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천당폭포를 뒤로하고 또 걸었어요. 목표는 대청봉. 천당폭포에서 너무 오래 놀 수 없었어요. 천당폭포를 넘어가자 슬슬 길이 어려워지기 시작했어요. 그래도 아직은 여유만만. 다람쥐 사진도 찍고 앉아서 쉬기도 하고 계곡물 받아 마시기도 하면서 갔어요.
꽤 올라와서 만난 다람쥐였는데도 우리가 뭔가 먹으면 우리 주변으로 쪼르르 달려와 우리를 바라보았어요. 혼자 먹기 미안해 소시지를 조금 잘라서 던져주어 보았더니 잘 받아먹었어요. 그리고 사람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아서 사진도 찍을 수 있었어요.
“길이 슬슬 험해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한심하고 바보 같은 소리. 길이 험해지는 것은 당연했어요. 천불동 계곡까지 많이 올라가지 못하고 올라간 만큼 내려가고 내려간 만큼 올라가는 일의 반복. 해발고도가 많이 높아지지 않았어요. 거리만 놓고 보면 반 넘게 왔어요. 즉, 나머지 구간에서 해발고도를 확 높여야 한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갈수록 험하고 힘들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 이때까지만 해도 ‘험해봐야 한라산 관음사 코스 험한 구간하고 비슷하겠지’라고 얕잡아보고 있었어요.
“아…진짜 험한데?”
“진짜 장난 아니다!”
슬슬 입에서 감탄사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표지판은 보이지도 않고 길은 갈수록 험해졌어요. 감탄사는 점점 ‘ㅆ’을 포함하는 감탄사로 변해 갔어요. 뭐 여러 가지 있죠. 욕으로도 잘 쓰는 감탄사들이요. 희운각 대피소에서 대청봉까지 표지판 상으로는 2.5km, 2시간 40분 소요라고 나와 있었어요.
“야, 이거 2.5km인데 왜 이리 머냐?”
“몰라!”
정상은 도대체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많이 걸은 것 같은데 그 끝이 어디 있는지조차 감이 오지 않았어요.
계속 이어지는 아름다운 경치. 하지만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어요. 아름다운 경치를 느끼는 것을 우리의 저질 체력이 허락하지 않았어요. 숨은 턱까지 차올랐어요. 점점 더 자주 쉬게 되었어요. 분명히 이 정도 걸었으면 정상이 보여야할 것 같은데 어디가 정상인지 구분할 수 없었어요.
“어떤 미친놈이 천당폭포라고 이름 붙인 거야! 천당은 개뿔…완전 생지옥이구만.”
산이 험해질수록 애꿎은 천당폭포 이름을 가지고 트집 잡기 시작했어요. 분명 표지판에 잘 적혀 있었어요. 지금은 길을 잘 정비해서 일반인들도 천당폭포를 볼 수 있지만 예전에는 길이 너무 험해서 일반인들은 갈 수가 없었다구요. 다리와 계단 아래를 보면 정말 인간이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다음부터 코스가 쉽다는 말과 그래서 천당폭포라는 것만 머리에서 맴돌았어요. 힘들어서 푹 쉬고 다음 코스를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어요. 산장에서 자고 정상에 갈 계획을 하고 온 것이 아니라서 산장에서 자는 것은 정말 문제였어요. 무더운 여름이라는데 하필 날도 그다지 덥지 않았어요. 밤이 되면 찾아올 추위. 끔찍한 악몽이 떠올랐어요.
때는 4월 초였을 거에요. 날이 따스하던 그 날. 사격 훈련이 있었어요. 야전상의를 걸치지 않고 사격장에 올라갔어요. 그리고 그날…제발 PRI를 시켜주기만을 기도했어요.
두 번째 악몽. 2010년 1월 초. 귀국해 친구집에 가야 하는데 비행기가 도쿄에서 연착했어요. 덕분에 인천공항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청량리역에 도착했을 때에는 버스도 지하철도 전부 끊긴 후였어요. 그날 신세를 지기로 한 친구 집은 외대앞. 친구집까지 택시를 타고 가려고 했지만 택시는 당연히 승차거부. 전부 장거리 뛰려는 택시밖에 없었어요. 길 위를 덮고 있는 눈과 얼음. 하필 너무나 추운 날씨. 무거운 가방을 질질 끌고 외대앞까지 걷기 시작했어요. 그냥 짐을 끌고 걷기에는 조금 먼 거리였지만 하필 피로도 잔뜩 쌓였고 눈과 얼음 때문에 길도 좋지 않았어요. 몰타에서 나오기 전날 짐을 싸고 방을 정리하느라 밤을 샜어요. 몰타에서 로마에서 환승해 파리에 도착해 샤를 드골 공항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어요. 짐을 다 찾아서 나왔기 때문에 도둑을 피하기 위해 밤을 새야 했고, 경찰들이 수시로 순찰을 다니며 노숙자를 잡고 있었어요. 밤을 새고 새벽에 파리에 와서 그냥 떠나기 아쉬워 북역 (Gare du Nord)에 가서 수하물 보관소에 짐을 맡겼어요. 원래 공항에 맡기고 나오려고 했는데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공항에는 없고 지하철 역에 있기는 한데 너무 비싸므로 북역에 가서 짐을 맡기고 돌아다니라고 했어요. 북역에 짐을 맡기고 걷기 시작했어요. 어떻게 흘러 흘러 콩코드 광장까지 갔어요. 콩코드 광장에서는 에펠탑과 개선문이 보여요.
“예전에 왔었을 때 개선문도 에펠탑도 못 갔었지?”
예전에 동유럽 여행 중 일정이 남아 1박 2일로 파리에 갔었어요. (이 이야기는 3대악산 연재가 끝난 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Fnac 이라는 서점을 찾겠다고 돌아다니다 시간을 많이 지체해서 그 유명한 개선문과 에펠탑 두 개 다 가지 못했어요. 그래서 작정하고 개선문까지 걷기 시작했어요.
저는 콩코드 광장에서 개선문이 그렇게 먼 줄 몰랐어요. 거의 경사가 없다시피 한 오르막인데 오르막이라고 욕이 나올 정도로 길었어요. 가뜩이나 벌써 사실상 이틀째 밤을 새서 체력은 밑바닥. 샹젤리제 거리에 도착했을 때에는 제정신인지 아닌지 구분조차 할 수 없었어요. 개선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사진을 찍고 이번에는 노트르담 성당 근처에 있는 Gibert Jeune 서점까지 걸어갔어요. 서점에서 책을 고르다 1시간 또 날려서 노트르담 성당은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전철타고 공항 가서 비행기타고 도쿄 가서 거기서 바로 환승해 한국 온 것이었어요. 무려 3일간 잠을 잔 것이라고는 비행기에서 잔 것이 전부였어요. 그나마도 자꾸 밥 먹으라고 깨워서 제대로 자지도 못했어요. 그런 상태에서 짐을 끌고 청량리에서 외대앞까지 걸어갔던 거에요. 쉬려고 하면 땀이 식어서 너무 춥고, 걸으면 너무 힘들어서 더웠어요. 목적지까지 얼마 남겨두지 않고 팔이 너무 아파 도저히 가방을 끌 수 없어서 구멍가게에서 캔커피를 샀어요. 반도 못 마시고 버렸어요. 다 얼어 있었어요. 정말 오들오들 떨면서 걸었어요.
이 끔찍했던 두 악몽이 계속 생각났어요. 머리 속을 지배하는 생각은 딱 하나였어요.
“어떤 일이 있어도 오늘 내려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