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해야 했던 숙제 (2012)

해야 했던 숙제 - 10 우즈베키스탄 안디잔

좀좀이 2012. 10. 25. 08:10
728x90

해가 긴 여름이었다면 지금도 백주대낮처럼 밝을 시간이었지만 지금은 가을. 이제 동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어요. 동지까지는 많이 남았지만 이제 해가 짧아져서 8시면 확실한 밤. 7시만 되어도 어두워서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니는 데에 제약이 따랐어요. 웬만해서는 6시에 돌아다니는 것을 마치는 것이 이상적이었어요. 문제는 제게 시간을 늘리고 줄이고 뒤로 돌리고 앞으로 당기는 능력이 없다는 것. 점점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갔어요.



안디잔에도 '우는 어머니 동상'이 있었어요. 이 우는 어머니 동상은 2차세계대전때 희생당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공원에 있는 동상이에요. 주요 도시에서는 이 우는 어머니 동상을 찾아볼 수 있어요. 타슈켄트에도 있고, 그 외 도시들에도 다 있어요. 이 동상이 있다는 것은 우즈베키스탄의 주요 도시라는 의미에요.



동상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재촉했어요. 아직 공원이 하나 더 남아 있었거든요.



조금만 기다려줘!


태양은 서쪽으로 계속 달려갔어요. 그만큼 날은 계속 어두워졌구요. 밤이 되어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위험해서 이렇게 저물어가는 태양을 보며 아쉬워한 것은 아니었어요. 밤이 오면 오직 눈으로만 보아야 하니까 문제였어요. 여행을 다니며 남는 것은 결국 사진. 이 도시를 기억하기 위해서 나중에 가장 먼저 찾게 될 자료는 분명 사진일 거에요. 기억하고 싶은 것은 사진으로도 찍고 해야 하는데 어두워지면 사진도 못 찍고, 파르고나에서처럼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었어요. 밤거리는 밤거리만의 아름다움이 있지만 제가 원했던 것은 낮의 아름다움.



나보이 문화 휴식 공원 Navoiy nomli madaniyat va istirohat bog'i 에 도착했어요. 입구의 아름다운 대문의 가운데 돔 안은 이렇게 벽화가 그려져 있었어요.



무슨 이야기를 가지고 벽화를 그린 것 같았어요. 벽화 사진을 찍고 있는데 한 무리의 아가씨들이 저를 보았어요.


"안녕!"


역시나 자기들끼리 제가 한국인일지, 일본인일지, 중국인일지 쑥덕대더니 제게 장난으로 인사를 걸었어요.


"안녕!"


제가 대답하자 막 웃더니 러시아어로 뭐라고 이야기했어요.


"나 러시아어 몰라. 우즈벡어만 알아."

"너 어디에서 왔어?"

"한국."


간단한 이야기를 하고 헤어졌어요. 농담으로 자기 집에 밥 먹으러 오라고 하기에 '진짜 가도 돼?'라고 눈치 없는 척 장난으로 받아칠까 하다가 그냥 되었다고 했어요.



공원은 볼 것 없었어요. 여름이었다면 아마 이 시각에 사람도 많고 분수도 가동했을 거에요. 하지만 지금은 계절도 가을인데다 하필이면 일요일. 사람도 별로 없었고, 마땅히 구경할 거리도 없었어요. 그래서 바로 다마스를 타고 양기 바자르로 갔어요.





양기 바자르에 도착했을 때에는 어둠이 깔리기 직전. 당연히 시장은 문을 닫고 있었어요.




시장을 간단히 둘러보고 나왔어요. 정말 이 시장은 볼 것이 없었어요. 시간을 완벽히 잘못 맞추어 갔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였어요.


'그냥 돌아갈까?'


이제 어둠이 깔렸어요. 더 돌아다니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일. 거리에는 사람도 별로 없었어요. 오직 자동차만 달릴 뿐. 그래도 이대로 다시 에스키 바자르로 돌아가자니 무언가 아쉬웠어요.


'아까 그 동상이나 보고 가야겠다.'



동상을 보고 다시 양기 보조르쪽으로 갔어요. 양기 보조르 맞은편에 있는 식당에 가서 간단히 밥을 먹고 다시 다마스를 탔어요.


"이대로는 못 끝내!"


이제 여행 시작한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여행이 끝나는 기분이었어요. 앞서 말한대로 저는 타슈켄트에서 거주중이었고, 다음날 갈 곳은 하필이면 타슈켄트. 타슈켄트 어디로 가든 모두가 너무 익숙한 곳이다보니 타슈켄트로 간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집에 가는 것 같았어요.


내가 단순히 3만숨을 아끼기 위해 호텔 안디잔에 숙소를 잡은 것인가?


그것은 아니었어요. 제가 고장난 변기가 있는 방임에도 일부러 호텔 안디잔에서 1박 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단순히 3만숨을 아끼기 위한 목적 외에 다른 이유가 더 있었어요. 그것은 바로 구시가지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구시가지를 잘 구경하기 위해 불편을 무릅쓰고 일부러 구시가지 근처에 있는 호텔에 방을 잡은 것. 그렇다면 이 목표에 아주 충실한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었어요. 하지만 아직까지 그 이점을 살리지 못했어요. 굳이 호텔 안디잔에 안 묵어도 지금까지 해 온 여행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여행이었으니까요.


밤의 구시가지를 보자!


나는 남자. 상대적으로 덜 위험한 존재. 게다가 우즈벡어도 할 줄 알아. 그리고 여기는 다행히 치안이 안전한 우즈베키스탄. 솔직히 타슈켄트 구시가지를 밤에 돌아다니는 일은 저도 망설여져요. 아무리 안전하다고 해도 으슥한 곳을 혼자 돌아다니는 것은 웬만해서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은 일이니까요. 지금은 낮에 한 번 본 길을 도는 것인데다 아주 야심한 시각은 아니라 돌아도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아서 구시가지를 돌아다니기로 했어요.




에스키 보조르에서 조메 모스크까지 갔어요. 이 조메 모스크 뒤쪽으로 들어가 에스키 바자르까지 걸어가는 길이 이 밤에 홀로 걸을 길.



드디어 구시가지에 발을 디뎠어요.



정말로 조용한 밤길.







구시가지를 조용히 둘러보고 에스키 바자르쪽으로 나왔어요.



정말 밤새 에스키 샤하르 안을 돌아다니고 싶었어요. 물론 그럴 수는 없었어요. 다음날 아무 일이 없어서 하루 종일 잘 수 있다고 해도 한밤중에 그렇게 마구 돌아다니는 것은 별로 좋은 일이 아니었거든요. 그 정도로 어둡고 별 볼 일 없기는 했지만 제게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시간에서 독립해 어두운 밤거리를 걷는 그런 기분이 들었거든요.



지금은 박물관이 된 마드라사를 청소하고 있었어요. 이제는 저도 숙소로 돌아가야할 시간.




에스키 바자르 주변. 마지막으로 손님을 태우기 위해 노력하는 다마스 운전 기사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손님은 별로 없었어요. 모두 집에 돌아갔으니까요.


호텔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호텔 앞 거리를 걸었어요.





호텔로 돌아왔어요. 돌아오자마자 샤워를 했어요. 물이 졸졸 나오기는 했지만 샤워를 할 만 했어요. 온수가 빌빌 나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어요. 옆에는 고장난 변기가 있었으니까요.


침대에 누워 밀린 여행 기록을 쓰기 시작했어요.


"어제 것은 그냥 놔 둬?"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어제 것은 무성의의 극치. 그래서 전날 것부터 쓰기 시작했어요. 다행히 하루 전 일을 기록하는 것이라 크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전날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았지만 수첩에 정리해 보니 그렇게 많은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어요. 어제나 오늘이나 공통된 특징이라면 사람들이 저를 매우 신기하게 보았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들과 간간이 잡담을 하며 여행을 했다는 것이었어요. 정말 풍경보다 사람이 더 인상적인 곳이었어요.


카메라로 사진을 보아가며 여행 기록을 적다가 사진 하나를 발견했어요.



이 사진을 보자마자 밀려오는 후회. 왜 문양을 찍을 생각을 지금까지 한 번도 안 했지? 이런 문양 하나 잘 찍어 놓으면 최소한 PPT 표지로 써먹을 수도 있었을텐데...후회는 밀려왔지만 코칸드 왕궁에 이거 하나 다시 찍으러 갈 수도 없는 일. 진화라면 나름 진화한 것이고, 깨달음을 얻었다면 나름 깨달음을 얻은 것이겠지만 이미 이것을 다시 찍기는 글렀어요. 거기 돌아갈 시간은 없었으니까요. 아...역시 진화와 깨달음은 끝이 없는 거구나...


여행 기록을 다 적은 후 불을 끄고 눈을 감았어요. 내일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힘든 날. 하루동안 1000km 넘게 이동해야 하는 날.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