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로 돌아왔어요. 정말 피곤한 하루였어요.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어요. 지쳤어요.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었어요. 저도 친구도 그렇게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어요. TV를 켰어요. 일본 TV 방송이 나왔어요.
나는 오늘 무엇을 했는가?
정말 많은 것을 했어. 그래. 정말 많은 계단을 오르내렸어. 너무 많이 계단을 올라가고 내려갔어. 이제 계단이라면 토 나올 지경이야. 계단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해질 지경이라구. 더 이상 계단 오르내리고 싶지 않아. 그냥 여기에서 이렇게 침대 위에 걸터 앉아 계속 쉬고 싶어. 신발 벗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발 얼얼한 것이 가라앉고 있어. 천국이 별 거야? 그냥 이렇게 앉아서 쉬는 것이 천국이지.
의욕 상실. 완전 상실. 남아 있는 체력 0.
TV를 멍하니 바라보았어요. 그렇게 가만히 있었어요. 손가락 하나 까딱이기 싫었어요. 완전히 지쳐 나가떨어져버렸어요. 이제 밤 10시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이 모양이었어요. 충분히 더 나가서 돌아다닐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그러나 체력이 아예 안 따라주었어요. 일어날 수 없었어요. 하루 종일 무슨 힘이 나서 그렇게 열심히 돌아다녔는지 스스로 대견할 정도였어요.
무슨 힘이기는 무슨 힘이야? 술기운으로 돌아다녔지.
2019년 8월 29일. 하루 종일 돌아다닌 것은 술기운 때문이었어요. 체력 고갈 직전에 에비스 맥주 기념관 가서 에비스 맥주를 마신 힘으로 돌아다녔어요. 마치 농촌에서 농부들이 새참으로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키고 술기운으로 일하는 것처럼요. 술기운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지쳐 나가떨어져버렸을 거에요. 이토야 구경을 마치고 나서 정말 지쳐서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아버렸어요. 정신력으로 혼을 실어서 긴자 우체국까지 간 후, 모든 것이 다 하얗게 불타 사라져버렸어요. 툴리스 커피에서 잠깐 앉아서 체력 회복한 것으로 긴자를 조금 돌아다니고 아사쿠사까지 왔어요. 아사쿠사 와서는 카미야바 가서 와인 한 잔 마시고 그 술기운으로 숙소까지 걸어왔구요.
'잠깐...나 오늘 뭐 먹었지?'
술기운으로 버틴 하루. 그런데 나 진짜 오늘 뭐 먹었지?
가만히 기억을 되살려봤어요. 하루 종일 열심히 걸어다니면서 먹은 것이 뭐 있었는지 계속 떠올려봤어요.
"진짜 술만 마셨네?"
에비스 맥주 기념관 입장 직전에 먹은 토스트. 그리고 에비스 맥주 기념관 투어에서 안주로 받아먹은 콩. 에비스 맥주 투어 이후 나와서 먹은 짬뽕 우동 한 그릇. 이게 전부였어요. 식사라고 할 만한 것은 오직 하나 뿐이었어요. 짬뽕 우동 한 그릇이요. 아침 일찍부터 밤 늦은 시각까지 제대로 밥이라고 먹은 게 짬뽕 우동 한 그릇 밖에 없었어요. 그렇다고 중간에 간식을 사먹은 것도 아니었어요. 고체로 된 것이라고는 딱 토스트, 콩알, 짬뽕 우동 뿐이었어요.
'진짜 힘들 만 했구나.'
간식도 많이 안 사먹은 날이었어요. 심지어 그렇게 좋아하는 음료수도 유독 별로 안 마신 날이었어요. 단순히 계단을 많이 오르내려서 힘든 것이 아니었어요. 밥도 음료수도 간식도 별로 안 먹고 돌아다니기만 열심히 많이 돌아다녔어요. 덥고 찐득거리는 날씨 속에서요. 땀은 계속 흘리는데 정작 수분 보충조차 충분히 하지 않았어요. 술을 마셨기 때문에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이 음료수를 마셔줘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어요. 게다가 백화점에서 구입한 캔맥주를 전부 가방에 넣고 이토야 계단까지 다 올라갔어요. 그러니 다른 날보다 더 힘들다고 느낄 수 밖에 없었어요.
"우리 나가자."
"왜?"
"저녁 먹어야지."
"저녁?"
"우리 저녁 안 먹었잖아!"
친구는 저녁을 안 먹었다는 것조차 망각하고 있었어요. 그만큼 친구도 엄청나게 힘들어한 하루였어요. 솔직히 만사 귀찮아서 드러누워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어요. 그렇지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야 했어요. 만약 오늘 저녁을 안 먹으면 다음날 더 고생할 거였어요. 조금이라도 더 피로를 잘 풀고 다음날을 쌩쌩하게 보내기 위해서는 무조건 저녁을 먹어야 했어요.
"지금 식당 문 연 곳 있을 건가?"
"여기에 새벽까지 하는 식당 하나 있어."
"어디?"
"롯지 아카이시. 거기 유명한 식당이래."
"그래? 거기 가보자."
비싸고 말고 없었어요. 한 끼 3000엔짜리 스테이크 썰어먹는 곳이라 해도 갈 생각이었어요. 다행히 여행 경비로 준비해온 돈이 충분히 남아 있었어요. 한 끼 무리해서 먹는 것 정도는 괜찮았어요. 다음날 일정을 봤을 때 돈을 크게 많이 쓸 일은 전혀 없었어요. 편의점 도시락도 맛있기는 했지만 편의점 도시락보다 더 맛있는 식당 밥이라면 이 상황에서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어요.
"조금만 더 쉬다 나가자."
"언제까지? 거기 금방 닫아버리는 거 아니야?"
"아니야. 거기 새벽까지 한대. 10시 되면 나가자."
"그래."
10시에 나가서 식당을 가기로 했어요. 그 전까지 쉬기로 했어요. 친구는 침대에 앉아 쉬었어요. 저는 그 동안 찬물로 샤워를 했어요. 찬물로 샤워하자 몸이 조금 가벼워졌어요. 피로가 조금 줄어들었어요. 온몸이 냉찜질되었거든요. 다시 어느 정도 꽤 걸을 수 있는 체력으로 복구되었어요. 옷을 입고 가방 속에 있는 캔맥주를 캐리어로 옮겨담았어요. 나갈 준비는 금방 끝났어요.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숙소에서 나왔어요.
롯지 아카이시 식당 LODGE AKAISHI 珈琲ロッジ赤石 으로 갔어요.
'이 분위기 뭐지?'
일단 자리를 잡고 앉았어요.
상당히 엔틱한 분위기였어요. 더 놀라운 점은 모든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는 점이었어요. 가끔 드라마나 애니메이션 같은 데에 나오는 1970년대 일본 분위기였어요. 이 분위기 속에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어요. 현대 일본인과 과거 일본의 만남이었어요. 얼핏 보면 드라마 세트장 같아보였어요. 그러나 그게 아니라 진짜였어요. 이것은 진짜였어요. 진짜로 너무나 자연스러운 엔틱 분위기였어요.
'여기 진짜 뭐지?'
카페 같기도 하고 식당 같기도 한 묘한 분위기. 식사를 시켜서 먹는 사람도 있고 커피를 주문해 마시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 이전에 분위기가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더 놀라운 점은 여기에서는 마음껏 흡연을 해도 된다는 점이었어요. 실내 흡연 가능한 곳이었어요. 자리마다 재떨이가 비치되어 있었어요.
'여기 진짜 담배 태워도 되나?'
직원이 왔어요. 직원에게 여기에서 담배 태워도 되냐고 물어봤어요. 직원은 담배를 태워도 된다고 했어요. 재떨이를 앞에 놓은 후, 담배를 입에 물었어요. 쭈뼛거리며 담배에 불을 붙였어요. 연기를 빨아들인 후 내뱉었어요.
뭐지? 이 자연스러움은!
하늘로 올라가는 담배 연기. 담배 연기조차 이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있었어요.
"여기 굉장한 곳이잖아!"
메뉴를 봤어요. 메뉴 종류도 여러 가지였어요. 메뉴를 정해 음식을 주문했어요.
"여기 왜 진작 안 왔지?"
"내가 몇 번 말했잖아. 롯지 아카이시 가지 않겠냐구."
"이런 걸 알았으면 확실히 말해줬었어야지!"
도쿄에 온 이후 친구가 롯지 아카이시에 대해 몇 번 말했어요. 그러나 친구는 혼을 담아 말하지 않았어요. 그냥 지나가듯 말했어요. 그래서 계속 그냥 그런 식당도 있나 보다 하며 넘어갔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여기는 그냥 지나칠 식당이 아니었어요. 무조건 꼭 한 번은 가봐야 할 정말 멋진 식당이었어요. 굉장한 곳이었어요. 아사쿠사 강력 추천 명소였어요.
한국에도 엔틱 분위기로 꾸민 카페들이 있어요. 그러나 한결같이 인위적인 느낌이 있어요. 롯지 아카이시에는 그런 인위적 느낌이 전혀 없었어요. 게다가 이런 분위기는 한국에서 아예 찾아볼 수 없는 분위기였어요. 분위기 자체가 경양식 같은 분위기였어요. 서양적인 것이 일본에서 재해석된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엔틱 분위기이면서도 묘하게 일본 분위기가 느껴졌어요. 서양 것 같은데 일본 냄새가 가볍게 살살 올라오는 모습이었어요.
메뉴는 다양했어요. 일본 음식 중 안 먹어본 것들이 여러 가지 있었어요.
창 밖은 조용했어요. 분위기에 녹아들어가고 있었어요.
저와 친구가 주문한 음식이 나왔어요.
저는 나폴리탄을 주문했어요.
나폴리탄 스파게티는 일본 문화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은 꼭 들어봤을 음식이에요. 일본식 스파게티의 대표라고 할 수 있어요.
기원은 미국의 스파게티 통조림이에요. 미국에서 스파게티가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스파게티 통조림이었다고 해요. 이 스파게티 통조림은 묽은 토마토 케첩에 면발이 퉁퉁 불어터진 음식이었대요. 상당수 미국인들이 스파게티를 이 묽은 토마토 케첩에 퉁퉁 불어터진 면발이 들어있는 통조림으로 처음 접했기 때문에 미국인들에게 스파게티란 이런 토마토 케첩 범벅 스파게티라는 인식이 매우 강했대요.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이 미군 지배를 받던 GHQ시절이었어요. 더글라스 맥아더가 일본 항복 이후 요코하마 아츠기 해군 비행장을 통해 일본에 도착해 비행장 근처에 있던 호텔 뉴 그랜드를 본거지로 접수하고 일본 점령 작업에 들어갔을 때였어요. 호텔 뉴 그랜드에 주둔한 미군들이 대충 물에 삶은 파스타를 케첩에 비벼먹고 있는 것을 보다 못한 일본인 주방장이 직접 토마토 소스를 만들고 삶은 면을 올리브 오일에 볶아 양파, 버섯 등을 추가해 스파게티를 만들어줬다고 해요. 이것이 바로 나폴리탄의 기원이라고 해요.
이후 다른 호텔에도 이 스파게티 조리법이 전해졌어요. 일본에서 파스타가 자체 생산되기 시작하자 케첩을 이용해 만드는 나폴리탄 스파게티 조리법이 일반에 소개되었어요. 이때부터 나폴리탄은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중적인 요리가 되었다고 해요.
나폴리탄 스파게티는 일본인들에게 추억의 음식 같은 느낌이 있다고 해요. 사실 한국인들에게도 나폴리탄 스파게티는 일종의 추억의 음식에 해당해요. 급식실에서 가끔 뜬금없이 등장하는 스파게티가 나폴리탄 스파게티거든요. 팅팅 불은 면발에 토마토 소스를 철퍽 올려주는 스파게티요. 미트볼 한 두 개 들어가 있는 경우도 있어요.
이것이 일본 경양식의 상징 나폴리탄 스파게티군요.
새콤했어요. 짠맛이 있었어요.
이번에는 친구가 주문한 카레가츠를 먹어볼 차례.
친구가 제 나폴리탄 스파게티를 맛보는 동안 카레 돈까스를 한 조각 먹어봤어요.
카레 맛이 달라.
일본 카레는 한국 카레와 맛이 아주 달랐어요. 진귀한 경험은 아니었어요. 한국 식당에서 판매하는 일본식 카레와 맛이 비슷했어요. 일본 고형 카레로 만들어 먹는 카레든 식당에서 판매하는 카레든 한국에서 판매중인 일본 카레와 맛이 비슷했어요.
한국 카레는 맛이 단순하고 직선적이에요. 그리고 약간 매운 맛이 있어요. 재미있는 점은 한국 카레에 다진 마늘을 넣으면 우리나라 식당에서 판매하는 인도 카레, 네팔 카레와 맛이 꽤 많이 비슷해진다는 점이에요. 이에 비해 일본 카레는 한국 카레에 비해 맛이 복잡하고 덜 자극적인 맛이에요. 같은 카레이지만 맛은 꽤 달라요. 색도 한국 것은 노란빛이 강하지만 일본 것은 흙빛에 가까운 빛이구요. 개인적으로는 한국 카레를 훨씬 더 좋아하는 편이에요.
"우리 내일 아침에 여기 또 오자."
"또?"
"우리 일본에서 먹어본 거 몇 개 없잖아."
일본 도쿄에 와서 이날까지 먹어본 일본 음식 종류가 몇 없었어요. 몇 가지 안 먹어본 수준이 아니라 1에서 100까지 온통 안 먹어본 것 뿐이었어요. 조금 심각한 수준이 아니라 너무 심각한 지경이었어요. 일본 와서 오므라이스도 못 먹어봤고 튀김도 못 먹어봤고 하다 못해 붕어빵의 조상인 도미빵 - 타이야키조차 아직 못 먹어봤어요. 이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문제가 심각했어요.
너 일본 가서 뭐 했어?
응. 계단 오르내렸어.
그거 말고 다른 거 뭐 했어?
응. 계단 오르내렸어.
어?
어. 계단만 오르내렸어.
이건 아니잖아!
패션에는 관심 없으니 이건 그냥 넘어간다 쳐요. 제대로 집중해서 잘 돌아다니며 구경한 곳도 없고 뭐 먹은 것도 없었어요. 그렇게 '혼을 실어서 하는 것'을 강조하는 일본 문화. 일본 문화에 감염되면 인스턴트 커피 한 잔을 타더라도 스포이드와 계량컵을 동원해 1 나노리터까지 정확히 물 양을 맞춰서 마셔야 할 것 같은 모양을 보여요. 그런데 나는 일본 와서 뭐 제대로 집중해서 한 게 하나도 없었어요. 신주쿠고 긴자고 완전 날림으로 봤어요. 먹은 것도 이날까지 편의점 도시락과 햄버거, 라멘, 짬뽕 우동 정도 뿐이었어요. 혼을 실어서 세밀하고 꼼꼼하게 하라는 일본 와서 아주 대충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어요.
그때 구세주처럼 등장한 것이 바로 롯지 아카이시 카페였어요. 여기 메뉴를 보니 김밥천국 같았어요. 여러 음식을 다 판매하고 있었어요. 가정에서 만들어먹는 경양식에 가까운 메뉴들이었어요. 그냥 딱 김밥천국 메뉴 일본 버전 같았어요.
여기에서 남은 끼니 다 때우면 어떻게든 되겠어!
저와 친구가 같이 가니까 한 번에 두 종류씩 주문할 수 있었어요. 다음날 아침, 다음날 저녁을 롯지 아카이시 카페에서 해결한다면 단번에 네 종류를 먹어볼 수 있었어요. 이미 벌써 여기 와서 일본식 카레도 먹어봤고 나폴리탄 스파게티도 먹어봤어요. 카레라이스가 아니라 카레 돈까스이기는 하지만 돈까스에 뿌리는 카레나 밥에 뿌리는 카레나 다 그게 그거죠. 이것은 일종의 치트키였어요.
게다가 롯지 아카이시 카페 분위기가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심야시간까지 문을 열고 장사한다는 점도 매우 마음에 들었구요. 솔직히 여행 일정에 하루만 더 여유가 있었다면 롯지 아카이시 카페에 와서 커피 주문해 커피를 홀짝이며 담배 태우면서 여행 기록을 싹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어요. 그 하루가 없다는 것이 너무 슬펐어요. 맨날 정신없이 걸어다니고 계단 오르내리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에 돌아와 찬물로 샤워하고 바로 침대에 드러누워 TV 보다 잠들었어요. 여행 기록도 정리해야만 했어요. 하루가 부족했어요.
롯지 아카이시 카페 특유의 일본풍 레트로 분위기를 최대한 많이 느껴보고 싶었어요. 남은 기간 동안 최대한 다양한 일본 음식을 먹어보고 싶었구요.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어요. 다음날 아침에 여기를 오고, 밤에 여기를 또 오는 것이었어요.
식사를 마치고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어요. 담배 연기가 천장을 향해 올라갔어요. 환기 시설이 연기를 빨아들였어요.
여기 저기에서 들리는 일본어. 살아있는 일본어가 일본풍 복고 분위기 카페 안에서 헤엄치고 있었어요. 롯지 아카이시 카페 안에서 부유하며 헤엄치던 싱싱한 일본어가 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줬어요.
아, 맞다.
나 꼭 가야하는 곳 있어!
잊고 있었다. 나 일본 와서 반드시 가봐야하는 곳이 하나 있다.
싱싱한 일본어의 부드러운 손길이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순간 갑자기 눈 앞에서 섬광이 번쩍였어요. 잊고 있었던 기억.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가봐야만 하는 곳. 있었어요. 그곳은 반드시 가야만 하는 곳이었어요.
"우리 맥도날드 가자."
"지금?"
"응! 나 거기 꼭 가야 해!"
"내일 가면 안 돼?"
"아니. 오늘 가자. 내일 어떻게 될 지 모르잖아. 나 거기 꼭 가야 해."
"왜?"
"있어, 그런 거."
그렇다. 잊고 있던 기억이 내 마음 속에 불을 지폈다. 두 눈에서 불꽃이 화르르 타오른다. 나는 반드시 일본 맥도날드에 가봐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일본 맥도날드는 무조건 가야 하는 곳이었어요. 다음날 밤에 어떻게 될 지 몰랐기 때문에 오늘 무조건 다 끝내버리기로 마음먹었어요. 친구는 제 이글거리는 두 눈을 보고 그러자고 했어요. 계속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이유를 궁금해했어요. 그러나 저는 친구에게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어요.
아사쿠사에는 24시간 영업하는 맥도날드가 하나 있었어요. マクドナルド 浅草ロックス店 이었어요. 마쿠도나루도 아사쿠사 록쿠스텐. 맥도날드 아사쿠사 록스점이었어요. 여기는 첫날 돌아다닐 때 밤 늦게까지 영업하는 것을 직접 봤어요. 친구와 일본 도쿄 24시간 맥도날드 영업점인 맥도날드 아사쿠사 록스점으로 갔어요.
맥도날드 아사쿠사 록스점에 도착하니 밤 10시 55분이었어요.
일본 도쿄 24시간 맥도날드 영업점 맥도날드 아사쿠사 록스점 マクドナルド 浅草ロックス店 안으로 들어갔어요. 들어가자마자 친구에게 말했어요.
"너 뭐 먹을래? 메뉴 골라봐."
친구에게 메뉴 고르면 무조건 제게 말하라고 했어요. 제가 일본어로 주문할 작정이었어요.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어요. 친구가 메뉴판을 보며 일본어를 더듬거리며 읽었어요. 친구에게 그게 뭔지 설명해줬어요. 친구가 햄버거를 고르는 것을 도와주면서 저도 무엇을 먹을지 골랐어요. 제가 고른 것은 맥도날드 더블 치즈버거 햄버거 세트였어요. 친구도 자기가 먹을 것을 골랐어요.
직원은 할아버지였어요. 조금 늙은 장년의 아저씨가 아니라 진짜로 할아버지였어요. 고령화 사회 일본이라는 말이 확 와닿는 순간이었어요. 이 야심한 시간에 맥도날드에서 할아버지가 일하고 있다니 놀라웠어요.
제가 고른 더블치즈버거는 ダブルチーズバーガー 였어요. 다부루 치즈바가. 그냥 읽으면 되었어요. 주문대 앞에 메뉴판이 있었어요. 솔직히 이걸 다 읽을 필요도 없었어요. 그렇지만 '다부루 치즈바가'라고 말하며 주문했어요. 솔직히 앞에 메뉴판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하나 찍으면서 '코레토 코레토 코레 쿠다사이'라고 말하면 되었어요. 그러나 아주 정성껏 제가 뭘 주문하고 싶은지 일본어로 또박또박 말했어요.
매장 안은 시끄러운 편이었어요. 서양인들이 와서 떠들고 있었어요. 여기에 직원 할아버지께서 귀가 약간 어두우셨어요. 그래서 조금 큰 목소리로 주문해야 했어요. 그것 뿐이었어요. 저와 친구 것 모두 주문했어요. 조금 기다리자 주문한 것이 나왔어요.
햄버거 잘 받아왔어요.
내 앞에 있는 맥도날드 더블 치즈버거 햄버거. 갑자기 끓어오르는 분노.
"이놈들은 왜 맨날 나한테 맥도날드 주문할 수 있냐고 물어본 거야!"
꽤 예전 일이에요. 고등학교 1학년때 혼자 책 잡고 독학으로 1년간 일본어를 공부했어요. 그 이후 일본어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어요. 그 당시에는 일본어 교재 종류도 별로 없었어요. JLPT 단계가 4급으로 구성되어 있던 시절, 2급부터는 독학으로 공부할 책이 마땅히 없었어요. 문법 설명 같은 것도 별로 없었어요. 2급 단어장 달달 외우고 문제집 풀어보는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문제집에 설명은 하나도 없었어요. JLPT 2급 레벨부터는 학원 도움 없으면 진도를 나갈 수 없었어요. 그래서 혼자 2급 레벨 공부하다 때려쳤어요. 집에서 제가 영어 공부는 안 하고 일본어를 공부해서 매우 못마땅해했거든요. 솔직히 일한 사전 구입할 돈을 주신 것만해도 감사해해야 했어요. 그런 상황에서 감히 일본어 학원을 다니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어요. 말해봐야 바로 거절당하고 영어나 공부하란 소리 들었을 거구요.
하지만 그때 공부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대학교 진학해 교양 일본어는 공부 하나도 안 해도 되었어요. 아무리 일본어 공부 안 한 지 2년이 넘었다고 해도 교양 과목에서 배우는 일본어 정도는 다 아는 정도였거든요. 공부하고 말고가 없었어요. 교양 일본어에서 JLPT 3급 레벨 정도를 다룰 리 없었으니까요. 어쩌다 가끔 제가 잊어버렸거나 처음 보는 단어 - 특히 의성어 같은 것 한 두 개 있으면 그거나 좀 외워주면 끝이었어요.
일본어과로 진학한 친구들과 지인, 그리고 일본 체류 경험이 있는 친구들이 제게 꼭 하는 말이 있었어요.
"너 일본 가면 맥도날드에서 주문이나 할 수 있냐?"
솔직히 이걸 왜 진지하게 물어보는지 전혀 이해 못했어요. 그냥 '코레 쿠다사이' 정도만 알아도 할 수 있는 거니까요. 그런데 이놈들은 항상 제게 이걸 매우 진지하게 물어봤어요. 제가 그딴 거 하나 못하냐고 하면 아주 스고이 연발할 표정으로 대단하다고 했어요.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추측조차 불가능했어요. 맥도날드 가서 주문하는 것이 뭐가 어렵길래 이걸 진지하게 물어보나 궁금했어요.
바로 이 의문 때문에 맥도날드에 가서 친구 것까지 주문한 것이었어요.
맥도날드 직원이 할아버지라 귀가 좀 어두우셔서?
아니면 다부루, 바가 같은 거 몰라서?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왜 그들이 제게 일본어로 맥도날드 주문할 수 있냐고 물어봤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어요. 맥도날드에서 주문하는 것은 정말 쉬웠어요. 글자만 읽을 수 있으면 누구나 다 주문할 수 있었어요. 다부루가 더블, 바가가 버거 같은 것은 일본어 잘 몰라도 대충 눈치껏 알 수 있는 거구요. 차라리 어렵다면 모스버거 주문하는 것이 더 어려웠어요.
초밥집 주문이라면 이해해요. 일본어 메뉴 볼 때 제일 고약한 것이 한자투성이 메뉴거든요. 읽는 법을 안 적어주고 한자만 적혀 있으면 읽기 난해해요. 여기에 일본어로 생선 각 부위 명칭 따위는 공부할 리가 없어요. 무슨 미스터 초밥왕을 일본어 원서로 보겠다고 작정하고 덤벼드는 미스터 초밥왕 매니아 아니라면요. 그런데 미스터 초밥왕 끝났잖아요. 한국어 번역판으로도 완결되었잖아요. 쇼타가 나중에 번외편으로 한국 오는 스토리까지 번역 깔끔하게 다 되었잖아요.
가타가나 퍼레이드가 조금 짜증나기는 하지만 그냥 읽으면 되었어요. 프랑스어, 독일어를 일본어 발음으로 바꿔놓은 메뉴도 없었어요. 아무리 정체 불명의 버거 같아도 가타가나를 읽고 이게 영어 무슨 단어인지 잠깐 생각해보면 무슨 버거인지 금방 다 알 수 있었어요. 프랑스어, 독일어를 일본어 발음으로 바꿔놓으면 완전히 허를 찔리는 거라 당황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런 것은 아예 없었어요.
"이놈들은 대체 왜 맨날 나한테 일본 맥도날드 가서 일본어로 주문할 수 있냐고 한 거야?"
질문할 때 짓던 진지한 표정. 그리고 할 수 있다고 대답하면 '일본어 좀 하는데?'라고 돌아오던 대답. 대체 왜? 글자 못 읽을 줄 안 건가? 이렇게 쉬운 걸 왜 물어본 거야? 차라리 일본어 신문 던져주고 일본어로 소리내서 읽을 수 있냐고 하면 이해라도 하지.
이딴 허무한 것 때문에 맥도날드에 왔다는 사실에 분노했어요. 더블치즈버거를 앞니로 콱 베어물었어요. 어금니로 잘근잘근 씹었어요. 어려울 게 하나도 없었어요. 모스버거는 메뉴에 한자가 간간이 섞여 있기라도 하지. 모스버거는 '채소'의 일본어인 野菜 やさい 라도 햄버거 이름에 들어가 있잖아.
결국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어요. 더 미궁 속으로 빠졌어요. 해결의 실마리는 고사하고 문제만 더 난해해져버렸어요.
맥도날드에서 나왔어요. 타누키 토오리 たぬき通り 로 갔어요. 타누키 토오리는 한국어로 번역하면 너구리 거리.
타누키 토오리에는 저와 친구 뿐이었어요.
타누키 거리에서 사진을 찍으며 숙소를 향해 걸어갔어요.
"내일 아침에 롯지 아카이시 또 가자."
"거기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어. 분위기도 좋고 음식도 맛있잖아."
친구에게 다음날 아침에 롯지 아카이시 카페를 또 가자고 했어요. 친구는 거기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냐고 물어봤어요. 저는 거기가 정말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하루 종일 거기에 앉아 시간 되면 음식 시켜먹고 시간 되면 커피 주문해 마시며 느긋하게 앉아서 노닥거리고 싶었어요. 여행 기록 정리도 하고, 키노쿠니야 신주쿠 본점에서 구입한 일본 전래동화도 읽구요. 그런 낭만적인 시간을 보낼 시간이 아예 없다는 것이 너무 아쉬웠어요. 분위기 뿐만 아니라 카레 돈가스와 나폴리탄 스파게티도 괜찮았어요. 엄청나게 굉장한 맛은 아니었지만 딱 그 식당 분위기에 어울리는 맛이었어요.
그때였어요. 친구가 말했어요.
"매운 거 먹고 싶어."
잠깐...잠깐만...
"어?"
"매운 거 먹고 싶어. 일본 음식 너무 달고 느끼해. 맵고 칼칼한 거 먹고 싶어."
이것은...기적인가. 일본의 기적인가. 메이도리밍에 이은 일본의 기적 2탄인가.
"너 매운거 아예 못 먹잖아!"
엄청나게 충격받았어요. 친구가 일본 음식은 너무 달고 느끼하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맵고 칼칼한 것을 먹고 싶다고 했어요.
이 친구는 매운 것 절대 못 먹어요. 평범한 김치도 먹으면 맵다고 해요. 라면도 순한 것만 찾아 먹어요. 매운맛에 대한 면역력이 바닥을 기어요. 일본인들이 매운 것 잘 못 먹는다고 해요. 이 친구는 아마 그런 일본인들과 맞먹을 거에요. 고춧가루가 들어가면 맵다고 하는 친구였어요. 그렇다고 매운 것을 즐기는 것도 아니었어요. 매운 것 안 좋아하는 친구였어요.
더 놀라운 점은 이 친구 입은 매운 것에만 엄청나게 까다롭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관대하다는 점이었어요. 맵지만 않으면 일단 그럭저럭 먹어요. 딱히 싫다고 하는 음식이 거의 없어요. 맵지만 않으면 일단 음식 투정은 안 하는 친구에요. 그래요. '맵지만 않다면' 모든 것에 관대한 편이에요.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 같았어요. 저는 일본에서 뭘 먹든 맛있게 잘 먹고 있었어요. 그러나 친구는 일본 음식이 물렸대요. 달고 짜고 느끼해서 조금 힘들대요.
저도 일본 음식이 한국인 기준에서는 미묘하게 안 맞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는 했어요. 양국 국민들이 좋아하는 음식 맛도 서로에게 가깝고도 먼 나라 맞았어요. 일본 음식은 달고 짜고 느끼하고 생선향 살살 풍기는 간장향이 강했어요. 이건 저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일본 가서 일본 음식 먹어본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일본 음식 맛의 특징이에요. 여기에 맛이 한국 음식에 비해 꽤 강한 편이었어요.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음식 맛이 한국인들 입맛과는 뭔가 안 맞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한국에 들어온 일본 음식이 전부 맛이 변했다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단순히 재료값 아끼려고 열화시킨 것이 아니에요. 정통 일본 맛에 최대한 가깝게 한다는 곳들 보면 의외로 평이 안 좋아요. 오히려 어느 정도 맛을 순하게 만들어야 인기 좋아요. 대표적인 음식이 바로 일본 라멘이에요. 여기에 일본 디저트는 한국에 들어와서 그렇게 큰 인기를 끌지 못했어요. 아무리 일본 여행 광풍이 불어도 일본 디저트는 한국에서 그렇게 인기 좋은 메뉴가 아니에요. 초콜렛, 과자 정도 제외한다면요.
오히려 음식, 디저트는 타이완 것이 한국인들 입맛에 잘 맞아요. 그러니 타이완 디저트가 한국에 계속 상륙하고 꾸준히 인기 끌고 있죠. 맛만 보면 한국인들에게는 타이완이 일본보다 훨씬 더 가까운 나라에요. 중국은 한국인들 입맛에 대놓고 가깝지 않구요. 아무리 중국 본토 음식이 조선족, 중국인, 그리고 이들 불법체류자의 힘으로 널리 퍼졌다 한들 아직까지도 양고기, 고수, 쯔란, 산초 등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엄청나게 갈려요.
그래도 저는 이 정도면 무난히 맛있게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정작 이런 음식 맛을 좋아할 줄 알았던 친구가 맵고 칼칼한 한국 음식이 그립다고 말하고 있었어요. 입맛만 본다면 오히려 제가 한식 찾아야 맞을 것 같은데요.
친구가 일본 음식 물려서 맵고 칼칼한 것 먹고 싶다고 한 것은 정말 충격이었어요.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갔어요.
조그만 너구리 동상이 있는 제단 같은 것이 있었어요.
타누키 거리 약도가 붙어 있었어요.
숙소로 돌아왔어요. 친구는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서 바로 잠들었어요. 저는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TV를 봤어요.
TV에서는 1만엔으로 외국 여행이 가능한지 테스트하는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어요. 먼저 거리에서 사람들을 잡고 인터뷰가 진행되었어요. 일본인들에게 1만엔 있으면 뭐 할 거냐고 물어봤어요. 1만엔이면 옷이나 사고 사고 싶은 거 사는 정도를 이야기했어요. 외국 여행을 1만엔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냐고 물어보면 전부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어요.
'1만엔이면 한국돈으로 10만원 조금 넘는 돈이지?'
한국 돈으로 약 10만원. 10만원보다 조금 많은 돈. 이걸로 해외여행? 교통비 고려하면 국내여행도 빠듯한 돈이었어요. 숙박비 제하고 교통비 제하면 얼마 안 남으니까요. 일본인들이 1만엔으로 외국 여행을 꿈도 못 꾸는 모습에 크게 공감했어요.
방송에서는 이게 되는지 보여주겠다고 마다가스카르로 갔어요.
"야, 저건 비행기표 값이 이미 1만엔 넘잖아!"
현지에서 1만엔인가...
비행기표 값 빼고 현지에서 1만엔이라면 돈 아껴가며 여행하면 가능하긴 할 거에요. 위생 따위는 개나 줘버린 쓰레기 같은 숙소에 건강은 포기하고 먹는 음식들 먹는다면요. 후진국이라고 무턱대고 저렴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후진국일 수록 밑바닥은 정말 밑도 끝도 없이 구렁텅이라서 청결에 익숙해진 선진국 사람들은 몸이 견뎌내지 못해요. 벼룩, 빈대에 A형간염, 장티푸스, 콜레라 같은 것 각오해야 해요. 그래서 아무리 돈을 아끼기 위해 몸이 견뎌내는 최저수준으로 돌아다녀도 현지에서는 최저 수준이 아니라 중간 정도로 소비할 수 밖에 없어요.
'막 설사하고 속 뒤집어지고 피부병 생기고 고생하는 거 보여주는 거야?'
흥미진진. 과연 어떤 여행을 보여줄 것인가?
마다가스카르로 간 일본인. 환전소에서 1만엔을 환전했어요. 돈을 뭉텅이로 줬어요. 우즈베키스탄에 있었을 때가 생각났어요.
제가 우즈베키스탄에 있었던 2012년 당시 1달러 환율이 암시장 환율로 2500숨인가 했었어요. 당시 우즈베키스탄에서 최고액권 지폐가 1000숨짜리 지폐였어요. 환전 한 번 하면 돈 뭉치 몇 개가 담긴 검은 비닐봉지를 받곤 했어요. 1달러가 2500숨이면 100달러 환전하면 25만숨을 받아야 하는데 지폐 최고액권이 1000숨이니 100달러 환전하면 지폐 두 묶음 반을 받아야 했어요. 하지만 이것은 이론적인 것이고, 실제로는 항상 그보다 더 받았어요. 곱게 1000숨 100장 묶음 두 뭉치에 1000숨 50장 묶음 한 뭉치를 주는 게 아니라 500숨짜리 지폐 뭉치를 줄 때도 있었거든요. 여기에 한 번 환전할 때 100달러보다 더 환전하다보니 환전 한 번 하면 돈이 막 몇 뭉치씩 되었어요.
마다가스카르는 더 심했어요. 아리아리 지폐를 아예 장바구니 정도로 떠안겨줬어요. 일단 여기에서 깔깔 웃었어요. 일본인은 내색하려 하는 것을 꾹 참고 있었지만 당황한 티가 역력했어요.
이제 이 아리아리 뭉치로 마다가스카르 여행하기. 마다가스카르에 사는 원숭이를 직접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공원을 갔어요. 가이드 대동해서 돌아다녀야 하는 공원이었어요. 멀찍이서 '저기 원숭이 있다!' 하는 수준이 아니라 진짜 아주 가까이까지 다가가 볼 수 있는 곳이었어요. 그 공원을 잘 돌아다닌 후 밥을 먹으러 갔어요. 과장 하나 안 보태고 상다리 휘어지는 밥상이 나왔어요. 커다란 식탁 앞에 혼자 앉았어요. 그 식탁 위에 음식이 꽉 들어찼어요. 일반인이라면 혼자 죽어도 다 못 먹을 양이었어요. 음식 양만 많은 것이 아니었어요. 진짜 고급 요리들이었어요.
이렇게 배 터지게 먹고 숙소로 갔어요. 숙소도 진짜 엄청나게 좋은 숙소였어요. 이렇게 좋은 숙소에서 머무르는 데까지 지출한 돈이 1만엔이 안 되었어요. 어떻게든 1만엔을 다 쓰기 위해 일부러 고급만 고르는데도 결국 1만엔을 하루에 다 쓰지도 못했어요.
"진짜 대단하다."
두 번 놀랐어요. 이 방송 촬영하겠다고 마다가스카르에 간 것에 한 번 놀랐어요. 무슨 몇 박 며칠 걸려 방송하는 특집 프로그램도 아니었어요. 우리나라 쇼프로그램이었다면 최소 한 달 우려먹었을 거에요. 되도 않는 훈장질에 웃기지도 않은 개그치면서 어떻게든 방송 분량 늘이려고 발악했을 거에요. 그렇게 아마 4편 찍어서 한 달 우려먹었겠죠. 그러나 이 방송은 1시간도 안 되었어요. 그 짧은 시간을 위해 마다가스카르까지 날아갔다는 것에 놀랐어요. 한국과 스케일이 달랐어요.
두 번째 놀란 것은 마다가스카르 물가가 진짜 저렴하다는 것이었어요. 저도 일본 방송에서 나오는 그 특유의 '우오오옷! 스게!'를 같이 외치고 있었어요. 진짜 웃겼어요. 돈을 다 쓰고 싶은데 다 못 쓰는 상황.
깔깔 웃으며 TV를 보다 TV를 끄고 잠을 청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