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두 개의 장벽 (2012)

두 개의 장벽 - 38 아제르바이잔 바쿠

좀좀이 2012. 9. 23.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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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났는데 콧물, 목 아픔. 어지러움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친구가 약 사줘서 먹고 다시 잤다.

오후 5시에 깨서 정신 차렸는데 우리가 자는 넓은 2인용 침대에 예약한 손님들 왔다고 혹시 비켜줄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그래서 비켜주었다. 원래 우리도 좁은 2층 침대에서 자야 하는데 우리보고 편히 자라고 넓은 침대 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일어나서 엽서 2장 사고 밥 먹으러 갔다. 아제리에서는 엽서고 선물이고 암 것도 안 하려고 했는데 결국 하게 된다. 친하게 지내는 아이는 타지키스탄에서 보낸 엽서 몇 글자 해석 불가라 해서 이번엔 작정하고 예쁘게 썼다. 학원에서 같이 근무했던 선생님과 친하게 지내는 아이에게 썼다. 모처럼 예쁘게 글자 쓰려니 힘들었다.

투르크멘서 보낸 건 어찌 읽으려구. 그때는 서점 가야하는데 엽서는 7통이나 써야 해서 진짜 미친 듯 썼다. 글자들을 한붓그리기로 쓴 듯 하다.

솔직히 지금 와서 그때 뭘 어떻게 썼는지조차 기억 안 난다.

바뀐 자리는 밖의 불 때문에 밝았다. 그래서 방의 불을 켜지 않고도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약이 대체 얼마나 독한지 처음 먹었을 때 거의 기절하다시피 잤는데 일어나니 콧물이 거의 떨어졌다. 몸이 지옥과 천당을 오갔다.

- 식당서 음식 시켰는데 내꺼 빼먹고, 계산서에는 콜라 2잔 대신 아이락 1잔을 적어놨다. 왠지 초짜 같은데 이놈 혼자 가게 말아먹을 놈일세...


2012년 7월 12일. 위의 내용은 이날 제가 기록해놓은 거에요. 수첩에 적은 것 가운데 사람 이름 (친구, 친하게 지내는 아이, 학원에서 같이 근무했던 선생님) 외에는 그대로 옮겨 적었어요.


감기는 절정에서도 최고조에 달했어요. 이제 일반 감기 수준에서는 더 심해질 것도 없겠다 싶을 정도였어요. 몸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려 토할 것 같았어요. 이 최고조에 달한 감기는 지금부터는 얼마나 지속되느냐의 문제 정도. 손으로 이마를 짚어보니 열이 나고 있었어요. 자리에서 일어나 휘청거리며 화장실로 들어갔어요. 코를 풀고, 가래를 뱉고, 세수를 했어요. 열을 식히기 위해 차가운 물로 계속 세수를 했어요. 세수를 하고 뒤돌아서면 콧물이 주르륵 나와서 세수를 몇 번 하고 나와서 침대에 쓰러졌어요.


침대에 누워도 정신 없었어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일부러 차를 타서 밖에 나가 의자에 앉았어요.


"어디 아파?"


주인 누나가 물어보았어요.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손가락으로 코를 가리켰어요.


"약 줄까?"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어요.


차를 마시며 햇볕을 쬐면 감기가 사그라들 거라 생각했어요. 차를 홀짝이며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안 좋은 일 있어?"

"감기."


프랑스 청년이 제게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냐고 물어보았어요. 저는 감기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했어요. 차를 마시며 햇볕을 쬐는데 감기가 전혀 좋아질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차를 다 마셨는데도 여전히 온몸이 무겁고 콧물은 계속 나왔어요. 머리가 세 배는 더 무거워진 것 같았고, 땅이 뱅글뱅글 도는 듯 했어요.


휘청거리며 주방으로 가서 찻주전자를 씻고 침대에 누웠어요.


"어디 아파?"

"죽겠어."


침대에 누워도 어지러웠어요. 친구는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어요. 침대에 누웠는데 아프기만 하고 잠은 오지 않았어요. 일어나 앉으려고만 해도 어지러웠어요. 머리가 어지러우니 속도 당연히 좋을 리 없었어요. 코를 풀기 위해 화장실에 갔다 오면 속이 토할 것 같이 울렁거렸어요. 콧물이 계속 나와 잠을 잘 수도 없었어요. 머리가 어지럽고 아파서 책을 볼 엄두도 나지 않았어요. 정말 침대 위에 널부러져 있었어요.


잠시 후. 친구가 감기약을 사 왔어요.


"이거 먹어."

"고마워."


친구가 준 약을 받아 먹었어요. 약을 먹자마자 잠이 밀려왔어요. 정신을 잃었어요.


다시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오후 5시.


"괜찮아?"

"응."


약이 대체 얼마나 독한 거야? 감기가 거의 다 나았어요. 콧물도 거의 멎었어요.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쓰러져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하도 누워 있어서 머리와 몸이 둔해진 것 외에는 그렇게 특별한 증상이 없었어요.


외국 약에 비해 한국에서 파는 약이 매우 약하기는 해요. 그런데 이것은 얼마나 독한지 먹고 곧바로 잠이 들었고, 푹 자고 일어났더니 감기가 거의 다 나았어요. 일단 최소한 내일까지는 계속 약을 먹기는 해야 되지만, 오래 먹을 약은 아니었어요.


"자리 좀 옮겨줄 수 있니? 그 침대 예약 손님 왔거든."


주인 할머니가 지금 예약 손님들 왔으니 침대에서 비켜줄 수 있냐고 물어보셨어요. 그래서 짐을 대충 정리해서 2층 침대로 옮겼어요. 저는 2층에서 자기로 했어요.


자리를 옮기고 슬슬 저녁을 먹기 위해 친구와 밖으로 나왔어요.


이제 할 일도 없는데 엽서나 부쳐줄까?


보통 여행 중 이렇게 하루를 나가 떨어지면 일정에 막대한 차질이 생기기 마련. 그러나 아무 문제 없었어요. 이제 계속 바쿠에만 있을 것이니까요. 떠나는 그날까지 바쿠에만 있을 예정이었어요. 배화교 사원은 택시로 가야 하는데 약 30마나트 든다고 했어요. 30마나트면 현재 가지고 있는 마나트로는 꽤 부담스러운 돈이었어요. 배화교 사원을 제외하니 바쿠에서 갈 곳이 남아 있지 않았어요.


아제르바이잔에 오며 이번에는 정말 저 자신을 위한 시간만 보낼 생각이었어요.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엽서를 없는 시간 쪼개가며 7통이나 쓴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어요. 그 나라에 들어가기 힘들어서 작정하고 쓴 것도 있었지만, 아제르바이잔에서까지 선물과 엽서를 준비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받는 사람이야 그냥 받았다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이런 선물을 뭣 하러 주냐고 생각하는 괘씸한 사람들도 있지만, 여행하는 동안 선물은 이래 저래 스트레스를 많이 주는 것이거든요. 무엇을 주는 게 좋을지 고려도 해야 하고, 가격도 자기의 여행 자금에 문제를 주지 않아야 하면서, 들고 다닐 때 큰 문제가 없는 것을 고른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으니까요. 이런 조건에 전부 부합하는 물건을 찾는 건 당연히 매우 어렵고, 자기 시간 가지기도 바쁜 와중에 이런 부분에 또 신경을 써야 하는 건 대단한 스트레스에요.


그런데 갑자기 엽서를 써서 부쳐주고 싶었어요. 여유가 생기고 진탕 아팠다가 나으니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에게 잘 지낸다고 엽서를 보내고 싶어졌어요. 물론 그들이야 제가 아팠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겠지만 그때 기분이 그랬어요. 그래서 엽서를 2장 샀어요.


식당에 가서 음식을 주문했어요. 오늘도 역시 탄투니. 그런데 제 것은 나오지 않았어요. 친구가 다 먹을 때까지 제가 시킨 탄투니가 나오지 않았어요. 게다가 다른 사람이 시킨 탄투니는 나오는데 제 것만 나오지 않았어요. 왠지 제 주문을 빼먹은 것 같았어요.


"탄투니 언제 나와요?"

"탄투니요?"


역시나 종업원이 주문을 빼먹은 것이었어요. 종업원은 뒤늦게 제가 시킨 탄투니를 가져왔어요. 종업원 얼굴을 보니 평소 이 식당에서 보던 얼굴이 아니었어요. 아무래도 오늘 처음 일하는 사람 같았어요.


계산을 하러 갔는데 뭔가 계산이 이상했어요. 이 집을 처음 온 것도 아니고, 항상 시켜먹는 것을 시켜먹었기 때문에 가격을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가격이 매우 이상하게 나왔어요.


"그거 영수증 잘못 된 거 아니에요?"


영수증을 보여달라고 했어요. 가게 사장님이 우리 영수증 맞다고 했어요.


"우리 아이락 시킨 적 없어요!"


아이락은 물과 소금을 탄 요구르트. 이것은 여행 중 단 한 번도 먹은 적이 없어요. 이게 유제품이라 잘못 먹으면 바로 배탈이 날 수 있거든요. 아무리 일정이 없어서 숙소에서 뒹굴어다니는 시간이 많다 해도 설사하는 것은 절대 반가운 일이 아니라 입도 안 대고 있었어요. 가뜩이나 여름에 이거 잘못 먹다 배탈난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서 유제품은 우유를 제외하고는 가급적 삼가고 있었어요. 당연히 이날도 우리가 마신 음료는 콜라. 그런데 콜라 2잔 대신 아이락 1잔이 적혀 있었어요. 콜라 2잔 가격이 아이락 1잔 가격과 같다면 문제가 없지만, 콜라 1잔 가격과 아이락 1잔 가격은 같은 가격.


또 자세히 보니 우리 영수증이라고 적어 놓은 것을 보니 탄투니가 아니라 케밥을 시켰다고 적혀 있었어요. 주인 아저씨가 짜증이 났는지 우리에게 무엇을 시켰는지 이야기해달라고 하셨어요. 아마 직원이 오늘 하루 종일 이런 실수를 잔뜩 한 듯 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먹은 것을 이야기하고, 맞는 돈을 내었어요.


"저 녀석, 혼자 가게 말아먹을 놈인데?"


친구와 농담을 하며 분수광장으로 갔어요.




한쪽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어요.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이 사람들의 연주를 듣고 있었어요. 우리도 자리를 잡고 앉아서 연주를 듣고 갈까 했지만, 자리가 없었어요. 그래서 서서 듣다가 이체리 셰헤르로 갔어요.


"우리 저기에서 커피 한 잔 뽑아 마셔볼까?"



툭하면 지나가는 건물. 이 앞에 커피 자판기가 있어요.



자판기 커피와 헤어진 지 어언 몇 개월. 마지막으로 먹은 게 작년 2월 초였어요. 믹스 커피는 우즈베키스탄에 온 후에도 종종 즐겨 마시지만, 자기가 타서 마시는 믹스 커피와 자판기 커피의 맛은 엄연히 다른 법. 이미 뼈에 새겨진 자판기 커피의 맛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우즈베키스탄에서 커피 자판기를 아직까지 구경한 적이 없었는데, 여기는 커피 자판기가 있었어요. 물론 우즈베키스탄에 자판기 커피가 없다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커피 자판기가 워낙 없어서 구경하기 매우 힘들어요. 자판기 커피 한 잔 마시려고 공항까지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뼈에 새겨진 자판기 커피의 맛은 아무리 향이 좋은 커피네, 질 좋은 커피네 해도 잊을 수 없는 맛. '자판기 커피는 저질이고 원두 커피는 고급이다'라는 생각이 아니라 '자판기 커피와 원두 커피는 아예 별개의 음료'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제게 자판기에서 뽑아 마시는 커피란 오매불망 고향의 맛.


자판기 커피 가격은 한국보다는 당연히 비쌌어요. 가장 저렴한 것이 아메리카노로 30개픽쯤 되었어요. 그래도 '자판기에서 뽑아마시는 커피'라는 것이 중요했어요.


이미 동전은 들어갔다.


카이사르가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외치던 것처럼 자판기에 1마나트 지폐를 집어넣고 버튼을 눌렀어요. 플라스틱 컵이 나왔어요. 자판기 커피는 종이컵으로 마셔야 진리이지만 플라스틱 컵도 나쁘지는 않았어요. 타슈켄트에서 구경하기 정말 어려운 자판기 커피이니까요. 그리고 이 자판기 커피를 획득하기 전까지 우즈베키스탄에 온 이후 단 한 번도 자판기 커피를 마셔보지 못했어요. 뼈에 새겨진 기억은 이미 이 자판기 커피를 갈구하고 있었어요.


"이거 먹을 만 한데?"


둘이 다 해서 1마나트 정도에 커피 한 잔씩 즐길 수 있었어요. 한국에서 흔히 먹던 그 자판기 커피와 맛이 다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원하는 그 느낌이었어요. 건물 앞 벤치에 앉아서 커피를 즐기며 노닥거렸어요.


앞으로 시간을 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즐길 방법을 찾아내었다는 기쁨과 함께 숙소를 향해 걸어갔어요.



저 원기둥이 바로 처녀의 탑이에요. 아직도 보수 공사중. 각도를 이상하게 잡으면 정말 볼 품 없게 나오는 유적이에요. 처녀의 탑 앞에 있는 작은 간이 건물이 바로 처녀의 탑 매표소이자 인포메이션 센터.



매일 생각 없이 지나가던 곳. 오늘은 정말 사진으로 남길 것이 너무 없어서 이것도 찍었어요.


숙소로 돌아와 엽서를 썼어요. 학원에서 제가 가르쳤던 애들 중 친하게 지내는 아이가 타지키스탄에서 보낸 엽서에서 몇 글자는 도저히 못 알아보겠다고 해서 이번에는 작정하고 글자를 또박또박 쓰려고 노력했어요. 노력한다고 악필이 명필이 되는 것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누가 보아도 알아볼 수 있게 또박또박 썼어요. 손가락에서 쥐가 나는 것 같았어요. 엽서 두 통을 그렇게 정성껏 또박또박 썼어요. 내용은 그렇게 정성껏 쓰지는 않았어요. 한국에서 보내는 거라면 정말 머리를 쥐어짜며 써야했을 거에요. 하지만 저는 지금 외국, 그리고 외국에 머무르면서 외국 여행 중. 그래서 그다지 머리를 쥐어짜내지 않아도 쓸 말은 충분했어요. 게다가 이 나라는 국가명도 무려 6글자라서 칸을 참 많이 잡아먹었어요. 정성껏 썼다는 말은 내용을 정성껏 썼다는 것이 아니라 글자를 정성껏 또박또박 썼다는 말이에요.


엽서를 다 쓰고 침대 위로 올라갔어요. 밖의 불이 들어와 굳이 불이 없어도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밝았어요. 불빛에 예민한 사람이라면 꽤나 신경쓰이는 자리. 저는 오히려 좋았어요. 잠을 잘 때 불빛에 예민하기는 커녕 잠 잘 때 매우 둔감한데다 밤 늦게 잠이 안 오면 책을 조금 보다 그냥 잠들어서 자는데 이러면 제가 불을 끌 필요도 없거든요. 남들에게 민폐도 안 주고 저는 제 방식대로 잠을 청할 수 있으니 저를 위해서 매우 적합한 자리.


감기가 나으니 몸도 많이 가벼워졌어요. 감기가 나으며 그동안 쌓여 있던 피로까지 같이 날아갔나봐요. 잠을 자야 하는데 몸이 너무 가볍고 머리가 잘 돌아갔어요. 정말 천국과 지옥을 다 겪은 하루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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