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해야 했던 숙제 (2012)

해야 했던 숙제 - 12 우즈베키스탄 안디잔에서 타슈켄트 가는 길

좀좀이 2012. 10. 27.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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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안 고파?"

"예. 괜찮아요."


진짜로 배가 고프지 않았어요. 사실 밥을 먹을 시간이 되기는 했어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지긋지긋한 택시 이동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 그리고 빨리 타슈켄트에 도착하고 싶다는 것. 이것이 중앙아시아 첫 여행이었다면 감상이 달라졌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첫 여행도 아니었을 뿐더러 무언가 강렬한 느낌을 주는 것도 하나도 없었어요. 오히려 분명 짜증이 제대로 날 것을 알지만 타슈켄트에서 여행자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것이 더 기대되었어요. 예전에 투르크메니스탄에서 투르크메나바트에서 아슈하바트까지 택시로 갈 때에도 지겨워서 혼났는데, 이번도 만만치 않았어요.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고 도로 포장도 안 좋고 산도 있고 해야 차를 타고 가며 재미가 있는데 이건 길도 좋고 온통 똑같아 보이는 들판 투성이. 무언가 사색에 잠기기에는 참 좋은 풍경이었어요. 하지만 저는 사색하는 것과는 아주 거리가 먼 인간.


제가 배고프다고 하면 왠지 가다가 차를 세우고 점심을 먹자고 할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건 정말 싫었어요. 점심을 15분 정도에 후딱 먹고 차에 타서 바로 타슈켄트 갈 것도 아니고 점심 먹는다고 하면 최소 30분, 예상 한 시간. 이러면 타슈켄트에서 돌아다닐 시간만 줄어들 뿐이었어요. 게다가 오후 2시 도착 예정이었기 때문에 타슈켄트 돌아가서 밥을 먹어도 충분했어요. 이 시각이면 반드시 카봅이 아니더라도 먹을 수 있는 것들이 있었거든요.


제가 배가 안 고프다고 하자 택시 기사 할아버지께서는 계속 차를 모셨어요. 다른 사람들도 그냥 빨리 타슈켄트 가는 것이 낫다는 눈치였어요. 할아버지께서도 마찬가지였구요. 택시가 타슈켄트 도착 예정시각이 오후 4~5시라면 차를 세우고 밥을 먹는 것이 맞았지만 아무리 늦어도 3시면 타슈켄트 도착.




'거의 다 왔다!'


드디어 풍경이 바뀌었어요. 이제부터는 산악지형. 이 천산산맥 끝자락만 넘어가면 드디어 타슈켄트였어요. 여기부터는 타슈켄트에서 코칸드 갈 때 지나갔던 길. 단순히 타슈켄트에 가까워져서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어요. 밋밋하고 단조로운 평지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 너무 좋았어요.



슬슬 높은 곳으로 올라갔어요.



"저거 샤슬릭!"


할아버지께서 제게 농담을 건네셨어요. 차는 양떼에 갇혔어요. 할아버지께서는 경적을 울리며 양들을 쫓아내고 길을 만들려고 하셨어요. 하지만 양떼는 이런 경험이 한 두 번이 아닌지 전혀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양치기가 와서 양을 몰아 길을 내줄 때까지 멈추어버린 차 안에서 양떼를 구경했어요.



정말로 말을 타고 양을 모는 목동. 아까 그 지루했던 들판과 달리 여기는 주변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어요. 사진과 영상으로 종종 보던 우즈베키스탄 동부의 이미지와도 많이 비슷했어요.




드디어 차가 본격적으로 산길을 올라가기 시작했어요.



차가 많지 않아 느릿느릿 가지는 않았어요. 구불구불한 산길을 기어올라가는데 얼마 가지 않아 차가 줄지어 서 있는 구간이 나타났어요.


'뭐 때문이지?'


앞을 보니 차가 검문소부터 늘어서 있었어요.


'이 검문소는 제대로 일하는 검문소구나!'


우즈베키스탄을 돌아다니다 보면 검문소는 흔하게 볼 수 있어요. 하지만 모든 차를 세워서 검사하는 경우는 여기 와서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그냥 속도를 잠깐 줄이고 경찰 눈치 보면서 슬금슬금 지나가는 검문소가 태반이었어요. 이렇게 모든 차를 다 세워서 검문하는 검문소는 처음이었어요.


재미있는 것은 동부에서 타슈켄트 들어가는 길만 이렇게 꼼꼼하게 검문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타슈켄트에서 동부로 들어가는 길은 차들이 다른 검문소들과 마찬가지로 잠깐 속도 좀 줄이고 슬금슬금 지나가고 있었어요.


이렇게 차가 줄 지어 서 있어서 그런지 주전부리를 파는 상인들이 자동차 사이 사이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고 있었어요. 우리쪽에도 상인이 왔어요.


"맛 볼 수 있어?"

"물론이죠!"


상인은 아몬드도 건네고 해바라기씨도 건네었어요. 아몬드는 제가 좋아하는 소금 뿌린 아몬드였어요.


"아몬드 얼마에요?"

"천 숨."

"여기요."


저는 아몬드를 1000숨 어치 사고, 택시 기사 할아버지께서는 해바라기씨를 1000숨 어치 구입하셨어요.


차가 천천히 빠져나갔어요. 정말로 검사를 꼼꼼이 하는 곳 같았어요. 이렇게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여기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검문소는 항상 제대로 일하는 검문소가 아닌가 싶었어요. 차가 앞으로 조금 이동했어요.


"여기는 군인도 있네?"


제복 입은 군인과 총을 든 군인도 보였어요. 품 속 목걸이 지갑에서 여권을 꺼내고 목걸이 지갑은 다시 품으로 집어넣었어요. 이번에는 처음으로 검문소에서 여권 검사를 받을 것 같았어요. 대충 허술하게 하는 검사라면 차가 이렇게까지 밀려 있을 이유가 없었거든요. 이 길에 자동차가 많아서 밀려 있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검문소에서 검사를 깐깐하게 해서 차가 밀려 있는 것이었어요. 딱 보아도 외국인인 저를 그냥 보내줄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차가 하도 막혀서 그런 것인지 경찰이 검문소에서 나와 차량 하나 하나 지나다니며 여권 검사를 하고 있었어요. 드디어 제가 탄 차 차례가 되었어요.


"여권."

"그냥 넘어가 주세요."


할아버지가 부탁했어요. 우즈벡인들이 운전할 때 흔히 볼 수 있는 모습. 그러나 경찰은 저를 보더니 외국인이니 여권을 확인해야 한다고 했어요. 저는 경찰이 제가 탄 차로 올 때 이미 여권을 꺼내 거주지등록 도장이 찍힌 페이지를 열어 기다리고 있었어요. 지난 번 거주지 등록을 받을 때 도장을 엉뚱한 곳에 찍어주어서 아예 거주지등록을 펼쳤어요. 경찰이 거주지등록을 못 찾아서 문제 삼으면 귀찮으니까요. 이 상황에서 경찰이 제게 문제 삼을 만한 것은 오직 거주지등록 밖에 없었어요. 여행자가 우즈베키스탄에서 신경써야 하는 것은 거주지등록이거든요. 비자에 문제가 생긴다면 당연히 거주지등록에 문제가 생기구요.


경찰은 제 거주지등록을 보더니 여권을 돌려주었어요.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 것은 확인도 안 하고 뒷 차량으로 갔어요. 이렇게 경찰이 검문소에서 나와 하나씩 검사하자 정체가 풀리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경찰이 확인한 차량을 검문소에서 다시 잡을 필요는 그다지 없었으니까요.


검문소에 가까워지자 흥미로운 장면 하나가 보였어요. 서양인 여행자가 굳은 얼굴로 서 있었던 것. 외모를 보니 슬라브 계열은 아니고 유럽인 아닌가 싶었어요.그 앞에는 자전거가 있었어요. 복장도 딱 자전거 여행자. 폼으로 보아서는 무언가 잘못해서 잡힌 듯 싶었어요.


'저거 거주지등록 잡힌 거 아니야?'


이 길을 달려오는 동안 자전거 여행자를 몇 명 보았어요. 단순히 자전거 때문에 잡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 저 여행자가 경찰과 군인에게 덤볐을 리는 없었어요. 여권이 없는데 여기까지 달려왔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구요. 상식적인 선에서 저 자전거 여행자가 잡힐 이유는 오직 하나, 거주지등록.


'저놈 여행 망했네. 쯧쯔쯔.'


경찰에게 잡힌 자전거 여행자를 보며 혀를 쯧쯔쯔 찼어요. 이 나라에서 정말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신경써야 하는 것이 바로 거주지등록. 이건 걸리면 벌금 대박이에요. 그래서 우즈베키스탄에서 이사할 때에도 가장 신경쓰이는 것이 바로 이 거주지등록. 여행자들도 제일 신경써야하는 것이 바로 이 거주지등록. 제 추측대로 조금만 신경쓰면 별 것도 아닌 거주지등록 때문에 걸린 여행자라면 이제 여행은 망했어요. 예전에는 이거 벌금이 얼마 하지 않았지만 요즘은 엄청 세거든요. 보통 3000달러라고 하는데 2000불에서 4000불까지 왔다갔다 한다고 해요.


검문소를 빠져나오자 할아버지께서 카메라를 숨기라고 하셨어요. 그 이유는 사진 촬영이 금지된 터널을 통과해야했기 때문이었어요. 얌전히 카메라를 가방 속에 넣고 앞을 보았어요. 이 터널 역시 군인이 지키고 있었어요.


터널을 빠져나오자 다시 사진을 찍을 수 있었어요. 지금 우리가 달리고 있는 길은 천산산맥.



사진 멀리 보이는 산 끝자락 하얀 것은 만년설. 지난 5월 타지키스탄 샤흐리스탄이 생각났어요. 아래는 살짝 덥다는 느낌이 있을 정도로 따뜻했는데 그곳은 눈이 내려서 쌓이고 있었어요. 이 차는 저 꼭대기까지 안 올라가도 된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었어요. 만약 저기를 올라가야 했다면 당연히 3만숨에 갈 수 있을 리도 없었을 것이며, 시간도 엄청나게 많이 걸렸을 것이니까요.




이제 타슈켄트 다 와 가는 구나!


아까 검문소에서 산 아몬드를 쉬지 않고 먹어서 다 먹었어요.


"배고프구나!"

"아니요. 아몬드 너무 좋아해서요."

"배 많이 고픈가 보구나."


저 정말 배 안 고프다구요! 정말로 배가 하나도 고프지 않았어요. 오늘 타슈켄트 가기 전까지 굶을 각오로 전날 매우 많이 먹었어요. 제가 아몬드를 쉬지 않고 먹어댄 이유는 오직 하나. 이것은 우즈벡인들이 해바라기씨를 하는 이유와 같아요. 그냥 심심해서. 그리고 맛있어서. 견과류를 워낙 좋아해서 땅콩 같은 거 사는 것을 매우 꺼리는 편이에요. 이게 적당히 먹고 끊고가 되어야 하는데 옆에 있으면 생각없이 계속 먹어대요. 정말 끝장을 내든가, 제 턱이 너무 아파서 못 먹을 지경이 되거나 둘 중 하나의 상황이 되기 전까지는 쉬지 않고 생각 없이 먹어대서 웬만해서는 견과류를 잘 안 사요. 그만큼 많이 먹고 좋아하거든요. 밥 먹는 건 귀찮아서 안 먹을 때도 많지만, 옆에 견과류가 있으면 무조건 먹어대요. 사람들이 전생에 설치류 아니었냐고 놀려댈 지경으로 까먹거든요. 해바라기씨는 껍질채 씹어먹구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 저는 배가 고파서 아몬드를 후다닥 다 먹어치운 모습이었어요.






드디어 산지에서 빠져나왔어요.


"잠깐 내려요. 가스 충전해야 해요."


할아버지께서는 어느 마을에 들어가 택시를 세우시고 모두 내리라고 하셨어요. 온몸이 찌뿌둥하던 차에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차에서 내렸어요. 몸을 움직이며 풀어주었어요. 이제 1시 반을 넘겼어요. 산도 넘어갔으니 이제 타슈켄트는 다 왔어요. 조금만 더 참으면 타슈켄트.





사진을 찍으며 주변을 둘러보았어요. 뒷좌석에 탄 세 명은 모두 의자에 앉아 있었어요. 얼굴을 보니 저보다 더 힘들어 보였어요. 그래도 저는 조수석에 앉아서 몸을 뒤척일 수 있었지만, 뒷좌석에 탄 세 명은 진짜로 불편함의 극치. 저도 의자에 앉아서 쉬었어요. 잠시 후. 할아버지께서 차를 몰고 나오셔서 다시 타라고 부르셨어요. 그래서 다시 조수석에 올라탔어요.




"너는 어디에서 내릴 거야?"

"예? 쿠일룩..."

"기차역? 초르수 바자르?"

"기차역이요!"


타슈켄트에서 동부로 가는 택시가 모이는 곳은 쿠일룩 보조르.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기차역과 초르수 보조르를 언급하셨어요. 제가 가려고 한 곳은 원래 초르수 보조르. 그러나 약 5초간 머리를 굴렸어요. 초르수 보조르까지 가는 것도 좋았지만 일단 기차역에서 내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어요. 일단 오후 2시 넘어서 제가 원하는 지점 도착은 확실했어요. 초르수 보조르로 가면 거기에서 놀다가 적당히 기차역으로 가면 된다는 장점이 있었고, 기차역으로 갈 경우 여차하면 그 근처에서 시간 좀 때우다 밥 먹고 기차 타러 들어가는 방법이 있었어요. 일단 이 택시가 타슈켄트 동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고려해서 기차역에서 내린 후, 밀리 보그를 갈지, 텔레미노라를 갈지, 아미르 티무르 공원을 갈지, 얌전히 초르수 보조르를 갈지 결정하기로 했어요.


드디어 눈에 아주 익은 풍경이 나타났어요. 택시는 타슈켄트 동쪽에 있는 부육 이팍 욜르 Buyuk ipak yo'li 로 들어갔어요. 부육 이팍 욜르는 지하철 역이 있는 곳으로, '비단길'이라는 뜻이에요. 이쪽은 제가 거의 가지 않는 곳으로 그냥 사람 사는 곳. 거기에서 방향을 틀어 기차역으로 갔어요.



오후 3시 15분. 드디어 타슈켄트역에 도착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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