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연말 특집은 뭘 쓸까?
2019년 12월 31일이 코 앞으로 다가온 때였어요. 12월 31일. 1년 365일 중 평범한 하루지만 한 해가 끝난다는 인간들의 약속 때문에 특별하게 느껴지는 날이에요. 뭔가 꼭 특집을 써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연말 결산 글을 써야만 할 것 같은 날이에요. 동지처럼 자연적으로 의미가 있는 날은 아니지만 인간들이 정한 사회적 약속인 해가 바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날이에요.
연말 결산은 조금 시시한데...
블로그 연말 결산으로 12월 31일을 마무리짓는 것은 영 탐탁치 않았어요. 12월 30일에 블로그 관리하는 거나 1월 1일에 블로그 관리하는 거나 별 차이 없을 거거든요. 12월 31일을 기점으로 블로그 관리에 엄청난 대혁신이 일어난다면 모르겠지만 그럴 일은 없었어요. 차라리 1월 1일부터 좀좀이의 여행 유튜브를 시작한다고 하면 12월 31일 결산이 의미가 있겠지만 좀좀이의 여행 유튜브는 이미 시작되었어요.
올해 이슈는 뭐가 있었을까?
올해는 이슈가 정말 많았어요. 이렇게 많았던 적이 없었어요.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온갖 이슈로 인해 사회가 시끄러웠어요. 나라가 조용했던 날이 단 하루도 없었어요. 어느 쪽이든 상관없이 뉴스만 보면 스트레스 받고 시끄러웠던 한 해였어요.
1년 내내 시끄러웠던 거 뭐 있지?
2019년에 특정 기간 동안 사회를 시끄럽게 만든 이슈는 너무 많았어요. 정부가 국민들에게 어제는 철창 데스매치, 오늘은 길거리 스트리트 파이팅, 내일은 하우스 연장질 데스매치 파이팅하라고 아주 매일매일 새로운 테마를 던져주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런 특정 기간 동안 사회를 시끄럽게 만든 것 말고 1년 내내 꾸준히 시끄러웠던 것이 뭐가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봤어요.
올 한 해 내내 한국 사회에서 시끄러웠던 거 하나 있다!
바로 부동산이었어요.
한국 사회는 이번 정권 집권하면서 꾸준히 부동산 문제 때문에 시끄러워요. 무슨 경마 중계 방송하듯 매일 뉴스에서 어디가 얼마 오르고 어디가 얼마 떨어지고 어디가 폭등할 예정이라고 계속 보도해줘요. 특히 서울 집값은 더욱 시끄러워요. 수요는 있지만 공급을 틀어막아버리는 정부와 서울시장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망둥어가 뛰니 꼴뚜기도 뛰는 꼴로 여기저기 너도 나도 다 오르고 있어요. 최근에는 정부가 또 부동산 가격 잡겠답시고 대출 규제 함으로써 그동안 잘 안 오르던 집값이 껑충 뛰는 소위 말해 '갭메우기'가 일어나고 있어요. 이 정도면 가히 정부가 주택 가격 상승에 있어서 신의 컨트롤 수준을 뛰어넘어 하느님 부처님 알라 컨트롤이라 할 수 있어요. 그간 특정 몇몇 지역에서 발생한 주택 가격 폭등이 거품 아니냐는 논란에 대해 안 오르던 지역까지 다 가격을 띄워버림으로써 그게 거품이든 아니든 간에 가격 붕괴를 막아버리고 있거든요.
고령화 사회로 갈 수록 도시는 그 범위가 위축되어가고 특정 지역으로 사람들이 더 몰릴 수 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일정 수요가 존재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서비스가 점차 인구 밀집지역에만 존재하게 되고, 여기에 노인들이 많아지면 노인들의 이동성과 건강 문제로 인해 더욱 인구 밀집지역 및 그 근처로 몰릴 수 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고령화 사회에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가 주택 가격 양극화에요. 인구가 몰려 있어서 다양한 서비스가 존재하는 곳 주택 가격은 천정부지로 상승하고, 그렇지 못한 지역 주택 가격은 땅 깊은 줄 모르고 끝없이 추락해요.
뭐가 재미있을까?
그때 딱 떠오른 것이 있었어요.
청량리588
그래, 청량리 가자!
청량리 588로 가기로 했어요.
집에서 나와 지하철을 탔어요. 청량리역 5번 출구로 갔어요.
청량리역 5번 출구로 나오자마자 청량리588 자리가 보였어요. 바로 청량리역 롯데캐슬 SKY L65 건설 현장이었어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청량리588. 수많은 남자들이 그 곳을 거쳐갔어요. 한때 서울 홍등가 지존이었던 청량리 588. 여기는 규모도 엄청나게 컸고 숫자도 하필 588이라 한 번 들으면 기억에 딱 남는 곳이었어요.
청량리 588 사창가는 서울에서 가장 큰 사창가였어요. 청량리 588 사창가가 언제 형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에 따라 의견이 분분해요. 일제시대 유곽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자료도 있고, 한국전쟁 당시 전선으로 향하는 군인들을 대상으로 성매매가 이루어지며 형성되었다는 자료도 있고, 1960년대에 형성되었다는 자료도 있어요.
서울 최대 윤락가였던 서울 종로에 있던 종삼이 나비작전으로 사라진 후 많은 매춘부들이 청량리 588로 넘어갔다고 해요. 청량리 588 의 전성기는 1988년 서울 올림픽 즈음부터라고 해요. 그 전에는 '팸프'라는 호객꾼 여성이 남자를 잡고 흥정한 후 방에 집어넣는 방식이었다고 해요. 그런데 1988년 서울 올림픽 즈음부터 전면이 잘 보이는 유리문을 설치해 윤락여성을 남자가 직접 보고 고를 수 있는 '유리방' 형식으로 바뀌었어요. 이때 청량리588에 예쁜 여자가 많은 '물 좋은 곳'이라고 소문나면서 청량리588로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고 해요.
게다가 청량리588은 입지조건이 매우 좋았어요. 이런 사창가를 이용하는 주요 고객 중 하나가 바로 군인이거든요.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군대 가면 죽을 수 있으니 죽기 전에 최소한 동정은 떼어줘야 한다고 입대하는 사람을 사창가에 보내주는 문화가 존재했었어요. (동정 못 떼고 죽으면 몽달귀신 된다는 민간신앙도 있었죠) 그리고 휴가 나온 젊은 혈기 넘치는 외로운 군인들이 이용하는 장소였구요. 청량리역 자체가 한국 동부 산악지역으로 이어지는 철도 노선의 중심지였어요. 서울의 강원도행 철도 요지였어요. 당연히 군인이 바글거릴 수 밖에 없었어요. 서울에서 강원도 가는 다른 교통의 요지인 동서울터미널과의 접근성도 괜찮았구요.
서울 최대 집창촌이었던 청량리 588. 청량리 및 그 일대 주민들에게는 당연히 혐오지역이었어요. 오죽하면 '청량리' 자체가 그런 동네의 대명사였으니까요. 청량리를 슬럼화시킨 주범이 바로 청량리 588이었어요. 서울 최악의 막장 중학교, 막장 고등학교가 있었던 곳도 청량리인데, 이렇게 최악의 쓰레기 중학교, 쓰레기 고등학교가 존재했던 이유도 바로 청량리 588 때문이었어요.
그런 청량리 588을 드디어 싹 밀고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었어요.
여기에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한국 민간신앙에서 이런 집창촌 같은 여성의 한이 많이 서려 있는 자리는 높은 건물을 세워서 나쁜 기운을 눌러야 한다는 믿음이 있어요. 그래서 청량리 588 자리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는 것은 여성의 한이 쌓이고 쌓인 자리이다보니 높은 건물을 지어 나쁜 기운을 누르기 위해서라는 말이 있어요.
청량리588 집창촌 자리에 들어설 아파트는 청량리역 롯데캐슬 SKY L65 에요. 청량리 및 이 일대 주민들도 꽤 많이 기대하고 있어요. 그동안 청량리588 때문에 청량리는 서울 최악의 동네였어요. 이른바 '컬쳐쇼크' 받는 지역이 바로 청량리였어요. 단순히 낙후된 정도가 아니라 범죄가 들끓는 슬럼 같은 곳이었거든요. 단순히 가난하고 빈곤한 동네가 아니라 '지저분한 동네'였어요. 깡패, 양아치, 정신병자, 비행청소년 등등 하나만 있어도 나쁘다고 하는 게 죄다 몰려 있는 동네였으니까요. 바로 청량리588 때문에요. 하지만 그 원흉인 청량리588이 사라지면서 동네가 많이 개선될 거라 기대하고 있어요.
청량리 588 자리는 부동산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꽤 주목받는 곳이었어요. 이유는 두 가지였어요. 첫 번째는 청량리는 교통의 요지에요. 서울 동북부, 더 나아가 경기도 동북부까지 낙후되고 저개발 상태인 이유가 서울의 주요 부도심 중 하나였던 청량리가 너무 낙후되고 안 좋은 동네였기 때문이에요. 청량리가 재개발되고 발전한다면 청량리를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제기동, 신설동까지, 동쪽으로는 최소 회기동, 휘경동, 이문동까지 거대한 낙후지역 상황이 크게 개선될 수 있어요. 여기에 더 북쪽 1호선 라인에 걸치는 지역들 모두 환경이 개선될 수 있구요. 청량리가 청량리588 윤락가라는 암덩어리 때문에 썩어곪아들어가면서 서울 동북부도 발전이 없었어요.
더욱이 청량리 일대는 땅이 상당히 넓어요. 박원순 서울 시장은 맨날 창동 타령 하는데 창동 실제 가보면 땅이 없어요. 아파트 수두룩 빽빽한 동네에요. 반면 청량리 일대는 땅이 엄청나게 넓어요. 거대 상업지구에 대형 아파트에 임대 아파트까지 다 넣어도 충분한 부지가 나와요.
두 번째는 위에서 길게 이야기한 과거 청량리588 사창가가 있었던 자리이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아주 최악의 지역이 어떻게 변모할지 궁금해하고 있어요.
길을 따라 걸어갔어요.
빨간 불빛이 빛나는 유리집이 한 집 있었어요. 저기가 바로 그 '의지의 한 집'이에요. 얼마 전 이곳을 다녀온 유튜브를 보면 저기 딱 한 집이 아파트 완공될 때까지만 영업하겠다고 버티고 있대요.
청량리역 6번 출구 근처 골목길까지 왔어요.
"이건 뭐지?"
무슨 투쟁 같은 것이 적혀 있는 비닐 천막이 있었어요. 성바오로병원 건물은 철거된 상태였어요. 이 투쟁은 세입자 보상 문제로 항의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요.
그리고 이것 대각선 맞은편 앞에 문제의 그 곳이 있었어요.
2019년 7월 23일.
박원순 서울시장, 청량리 588 보존 결정
올해 전국민 어이 상실하게 한 박원순 서울시장의 원대한 계획 발표가 있었어요. 바로 청량리588 지역에서 청량리 4구역 4만 제곱미터 일부 건물을 보존, 리모델링해서 '청량리 620'이라는 문화역사 공간으로 조성해 2023년 즈음에 일반에게 공개할 예정이라고 발표했어요.
당연히 청량리 사람들 모두 분노했어요. 한국인들 모두 어이가 없었구요. 마지막 먼지 한 알까지 깨끗하게 없애도 부족할 마당에 청량리 588 일부를 남겨서 청량리 620이라고 남겨놓겠다는 아이디어는 대체 무슨 정신으로 떠올려낸 건지 알 수 없는 일이었어요. 청량리를 영원히 윤락가 있는 더러운 동네로 낙인 도장 찍고 싶어서 환장한 것 아닌 이상 저런 생각은 못 해요.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기 때문에 당연히 얼마 안 가서 사라질 거라 예상한 사람들이 많아요. 그리고 청량리 588 다녀와서 글을 쓰고 유튜브 올린 사람들 보면 이곳을 놓친 사람이 상당히 많구요.
바로 박원순 서울시장이 청량리 620 만들겠다고 보존하라 지시한 그 자리였어요.
저것이 청량리 미래를 결정짓겠지...
인터넷 보면 청량리역 일대에 대한 장밋빛 전망이 한가득이에요. 그러나 몰라요. 청량리역의 미래가 밝고 아름다울지 음침하고 암울할지는 바로 저 청량리 620 자리에 달려 있는 문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참고사례로 아주 좋은 곳이 하나 있어요. 바로 영등포역 일대에요.
영등포역 일대를 보면 타임스퀘어 옆쪽에 아직도 사창가가 영업중이에요. 그리고 영등포역 6번 출구에는 서울에서 최고로 악명 높은 노숙자 밀집구역인 영등포 쪽방촌이 있어요. 영등포 쪽방촌은 박원순 서울시장이 만든 서울미래유산 중 하나로 지정되어 있어요. 영등포역에 아무리 백화점이 있고 타임스퀘어가 있다고 해도 여전히 낙후되고 안 좋은 분위기가 가득한 이유는 바로 영등포 쪽방촌과 영등포역 사창가 때문이에요. 이것이 서울 남서부 슬럼화의 주요 원인이에요.
청량리역은 영등포역과 대칭을 이뤄요. 영등포역이 서울 서부 철도 노선의 중심지라면 청량리역은 서울 동부 철도 노선의 중심지에요. 서울 남서부의 핵심 부도심이 영등포역 일대라면 서울 북동부 핵심 부도심이 청량리역 일대에요. 영등포역 주변에 거대한 재래시장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청량리역 주변에는 거대한 재래시장이 자리잡고 있어요. 영등포역과 청량리역을 비교해보면 유사한 부분이 엄청나게 많아요.
그렇지 않아도 청량리역에서 조금 걸어가면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홍릉주택이 있어요. 만약 박원순 서울시장의 고집대로 청량리620이 들어선다면 그 청량리620이 암세포 같은 역할을 할 거에요. 동네 이미지를 아주 철저히 다 깎아먹을 거니까요. 이쪽 지역 주민들에게 숨기고 잊고 싶은 기억인 서울 최대 집창촌 청량리588을 영원히 기억하도록 만들겠죠. 어쩌면 저 남아 있는 의지의 한 집도 그런 식으로 보존될 수도 있을 거에요.
또한 홍릉주택과 청량리620이라는 알박기로 인해 가뜩이나 낙후된 동네인 청량리 일대는 개발이 엄청나게 지지부진해질 거에요. 이로 인한 악효과는 단순히 '청량리' 하나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울 동북부 전역, 더 나아가 의정부, 양주, 동두천 등 경기도 동북부까지 영향을 끼쳐요.
혹자는 청량리에 있는 청과물 도매시장과 수산물 도매시장은 어쩔 거냐고 할 수 있어요. 그것 때문에 청량리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그것은 그렇게까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아요. 청량리 도매시장보다 훨씬 큰 가락시장 케이스가 있거든요.
과장 같지만 과장이 아니에요. 영등포역 일대를 돌아다녀보면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영등포 쪽방촌, 그리고 타임스퀘어 뒷편 사창가가 이 일대를 얼마나 낙후된 상태로 머무르게 하는지 직접 볼 수 있어요.
과연 전농동 588번지 청량리588 사창가의 흔적은 완전히 지워질지, 청량리620으로 박제되어 영원히 남을지 주의깊게 지켜봐야 해요.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이 청량리 일대의 미래, 더 나아가 서울 동북부와 경기도 동북부의 미래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거에요.
위 영상은 2019년 12월 27일 새벽에 촬영한 청량리 588 재개발 지역 영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