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뭐라카네 (2008)

뭐라카네 - 07 (마지막화) 경상남도 사천

좀좀이 2011. 11. 14. 15:36
728x90

사천이 너무 마음에 든다고 해서 시내만 돌아다닐 수는 없었어요.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확실한 목표인 대곡숲이 있었거든요. 사실 너무 즉흥적으로 찾아낸 곳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우리의 머리 속에 확실한 이 여행의 목적으로 확고히 자리 잡아 버렸어요. 문제는 대곡숲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었어요. 분명 여기는 한국. 말은 잘 통해요. 길을 물어보는 데에 전혀 어려움이 없어요.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대곡숲을 잘 모른다는 사실이었어요. 더욱이 여행이 꼬이려고 작정했는지 대곡숲 가는 길을 물어보기 위해 말을 건 행인들 전부 외지에서 사천으로 온 지 얼마 안 되신 분들. 목적지는 있는데 길을 못 찾아서 점점 우리의 길은 여행에서 방랑으로 변질되어가고 있었어요.


친구와 방향 없이 걷다가 마침 봄이다보니 동요가 하나 생각났어요.


아버지는 나귀타고 장에 가시고

할머니는 건넛마을 아저씨댁에

고추먹고 맴맴 달래먹고 맴맴


아버지와 할머니 모두 일 나가시고 어머니도 바쁜 상황에서 홀로 남겨진 어린이. 아무 것도 모르고 고추를 먹었다가 매워서 달래를 먹었는데 달래도 만만찮게 매움. , 맞벌이 가정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노래임.


이런 생각을 하며 걷는데 정말 힘이 많이 들었습니다. 일단 복장. 저는 2월 말 졸업식 참가 때문에 올라왔기 때문에 오리털 파카를 걸치고 옷을 매우 두껍게 입고 있었어요. 하지만 날씨는 완전 4월의 따스한 오후. 가만히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더위 그 자체. 거기에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나와서 잠시 사천 구경을 하는 것이라서 무겁지는 않지만 옷의 무게와 방출되지 못하고 계속 쌓이는 체온은 충분히 체력을 갉아먹고 있었어요. 파카 안에는 반목 티셔츠와 남방을 입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남방 단추가 정확히 위에서 두 번째 것이 떨어져 있었어요.


반목 티셔츠와 남방을 입고 파카 지퍼를 열고 다닌다. - 매우 덥다.

반목 티셔츠를 벗고 남방에 파카 지퍼를 닫는다. - 죽게 덥다.

반목 티셔츠와 남방을 모두 벗고 하얀 반팔티에 파카를 입고 다닌다. - 노숙자 아니면 미친놈 패션.


가뜩이나 오리털 파카에 정장바지, 등산화라는 완벽한 부조화 패션에 하얀 반팔티에 파카를 입고 다니면 갈 데까지 간 막장 패션의 등장이 될 거 같아 소심하게 그냥 반목 티셔츠와 남방을 입고 파카 지퍼를 열고 다니고 있었어요.


두 번째로 무겁지는 않지만 종이가방에 짐을 넣고 손에 덜렁덜렁 들고 다니고 있었어요. 무겁지는 않은데 많이 걸으려니 은근히 신경이 쓰였어요.


세 번째로 체력의 문제. 설사와 다리-특히 무릎의 통증은 체력을 갉아먹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체력을 잡아드시고 계셨어요. 체력에서 꽤 많은 부분이 아랫배에 집중되어 있다 보니 가뜩이나 아픈 다리는 더욱 힘이 들었어요. 배가 싸르르 아프기는 한데 정말 이도 저도 아닌 참 애매한 통증이어서 화장실을 가면 나오지 않고, 걷자니 아픈 그런 상황이었어요. 차라리 많이 아프면 일단 화장실부터 찾을 텐데 화장실에 가봤자 나올 통증이 아니라서 그냥 참고 걷는 중이었어요.


친구는 지도를 보더니 사천 향교에서 대곡숲은 금방이니 사천 향교를 찾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친구를 따라갔어요. 친구는 사천 지리를 잘 안다고 큰소리쳤기 때문에 친구를 믿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어요. 그러나 친구도 헤매고 있었어요. 저는 단지 진실을 외면하고 싶었을 뿐이었어요. 사실 둘이 사이좋게 헤매고 있었어요. 제가 엉뚱한 길 들어갔다가 친구가 엉뚱한 길 들어갔다가의 무한 반복. 길을 물어보아서 찾아가는데 같은 향교를 물어보아도 전혀 다른 대답. 하여간 헤매다 헤매다 아래 사진과 같이 정말 끔찍한 곳을 발견했어요.



각도가 환상의 각도가 아니라 환장의 각도로구나!


순간 친구가 여자였다면 지금 저와 친구는 환상의 커플이 아니라 환장의 커플을 찍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보자마자 끔찍한 각도. 더욱이 지금 나는 가벼운 증상의 설사 환자. 조금만 잘못하면 가벼운 증상의 설사 환자에서 친구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될 전설의 설사쟁이로 전락할 상황. 길이 생긴 것을 멀리서 딱 보자마자 이 길에 화장실이 있을 확률? 0%. 화장지가 있는 화장실은 고사하고 그냥 화장실이 있을 확률이 0%였어요. 이 각도를 올라가고 내려올 때 다리 운동이 좀 된다 싶다고 느낄 확률? 100%. 그러므로 이 길은? 환장의 길.


배에서 통증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친구에게 말했어요.

, 여기는 향교 절대 없다.”

여기 맞아.”

이 길이 옳기 때문에 꼭 올라가야 한다는 친구. 이 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저는 이 길이 적당한 오르막길이라고 추측했어요. 그러면 눈앞에 보이는 이 길만 기어 올라가면 끝이겠지? 그리고 내려오는 거야 적당히 빨리 내려오면 되고, 그 다음에 대곡숲에 가서 대곡숲 화장실을 이용하는 거야. 그 정도는 참을 수 있다.


정말 눈앞의 경사진 길만 올라가면 끝인 줄 알았어요. 일단 벽이 깎여있는 것으로 보아 위에는 별 볼 일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비록 길에 난간을 만들어 박았다고는 하지만 위에 다 올라가면 공사장이 있거나 정말 황량한 모습이 보이며 길이 끝날 거라고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진 속 경사를 다 올라가자 길이 또 있었어요. 길은 계속 이어져 있었어요. 그리고 화장실 따위는 보이지 않았어요. 그저 마을 주민들을 위한 운동기구가 몇 개 있는 약간 평탄한 곳이 있고, 길은 그 뒤로 계속 이어져서 끝날 줄을 몰랐어요.


이왕 여기까지 올라왔으니 여기서 끝장을 봐야겠다는 오기가 솟구쳤어요. 이번 여행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이런 여행은 지금까지 제 인생에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정말 꾸준히 10분 내외로 늦고, 그것도 모자라 무릎통증에 설사까지 찾아왔어요. 이제 그 저주를 끊어야겠다는 굳은 다짐이 생겼어요. 타이밍의 여왕이라는 친구의 여자 친구까지 모셔와도 이번 여행에서 저의 이 이상한 지각의 저주를 풀 수는 없었어요. 처음에는 남는 것이 시간이었지만 슬슬 비행기 시간도 걱정되기 시작했어요.



멀리 진주향교가 보였습니다. 분명 길은 얼추 맞게 들어온 거 같았어요. 그런데 진주 향교의 입구가 보이지 않았어요. 진주 향교 입구는 전혀 엉뚱한 곳에 있었어요. 지도를 보니 지금 있는 곳에서 대곡숲이 보여야 하는데 대곡숲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이라는데 너무나 평범한 숲이었어요. 친구와 앉아 쉬면서 지도를 펼쳐 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대곡숲이라는 곳은 보이지 않았어요. 대곡숲으로 추정되는 곳조차 보이지 않았어요. 지금 있는 곳이 대곡숲이 맞다면 대곡숲이라는 간판이라도 하나 서 있어야 할 거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사천시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사천에 대곡숲이라는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이 있다는 정보를 획득한 것이지, 사천 주민으로부터 사천에 가면 대곡숲 꼭 가 보세요라는 정보를 획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어요. 민간인으로부터 획득한 정보라면 충분히 표지판이고 길이고 아무 것도 없을 수 있어요. 그러나 관청에서 얻은 정보라면 반드시 표지판과 길이 있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표지판과 길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안 보였기 때문에 이것은 누가 봐도 잘못 온 것이었어요.


그래서 일단 내려가기로 하고 내려가는데 마을 주민분이 올라오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대곡숲의 위치를 물어보았어요.

대곡숲 가려면 어떻게 가야하나요?”

대곡숲이요?”

그 분도 대곡숲에 대해서는 잘 모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대곡이라는 마을에 대해서는 알고 계셨어요. 그분 말씀으로는 택시로 10분 거리라고 하셨습니다. 일단 내려갔어요. 내려와서 시계를 보니 17시를 조금 넘겼어요.

어떻하지? 시간이 참 애매하다.”

그냥 사천이나 구경하다 공항 들어갈까?”

그러나 대곡숲을 찾아가겠다고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한 상태. 여기에서 패잔병이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택시타자.”


비행기는 1920분 출발. 아직 시간은 조금 남아 있었어요. 공항에서 친구에게 제가 찍은 사진을 넘겨주고, 친구가 그 사진까지 받아서 동영상으로 편집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 시간까지 포함한다면 공항에 18시에서 18시 반까지는 도착해야 했어요.


설마 화엄사보다 더 하겠냐. 택시타고 가자. 우리는 화엄사 10분만에 다 보고 인증샷까지 다 찍었잖냐.”

화엄사 여행. 절대 잊을 수 없는 최단시간의 여행. 정자 하나를 둘러보아도 10분은 걸릴 거에요. 그런데 그 큰 사찰인 화엄사를 10분 만에 다 보고 (물론 4사자 3층석탑은 못 보았지만요) 사진까지 다 찍었어요. 어차피 대곡숲도 숲. 입구에서 사진 찍고 내부는 전력질주 하며 구경한다면 시간이 충분하다 못해 남을 것이라고 계산했어요. 그런데 오르막에서 내려오는 길에 택시가 한 대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친구는 아이스크림과 음료수를 가게에서 사 왔습니다.



친구가 아이스크림을 사러 들어간 사이에 찍은 사진이에요. 이 가게에서 친구가 아이스크림과 음료수를 사 왔어요.


친구가 사온 아이스크림과 음료수를 먹으며 걷고 걷고 걷다가 드디어 큰길에 도착해서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에 타자마자 시계를 보니 1730분이었어요. 18시 공항 도착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택시로 왕복 20분 걸린다고 계산하면 10분간의 관람시간이 있었습니요. 공항에서의 작업시간을 조금 빠듯하게 한다면 최대 30분은 관람할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대곡숲으로 가자고 택시 기사아저씨께 말씀드리자 기사아저씨께서는 그곳에 왜 가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래서 사천시 홈페이지 가니까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이라고 해서요라고 대답했어요. 대곡숲에 가는 이유가 우리는 잠시 사천에 들른 것이고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이라고 사천시 홈페이지에 나와 있기에 구경하고 사진 찍으러 가는 것이라고 말씀드리자 기사아저씨께서는 그런 곳을 뭣 하러 가지라는 태도에서 한 번 가 봐라는 태도로 바뀌셨습니다. 그때까지는 어떤 재앙이 기다리고 있을지 잘 몰랐어요. 하지만 저 역시 제주라는 관광지에서 살다보니 기사아저씨의 태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어요.


대곡숲에서 돌아가려면 어떻게 돌아가야 하나요?”


차는 엄청난 시골로 들어가고 있었어요. 버스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어요. 중요한 것은 비행기를 타는 것. 숲 구경은 입구에서 여기를 거쳐 갔다는 증거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되요. 대곡숲 구경과 비행기를 타는 것은 절대 비교 자체가 안 되는 거에요. 비행기를 놓치면 일단 일요일까지 진주에 있어야 해요. 금요일과 일요일밖에 비행기가 없기 때문에 선택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요. 택시가 대곡숲을 향해 갈수록 공항으로 가는 방법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거 하나 빼 들고 가서 콜택시 부르세요.”

사실 콜택시를 부를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이미 돈을 예상보다 너무 많이 써버렸기 때문에 저나 친구나 금전적으로 매우 힘든 상태. 거기다 대곡숲까지 가는데 택시라는 사치를 해 버리고 말았어요. 이제는 무조건 돈을 아껴야 했어요. 일단 명함을 하나 챙기기는 했지만 절대 콜택시 따위를 부르는 사치를 부리지는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740. 드디어 대곡숲에 도착했어요. 넉넉하게 20분 정도의 구경 시간이 있었습니다.



최대한 시간 많이 잡아야 10분에서 20분 정도니까 후딱 보고 돌아가자. 여기는 차도 별로 없겠다.”

기사아저씨께서 대곡숲이라고 말씀해주셨기 때문에 대곡숲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숲 같이 생긴 것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위의 사진이 바로 대곡숲 입구에요. 사진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정자도 있고, 다리도 있어요. 일단 입구만 보면 꽤 예뻤습니다. 그런데 숲 같이 생긴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어요. 시간이 별로 없다보니 빨리 보고 돌아가야 하는데 막상 대곡숲이라고 내린 곳에서 보니 숲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분명 대곡숲이 여기인데 숲이라고 생긴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앞에 보이는 산이 대곡숲일까요? 분명 이 길에 대곡숲이 있어야 했어요.



이것은 정말 거의 공황상태. 이것은 택시기사가 우리를 아무 데에나 던져놓고 간 것일 거야. 아니면 대곡숲 입구에서 한참 걸어 들어가야 대곡숲의 진짜 모습이 나오는 것일 거야. 그러나 잔혹한 현실.



이렇게 보면 약간 숲의 모습이 보일락 말락 하기도 해요. 사실 이 사진으로도 이게 숲이라고 믿을 사람은 거의 없을 거에요. 무슨 최면을 걸듯 계속 이것은 대곡숲이다라고 세뇌를 시켜도 숲으로 보기 힘든 풍경.



이게 바로 대곡숲의 실체에요. 진정 잔인하고 잔혹하고 쓰라린 현실. 이건 숲이라고 볼 수 없어요. 공원이라고 보기도 힘들 지경이에요. 고작 나무 몇 그루 심어놓고 대곡숲이라고 하다니...그것도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이라고 홍보하다니 너무 황당했어요. 이건 엄마 손을 먹은 인간 기사를 읽어보니 한 소년이 엄마손 파이를 너무 먹다 병원에 실려 갔다는 내용이어서 받는 충격보다 더 큰 황당함과 허무함이 있었습니다. 표지판을 읽어보았어요. 대체 왜 이게 숲이고 전국에서 가장 예쁜지 그 이유를 반드시 알아야만 했어요.


-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숲으로 선정. 현재 조성중-


위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어요. 하여간 할 말을 완벽히 잃어버렸습니다. 사진을 찍고 말고도 없었어요. 너무 허무해서 화장실을 찾아 갔습니다. 아까부터 참아오던 고통이 허무함과 황당함으로 인해 너무 박진감 넘치게 느껴졌거든요. 대곡숲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을 본다는 기대에 모든 신경이 쏠려 있었어요. 배의 통증은 대곡숲에 대한 기대로 잊어버릴 수 있었어요. 그러나 대곡숲의 기대가 사라진 지금, 남은 것은 통증밖에 없었어요. 꽤 오래 참아서 많이 아팠습니다.



대곡숲에 화장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친구에게 대충 짐을 맡기고 엄청난 속도로 달려갔어요.


나름 그럴듯한 화장실의 외관. 그러나 문을 열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전통 푸세식 화장실의 개조형. 이것까지는 좋아요. 참을 수 있어요. 그러나 정말 환상의 대곡숲이라는 기대를 환장의 대곡숲이라는 현실로 바꾸어 버린 것은...


휴지가 없다!


끄으으응

돈과 시간, 체력을 모두 쏟아부어 획득한 결과가 소나무 몇 그루, 정자 한 채, 폐교 비슷한 건물 한 동, 다리 한 개, 과수원과 밭, 휴지 없는 푸세식 화장실. 이런 허무한 상황에서 저는 나약한 인간. 불완전한 존재. 기를 모아 고통을 이겨내야 했어요. 조금만 방심해도 터질 것만 같은 긴장감이 있었어요. 불평불만을 마음껏 늘어놓을 때가 아니었어요. 주변을 둘러보니 화장실이라고는 위의 휴지 없는 푸세식 화장실이 전부였고, 휴지를 빌릴 곳은 아무 곳도 없었어요.


이제 가자.”

결국 통증을 해결하지 못하고 힘없이 화장실에서 걸어 나왔어요. 그러나 저의 아랫배만큼은 힘찬 생동감이 넘쳐흐르고 있었어요. 이제 모든 신경은 빨리 공항 가서 화장실로 달려가는 것에 쏠려 있었어요. 대곡숲이 허무하다는 것을 제대로 음미할 정신도 없었어요.



대곡숲의 정자를 뒤로 하고 길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버스 따위는 절대 지나갈 것 같지 않았어요. 친구와 길에 서서 어떻게 할 지 생각하고 있는데 어떤 꼬마가 우리를 향해 걸어왔습니다.

...힘들다!”

너 어디에서 여기까지 걸어왔어?”

사천에서부터 걸어왔어요. 걸어서 한 시간쯤 걸렸어요.”

할 말 잃음.

--

생각은 이렇게 정리되었어요. 일단 걸어가는 것은 무리. 저는 다시 한 번 히치하이킹에 도전했고, 친구는 그런 저를 말리며 자기가 돈을 낼 테니 콜택시를 타자고 했습니다. 친구가 너무 간곡히 말리는 바람에 차를 몇 대 잡기 위해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친구가 콜택시에 전화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


기적은 있어요! 몇 번이고 기적은 있어요!


제가 거리에서 차를 얻어 타기 위해 손을 흔드는 것을 본 마을에서 나오던 트럭이 우리 옆에 멈추어 서더니 타라고 했습니다. 하늘은 이렇게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마지막 콜택시를 타고 갔다면 친구가 원하던 지극히 정상적인 여행. 그러나 차를 얻어 탐으로서 이 여행은 최소한 인간적인 여행에서 구걸의 단계로 떨어져 버렸어요. 마지막 사천 여행을 무사히 정상적으로 마침으로써 정상적 여행으로 만들려 했던 친구의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어요. 10분 지옥 하동, 차 얻어 탄 남해에 이어 차 얻어 탄 사천. 정말 마지막 끝내기 쐐기포 만루 홈런. 친구는 패배의 얼굴. 저는 승자의 미소. 트럭 안에서 친구는 콜택시를 취소했습니다. 친구 말로는 콜택시 불렀는데 그 회사 택시가 그냥 지나쳤다고 하더군요. 어쨌든 하늘의 도움으로 저는 승자가 되었고, 교통비도 아끼게 되었습니다.


어느 댁 친척분이세요?”

저희는 여기 대곡숲 보러 온 관광객이에요. 사천시 홈페이지 들어가 보니까 대곡숲이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이라고 나와 있기에 제주행 비행기 타러 사천 온 김에 대곡숲 보러 왔었어요.”


트럭에 태워주신 분께서는 우리가 마을 주민의 친척인줄 알고 태워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아저씨께서는 우리의 대답을 듣더니 이 숲에 볼 것이 무엇이 있다는 것이지?’라는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트럭을 얻어 타게 되었고, 우리의 목적지가 공항이라고 하자 아저씨께서는 공항에는 안 들어가고 대신 공항 입구에 세워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운전하시는 분 옆에 앉은 운전자의 두 자녀분께서 비행기와 공항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시여서 아저씨께서 공항 입구에 내려 주셨어요.



사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친구에게 제 디지털 카메라의 메모리카드를 넘겨주고 화장실로 달려갔어요. 마지막이 좋으면 다 좋은 것. 무사히 사천공항에 도착했고, 화장실에 갈 수 있었어요.



진주-사천 공항 내부. 타는 곳이 왼쪽에 보이는 문밖에 없는 작은 공항. 자주 이용하는 제주공항과 김포공항에 비하면 매우 작은 공항이었습니다. 금요일이라서 그런지 제주행 탑승자가 꽤 많았습니다. 좌석을 창 쪽 좌석으로 체크하고 느긋하게 친구가 동영상 작업하는 것을 구경하다가 밖에 나가서 담배를 태우는 행동을 반복했어요. 친구는 원래 이번 여행에서 찍은 사진들을 한데 모아 꽤 화려한 동영상으로 만들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시간관계상간단한 동영상으로 편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동영상을 만들어준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고마웠어요.


시간이 되어서 탑승하러 들어갔어요. 소지품 및 몸 검사를 하는 검사대 앞에 서서 능숙하게 짐을 올려놓고 외투를 벗으려고 했습니다. 항상 공항에서는 외투를 벗으라고 해서 아예 자잘한 물건들은 외투 주머니에 넣고 소지품 및 몸 검사를 받으러 가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했어요.


외투 벗지 마시고 소지품은 바구니에 넣어 주세요.”

뭐라고?!

외투 양쪽 주머니는 물론 안주머니에까지 뭔가 잔뜩 집어넣은 상태. 일일이 빼려고 하는데 자잘한 것도 많고 종이조각도 많아서 쉽게 나오지 않았어요. 뒤에 사람들이 계속 꾸역꾸역 들어와서 대충 주머니에 1/3 정도 넣고 검사대에 올라갔습니다. 어차피 금속류만 아니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데 문제는 라이터를 못 빼냈다는 것이었어요.


당연히 삐빅하고 양쪽 주머니에서 경고음이 울렸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주머니에 있던 열쇠와 라이터 두 개를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라이터는 한 개 이상 소지하시고 들어가실 수 없으니 하나 파기하셔야 합니다.”

제주공항과 김포공항을 비롯해 다른 공항들에서는 없는 탑승 조건이었어요. 다른 공항에서는 라이터 두 개 정도는 그냥 들고 탈 수 있거든요. 물론 주머니에 라이터를 넣고 몸수색을 받은 적은 없지만요. 주머니에 라이터 넣고 몸수색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어쨌든 라이터를 한 개 버리고 비행기에 올라탔습니다.



비행기 내부입니다. 저는 줄을 일찍 서서 다섯 번째 정도로 탔습니다. 짐 검사와 몸수색 후 탑승 대기하는 곳에서 좌석이 없어서 그냥 서 있었는데 그 덕분에 매우 일찍 타게 되었습니다.



비행기에서 바라본 진주-사천공항입니다. 참고로 진주-사천공항은 군사공항의 일부분을 민간공항으로 빌려 쓰는 것이기 때문에 사진촬영을 하지 말아달라는 방송이 나옵니다.


사천에서 제주까지는 약 50분 정도 걸립니다. 타러 들어가고 착륙 후 내리는 시간까지 다 하면 50분 정도이지만 실제 공중에 있는 시간은 약 40분 정도에요. 비록 밤이었지만 매우 맑아서 지상의 야경을 볼 수 있어 즐거웠어요. 조선소도 보았고, 그 외 이것저것 많이 보았습니다. 육지의 풍경을 조금 보다 바다가 나왔는데, 밤이어서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비행시간이 짧다보니 지루할 틈도 없었어요. 대한항공 비행기를 타고 갔는데, 좌석 앞에 꽂혀 있는 잡지를 보고 음료수가 나왔습니다. 음료수가 승객 모두에게 돌아가기도 전에 곧 착륙한다는 방송이 나왔어요. 정말 빠듯했어요. 언제 다시 올라올지 기약할 수 없는 육지에서 제주로 돌아가는 것이 너무 빨라 기분이 참 묘했습니다. 보통 비행기를 타면 온갖 짜증과 함께 빨리 착륙하기만을 비는데 이날만큼은 비행기가 빨리 착륙하는 것을 빌지 않았어요. 오히려 너무 빨리 가서 많이 아쉬웠습니다.



드디어 제주도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제주항이 보였습니다. 왜 그렇게 나는지 잘 모르지만 항상 제주로 오는 비행기는 동쪽으로 한참 갔다가 서쪽으로 한참 가서 U턴해 착륙해요. 낮이라면 정말 멋진 제주 전경을 찍을 수 있었겠지만 밤이라서 이 정도의 야경도 감지덕지. 이걸 찍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신기했어요. 그 뒤에도 많이 찍었지만 다 버려야 했어요. 이것도 잘 나온 사진은 아니지만 그나마 잘 나온 사진이에요.



그리고 드디어 제주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왼쪽에 보이는 불빛이 관제탑과 제주공항입니다. 참 긴 여행이었어요. 비록 45일의 일정이었지만 참 열심히 돌아다니고 참 많이 버스와 기차를 놓쳤어요. 정말 기억이 많이 남는 여행이었어요.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에요.


제주공항에 도착해 집에 가는 버스에 올라타 집에 전화했어요.

저 제주 도착해서 버스 탔어요.”

벌써? 아빠가 너 데리러 간다고 오늘은 일찍 퇴근하셨는데?”

아버지께서 요새 밤 10시 넘어서 퇴근하시다보니 집에 혼자 들어갈테니 공항으로 마중나오시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이날은 제가 내려온다고 일찍 오셨지만, 저는 비행기 탑승중이라 전혀 그 소식을 접할 수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친구가 받아준 쵸비츠를 틀었습니다.


뭔가 이상하다.

이건 이상한 정도가 아니다. 매우 이상하다.

왜 다 영어로 이야기하지?

그리고 왜 아래 자막이 영어로 나오지?

자막 영어와 대사 영어가 안 맞는 이유는 뭐지?


쵸비츠는 분명히 일본 애니메이션이에요. 그런데 모든 대사가 영어로 나오고 있었어요.


이거 영어 더빙이다!


친구에게 이 사실을 문자로 보냈더니 친구에게서 답이 왔어요.


ㅋㅋㅋ확인할걸ㄷㄷㄷ


마지막까지 이러는구나. 한숨을 내쉬며 옥상에 올라가 담배연기를 내뿜었어요. 정말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 내 고향. 정말 시간이 멈추어버린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자고 나서 옥상에 다시 올라오면 허무함이 떠오르고 여행했던 시간이 지극히 평범했던 나의 시간 속에 들어온 이질적인 덩어리로 보이겠죠. 어쩌면 서울생활에서 제주생활로 다시 바뀌면서 생활의 변화에서 느끼는 충격으로 인해 아무 것도 못 느낄 수도 있겠죠. 하지만 5일의 시간이 짧게 느껴질 것 같지는 않았어요. 사실 돌이켜보면 입학과 입대, 전역, 그리고 졸업까지 6년이라는 시간동안 일어난 일들 모두를 가까운 과거의 일처럼 느끼고 있어요. 이것은 아마 몇몇 특별한 일을 제외한 나머지 날 대부분은 지루하고 똑같은 날의 반복이라 무한의 덮어쓰기가 진행되어서 그런 것이겠죠. 그러나 이 5일은 그런 무한의 덮어쓰기라는 제가 제어할 수 없는 제 두뇌의 작업에서 작업의 대상으로 선정되어 잊혀질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절대 잊을 수 없는 여행은 끝났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