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서울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남구로역 조선족, 중국인 밀집지역 벌집촌 쪽방촌

좀좀이 2019. 12. 30.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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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남구로역에 있는 연변거리를 따라 걷다 가리봉시장으로 들어갔어요.


가리봉시장


가리봉시장은 그렇게까지 크게 볼 것이 없는 시장이었어요. 가리봉시장을 쭉 둘러보며 걸어갔어요. 딱히 눈에 띄는 것이 없어서 영상 촬영하면서 쭉쭉 앞으로 걸어갔어요. 시장 양 옆으로는 음침하고 음울하고 암울한 분위기가 진하게 뭍어 있는 골목길이 있었어요. 이때 계획은 가리봉 시장 동영상과 사진을 촬영한 후 연변거리를 촬영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어요. 시간적 여유가 그렇게까지 많지 않았거든요. 어물쩍거리다가는 인력시장 나가는 조선족, 중국인들이 쏟아져 나올 시간이 되어 버릴 거였어요. 그 다음에는 동이 틀 거구요.


'여기 진짜 별 거 없는데?'


대림 차이나타운, 대림중앙시장과 비슷할 거라고 상상하며 연변거리와 가리봉시장에 왔어요. 가리봉동은 조선족, 중국인 밀집지역으로 워낙 유명한 곳이었거든요. 하지만 실제 와 보니 그런 번화가가 아니었어요. 허름하고 낡은 동네였어요. 대림2동이 조선족, 중국인들의 강남이라면 가리봉동은 조선족, 중국인들의 슬럼 같은 느낌이었어요. 대체 마지막 페인트칠을 언제 했는지 알 수 없는 건물, 조그만 상점들, 그리고 별 볼 일 없어보이는 시장. 중국어를 제외하고 동네 모습만 보면 쇠락한 동네였어요.


가리봉시장 끄트머리에 도착했어요. 가리봉시장 끄트머리는 바로 급경사 오르막길로 이어졌어요.


서울 중국인 우범지역


서울 조선족 우범지역


오르막길로 올라가서 연변거리로 돌아갈 계획이었어요. 시장만으로는 너무 볼 것이 없었거든요. 가리봉시장 영상만으로는 아무 특징도 없고 재미도 없어서 연변거리까지 묶어서 촬영할 계획이었어요.


'어? 잠깐만...'


가리봉 벌집


딱히 신경쓰지 않고 대충 둘러보면 서울에 흔히 있는 평범한 2층 양옥집. 얼핏 봐서는 이상하거나 흥미를 가져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집이었어요.


'저거 벌집 아냐?'


서울 달동네를 찾아다닐 때였어요. 달동네 말고 쪽방촌은 어떻게 생긴 곳인지 궁금해서 서울 5대 쪽방촌인 서울 종로구 창신동 쪽방촌, 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 서울 중구 남대문로5가 쪽방촌,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역 쪽방촌 위치를 찾아보고 자료를 모으고 있던 중이었어요. 인터넷 검색으로 자료를 모으다 서울의 5+1 쪽방촌이라는 기사 제목을 발견했어요. 무슨 기사인지 읽어봤어요.


서울 5+1 쪽방촌이란 창신동, 돈의동, 남대문5가, 동자동, 영등포역 쪽방촌에 가리봉동 벌집촌을 더한 내용이었어요.


가리봉동 중국인 밀집지역


가리봉동 조선족 밀집지역


"가리봉동도 쪽방촌 있었어?"


가리봉동 쪽방촌 정보는 별로 접하지 못했던 것이었어요. 궁금해서 자료를 검색하고 공부했어요.


'아, 이래서 가리봉동 쪽방촌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구나.'


가리봉동 쪽방촌은 서울 5대 쪽방촌과 성격이 달라도 너무 달랐어요. 거주 공간이 좁다는 공통점 외에는 그 어떤 공통점도 존재하지 않았어요. 아예 부르는 이름부터 가리봉동은 아주 좁은 벌집이 모여 있다고 '벌집촌'이라고 부르고 있었어요. 대부분의 연구에서 벌집촌과 쪽방촌은 따로 나눠서 다루고 있었어요. 쪽방촌에 관심갖는 부류와 벌집촌에 관심갖는 부류 자체가 아예 달랐어요. 그만큼 벌집촌과 쪽방촌 성격은 매우 달랐거든요. 구로동, 가리봉동, 가산동, 독산동에 분포해 있는 벌집촌과 창신동, 돈의동, 남대문로5가, 동자동, 영등포역에 분포해 있는 쪽방촌은 같이 묶을 수 없는 범주였어요.


현재는 가산디지털단지와 구로디지털단지로 나눠서 부르는 과거 서울 구로공단 일대 벌집촌 자료를 보면서 벌집촌에 있는 벌집 사진을 여러 장 봤어요. 그때 봤던 벌집 사진과 가리봉동 시장 오르막길에 있는 집 사진이 상당히 유사했어요. 얼핏 보면 이게 어째서 뭐가 특이한지 알 수 없지만 자세히 보면 확실히 일반 가정집 단독주택, 다세대주택과 다른 점이 뚜렷하게 보이는 점이 눈에 들어왔어요.


'여기 설마 벌집촌인가?'


아직 확신이 없었어요. 가리봉동 벌집촌 위치에 대해 조사하고 오지 않았거든요. 오직 예전에 쪽방촌 관련 자료 찾다가 같이 보게 된 벌집촌 자료에서 봤던 사진 속 건물과 너무 비슷하다는 것 뿐이었어요. 일단 더 돌아다녀보기로 했어요.


구로구 조선족 밀집지역


구로구 중국인 밀집지역


'아, 여기 맞다!'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남구로역 조선족, 중국인 밀집지역 벌집촌 쪽방촌


오르막길 끝에 있는 건물을 보자 여기가 가리봉동 벌집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위 건물 사진을 얼핏 보면 전국 도처에 있는 흔하디 흔한 오래된 연와조 주택과 뭐가 다른지 알기 어려워요. 그러나 자세히 보면 상당히 이상한 부분을 찾을 수 있어요. 사진 가운데를 보면 계단이 하나 있어요. 저런 식으로 가운데에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설치해놓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이런 가옥은 1층과 윗층을 분리하기 위해서 건물 외부에 계단을 설치할 경우, 대체로 건물 측면에 계단을 배치해요. 건물 한쪽 측면에 계단을 배치해서 1층과 윗층을 완전히 분리시켜버려요. 그리고 주인집은 한 층을 사용하고 다른 층에 세입자를 들여놓아서 두 공간이 완전히 분리되게 하는 편이에요. 이렇게 건물 정중앙에 계단을 두지 않는 이유는 건물 내부 각 공간과 건물 입구의 동선이 공통적으로 최단거리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에요. 입구의 가장 효율적인 배치이기 때문이에요.


집 정중앙에 계단을 배치하는 경우는 여러 명이 계단을 공용으로 사용해야 하는 경우에요. 다세대 주택에서 계단을 보통 가운데에 배치해요. 건물 외부에 있는 계단이 가운데에 있다는 것은 양 측면 모두 다른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해요.


벌집촌 벌집 중 가장 대표적이고 인상적이었던 사진 속 건물은 바로 이런 건물이었어요. 건물 외부에 계단이 쓸 데 없이 많다든가, 건물 외부 정중앙에 계단이 만들어져 있는 건물이었어요. 이 건물을 보자 여기가 벌집 밀집지역인 서울 구로구 남구로역 가리봉동 벌집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남구로역 우범지역


구로구 우범지역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연변거리 입구에 서 있는 가리봉 역사와 특징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어요.


- 마을 이름은 작은 봉우리들이 이어져 있다고 해서 붙여진 것과 가리(골짜기)에서 유래했다는 설, 낟가리를 쌓은 모습의 봉우리라는 설도 있다.


- 구로공단 이전부터 형성되었던 농경 마을 (대촌) - 북동쪽 언덕을 기반의 대촌, 꼴말, 석비탱이 드의 오래된 마을 지명들이 남아 있다.


- 1970~80년대 구로동단으로 인한 젊은 근로자 유입.


- 1990년대 경공업에서 중공업단지 변경으로 인한 공장과 근로자 이주.


- 1988년 올림픽 계기로 방문했던 중국 동포들이 1992년 한-중수교 이후 대거 유입.


- 2000년대 IT첨단 산업단지 변경으로 인해 새로운 젊은 근로자 유입.


- 자연 부락의 골목 형태를 유지하고 있음.


- 70~80년대 지어진 다양한 형태의 건축물들과 독특한 난간문양 장식은 과거로 여행하는 듯한 정취가 남아 있음.


- 노동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벌집(쪽방)이라는 독특한 밀집주거형태로 남아 있음.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조선족 밀집지역 쪽방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중국인 밀집지역 쪽방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은 1960년대 이전까지는 서울 중심가인 종로와 멀리 떨어져 있는 한적한 농촌 지역이었어요. 또한 서울 중심가 재개발로 인해 도심 지역에서 이주해야 했던 이주민들이 형성한 난민촌이 있었던 동네였어요.


수출공업단지육성위원회가 1964년에 설립되었어요. 수출 공업단지 육성 위원회는 구로구에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를 조성하기로 결정했어요. 수출 공업단지 조성 계획이 수립됨에 따라 1964년 12월부터 1966년 말까지 구로동 제1공업단지 조성공사가 마무리되었고, 1967년부터 1968년까지 1단지 서쪽에 제2단지, 1970년부터 1973년까지 제2단지와 인접한 서쪽에 제3단지가 건설되었어요.


원래 구로공단 조성 자금은 재일교포의 투자를 통해 조달할 계획이었어요. 그러나 제1단지 조성 과정부터 재일교포의 투자는 초기 예상처럼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그 결과, 정부는 제2단지 조성부터 대기업의 유치를 통해 단지 일부 빈자리를 메꿨어요.


구로공단은 준공 직후부터 입주기업 생산제품의 내수 판매가 허용되기도 했어요. 구로공단 조성 목적이 원래 수출을 위한 공업단지를 조성하는 것이었지만 이 원칙이 완벽히 엄격하게 적용되지는 않았어요. 수출의무 규제는 1970년대 말부터 완화되었어요. 이와 동시에 소규모 도시형 내수기업들의 구로공단 입주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어요. 이로 인해 구로공단은 수출지향 공업화라는 국가적 정책 목표로 조성된 공업단지였지만 서울 및 수도권 지역의 산업적 수요에 대응하며 성격이 변하게 되었어요.


구로공단이 있는 구로역은 경인선과 경부선의 분기 지점이에요. 구로공단이 성장하면서 공단에 고용된 노동력의 주거 지역도 확대되었어요. 이때 구로공단 노동자들에게 저렴한 주거를 제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벌집'이에요. 한 건물 내부 공간을 아주 좁게 나눠서 저렴한 월세를 받고 노동자들에게 거주할 수 있게 해준 것이었어요.


이 점이 상당히 중요해요. 벌집과 쪽방은 생성 원인 자체가 다르거든요. 서울 5대 쪽방촌의 경우, 서울 도심권 사창가 매춘업 종사자들이 정부 정책에 의해 쫓겨나면서 발생한 빈 건물들이 저렴한 도심 숙박시설로 용도가 변하면서 서울 사회 최하층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하며 형성되었어요. 사창가와 사창가 주변 빈민가 일대에 최하류 계층 사람들이 거주하는 쪽방촌으로 성격이 바뀐 경우에요.


그렇지만 벌집촌은 애시당초 공단 노동자들의 저렴한 주거 제공을 위해 형성된 곳이에요. 조성 원인 자체에 정부의 의도가 들어있어요. 정부가 직접 벌집을 지어 벌집촌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정부가 구로구, 금천구 일대에 벌집촌이 조성되도록 의도적으로 조장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서울 5대 쪽방촌과 서울 남서부 벌집촌은 발생 배경과 성격에서 상이한 모습을 보여요. 서울 5대 쪽방촌은 정부가 없애려고 노력했지만 못 없앤 지역이고, 서울 남서부 벌집촌은 정부가 형성되도록 조장한 지역이거든요.


서울 불법 체류 외국인 노동자 밀집지역


서울 불체자 다수 밀집지역


서울 외노자 다수 밀집지역


구로 일대에 공단이 건설되면서 노동력이 밀집했고, 산업화를 동반한 서울의 도시화로 인해 서울은 이 지역에 행정구역을 신설하게 되었어요. 1980년에는 영등포구에서 구로 지역이 분리되어서 구로구가 신설되었어요. 이 당시 구로구는 구로동, 가리봉동, 시흥동, 독산동, 고척동, 개봉동, 오류동, 궁동, 온수동, 천왕동, 항동, 신도림동으로 구성되어 있었어요.


1995년에는 구로구에서 시흥동, 가산동, 독산동이 분리되어 금천구가 신설되었어요.


공단 제1단지는 구로구가 신설될 때 구로구에 편입되었고, 이름이 구로디지털단지로 바뀌었어요. 공단 제2단지와 제3단지는 금천구가 신설될 때 구로구에서 금천구로 편입되었어요. 공단 제2단지와 제3단지는 이름이 가산디지털단지로 바뀌었어요.


서울 구로공단


서울 구로공단 벌집촌


서울 슬럼가 가리봉동 벌집촌


한편, 중국 조선족 사회는 1970년대 말부터 계층 분화가 급격히 진행되었어요. 문화대혁명 이후 덩샤오핑이 집권하면서 중국은 탈사회주의로 전환해가기 시작했어요.


여기에서 정확히는 '탈사회주의'라는 표현보다는 '반동사회주의'가 더 맞는 표현이에요. 사회주의는 기본적으로 단선 진화주의 형태거든요. 모든 단계를 다 거쳐야 사회주의 지상낙원을 달성할 수 있다고 봐요. 이 말은 충분한 산업화와 물적 토대 없이는 사회주의 지상낙원을 절대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이에요. 산업화 사회까지 도달하는 경로는 여러가지 있어요. 하지만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조건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달한 산업 사회여야 해요.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달한 산업사회에 이르지 못한다면 사회주의, 공산주의 실현은 불가능해요. 왜냐하면 자본주의와 공업 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모순이 극대화되어 자본주의가 스스로 붕괴할 때 도래하는 것이 바로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거든요.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능력에 따른 기여, 필요에 따른 분배'가 이루어져야 해요. 능력에 따른 기여와 필요에 따른 분배가 이루어지려면 생산물이 거의 무한대로 공급되어야 해요. 마치 대기 속 산소처럼요. 지구상 어디에나 산소가 충분히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만 숨을 들이마셔요. 그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산소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산소를 더 마시려고 미친듯이 숨을 거칠고 빠르게 마구 들이마시지 않아요. 이 정도 수준까지 다다라야 공산주의, 사회주의가 실현될 수 있어요. 만약 이 수준까지 다다를 정도로 모든 산업이 고도로 기계화되고 생산물이 저절로 무한대로 공급되는 수준으로 초과잉생산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절대 달성될 수 없어요. 억지로 사회주의, 공산주의 해봐야 결국 붕괴되고 원래 자리로 회귀할 뿐이죠.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 정책은 당시 중국이 아직 사회주의 단게에 도달할 만큼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할 물적 토대도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잠시 뒤로 물러난 것이라 봐야 해요. 사회주의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몇 단계 비약을 통한 급진적인 사회주의 실현이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현재 수준에 맞게 일단 뒤로 물러섰다고 봐야 해요.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고 표현하면 정확해요.


서울 중국인 불체자 거주지역


서울 구로구 벌집촌


서울 가리봉동 벌집촌


1970년대 말부터 조선족 사회는 계층 분화가 급격히 일어났어요. 사회경제적으로 상층부에 진입한 조선족은 중국 주류 사회 구성원이 되었어요. 그러나 상층부에 진입하지 못한 많은 조선족들은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찾아야만 했어요.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조선족들이 서울을 방문한 후, 1990년대 들어 한중 수교가 맺어졌어요. 이때부터 조선족의 국내 유입이 본격화되었어요. 한국에서는 노동운동 확산, 3D업종 기피현상, 청소년 인구 감소 및 진학률 상승, 농촌으로부터의 인력 수급 한계에 생산직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으로 인해 저임금 생산직 노동자 수요가 급증했어요. 이와 같은 상황은 한국 경제에서 노동집약적 경공업 쇠퇴, 저개발국으로의 생산 기지 이전 등을 야기했어요.


한국은 저임금 생산직 노동자 수요 급증과 가격 경쟁력 하락 문제에 대해 외국인 노동자 수입으로 대처했어요. 이때 제일 선호되었던 사람들이 바로 중국 조선족이었어요. 언어가 같고 '같은 한민족'이라는 민족 정서가 있고, 문화도 매우 유사했기 때문이었어요.


1990년대 중국에서는 개혁개방 이후 일자리를 필요로 하는 연변 조선족의 이동성이 증대되었어요. 한국에서의 저임금 노동자 수요 폭증과 중국에서의 연변 조선족의 구직 이동 증대가 맞물리자 조선족이 엄청나게 많이 몰려오기 시작했어요.


1990년대만 해도 조선족에 대한 인식은 꽤 괜찮았어요. 조선족에 대한 인식이 나쁘다기 보다는 중국이 대체 얼마나 못 사는 나라냐는 인식이 훨씬 압도적으로 강했어요. 한국 사회에서는 절대 막노동할 상상조차 못하는 교사, 대학 이상 졸업 고학력자 같은 조선족들이 한국 와서 건설 현장 노가다 인부 및 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중국에서 일할 때랑 비교할 수 없이 큰 돈을 번다고 방송에 나오곤 했거든요.


서울 중국인 밀집구역


구로구 중국인 밀집구역


가리봉동 중국인 밀집구역


그러나 2010년대 들어서 조선족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은 나날이 최악을 갱신하고 있어요. 여기가 밑바닥인 줄 알면 지하실이 있고, 지하실이 끝인 줄 알면 하수구가 있고, 하수구가 끝인 줄 알면 싱크홀이 있는 식으로 더 나빠질 것도 없을 것 같은데도 더 나빠지고 있어요.


가장 큰 이유는 2가지에요.


첫 번째는 보이스피싱 사기에 가담하는 조선족, 중국인들이 증가하면서 이들의 문제가 먼 동네 남 일이 아니라 당장 자신의 일이 되었어요. 불법체류자, 흉악 범죄까지는 음침하고 음울하고 암울한 어느 뒷동네 이야기라 넘어갈 수도 있어요. 하지만 당장 자기 자신에게 걸려오는 조선족, 중국인들의 보이스피싱 사기 전화는 당장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절대 그렇지 않아요. 자신과는 상관없는 '특정 지역 특정인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게 되어버렸어요.


두 번째로 1990년대 들어온 조선족들과 달리 현재 들어오는 조선족들에게서 한국인들이 '같은 한민족'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에요. 한국어도 잘 하지 못하고 대부분 일상에서 중국어를 사용하며 자기 유리한 상황에 따라 자기는 한국인, 자기는 중국인 이러고 있어요. 한국어 조금 할 줄 아는 중국인과 조선족의 차이점이 없어져버렸어요. 말하는 것만 들어보면 외국인으로써 표준 한국어를 제대로 배운 중국인들이 특유의 억양 팍팍 써가고 한국 사회에서 안 쓰는 표현 막 써가며 말하는 조선족보다 오히려 더 한국인 같아요.


여기에 또한 무시 할 수 없는 이유가 두 가지 더 있어요.


첫 번째는 바로 일자리 경쟁이에요. 과거에는 중국인, 조선족 노동자들이 한국 사회에서 최하류층이 담당하는 일자리만 잠식했기 때문에 서로 일자리 경쟁을 벌여야 하는 일이 거의 없었어요. 그러나 중국인, 조선족 노동자 및 그들의 자녀들이 한국에 체류하는 기간이 길어지며 점점 더 위쪽 계층이 담당하는 일자리까지 잠식해가고 있어요. 여기에 청년들은 당장 아르바이트 자리에서 이들과 경쟁을 하고 있어요.


두 번째는 대학교가 비자 장사, 등록금 장사한다고 무차별, 무분별하게 중국인 유학생을 대거 끌고왔다는 점이에요. 이로 인해 대학교 캠퍼스 안에서 한국인 학생과 중국인 학생의 갈등이 매우 심각해졌어요. 중국인 학생들끼리 몰려다니며 컴퓨터에 이상한 것 깔아놓고 바이러스 걸리게 하는 것은 애교 수준이고, 공공도덕 안 지키는 건 일상이고, 수업 분위기 흐트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재수없으면 조별과제에 같은 조 되어서 한국인 학생 성적조차 망쳐놔요. 학교 주변 아르바이트는 이들과 임금 덤핑 경쟁을 벌여야 하구요.


서울 가리봉동 벌집


서울 구로구 벌집


서울 슬럼가


가리봉동 벌집촌은 1990년대 중반부터 중국인들이 몰려 살던 곳이에요. 한국으로 중국인 노동자가 대거 유입되기 시작한 1990년대에 이들이 처음 무리지어 정착하기 시작한 곳이거든요.


2000년대 들어서 가리봉동 중국인 노동자들이 대림2동으로 이주하기 시작했어요. 첫 번째 원인은 서울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중국인 노동자들이 증가하면서 이들이 열악한 가리봉동 벌집촌보다 보다 인간적인 거주 환경을 찾기 시작했다는 점이었어요. 대중교통 이용 및 타지역으로의 이동이 편리한 곳을 찾으면서 기존에 형성된 가리봉동 중국인 네트워크와 멀지 않은 곳을 찾다보니 대안으로 등장한 곳이 바로 대림2동이었어요.


여기에 2000년대 초반부터 가리봉동에 재개발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어요. 가리봉동 낙후지역인 벌집촌 밀집지역이 재개발될 거라는 각종 이야기와 계획이 등장하자 이쪽에 거주하던 중국인 노동자들은 다른 거주지를 찾아 이동해야 했어요.


그렇지만 가리봉동 재개발은 아직까지도 답보 상태에요. 가리봉동 벌집촌 자료를 찾아보면 2010년에 가리봉동 벌집촌이 재개발될 거라는 말이 많아요.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낙후된 벌집촌 밀집지역이에요.


서울 불법 체류자 밀집지역


가리봉동


가리봉동 거주환경


가리봉동에 몰려 살던 중국인들이 영등포구 대림2동, 광진구 자양4동 등으로 이동하면서 한국 체류 중국인 사회에 계층 분화에 따른 거주지 변화도 발생했어요. 이들 무리 중에서 하류층, 뜨내기 중국인들은 가리봉동 벌집촌에 거주하고 있어요. 어느 정도 돈을 모은 중국인들은 대림2동, 자양4동 등에서 거주하고 있구요. 가리봉동 벌집촌은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슬럼화된 곳이에요.


서울 여행


한국 여행


서울 벌집촌


서울 5대 쪽방촌과 서울 남서부 벌집촌을 같이 묶어서 보지 않는 이유는 발생 원인부터 현재 상황까지 너무 상이하기 때문이에요. 서울 5대 쪽방촌 거주자들은 한국인이에요. 그러나 서울 남서부 벌집촌 거주자들은 중국인이에요.


이러다보니 서울 5대 쪽방촌은 주로 한국인 대상 사회복지 쪽에서 잘 다루고, 서울 남서부 벌집촌은 외국인 노동자 문제 중 특히 중국인 노동자, 그리고 조선족 문제에서 잘 다루는 편이에요. 서울 5대 쪽방촌과 서울 남서부 벌집촌은 거주 공간이 좁다는 점 하나 빼면 너무나 다르거든요. 한 데 묶어서 보면 오히려 이도 저도 아니고 뒤죽박죽이 되어버리기 마련이에요.


서울 구로구 교육환경


서울 구로구 거주환경


다시 가리봉시장으로 돌아왔어요. 처음 가리봉시장 영상을 찍을 때 한 번 둘러봤고, 다시 가리봉동 벌집촌 영상 촬영 경로를 봐가면서 사진을 찍으며 한 번 또 둘러봤어요. 다시 가리봉시장과 이어지는 급경사 비탈길부터 시작해서 가리봉동 벌집촌 쪽방촌 영상을 찍었어요.



영상까지 다 찍자 새벽 4시 50분이 되었어요. 중국인들이 남구로역 인력시장에 가기 위해 우루루 쏟아져나오고 있었어요.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연변거리


연변거리


서울 남구로역 연변거리 중국인 노동자 밀집지역


연변거리 및 남구로역 2번 출구와 3번 출구 일대에는 남구로역 인력시장이 펼쳐져 있었어요. 중국인 노동자가 바글거렸고, 이들을 태워가기 위해 온 승합차도 많았어요. 거리가 매우 북적였어요.


남구로역 중국인 인력시장


남구로역 중국인 인력시장까지 보고 이날 일정을 마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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