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지인과 서울 종로에서 만나서 같이 점심 식사를 했어요.
"이제 어떻게 할까요?"
점심까지는 잘 먹었어요. 식당에서 나오자 문제가 발생했어요. 갈 곳이 없었어요. 보통 식사 후 카페 가서 커피 한 잔 마시며 대화하고 헤어지는데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카페에 갈 수 없었어요. 모든 카페 매장 내부에서 취식이 금지라서요. 카페에 가서 음료만 사와서 밖에서 마실 수도 없었어요. 여름이라면 가능하겠지만 지금은 추운 겨울이에요. 겨울에 밖에서 벌벌 떨며 음료 마시며 대화하는 건 정말 안 좋은 선택이었어요. 음료를 들고 돌아다니기도 별로였였어요.
대안이 없다.
카페 중에서도 브런치 카페는 매장 안에서 음료를 마실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제 막 밥 다 먹고 식당에서 나왔어요. 카페에 앉아 있기 위해 브런치 카페 가서 음식을 또 시키는 것은 정말 아니었어요. 브런치 카페 가서 음식을 하나 주문한 후 둘이서 조금씩 나눠먹으면 먹기야 다 먹겠지만 그런 선택을 하자니 돈이 엄청 아까웠어요. 이건 먹고 싶어서 먹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카페에 앉아 있기 때문에 억지로 먹는 거였어요. 이러면 이건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뱃속에 버리는 꼴이었어요. 먹고 싶은 것을 먹어야 음식을 '먹는 것'이지 먹기 싫은데 억지로 먹으면 이건 음식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 아니라 뱃속에 '버리는 것'이니까요.
"일단 조금 걷죠."
당장 떠오르는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조금 걸으면서 어떻게 할 지 생각해보기로 했어요. 다행히 식당에서 배부르게 밥을 먹고 나왔기 때문에 소화시킬 겸 걷는 것도 좋았어요. 중국발 미세먼지가 가득하기는 했지만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미세먼지가 어느 정도 차단되었어요. 날도 12월치고는 별로 안 추워서 걸어도 괜찮은 날씨였어요. 종로 길거리를 구경하며 같이 조금 걸었어요.
'아, 그 방법 하나 있구나!'
문득 머리에서 생각이 떠올랐어요. 카페를 가지 않고 어디 들어가서 앉아서 잡담하며 시간 보낼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어요.
맥주집 가서 간단히 맥주 500cc 한 잔 한다면 자리에 앉아서 대화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요. 카페에서 커피 주문하는 대신 맥주집 가서 맥주 500cc 주문하면 되었어요. 안주는 제일 저렴한 거 하나 주문하면 되구요. 이게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었어요. 이게 싫다면 맥도날드, 롯데리아 같은 패스트푸드 체인점 가서 음료 시켜서 앉아 있는 영 보기 안 좋은 민폐짓을 해야만 했어요.
낮술 권하는 사회적 거리두기.
가게 주인에게 민폐 안 끼치고 가게에 앉아서 간단히 뭐 마시면서 잡담하는 방법이라고는 현재 상황에서 이것 뿐이었어요. 술을 잘 마시지 못하고 안 좋아해서 술을 먼저 마시자고 하는 일이 절대 없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달랐어요. 호프집 가서 맥주 한 잔 마시고 가는 게 아니라면 답이 없었어요. 맥주 한 잔 주문하고 가벼운 안주 하나 주문하는 것이 최선 수준이 아니라 아쉽게도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는 유일한 정상적인 방법이었어요.
"맥주 500cc 나 한 잔 하고 갈까요?"
"그래요."
어지간해서는 절대 술을 입에 안 댄다는 걸 아는 지인이 조금 놀라는 눈치였어요. 그러나 지인에게 주절주절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지인도 왜 제가 그런 말을 했는지 바로 이해했어요. 맥주 500cc 한 잔 마시면서 앉아서 대화하다가 헤어지는 것 외에는 어디 들어가서 앉아서 잡담하다 헤어질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어요. 이게 싫다면 정말 맥도날드, 롯데리아 같은 곳 가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잡담하는 짓을 하든가 지금 당장 각자 헤어져서 집으로 가야 했어요.
"어디 괜찮은 곳 아세요?"
"을지로 노가리 골목 가죠."
종로였기 때문에 아주 좋은 곳이 있었어요. 바로 을지로 노가리 골목이었어요. 여기는 가볍게 맥주 500cc 한 잔 하기 매우 좋은 곳이에요. 더욱이 아직 저녁 장사할 시간이 아니었어요. 맥주 한 잔만 마시고 일어나기 딱 좋은 곳이었어요. 맥주 500cc 한 잔 놓고 카페에서처럼 한두 시간 동안 잡담하기야 어렵겠지만 그래도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중요했어요.
을지로 노가리 골목으로 갔어요. 만선호프, 뮌헨호프 등 맥주집이 여러 곳 있었어요. 아직 저녁 장사 시간이 아니라 가게마다 빈자리가 엄청나게 많았어요. 여기는 맥주집이 몰려있는 곳인데다 안주도 저렴한 노가리, 쥐포 같은 것 시켜서 마셔도 되는 곳이라 카페 대신 가기 매우 좋은 곳이었어요. 낮에 서울 종로 돌아다니다 혼자 맥주 한 잔 마시고 가기에도 매우 좋은 곳이구요.
'혹시 을지OB베어 자리 있을 건가?'
을지OB베어 자리가 있는지 궁금했어요. 을지OB베어는 을지로 노가리골목에서 가장 오래된 맥주집이에요. 여기는 가게 내부가 작고 좁은 편이에요. 분위기는 좋은데 좌석이 별로 없고 항상 사람들이 들어차 있어서 가보지 못한 곳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참 안 좋은 때인데다 상황이 좋다고 해도 사람들이 거의 없을 아주 어정쩡한 시각이었어요. 그래서 을지OB베어부터 보기로 했어요.
을지OB베어 내부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어요. 절호의 기회였어요. 여기는 항상 사람들이 들어차 있는 가게였어요. 조용히 앉아서 맥주를 홀짝이며 실내 구경하기에 이렇게 좋은 기회가 없었어요.
"여기로 가요."
지인과 서울 을지로 노가리 골목 을지OB베어 안으로 들어갔어요.
지인과 자리를 잡고 앉았어요. 생맥주 500cc 가격은 3500원이었어요. 각자 생맥주를 하나씩 주문했어요. 이제 안주를 고를 차례였어요.
"안주는 쥐포 시키죠."
"예."
여기는 전에 한 번 와본 적이 있었어요. 원래는 을지OB베어에서 노가리를 주문하는 것이 정석이에요. 을지OB베어가 처음 생겼을 때 손님에게 판매하던 안주가 노가리였다고 해요. 그래서 옛날 맛을 즐기고 싶다면 노가리를 안주삼아서 생맥주를 마셔야 한다고 해요. 여기에서 초창기에 노가리를 안주로 제공하기 시작한 것이 널리 퍼진 것도 '노가리 깐다'는 표현을 흔히 쓰게 된 것과도 연관이 있을 거에요. 원래 어원은 명태가 한꺼번에 많은 알인 노가리를 낳는다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하지만 현재 '노가리깐다'는 표현을 많이 쓰는 데에는 그보다는 술집 안주로 노가리 하나 시켜놓고 잡담하는 일이 많아서일 거거든요. 동해 바닷가 사람이 아닌 우리나라 사람들이 명태가 알을 1개만 낳는지 무진장 많이 낳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정확히 노가리는 다 자리지 않은 새끼 명태를 지칭하는 말이에요.
원래는 노가리를 안주로 주문하는 것이 맞지만 저는 노가리 매우 안 좋아해요. 전에 여기 왔었을 때는 저도 노가리를 주문했어요. 그런데 노가리는 바르기도 힘들고 먹기도 불편했어요. 이게 맥주를 먹으러 온 건지 노가리 해체작업을 하러 온 건지 분간이 안 갔어요. 그렇다고 맛이 엄청나게 특별한 것도 아니었어요. 그래서 다음에 올 때는 제일 무난하고 먹기 쉬운 쥐포를 시켜서 먹기로 결심했어요. 그래서 안주로 먹기 쉽고 맛있는 쥐포를 주문했어요.
제가 주문한 생맥주가 나왔어요.
을지OB베어 생맥주는 구수하고 살짝 달콤한 맛이었어요. 쓴맛은 어디 구석에 꽉꽉 우겨넣고 처박아놓은 느낌이었어요. 쓴맛이 없지는 않지만 끝부분에 살짝 느껴지는 정도였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구수하고 살짝 달콤했어요. 알코올 성분만 아니라면 음료로 마셔도 매우 맛있을 맛이었어요. 술 잘 마시는 사람이라면 커피 대신 마셔도 좋아할 거였어요.
하지만 저는 술을 잘 못 마시는데다 조금만 마셔도 온몸이 시뻘개지기 때문에 낮에 마시는 건 솔직히 무리였어요. 지금이야 겨울이고 해 질 시간이 슬슬 다가오고 있어서 한 잔 마시고 벌개져도 잘 안 보이니 괜찮았지만요. 생맥주 맛은 매우 맛있었어요. 마음 같아서는 한 잔 더 마시고 싶었지만 그러면 제가 진짜 크게 무리하는 거라서 참았어요.
가게는 매우 오래된 티가 났어요. 어떻게 보면 '한국식 엔틱함'이 지배하는 공간이었어요.
낮술 하라고 하는 사회적 거리두기인데 낮술 한 잔 괜찮잖아.
카페에서 커피를 못 마시게 했으니 맥주집 가서 낮술 해야죠. 방법이 없잖아요. 낮술도 괜찮았어요. 특히 이렇게 공간 자체가 특별한 곳에서 낮술한다면 가끔은 즐길 만 했어요. 게다가 맥주 가격이 비싸지도 않았어요. 생맥주 한 잔 가격이 3500원이었어요. 쥐포 가격은 2000원이었어요. 2명이 생맥주 각각 한 잔씩 마시고 쥐포 하나 먹고 일어나자 총 9,000원 나왔어요. 카페보다 훨씬 경제적이었어요.
지인과 맥주를 홀짝이며 속으로 생각했어요. 전화위복이 되었다구요. 평소였다면 맨날 사람 들어차 있어서 이렇게 안에서 사진도 찍고 여유도 불리지 못했을 거였어요. 원래는 실내 공간을 안주 삼아 마시기는 어려운 곳이었어요. 하지만 사람이 워낙 없는 때라서 쥐포 뿐만 아니라 실내 공간 그 자체를 안주 삼아서 맛있는 생맥주 한 잔 마셨어요.
을지OB베어에서 공간을 안주 삼아 마시는 맥주맛은 참 맛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