여행-잊혀진 어머니의 돌 (2022)

잊혀진 어머니의 돌 - 02 강원도 여행의 시작은 청량리역

좀좀이 2022. 9. 12.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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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의정부역으로 갔어요.

 

 

2022년 8월 29일 오후 4시 31분. 의정부역 앞에 도착했어요. 의정부역 사진을 갤럭시노트10+로 촬영했어요.

 

이것은 여행기를 반드시 쓰겠다는 굳센 다짐.

 

아직 강원도 동해시 여행기인 '망상 속의 동해'도 다 쓰려면 많이 남아 있었어요. 다섯 편 정도 더 써야 완결이었어요. 말이 좋아 다섯 편이지, 다 쓰려면 꽤 걸릴 거였어요. 동해시 여행기를 완결내어야 이번 여행기를 쓰기 시작할 거였어요. 여행기 쓰는 것을 툭하면 미루다보니 동해시 여행기가 언제 끝날지 저도 몰랐어요. 강원도 동해시 여행은 2022년 7월 17일부터 7월 19일까지 2박 3일로 다녀왔어요. 여행을 길게 다녀온 것도 아닌데 이 여행기를 8월이 다 끝나도록 완결짓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래도 반드시 이 여행기는 쓰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여행기를 쓰겠습니다.

 

저는 여행을 출발하기 전에 여행기를 쓸 계획을 하고 여행을 떠나면 반드시 출발지로 삼을 곳을 사진으로 찍어요. 지금은 의정부에 살고 있고, 보통 여행을 떠날 때는 의정부역을 출발지 삼아서 사진을 찍어요. 여행기를 쓸 계획이 아예 없다면 의정부역 사진을 찍지 않고 여행가요. 제가 의정부역 사진을 찍었다는 것은 여행기를 반드시 쓰겠다는 다짐의 표현이었어요.

 

 

의정부역에 올라와서 의정부역 서부광장을 사진으로 찍었어요. 사진에서는 정말 잘 안 보이지만 의정부 시청도 살짝 찍혔어요. 예전에 경전철과 신도 아크라티움이 없었을 때는 의정부역에서 나오자마자 의정부시청이 딱 보였다고 해요. 그러나 경전철 노선이 의정부역에서 의정부 시청 앞으로 이어지는 길 위로 교각으로 세워지면서 의정부시청을 가렸고, 여기에 의정부시청과 비교할 수 없이 높고 삐까뻔쩍한 신도 아크라티움이 들어서면서 이쪽 풍경에서 의정부시청 존재감이 완전히 없어져버렸어요. 의정부 처음 온 사람 중 꽤 많은 사람들이 아크라티움이 의정부시청이라고 착각하곤 해요. 시청이 랜드마크가 아니라 아크라티움이 랜드마크에요. 아크라티움은 높고 멀리서도 잘 보여서 의정부 돌아다닐 때 방향 잡는 건물로 참 유용해요.

 

 

의정부역 하행선 플랫폼으로 내려갔어요.

 

'강원도 친구한테 장난쳐봐야지.'

 

갑자기 강원도 친구한테 장난 좀 치고 싶어졌어요. 카카오톡으로 메세지를 보냈어요.

 

"나 다게스탄 가."

"다게스탄? 러시아? 왜?"

 

강원도 친구가 놀라며 물어봤어요.

 

"Догестан. 도게스탄이라고...

"

"야!"

"가면 '빠 루스끼 가바리쯔' 해야 해?"

"응!"

 

당연히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요. 도계 가서 왜 러시아어로 러시아어 아냐고 물어봐요. 러시아인들이 도계에서 일하고 있을 리 없잖아요. 설령 있다고 해도 그 사람들한테 말 걸 일도 없고, 말을 걸어야하는 일이 있더라도 내가 왜 잘 알지도 못하는 러시아어를 아냐고 물어보겠어요. 캔 유 스피크 잉글리시조차 안 말하고 바로 한국어 아냐고 물어보죠. 지천에 널린 게 한국인인데 한국어 못 알아듣는다면 한국어 아는 사람 찾으면 되요. 블라디보스토크 가는 배가 있어서 러시아인들이 조금 있다는 묵호항 가서도 빠 루스끼 가바리쯔 말할 일이 없어요.

 

"나 전철 탔다."

 

오후 4시 40분. 인천행 지하철을 탔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너 아까 이태원 갈 때 바로 도계 가자고 할 껄."

"왜, 저녁 기차도 좋잖아."

"진짜 흥분되네. 얼마만의 흥분이야."

 

매우 신났어요. 당장 도계 도착해서 어디에서 잠을 자야 할 지도 몰랐어요. 그냥 가고 보는 거에요. 가면 뭐 어떻게든 되겠죠. 이런 여행, 참 오랜만이었어요.

 

"기차 7시 10분이니까 청량리에서 국밥이든 냉면이든 먹고 6시 30분까지 놀다가 가면 되겠다."

 

친구가 청량리에서 저녁 먹고 6시 30분까지 놀다가 청량리역으로 가서 기차 타면 되겠다고 했어요.

 

"청량리에는 맛있는 탕수육, 짜장면 없나?"

 

친구가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지 물어봤어요.

 

"오랜만에 콩국수? 아니면 청량리 할머니 냉면?"

"청량리 할머니 냉면? 그건 너무 양심없이 매워."

"너는 할머니냉면 양념 적당히 긁어내고 먹거나."

"콩국수가 낫겠다. 거기 따뜻한 건 없나?"

"있을 걸?"

"만두국이나 설렁탕 같은 거."

"콩국수집에서 수제비 팔 거야. 거기가 원래 수제비집일 거야. 콩국수는 여름 한정이구."

 

지하철에서 카카오톡으로 친구와 청량리에서 저녁으로 뭘 먹을지 계속 이야기했어요. 청량리는 별로 안 알려진 동네 맛집이 매우 많은 동네에요. 청량리역 주변이 서울 동북부 중심 도매시장가라서 시장도 엄청 크고 물가도 매우 저렴해요. 말이 좋아 청량리 시장이지, 시장 따라 걷다 보면 청량리역에서 제기동 약령시까지 쭉 이어져요. 당연히 인터넷에 별로 안 알려진 허름한 동네 주민 맛집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어요. 메뉴만 정하면 어지간한 식당은 다 있는 동네라 메뉴만 정하면 되었어요.

 

"고향집이라고 피순대 맛집 있네. 남원통닭이라고 후라이드 맛집도 있어."

"통닭은 전에 먹었고. 콩국수 파는 곳부터 가보자."

 

친구에게 콩국수 파는 곳부터 가보자고 했어요. 오랜만에 청량리역 근처 콩국수 맛집에 가서 콩국수를 먹고 싶었어요.

 

"나 긴팔옷 사야겠다. 바람막이. 여기 시장에 있겠지."

"내일은 도계 정복한 후에 태백 넘어가고, 태백에서 예미 간다면 탈출 가능할까?"

 

친구는 여행 일정 이야기하는데 아직 별 관심이 없었어요. 친구가 본격적으로 여행 일정에 관심을 보이려면 최소한 도계역에 도착해야 할 거였어요. 도계가 정말 좋으면 하루 더 있을 수도 있고, 도계가 정말 별로면 당장 떠날 수도 있었어요. 아, 당장은 못 떠나요. 기차 도착 예정 시각이 23시 10분이라서 무조건 1박은 해야 했어요.

 

"야야, 여기 청량리 먹자골목 한 번 둘러보자. 저번에 우리 지나갔던 곳. 3번 출구로 나오면 연락 줘."

 

이때 저는 막 월계역에 도착해 있었어요. 아직 조금 더 가야 했어요.

 

"아, 1번 출구네."

 

친구가 1번 출구로 오라고 했어요. 그 동안 기차 노선을 쭉 봤어요.

 

"역 이름에 민둥산도 있다!"

 

역 이름이 민둥산이 기차역이 있었어요. 멋들어진 이름이 많고 많을 건데 하필 기차역 이름이 민둥산역이었어요.

 

"내일 도계에서 놀고 태백으로 나가서 물닭갈비 먹은 다음에 다음날 아침에 뭔가 끌리는 역 두 개 찍고 서울 청량리 오면 밤 10시 22분이겠네."

"일단 만나서 의논해보게. 기차에서도 여기저기 찾아보고."

 

친구가 여행 일정은 이따 기차에서 이야기하자고 했어요. 그래서 그러자고 했어요. 어차피 기차 안에서 의논한다고 해서 그대로 갈 확률은 극히 희박했어요. 도계가 얼마나 볼 게 많고 마음에 드는 동네인지가 중요했어요.

 

"무작정 어디 들어가서 먹는 것도 재미있겠다. 저번처럼 안 알려진 곳 동네 식당."

 

친구가 청량리에서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서 먹는 것도 재미있겠다고 했어요.

 

"춘천 냉면도 있음."

"면은 좀 자제하자."

 

청량리 할머니 냉면 있는 냉면 골목에는 춘천 냉면도 있어요. 여기도 역시 매운 냉면 가게에요.

 

"할머니냉면으로 정신재무장이 딱이라니께."

"안 먹는다고, 항머니!"

 

친구가 얼마나 청량리 할머니 냉면이 싫었으면 할머니를 항머니라고 쓰는 오타도 내었어요. 전에 친구를 한 번 청량리 할머니 냉면에 데려갔더니 매운 거 좋아한다고 자부하던 이 친구도 매워서 혼났어요. 물론 저도 여자친구랑 청량리 할머니 냉면 처음 갔을 때 너무 매워서 혼났어요. 여자친구는 진작에 거기가 매운 냉면으로 유명한 거 알아서 양념을 싹싹 긁어내고 양념이 조금이라도 미세하게 묻어 있는 무 조각까지 다 건져내고 물냉면으로 먹었고, 저는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청량리 할머니 냉면이 서울에서 유명한 냉면집이라길래 멋모르고 다 비벼서 먹었다가 불 뿜고 난리났어요. 이후 청량리 할머니 냉면을 저 혼자 간간이 가다가 친구가 매운 거 좋아한다길래 데려갔더니 친구가 이건 양심없이 맵다고 분노했어요. 그리고 지금도 이 친구한테 청량리 할머니 냉면 가자고 하면 질색해요.

 

 

2022년 8월 29일 오후 5시 15분, 서울 지하철 1호선 지하 청량리역에 도착했어요. 친구가 제게 전화했어요. 전화를 받았어요. 하필 이때 지하철이 출발하고 들어오면서 소리가 엄청 안 들렸어요.

 

"일단 1번 출구에서 보자. 지금 지하철 소음 때문에 잘 안 들려."

"어. 빨리 와."

 

친구가 청량리역 1번 출구에서 보자고 했어요.

 

 

청량리역 1번 출구로 나갔어요.

 

"아, 여기 아니다."

 

친구가 자기가 말한 먹자 골목은 여기가 아니라고 했어요. 친구가 어디를 말하는지 알고 있었어요. 거기는 그렇게 식당이 많지 않았어요.

 

"여기에서 고르자. 거기 식당 별로 없어."

 

친구와 청량리 시장 주변에서 식당을 찾기로 했어요.

 

 

"콩국수집부터 가보자."

 

청량리에서 콩국수 맛있게 잘 하는 집으로 갔어요. 친구는 표정이 영 떨떠름했어요.

 

"너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국밥 없나? 너는 콩국수?"

"콩국수나 할머니 냉면 먹고 싶기는 한데 딱히 막 먹고 싶은 건 아냐. 국밥 먹어도 되구."

 

친구에게 국밥 먹고 싶으면 국밥 먹자고 했어요. 콩국수나 할머니 냉면을 먹으면 좋기는 하지만 그렇게 엄청나게 먹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거야 정 먹고 싶으면 나중에 혼자 청량리역 와서 먹어도 되었어요.

 

"여기에서 너가 예전에 엄청 맛있게 생겼다고 한 순대국밥집 어디 있었는데..."

"어디였지?"

"그 바깥에 솥 내놓고 팔팔 끓이던 곳."

"어디 말하는 거?"

"이쪽 어디인데..."

 

친구와 청량리역 맞은편 시장 먹자 골목을 돌아다녔어요. 예전에 친구가 진짜 맛집 같다고 말한 바깥에 솥을 내놓고 국물을 팔팔 끓이던 허름한 식당을 찾아다녔어요. 몇 바퀴 돌아다녔는데도 그 식당이 보이지 않았어요.

 

"저기 맛집 같다."

 

친구가 허름한 뼈해장국집 한 곳을 찾았어요. 친구는 인터넷으로 평점을 살펴봤어요. 맛집이라고 나와 있었어요.

 

"다른 거 없어?"

 

손에 뭐 묻히기 싫다.

 

저는 뼈해장국 자체는 좋아하지만 손에 뭐 묻히는 걸 영 안 좋아해요. 이왕이면 깔끔하게 숟가락으로 먹을 수 있는 국밥을 먹고 싶었어요. 일단 후보로 올려놓고 다른 곳을 찾아보기로 했어요.

 

"저기도 맛있겠는데?"

 

친구가 이번에는 순대국밥 가게를 보더니 저기가 왠지 맛집일 거 같다고 했어요.

 

"또 둘러보자."

 

이번에는 소머리국밥집이 나왔어요. 여기도 맛집 같았어요.

 

"뭐 먹지?"

"내일 저녁에 물닭갈비 먹어야 하니까 닭만은 먹지 말게."

 

친구에게 뭘 먹어도 좋지만 닭만큼은 피하자고 했어요. 다음날 저녁에는 태백 가서 물닭갈비를 먹을 예정이었어요. 일정이 바뀌어서 태백에 안 가더라도 무조건 저녁은 물닭갈비였어요. 물닭갈비는 강원도 남부 탄광지역 음식이에요. 물닭갈비가 얼마나 맛있는지 모르겠지만 강원도 남부 탄광지역 대표 음식인 만큼 꼭 먹어봐야 했어요. 다음날 저녁에 물닭갈비 먹을 건데 이날 저녁 식사로 닭고기를 먹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었어요.

 

"아, 결정장애 오네."

 

친구는 계속 고민했어요.

 

"순대국밥은 흔하니까 빼자."

 

순대국밥집은 왠지 별로였어요. 순대국밥 자체가 그다지 내키지 않았어요. 순대국밥이야 서울 도처에 흔한 거니까요. 어쩌면 여행 중에 순대국밥을 먹을 수도 있었어요. 먹을 게 마땅히 없으면 순대국밥 먹어야할 수도 있었어요. 순대국밥은 일단 제외했어요. 남는 것은 소머리국밥과 뼈해장국이었어요. 가격을 봤어요. 소머리국밥이 뼈해장국보다 더 비쌌어요.

 

"뼈해장국 먹자."

"너 손에 묻히는 거 싫대메."

"물티슈로 닦으면 되지."

 

친구와 저녁으로 뼈해장국을 먹으러 갔어요.

 

 

친구가 찾은 뼈해장국 맛집은 복순네 감자탕이었어요. 식당 안으로 들어갔어요.

 

뼈해장국 2개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어요.

 

 

조금 기다리자 뼈해장국이 나왔어요.

 

 

뼈해장국을 먹기 시작했어요.

 

"여기 진짜 맛집인데?"

 

뼈해장국은 정말 맛있었어요. 맛이 자극적이지 않고 정직했어요. 뼈에 붙어 있는 살코기도 많았어요.

 

"여기 장이 맛있다."

 

생양파를 찍어먹으라고 장이 나왔어요. 일반 된장보다 붉은빛이 더 도는 것으로 보아 고추장과 된장을 섞은 막장 같았어요. 막장이 매우 맛있었어요. 생양파를 막장에 푹푹 찍어서 먹었어요. 자극적이지 않은 뼈해장국과 막장에 찍어 먹는 양파 맛이 매우 잘 어울렸어요. 장이 너무 맛있어서 생양파를 순식간에 다 해치웠어요. 사장님께 생양파를 더 달라고 해서 많이 받아서 먹었어요.

 

뼈해장국 한 그릇을 다 비웠어요.

 

"이건 내가 살께."

"너가?"

"그래. 먹고 힘내라구."

 

저녁은 제가 산다고 했어요. 여행 끝난 후 친구가 병원 진료를 받아야 하니 이거 먹고 힘내라고 했어요. 친구가 고맙다고 했어요.

 

계산하고 식당에서 나왔어요.

 

 

시간이 남아서 청량리 시장을 돌아다녔어요. 청량리 청과물 도매시장은 파장 시간이 가까워져서 상점마다 과일을 싸게 떨이로 판매하고 있었어요.

 

"여기 포도 왜 이렇게 싸지?"

 

친구는 포도가 매우 싸다면서 기차에서 포도를 먹자고 했어요.

 

"너 다 먹어질래? 나는 배불러서 별로 못 먹는다."

 

전날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여행 안 갈 거 같아서 밤에 저녁을 엄청 먹고 잤어요. 밖에 나가기 귀찮으니 아예 하루치 다 먹겠다는 생각으로 피자스쿨 피자 2판을 먹고 잤어요. 전날 먹은 피자스쿨 피자 2판이 어느 정도 소화가 되어서 뼈해장국 한 그릇을 먹기는 했지만 바가지 크기만한 바구니에 수북히 담긴 포도를 절반 이상 먹을 자신이 없었어요. 만약 포도를 산다면 친구는 1/3이나 먹으면 많이 먹은 것일 거였어요. 남는 포도는 비닐에 싸서 다니면 될 거 같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당장 기차에서 먹을 포도라면 물로 씻어야 했어요. 이렇게 물로 씻으면 오래 보관 못 해요. 재수 없으면 다음날 자고 일어났을 때 썩은 것 투성이라 다 버려야 했어요.

 

친구는 제가 배불러서 포도 사면 몇 알 못 먹는다고 하자 고민했어요.

 

 

"사과는?"

"저거? 너 다 먹을 수 있으면 사구. 나 진짜 얼마 못 먹어."

 

친구는 계속 고민했어요. 청량리 청과물 시장을 돌아다니다 아까 포도가 저렴한 곳으로 되돌아갔어요.

 

"이건 왜 유독 저렴하지?"

 

똑같은 바가지 크기 바구니에 담긴 포도인데 하나는 엄청 싸고 하나는 엄청 저렴했어요. 대충 왜 그런지 알 거 같았어요. 엄청 저렴한 것은 포도 송이에서 떨어진 포도알을 모아놓은 거였어요.

 

"이거 둘이 왜 가격 차이가 나요?"

 

친구가 상점 주인에게 물어봤어요.

 

"그쪽 거는 포도 송이에서 떨어진 알들이잖아요."

 

제 추측대로 가격이 매우 저렴한 포도 바구니는 포도송이에서 떨어진 포도를 모아놓은 바구니였어요. 포도송이에서 떨어진 포도알이었지만 물로 씻으면 먹는 데에는 아무 지장 없어 보였어요.

 

나는 도저히 저거 다 먹을 자신 없다.

 

친구에게 다시 한 번 확실히 말했어요. 저는 수북한 포도알 중 몇 알 먹고 끝낼 거였어요. 나머지는 친구가 다 먹어야 했어요. 친구가 남긴다면 분명히 다음날 다 버려야 했어요. 그래도 사고 싶다면 사라고 했어요. 친구는 아쉬워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친구는 포도를 구입하지 않았어요.

 

"너 그거 입고 되겠어?"

"어?"

"너 너무 얇게 입고 왔잖아."

 

8월에 감기 맛 한 번 봐보고 싶니?

 

친구는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왔어요. 지금은 조금 더웠어요. 그러나 이제 가야 할 도계는 안 봐도 뻔했어요. 분명히 밤에 꽤 쌀쌀할 거였어요. 폭염에 열대야까지 덮쳐도 도계 같은 강원도 산간지역 갈 때는 밤에 바람막이 정도는 갖추고 가야 해요. 그런데 폭염에 열대야까지 덮친 때가 아니었어요. 제가 살고 있는 의정부도 밤에는 꽤 선선했어요. 이러면 강원도 산골은 반팔에 반바지 입고 가면 보나마나 추울 거였어요. 게다가 비가 내리기라도 한다면 최악이었어요.

 

"이걸로 추울 건가?"

"야, 당연히 춥지!"

"여기 근처에 옷 파는 곳 없을 건가? 만원짜리 츄리닝 같은 거."

"시장이니까 있지 않을 건가?"

 

예, 없습니다.

 

청량리 시장을 돌아다녔어요. 막 입다 버릴 수 있는 만원짜리 츄리닝은 보이지 않았어요. 길거리 노점상에서 딱 하나 발견했어요. 친구는 그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어요.

 

"바지만 사든가. 긴소매 상의는 나한테 있으니까 너 빌려주면 되는데 바지는 나도 긴 바지 여분으로 들고 온 거 없어."

"에이, 되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친구는 괜찮다고 했어요. 혹시 몰라서 회기역 방향으로 조금 걸어올라가봤어요.

 

옷가게는 있다.

만원짜리 츄리닝만 안 팔 뿐.

 

청량리역에서 회기역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자 옷가게가 여러 곳 나왔어요. 옷가게는 있었어요. 단지 만원짜리 막 입다 버릴 츄리닝을 팔지 않을 뿐이었어요. 비싼 의류를 판매하는 가게들이었어요.

 

"가자."

 

친구와 청량리역을 향해 걸어갔어요.

 

 

"저거 거의 다 지었네?"

 

청량리역에 안 와 본 지 꽤 되었어요. 청량리역 자체야 지하철 타고 서울 갈 때 여러 번 지나갔지만 청량리역에서 지하철에서 내려서 밖으로 빠져나온 건 최소한 몇 달 되었어요. 청량리역을 보니 과거 청량리 588 자리에 지어지고 있는 고층 건물이 많이 완공되어가고 있었어요.

 

"저게 풍수지리적으로 저기 쌓인 여성들의 한을 누르기 위해 고층 빌딩을 올리는 거래."

 

저도 부동산에 관심 많은 친구한테 들은 말이었어요. 풍수지리적으로 여자의 한이 많이 쌓여 있는 곳은 고층 빌딩을 올려서 나쁜 기운을 눌러야 한대요. 청량리역 뒷편 과거 청량리 588 자리에 고층 빌딩, 고층 아파트가 올라가는 이유도 풍수지리적 이유 때문이라는 카더라 이야기가 있다고 제게 알려줬어요.

 

"저기 우리 다닐 때마다 밤에 잡곤 하던 곳이잖아. '총각, 놀다 가' 하면서."

"진짜 그 할머니들 숙성되고 단련된 악력이 장난 아니었어?"

 

아주 예전 추억이 떠올랐어요. 친구와 같이 회기역 근처 고시원에서 살 때였어요. 그때 친구와 밤에 종종 서울을 걷곤 했어요. 서울에서 동대문을 향해 걸어가려면 청량리역 앞을 지나야 했어요. 그 당시에는 청량리 588이 있었기 때문에 어둑어둑해지면 호객꾼 할머니가 나와서 사람들을 잡고 놀다 가라고 하곤 했어요. 이 할머니들 악력이 장난 아니었어요. 맨날 사람들 옷깃과 손목 잡는 게 일이다 보니 매일 하드코어 훈련을 해서인지 힘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었어요. 한 번 잡히면 절대 안 놔줬어요.

 

이때 친구가 빠져나가는 방법을 알려줬어요. 마법의 주문이었어요.

 

"이미 하고 왔어요."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은 풀어줬어요. 그러나 가끔 또 하고 가라며 안 놔주는 할머니가 있었어요. 그러면 진짜 힘 없어서 못 한다고 하라고 했어요. 이렇게 말하면 젊을 때는 몇 번씩 한다면서 역시 안 풀어줬어요. 그렇게 끝까지 안 놔주면 오늘은 진짜 피곤해서 안 되고 다음에 꼭 온다고 말하면 된다고 했어요. 이 당시 청량리역을 밤에 지나갈 때 남자들이 호객꾼 할머니에게 잡혔을 때 별 일 없이 잘 빠져나가는 방법이었어요.

 

친구와 같이 다닐 때는 이렇게 잘 빠져나가곤 했어요. 나중에 혼자 밤에 걸어갈 때는 더 간단한 방법을 사용했어요. 아예 갈 길을 먼저 떠올려서 청량리역 바로 앞을 최대한 안 갔어요. 바로 큰 길 건너 맞은편으로 걸어가면 호객꾼 할머니가 없었거든요. 그러나 서울 다른 곳에서 버스 타고 돌아오는 길에 청량리역에서 내려서 환승해야 할 때면 어쩔 수 없었어요. 이때마다 친구가 알려준 마법의 주문 '이미 하고 왔어요'를 시전해서 할머니의 손아귀에서 풀려나야 했어요.

 

다 옛날 일이에요. 이제는 청량리 588이 완전히 싹 다 깔끔히 없어졌기 때문에 심야시간에 청량리역 바로 앞을 지나가도 매우 평화롭게 지나갈 수 있어요.

 

 

청량리역.

서울에서 가장 재미있는 곳.

 

단순히 청량리 588 뿐만 아니라 청량리 자체가 매우 재미있는 동네에요.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 '청량리 석탄'을 검색하면 검색 결과가 위와 같아요.

 

석탄 절도!

 

1960년 10월 26일 경향신문 기사를 보면 '서울의 이색지대 청량리역'이라는 르포 기사가 있어요.

 

 

큰 글씨로 적힌 글은 다음과 같아요.

 

서울의 異色地帶(이색지대) 淸凉里驛(청량리역)

도둑의 손 거쳐 흘러나오는 江原道炭(강원도탄)

하룻밤 盜難量(도난량)30餘噋(여톤)

警備員(경비원) 모자라 보고도 못 막아

三大利權地帶(삼대이권지대)엔 집값도 껑충

 

기사 내용을 보면 밤에 강원도에서 캔 석탄을 실은 화물열차가 청량리역으로 다가오면 허리띠에 부삽 하나를 차고 손에는 길이 20~30cm의 쇠갈퀴를 들고 있는 대여섯명의 괴청년들이 석탄을 실은 화물 열차에 달려들어서 쇠갈퀴로 열차 옆문짝 고리를 따고 열차에 올라가서 부삽으로 석탄을 파내렸대요. 이렇게 괴청년들이 열차에 올라가서 석탄을 쏟아내면 부녀자들이 석탄을 자루에 집어넣고 사라졌대요. 이렇게 석탄을 훔쳐서 팔아서 생계를 이어갔다고 해요.

 

더 흥미로운 내용은 청량리역 주변 판잣집은 이렇게 강원도에서 오는 석탄을 훔쳐서 팔 수 있기 때문에 판잣집임에도 불구하고 집값이 다른 곳에 비해 대여섯배 가격을 부르고 있었다고 해요.

 

청량리역에서 멀지 않은 외대앞역 - 과거 이문역은 근처에 연탄 공장이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이쪽에서 오래 살았거나 오래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이문동 이야기가 나오면 연탄공장을 말하곤 해요. 지금도 네이버 지도, 카카오맵을 보면 연탄 공장이 있다고 나와요. 신이문역에서 북쪽으로 조금 더 가면 석관지하보도가 나오고 한국철도공사수도권동부지역관리단 건물이 있어요. 석관지하보도, 한국철도공사수도권동부지역관리단, 중랑천 사이에 있는 조그맣고 길다란 직각삼각형 땅에 연탄공장과 삼천리연탄, 삼천리E&E가 있다고 해요.

 

청량리역은 오늘날 서울에서 강원도로 가는 관문 중 하나에요. 서울에서 강원도 가는 관문으로 철도는 청량리역, 버스는 동서울터미널이에요. 강원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청량리역답게 석탄과 연관된 이야기도 있는 지역이에요.

 

청량리역 안으로 들어갔어요.

 

"우리 물 사가야지."

 

편의점에서 물을 골랐어요. 제일 저렴한 생수를 골랐어요. 오리온 닥터유 제주 용암수였어요. 가격이 530mL짜리 한 통이 700원이라 다른 생수보다 더 저렴했어요.

 

 

생수를 사고 나왔어요. 이제 드디어 기차를 타러 갈 시간이 되었어요.

 

 

한산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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