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끝까지 올라가자 딸기원 마을을 윗쪽에서 둘러볼 수 있었어요.
이제 정말로 날이 어두워졌어요. 카메라 손떨림 방지 기능을 믿고 사진을 찍기는 하겠지만 흔들린 사진들도 있을 거고 너무 까맣게 찍힌 사진들도 있을 거였어요.
비탈길을 따라 내려가며 사진을 찍었어요.
딸기원 마을.
서울 중랑구 달동네를 찾아 위성사진을 살펴보다 발견한 마을이었어요. 딸기원 마을을 처음 찾았을 때는 그렇게 큰 감흥이 없었어요. 서울을 벗어나서 달동네를 찾는 것은 제게 그렇게 큰 의미있는 행위는 아니었거든요. 더욱이 서울을 벗어나서 달동네를 찾아보겠다는 것은 제 지식 수준으로 무리가 있었어요. 이것이 시골 마을인지 달동네인지 파악할 능력이 없었으니까요.
'여기는 무슨 마을이지?'
일단 마을 이름이나 알아보자고 생각했어요. 지도를 잘 살펴보았어요. 마을 이름은 딸기원 마을이었어요. 딸기원 마을에 대해 인터넷으로 검색해 봤어요.
구리시청 홈페이지에 딸기원 마을 유래가 나와 있었어요.
딸기원 마을은 교문사거리에서 망우리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는 마을이에요. 옛날에는 '응골'이라고 불렀다고 해요. 응골은 몇 가구 살지 않는 아주 조그만 마을이었어요. 1954경에 버스가 다니기 시작했대요.
1960년대 이쪽으로 사람들이 들어와 살며 마을이 생겼대요. 이때 들어온 사람들은 구리시 왕숙천 범람 때문에 이주한 사람들이었고, 25가구 정도가 이주해 왔다고 해요.
버스가 다니면서 버스 정류장 이름을 붙여야 했어요. 그런데 이 동네 버스정류장에 붙일만한 적당한 말이 없었어요. 당시 버스 차장들은 여기를 '딸기원'이라고 불렀어요. 이렇게 버스차장들이 이 지역을 부르던 말이 확대되어서 오늘날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해요.
이러한 동명 유래와 달리, 한국전쟁 이후부터 이곳에 꽤 큰 규모의 딸기밭이 있어서 버스정류장 이름을 지을 때 길가의 딸기밭을 보고 편의상 '딸기원'이라고 지은 정류장 이름이 확장되어 마을명이 되었다는 설도 있어요.
중요한 것은 딸기원 마을 이름 유래는 버스 정류장 이름을 '딸기원'이라고 붙인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었어요.
딸기원 마을에서는 마을 이름을 딸기밭에서 왔다는 설을 밀고 있어요. 여기까지는 전혀 이상할 게 없었어요.
그렇지만 뭔가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어요.
왜 구리시는 딸기와 관련된 것이 없지?
경기도 구리가 딸기로 유명하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어요. 구리에서 생산된 딸기라고 판매하는 것도 못 봤구요. 서울 중랑구 먹골은 과거 배가 많았던 동네 맞아요. 먹골배가 있거든요. 지금은 다 개발되어서 배 과수원을 찾을 수 없지만 옛날에 거기에 배가 많았다는 것은 '먹골배'라는 배 이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구리딸기 같은 말은 못 들어봤어요.
'완전 옛날에 있었다가 다 밀렸나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딸기원 마을에 대해 더 검색하고 있었어요. 딸기원 마을의 이름 유래를 찾아 밝히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어요. 여기가 중랑구 달동네로 볼 수 있는 동네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였어요.
"이거 뭐야?"
딸기원 마을 자료를 찾던 중이었어요. 다음 지식tip 답변 중 눈을 휘둥그레 만드는 답변이 있었어요.
질문은 2005년 5월 30일에 최종 수정된 질문이었어요. 그 질문에 2015년 1월 1일에 수정된 답변 내용은 위와 같았어요.
Daum tip 질문 주소 : https://tip.daum.net/question/105527
저 질문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쪽에는 무덤이 매우 많았고, 만신 - 즉 신 내리는 굿당 같은 것이 많았대요. 매달 음력 초하룻날 밤에 산신령에게 두 손 모아 달에 기도를 하는 사람이 많아서 '달기원'이라고 부르던 곳이 빠른 억양에 사투리로 인해 '딸기원'이 된 것이래요.
이 답변을 보고 딸기원 마을 지도를 다시 보았어요. 마을 주변에 무덤이 엄청 많았어요. 바로 망우리 공동묘지였어요. 망우리 공동묘지 역사를 찾아봤어요.
망우리 공동묘지는 일제강점기인 1933년 2월 2일에 미아리 공동묘지가 조만간 매장종료될 것에 대비해서 경기도 망우리 임야 700000평을 경성부의 공동묘지로 결정한 것이 시초에요. 1933년 5월 27일에 망우리 묘지가 개원했어요.
1935년 10월 24일에는 이태원 공동묘지를 택지화하기 위해 무덤 37000기 중 연고자가 있는 묘는 망우리로 이장하고 무연고 묘는 신사리에서 화장하기로 결정했어요.
해방이 된 이후로도 망우산 망우리는 계속 공동묘지 자리로 남아 있었어요.
1973년 3월 25일, 망우리 공동묘지에 28500여기의 분묘가 가득차 더 이상 묘지 쓰는 것이 금지되었어요. 1973년 5월에는 매장이 종료되었구요. 이 당시 총 47754기의 묘지가 있었대요.
2013년에 망우리 공동묘지는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어요.
망우리 공원은 1933년에 생긴 공동묘지에요. 1954년경 이쪽으로 버스가 다닐 때는 무덤이 매우 많았을 거에요. 달기원이 딸기원이 된 것도 한국전쟁 이후 한국어에서 나타나는 대표적 특징이 된소리화라는 점을 고려하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에요. 더욱이 정한수 떠놓고 달에게 소원 비는 장면은 우리나라 옛날 토속 문화에서 정말 흔한 모습 모습이기도 했구요.
딸기밭이 있어서 딸기원 마을이 되었다는 주장보다 '달기원'이 된소리화되어 '딸기원'이 되었다는 쪽이 훨씬 그럴 듯 해보였어요. 딸기가 아무리 건조에 약하고 추위에 강하고 더위에 약한 작물이라고 해도 '구리 딸기'라는 것을 못 들어봤기 때문에 더욱 그랬어요.
게다가 상덕마을 마을 이름 유래를 보면 딸기원 마을 이름이 달기원에서 왔을 확률이 더 높았어요. 딸기원 길 건너 맞은편에 있는 상덕마을은 '덕현'이라는 지명에서 온 이름이에요. 딸기원 안에 있는 원불교 건물 부근 과수원으로 가는 길에 큰 서낭당 나무가 있었대요. 그 나무 아래에는 소원을 빌며 쌓은 돌탑이 있었다고 하구요. 그 돌탑을 '복바위', '덕바위'라고 불렀고, 덕바위 윗마을을 상덕마을이라고 불렀대고 해요.
게다가 옛이름이 '응골'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응'은 응달을 말하는 것 같았어요. 달기원에서 왔다는 설은 딸기밭에서 왔다는 설보다 딸기원 옛지명 및 상덕마을 이름과 통하는 부분이 더 많았어요.
물론 답이 뭔지는 저도 몰라요. 딸기원 마을 돌아다니며 동네 어르신분들께 딸기밭 여쭈어봤을 때 옛날에 있었다고 들어봤다는 대답만 들었어요.
깜깜한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계속 아래를 향해 내려갔어요.
골목길에서 빠져나왔어요.
"이제 집으로 가야겠다.
벌써 8시를 훌쩍 넘겼어요. 2019년 5월 14일 20시 23분이었어요.
밤 8시 30분이 넘어서야 딸기원 마을을 둘러보는 것을 끝냈어요. 너무 어두워졌기 때문에 바로 집으로 돌아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