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나의 정말 정신나간 이야기 (2006)

나의 정말 정신나간 이야기 - 06 충청북도 단양

좀좀이 2011. 11. 16.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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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커덩 덜커덩


풍기에서 청량리로 가는 막차가 움직였다.  풍기에 대한 아쉬움과 안동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뒤로 하고, 일단은 북서쪽을 향해 몸을 맡겼다.


"날씨 좋겠지?"

"좋을 거야."


이 짧은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기차 창문에 빗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빗방울은 점점 세게 창문을 때리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할까?  표는 단양까지만 끊었다.  평일 막차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타지는 않을 것이다.  이대로 쪽팔림을 무릅쓰고 청량리에 갈까?  풍기역에서 청량리행으로 표를 끊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풍기만 해도 날씨가 다시 개고 있었지만, 딱 기차에 타자마자 비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할까?  우리가 단양까지만 표를 끊었기 때문에 단양 이후부터 우리 좌석은 공석으로 체크가 될 것이다.  재수가 지지리 없다면 서서 청량리까지 가야할 것이다.  그리고 청량리에서 추가요금을 물고, 적당히 변명을 둘러대느라 망신을 당해야할 것이었다.


"어떵 하젠?"(어떻게 할래?)

"그냥 단양 가게."(그냥 단양 가자.)


H군이 비가 내리는 것이 걱정스럽다는 말투로 물어보았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표는 단양으로 끊었다.  창밖의 비는 언제 그칠지 모르지만, 이것은 거의 50%의 찍기였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아쉬움을 남기는 것보다는 망하더라도 끝까지 가 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내가 언제 단양을 다시 오게 될까?  그것도 이렇게 한밤중에...기약이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최소 3년간 여행으로 단양을 올 일이 없을지도 몰랐다.  원래 예정에도, 그리고 향후 여행구상에도 단양은 없었다.  충청북도에 갈 일이야 적당히 구실을 만들면 있지만, 정말 단양에 갈 일은 없었다.  그래.  단양에 가자.  모 아니면 도다.  설마 비가 폭우로 돌변하겠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비가 기적같이 그쳤다.


"비 그쳐싱게." (비 그쳤다.)

"기?"(그래?)


이제 내리는 쪽으로 방향이 잡혔다.  기차에서 방송이 나왔다.  "이번 역은 단양역입니다."  선택의 시간이 도래했다.  내릴까?  말까?  이미 비는 그쳤다.


"내리자."


나의 이 판단이 엄청난 실수가 될 줄 누가 알았으랴...얌전히 청량리로 갔다면 이 이야기도 7화에서 막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 엄청난 판단 실수로 인해 이 이야기는 8화로 끝을 내리게 되었으며, 고생은 고생대로 진탕 하게 되었다.  역시나 하늘은 공평했다.  하루 해가 떠 있는 시간은 나날이 변하지만, 1년을 보면 12시간인 것처럼, 우리의 운좋음은 밤이 되면서 운나쁨으로 바뀌고 있었다.


드디어 단양역에 도착했다.  우리는 조용히 내렸다.  밖은 방금 전까지 내린 비로 젖어 있었지만, 비는 더 이상 내리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역에서 나오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로 서울에서 볼 수 없는 환한 달이었다!  이 얼마만에 보는 환한 달이란 말인가.  내가 2월 중순에 서울에 올라왔으니 거진 4개월만에 보는 환한 달이었다.  구름은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고, 달은 구름 사이로 우리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예감이 좋았다.  느낌이 좋았다.  달이 떴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날씨가 개어서 별을 볼 수도 있을 거야!  H군이 달을 찍는 동안, 기념으로 단양역을 한 컷 찍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풍기역 역무원 아저씨의 말대로 주위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이런 장면은 청주 공항 이후 처음이었다.  정말로 농담을 섞지 않고,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역사, 택시, 산, 농경지 뿐이었다!  시계를 보았다.  앞으로 거진 6시간을 버텨야만 했다.  단양-청량리행 기차의 첫차는 새벽 2시 52분 출발이었다.  2시 반까지 역에 돌아온다고 계산하면 대충 6시간 남은 것이었다.  6시간동안 무엇을 하지?  삼각대라도 가져왔다면 셔터스피드를 내 카메라 최고 느린 속도인 30초로 놓고 사진이나 찍으면서 버티겠지만, 삼각대도 없었다.  즉,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낭만에 젖어 집을 나갔던 나의 이성이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이 시험이야!  제일 자신있는 과목 시험이라구!  사전 및 단어장 지참도 가능한 시험인데 나는 지금 필기구도 안 가져왔어!  내일 시험 망치면 앞으로의 시험에 대한 부담이 거의 무한대급으로 커진다!


이런 허허벌판과 산 속에서 6시간을 버텨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기차에서 내린 것이 뼈저리게 후회되었다.  물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비하면 그다지 뼈저릴 것까지도 없었지만 정말 순간 후회가 되었다.  누구를 원망하랴.  청량리로 가는 쪽으로 진지하게 고민하던 H군을 끌고 내린 것은 바로 나였다.  H군이 느긋하게 달을 찍으며 자신의 망원렌즈의 힘을 만끽하고 있는 동안, 내 두뇌는 멍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6시간이면 희망이 있다.  2시간 반 걸어가서 3시간만에 다시 역으로 돌아올 수 있는 곳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표지판마저 나를 좌절로 몰고갔다.  볼 만한 곳은 기본적으로 10km가 넘는 지점이었다.  밤이라서 길을 물어볼 사람조차 없었다.  일단 단양 시내로 들어가볼까?  그런데 방향을 잡는 것도 쉽지 않았다.  어둡고 깜깜하고, 비가 내려서 생긴 연무 때문에 앞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정말 보이는 것이라고는 역사와 역사 앞에 대기중인 택시 몇 대, 그리고 산산산 논논논...이것이 전부였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긍정적으로 생각하자...예전에 시청에서 집까지 자주 걸어오곤 했었잖아.  그때 1시간 정도 걸렸잖아.  그 정도 거리도 잘 걸어다녔잖아.  활주로 한 개도 끝에서 끝까지 걸어봤잖아.  오오~마인드 컨트롤.  오오~마인드 컨트롤.  너는 할 수 있어.  너는 할 수 있어.  오늘 지금부터 6시간동안 걷고, 기차에서 잠깐 눈 좀 붙인 다음, 집에 가서 벼락치기로 날림 공부하고 시험을 칠 수 있어.  오~자기최면.  오~자기최면.  시험 별 것 없을 거야.  사전, 단어장 지침이면 발가락으로 풀어도 될 거야.  집에서 열심히 단어장만 만들어서 시험보러 가면 될 거야.  오오오~내적 평화.  오오오~내적 평화.  나의 다리는 백만불짜리 다리.  나의 다리는 백만불짜리 다리.  피로야 가라.  피로야 가라.


이미 내 마음 안에서는 굿판이 벌어졌다.  이 막막한 풍경을 보자마자, 그리고 표지판을 보고나서 바로 자기최면을 걸기 시작했다.  그러나 돌아온 이성은 어디에서 배워왔는지 전대미문의 끔찍한 기술로 모든 낭만을 물리치고 머리 속에 '시험과 피로'라는 공포를 쌓아가고 있었다.  가뜩이나 1학년 1학기때, 완벽히 시험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던 과목을 학교 과방에서 잠을 자다가 시험시간에 못 들어가서 F를 맞았던 경험이 있었던 나로써, 피로에 쓰러진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제 아무리 잘 걷는다고 해도 6시간을 걸을 생각을 하니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시험공부는 언제 하지?  이 의문이 내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6시간 동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역에 들어가서 의자에 앉아 새벽 2시 반까지 공부를 하는 것도 보통 철면피로는 할 수 없는 짓이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것...그냥 즐겁게 받아들이자.  바로 체념 모드로 돌입했다.  내일 시험이야 사전 가지고 볼 수 있으니까 굳이 단어장 만들 필요도 없을 것이다.  평소 수업때 들었던 내용과 사전만 있다면 대충은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걸어갈 방향을 잡았다.  우리가 걸어갈 방향은 단양 시내를 향한 방향이었다.  과연 얼마나 걸어야 단양 시내에 들어갈 수 있을까?  몰랐다.  나와 H군 가운데 단양에 와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나 뿐이었고, 그나마 대낮에 승용차를 타고 고수동굴에 갔을 뿐이었다.  단양역은 나 역시 처음 와 보는 동네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날씨가 계속 개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만약 정말 즐겁게 놀 수만 있다면 나쁠 것도 없었다.  밤하늘을 채운 별만 볼 수 있어도 이 단양에 내린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었다.  조금 걷자 골목으로 들어가는 갈림길이 나왔고, 그 갈림길을 지나가자 다리가 하나 나왔다.  다리의 길이는 그다지 길지 않았다.  다른 조그만 다리들보다야 당연히 길었지만, 한강에 있는 다리들보다는 짧았다.  길이만 따진다면 건너기 딱 좋은 길이였다.  한강다리처럼 걷다가 걷다가 질릴 정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무슨무슨 천에 있는 다리처럼 걷는 맛을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짧은 거리도 아니었다.  문제는 차가 한 대 지나갈 때마다 다리가 덜덜 흔들렸다는 것이었다.  다리 표면이 젖어서 카메라를 다리 위에 올려놓을 수도 없었을 뿐더러 차가 지나갈 때마다 다리 자체가 흔들려서 사진을 찍기 매우 힘들었다.


멀리 단양 시내로 추정되는 곳이 보였다.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저 불빛과 경치들이 시험 걱정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나의 눈에는 이렇게 보였다.


평소 아무리 걸어도 아프지 않던 다리도 아프고, 차로 인해 다리가 흔들릴 때마다 다리가 파도를 치는 것 같이 느껴졌다.  불빛과 풍경들은 나를 보며 '시험~시험~'하고 외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연무 때문에 추웠다.  피부는 연무로 인해 축축한 습기로 뒤덮였다.  온도도 확 떨어져 버렸고, 간간이 선선한 바람도 불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피로도가 쭉쭉 오르는 것 같았다.  추위는 피로도를 가중시켰다.  진짜 고난의 행군이었다.


다리를 건너 불빛 속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불빛이 단양 시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확실히 단양 시내는 아닌 것 같았다.  불빛만 있을 뿐, 아무 것도 없었다.  식당 몇 군데와 일반 가정집 몇 채가 전부였다.  지방적인 특색?  그런 것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었다.  그냥 아무 것도 없는 곳에 가로등이랑 현대식 가옥 몇 채 세운 동네였다.  간간이 호텔이 보였다.


꽤 걸은 것 같았지만, H군에게 시간을 물어보니 고작 1시간 정도 걸었다.  정말 피로도가 엄청나게 쌓이는 길이었다.  러닝머신을 한 시간 정도 탄 기분이랄까?  풍경은 계속 변하고 있었지만, 하나도 변하지 않고 있었다.  계속 앞으로 걸어갔기 때문에 풍경은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걸어도 똑같은 모습이었다.  강이 있고, 강 옆에는 가로등과 식당, 민가가 있었고, 간간이 호텔들이 있었다.  이 풍경의 연속이었다.  내가 지금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인지,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지 도통 구분이 되지 않았다.  걷는 맛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었다.


"돌아가자."

"벌써?"

"차라리 아까 그 골목으로 들어가자.  이게 뭐냐?  계속 같은 풍경만 반복되잖아."


우리는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시 돌아가려고 하니 정말 끔찍했다.  러닝머신을 한 시간 동안 타서 질렸는데, 앞으로 다시 한 시간 동안 더 타야할 때의 기분이랄까?  풍경이라도 바뀌면 풍경을 보는 맛에 기분좋게 걸었겠지만, 풍경이 전혀 바뀌지 않자 시험 걱정만 더더욱 많이 하게 되었다.  게다가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쓰고 길을 걷다가 강냉이를 다 먹기 위해 잠깐 비를 피할만한 구석으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강냉이를 먹고, H군에게 우산을 빌려서 우리가 아까 건넜던 다리를 한 장 찍었다.  우산이 오늘 정말 일등공신이었다.  이 여행에서 H군의 거대한 우산이 없었다면 대부분의 사진을 날려야만 했을 것이다.

연무가 소프트 필터 효과를 내고, 주변의 풍경을 싹 지워버렸다.  어두운 밤에도 남한강에 비친 다리의 모습이 찍히는 것으로 보아 현대 과학기술은 정말 위대하다.


다리 중간쯤 가자 비가 다시 그쳤다.  다시 열심히 걸어서 갈림길이 있는 곳까지 도착했다.  갈림길에 들어서자마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볼 수 있었다.  갈림길에 들어가자마자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갈림길 입구에는 폐가가 한 채 있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H군으로부터 우산을 빌릴 수 없었다.  H군이 전화를 받는 동안, 나는 최대한 흔들리지 않도록 노력하며 폐가를 찍었다.  그런데 결과물은 참담하다못해 으스스하게 나와버리고 말았다.  상당히 많이 흔들린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화면 전체가 시뻘겋게 나온 것이었다.  거의 '전설의 고향', '그것이 알고 싶다-여름 납량특집편-흉가', 'PD수첩-흉가의 기운, 그 진실은?'에나 나올 법한 사진이 되어버렸다.  그 사진을 보는 것 자체가 공포였다.  결국 그 폐가를 찍은 사진을 모두 그 자리에서 삭제해 버렸다.  그리고 길이 있길래 따라 올라가 보았다.  전화를 다 받은 H군은 나를 쫓아오며 나에게 내가 유독 이상한 곳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같이 가자고 내 팔을 잡았다.  이 순간, 내 팔을 잡는 것이 내 여자친구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현실은 H군이었다.


길이 조금만 이어지다가 끊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길은 끝을 보여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로등조차 없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자 비가 그쳤다.  우산을 접고 계속 들어가다보니 마을이 나왔다.  우리가 그렇게 보고 싶어했던 지역 냄새가 물씬 풍기는 시골 마을이었다.  우리는 만세를 부르며 마을로 들어갔다.


"멍멍멍"


갑자기 똥개 한 마리가 우리를 보며 미친듯이 짖어대기 시작했다.  어두워서 그 개가 묶여있는지, 묶여있지 않은지 확인이 되지 않았다.  H군이 플래시를 터트려 사진을 찍어보았다.  개는 묶여 있었다.


"이 망할 눔의 개새끼가..."


이 개를 지나가야 마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개는 쉬지 않고 짖어대었다.  어둠이 깔린 시골 마을의 정적은 이 개 한마리로 시끄러운 밤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일단 개를 지나가기 위해 사진기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플래시 연사 공격을 사용했다.  개는 겁에 질려 개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개집에서 정신없이 미친듯이 짖어대었다.


"이거 민폐 아니야?"


우리가 듣기에도 정말 참을 수 없는 소음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마을에 들어가지 못하고 나오고 말았다.  너무 어둡고, 개가 계속 짖어대어서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찍는 족족 흔들리고 말았다.


'삼각대...'


마을에서 나와서 다시 걸어가는데, 작은 불빛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반딧불이었다.  고3때 탐라도서관에서 반딧불이를 본 이후로 처음 보는 반딧불이었다.  작은 연두빛 불이 한 두 개 날아다니다가 우리가 다가가면 풀숲으로 숨어버렸다.  H군은 반딧불을 촬영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못 찍었다.  만화의 한 장면 같았다.  비가 막 그친 어두운 밤,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길에서 반딧불이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너무나 가볍게 하늘을 둥둥 떠다니던 불빛들은 풀숲 속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다시 불빛 하나다 가볍게 하늘로 떠올랐다.


'망할 눔의 개새끼...'


진짜 망할 눔의 개새끼였다.  만약 그 개만 없었다면 단양 여행도 나름대로 즐겁게 끝마쳤을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도 나름대로 알차게 보내서 피로도가 덜 쌓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개로 인해 마을에는 들어가보지도 못했고, 우리는 계속 산산산 논논논 풀밭풀밭풀밭만 보아야 했다.

 

마을 입구에서 돌아나오자 아쉬움이 끝없이 밀려왔다.  전형적인 지역의 특색이 물씬 풍기는 마을에 가 보고 싶었다.  게다가 비가 그쳤고, 온다고 해도 많이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던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으로 돌아가다가 길을 건너서 기사식당에 들어가 담배를 한 갑 사고, 마을이 어디에 있는지 여쭈어보았다.  그러자 우리가 왔던 길에서 반대쪽으로 쭉 가서 역을 넘어가면 한 곳인가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셨다.  역으로 돌아와서 나는 밖에서 담배를 한 대 태우고, H군은 화장실에 갔다.  많이 피곤했다.  그냥 피곤했다.  마을에 들어가든, 역에서 그냥 죽치고 앉아서 쉬든 좋으니 하나가 빨리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H군이 화장실에서 나오자 아까 걸었던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멀리 거대한 도로가 얼핏 보였고, 도로 좌우에는 풀숲 아니면 논이었다.  길은 계속 어둠을 향해 가고 있었다.  우리가 걷는 도로는 산인지 언덕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시커먼 것 옆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걸어도 풀숲풀숲풀숲 아니면 논논논이었다.  게다가 아까는 그나마 인도 비스무리한 것이라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사람이 걸어갈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대형 트럭과 버스가 미친듯이 달릴 때마다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만 했다.

 

풍경만 놓고 본다면 아까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낮이라면 주위 풍경이 보이기 때문에 논을 보고, 또는 풀숲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두컴컴한 밤에 그런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었다.  게다가 조금 걸을만하면 차가 미친듯이 달려 옆을 지나갔다.  아주 멀리에서 '차가 온다'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서 몇 초 후에 그 차가 우리 옆을 '쌩~'소리와 함께 지나갔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차가 살짝만 삐끗해도 우리를 치어버릴 수 있었기 때문에 오싹했다.

 

투둑 투둑


빗방울이 떨어졌다.  이번은 시작부터 아까와 달랐다.  시작부터 아주 굵고 투실투실한 놈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불길했다.  우산을 펼치고 천천히 걸어가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 비가 잠깐 오고 그칠 비인지, 계속 내릴 비인지 일단 알아볼 생각이었다.

 

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

 

순식간에 비는 폭우로 바뀌었다.  처음부터 아주 굵고 투실투실한 놈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고 있었다.  생각이고 말고 없었다.  일단 카메라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한 손으로 카메라를 가슴팍에 대고, 역으로 돌아갔다.  비는 점점 더 많이 내리고 있었다.  이런 비라면 언제 그칠지 예측을 할 수 없었다.  제발 소나기이기를 바랬다.  이렇게 여행을 마무리짓고 싶지는 않았다.  비록 피곤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끝내는 것은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다.


역에 들어왔을 때, 바지는 홀라당 다 젖어 있었고, 위에 걸친 남방도 꽤 젖어 있었다.  정말 다행인 것은 카메라 가방은 젖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까 왔을 때만 해도 수분을 거의 잃었던 단양역 앞은 거의 홍수 분위기였다.  사진을 찍는데, 자꾸 흔들렸다.  그러다 겨우 한 컷 성공했다.  화면의 하얀 것들이 전부 빗방울이다.  셔터스피드를 올릴 수 있는 대로 올리고 플래시를 터트린 사진이다보니 어두워서 멀리 떨어지는 비가 찍히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비라는 것이 나타난다.  문제는 바로 다음이었다.  액정에 뭔가 이상한 상이 보였다.

 

"아악!"

 

내 디카 렌즈에 빗물이 튄 것이었다.  컨버터나 필터를 끼우지 않은 상태여서 카메라 본체 렌즈에 빗물이 튀어버렸다.  급히 안경 닦는 천으로 물기를 흡수시켰다.  나중에 돈이 조금 모이면 카메라 본체 렌즈를 닦던지 해야겠다.  이거 닦는 것만으로도 분명히 돈을 달라고 할 텐데...

 

자리에 앉자마자 피로가 몰려왔다.  밖에서는 비 내리는 소리가 신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것이 깊이 잠들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는 새벽 1시였다.  H군은 축구를 보며 잠을 자지 않고 있었으며, 내가 잠들어있는 동안, 한 택시기사가 우리가 새벽 2시 52분 첫차를 타고 청량리로 갈 것이라고 하자 상당히 어이없어 했다고 알려주었다.  담배를 한 대 태우러 밖에 나갔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안구건조증으로 인해 눈은 완벽히 말라 있었다.  인공눈물을 가지고 올 걸...오늘 벌써 두 번째였다.  비는 아직도 신나게 오고 있었다.  담배를 한 대 태우고, 짐을 정리한 후, TV를 보았다.  축구 평가전 재방송을 해 주고 있었다.  교재를 펼쳤다.  그러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 생각없이 축구만 보았다.  그 어떤 생각도 하기 싫었다.  비가 원망스럽다던지, 단양에서 내린 것이 잘못이라던지...그런 생각은 없었다.  그저 내가 생각해도 참 어이없는 여행이었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냥 멍하니 앉아있고 싶었다.

 

단양역도 풍기역과 마찬가지로 기차가 들어오자 방송과 함께 역에 불이 켜졌다.  드디어 서울로 돌아가는구나!  이번 여행 참 재미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전혀 평범하지가 않았다.  시험 전날 여행을 떠나는 것도 미친 짓이지만, 여행 내용 자체만으로도 미친 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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