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서 살다보면 한국 라면 참 그립죠. 한국에서 자취하며 엄청 먹어대었는데, 아니 그 이전부터 엄청 먹어대었기 때문에 뼈 속에 새겨진 맛이랄까요? 저는 한국에서 라면을 하도 먹어서 밥이 그리운 만큼 라면이 그리워요. 물론 우즈베키스탄에도 라면이 있기 때문에 대리 만족을 느낄 수도 있지만 이건 한국에서 먹던 라면이 아니다보니 그 허전함의 10%밖에 채워주지를 못해요. 아무리 라면 국물 맛을 내려고 고춧가루도 넣어보고 후추도 넣어보고 소금도 넣어보고 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
그러다 작정하고 가스피탈리에 가서 한국 라면을 사 왔어요. 슈퍼 들어가는 순간 눈알이 뱅글뱅글...그냥 슈퍼를 통째로 들고 나오고 싶었어요. 라면은 물론이고 냉동 삼겹살에 과자까지 다 있었어요.
그래서 이성의 끈을 놓고 먹고 싶었던 라면을 마구 사 왔어요.
집에 돌아와 그동안 참고 있던 한국 라면에 대한 욕구를 푼 후, 사온 것을 정리하다 보니
아뿔싸...
여기는 생수를 사먹는 나라. 네슬레에서 정수기 통을 시켜 먹어야 해요. 네슬레 통 20리터는 7천숨. 여기에서 물을 사서 마셔야 하는 이유는 석회 때문이에요. 단순히 끓여먹는다고 석회가 증발해 날아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물을 사먹어야 하죠. 네슬레 물도 끓여먹다보면 커피 포트에 석회질이 허옇게 끼는데 수돗물은 말할 필요가 없죠.
그래서 라면을 살 때 약간 머리를 써야 해요. 라면을 끓일 때 쓰는 물을 수돗물로 쓰면 안 되니까요.
먼저 국물 라면류. 이런 건 생각 없이 액수만 신경써서 구입하면 되요. 어차피 국물도 먹는 거니까요.
두 번째로는 짜파게티, 스파게티 같은 비빔라면류. 이건 국물 라면과 달리 물을 많이 잡아야 해요. 국물 라면은 물을 조금 잡더라도 면이 풀어지면 조금 불려서 먹으면 되는데 이건 물을 버리고 비비기 때문에 면을 일정 단계까지 충분히 잘 익혀주어야 하니까요. 그리고 면 삶은 물을 또 버려야 하는데...
버리는 게 물이 아니라 돈이야!
20리터 물 한 통이 7천숨이니 얼마 하지는 않지만 왠지 이런 조그만 것들이 아깝게 느껴져요. 그래도 이건 그나마 나은 편.
마지막으로 비빔면. 이건 뭐 물 낭비의 결정판. 면을 삶고, 또 찬 물에 두 어 번 씻어내야 하다보니 물 낭비가 커요. 아마 여름이었으면 비빔면을 사왔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다행히 여름이 아니라 비빔면은 안 사왔어요.
이건 어쨌든 물낭비가 큰 라면이라 정말 아껴먹어야지 하고 찬장에 잘 두고 있던 어느 날.
친구가 놀러왔어요.
"먹을 거 없어?"
"짜파게티 먹을래?"
친구가 놀러왔길래 짜파게티 끓여서 친구에게 대접하기로 했어요. 당연히 좋아하는 친구. 한국 음식은 대충 해먹을 수 있지만 한국 라면은 자기가 만들어먹을 수가 없으니까요. 게다가 한국 라면 한 봉지면 시장에서 밥 한 그릇 가격. 마구 먹기에는 가격이 세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한국 음식 중 의외로 먹는 게 망설여지는 것이 바로 한국 라면이에요.
그래, 내가 오늘은 짜파게티 요리사!
한국에 있을 때 제가 끓인 짜파게티 수만 1년에 20회가 넘어요. 그만큼 엄청나게 많이 먹어대었던 라면. 짜파게티 맛있게 끓이는 법의 포인트는 물을 얼마나 버리느냐. 물을 적당한 양 버리고 봉지에 들어있는 기름을 붓고 남은 물에 짜장 스프를 개어서 중간 정도 불에 볶듯이 국물을 조려주는 것이 포인트. 요리는 지지리 못하나 짜파게티 끓이는 거라면 자신이 있었어요.
친구도 먹을 것이니 이번에 끓여야할 짜파게티는 총 4개.
여기서부터 불행이 시작되었다.
저희집 냄비는 짜파게티 끓이기에 최악화 된 냄비에요. 일단 냄비가 너무 작아요. 지름이 라면 면발 대각선 길이보다 살짝 길어요. 그래서 라면 4개 집어넣으면 당연히 미어터져요. 한국이라면 방법이 있긴 해요. 면을 삶은 후, 찬물로 면을 씻어내 탱탱하게 만든 후 스프를 부어서 섞으며 익혀내는 법이 있어요. 이러면 면발이 불어서 맛없게 되는 것을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집 냄비 손잡이가...아...
냄비 손잡이가 하필이면 짜파게티 끓이기에 안 좋게 되어 있었어요. 라면 끓이기 편한 냄비는 손잡이가 하나이고 자루처럼 길게 달려 있는 냄비. 그런데 우리집 냄비는 작은 손잡이가 2개 고리처럼 딱 냄비에 달라붙은 것. 이게 문제인 게 냄비 안은 라면 4개로 꽉 찼는데 물을 빨리 비워낼 법도 없었다는 것이었어요.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냥 2개 끓여서 친구 먼저 주고 제꺼 2개 끓였을 거에요. 한 순간의 실수는 냄비에 라면 4개를 집어넣는 순간 되돌릴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일단 면 삶기는 평범했어요. 작은 냄비에 면 4개 삶는 것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어요. 문제는 물 따라내기.
"이거 물 어떻게 따라내야하지?"
냄비를 들어서 물을 비워내야 하는데 냄비를 들고 싱크대로 가서 냄비를 기울일 방법이 없었어요. 말이 좋아 냄비 손잡이이지, 냄비에 달린 손잡이는 오직 냄비를 드는 기능 밖에 할 수 없었어요. 빨리 물은 비워야 하는데 방법은 없고...
"국자로 퍼내자!"
국자로 컵에 물을 퍼서 버리기 시작했어요. 당연히 면은 물을 퍼내는 동안 불어만 갔죠.
대충 물을 퍼내고 이제 스프를 부어야 하는데...
물 양을 가늠할 수가 없네?
이미 면은 조금 불어버린 상태. 빨리 비벼서 먹어야 하는데 양을 당최 가늠할 수 없었어요. 그러고보니 나 이 냄비로 라면 끓여본 적 거의 없어...한국에서 흔히 쓰는 냄비로는 라면의 표면에 닿을락 말락하게 물을 남기면 딱 맞아요. 그래야 스프를 개고 비비고 볶으니까요. 물이 부족하면 수돗물 조금 더 받아 넣으면 되고, 물이 많으면 강한 불로 확 졸여버리면 되요. 그런데 이건 당최 물 양을 가늠할 수가 없네? 두 개라면 대충 감으로 어떻게 해 보겠는데 이게 4개이니 얼마나 물 양을 잡아야하나 애매했어요. 게다가 냄비는 좁아서 물을 잘 남긴 것인지 안 남긴 것인지 알 수 없었어요.
대충 찍어서 물을 남기고 평소 하던 것처럼 했더니...
삼층밥이 아니라 삼층 짜파게티를 아시나요?
"많이 먹어라..."
내 인생 최악의 짜파게티를 끓여버렸다...
아마 짜파게티 끓이다 제대로 망쳐본 분들은 아실 거에요. 짜파게티 제대로 망치면 3x3 입체적으로 망친 놈이 탄생해요. 면은 타서 눌러붙은 놈, 불은 놈, 제대로 된 놈, 스프도 뭉친 놈, 제대로 발라진 놈, 아예 스프가 안 발라진 놈이 되어 무려 3x3 의 입체적이고 다채로운 모습을 가진 망한 짜파게티가 탄생하죠.
친구에게 많이 많이 먹으라고 했어요. 저는 16000숨 짜리 밥을 날렸다는 것에 면이 잘 넘어가지도 않았어요. 그 이전에 불어서 한 덩어리처럼 되어 있었기 때문에 잘 안 넘어간 것이었지만요. 한 사람당 8000숨이면 그럭저럭 맛있게 밥 먹을 수 있는데...
결국 물도 버리고 라면도 버리고 돈도 버렸다는 결말로 끝났어요.
이 일로 얻은 교훈은
외국에서 라면 살 때 물을 얼마나 소모하는 라면인지 생각해서 사자.
...였어요. 그 돈으로 국물 라면 살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