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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출판사 세계어학 시리즈 - 알기쉬운 불가리아어 입문

좀좀이 2019. 1. 21.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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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리뷰할 외국어 학습교재는 명지출판사 세계어학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알기쉬운 불가리아어 입문이에요.


개인적으로 이 책에는 얽힌 이야기가 있어요.


꽤 오래전이에요. 지금으로부터 10년도 훌쩍 넘은 이야기에요.


저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 중 러시아어를 잘 하는 사람이 몇 명 있었어요. 이들 모두 러시아에서 대학교를 다닌 사람들이었어요.


이 당시 저는 여러 외국어에 관심이 많았어요. 당연히 러시아어에도 관심이 있었어요. 사람들이 러시아어가 어렵다는 말을 많이 해서 대체 얼마나 어려운지 한 번 도전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러나 이 당시, 러시아어 교재는 얼마 없었어요. 지금처럼 유투브가 발달해서 유투브 보며 러시아어를 익히는 것도 가능하지 않던 시절이에요. 러시아어 학원도 제대로 없을 때였어요. 러시아어 공부해보고 싶다고 하면 러시아어 어렵다는 말만 돌아올 뿐이었어요.


그래서 러시아어를 잘 하는 지인들에게 러시아어를 공부해보고 싶은데 혹시 도와줄 수 있냐고 물어보았어요. 모두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면서 제게 러시아어는 키릴 문자를 사용하니 키릴 문자를 먼저 외워야한다고 했어요. 이 러시아어를 아는 지인들 중 하나가 키릴 문자와 '교과서적인 발음 설명'을 인쇄해서 제게 주었어요. 이것을 외우라고 했어요.


키릴 문자를 외웠어요. 금방 다 외웠어요. 글자 외우는 건 상당히 쉬웠어요. 집중해서 외우니 반나절 채 안 걸려서 다 외웠어요. 한자처럼 그 수가 무지막지하게 많은 것도 아니고, 글자 외울 게 막 많지도 않았거든요. 제가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에요. 어지간한 표음문자는 정상적인 성인이라면 하루면 다 외워요. 그 어렵다고 하는 아랍문자조차요. 이걸 지레 겁먹고, 또는 귀찮으니까, 또는 이런저런 핑계대고 집중을 하나도 안 하니 작정하고 끝내려고 하면 금방 끝낼 것을 질질 끌어서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일주일이 되고 일주일이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일년이 되고 하는 거죠.


"저 키릴 문자 다 외웠어요."

"뭐?"

"그러면 이제 뭐 공부하면 되요?"


제가 키릴 문자 외우는 데에 시간이 엄청 걸릴 줄 알았나봐요. 모두가 경악했어요. 키릴 문자가 인쇄된 종이 준 다음날 다 외워왔으니까요. 러시아어를 알던 지인들 모두 제가 종이 받은지 하루만에 키릴문자를 다 떼었다는 사실에 두 눈이 휘둥그레해졌어요. 제게 키릴 문자를 읽어보라고 시켰어요. 당연히 읽었어요.


그걸로 끝이었어요. 글자를 다 외웠더니 그 다음부터 차일피일 미루기 시작했어요. 제가 글자 외우다 나가떨어질 줄 알았나봐요. 내일 알려줄께, 모레 알려줄께 계속 뒤로 미루기만 했어요. 자기들이 러시아어 알려줄 때 쓰던 한국어로 된 교재가 있다고 했는데 그 교재가 뭐지도 알려주지 않았어요. 그게 뭔지나 알려줬으면 제가 구입해서 독학이라도 할 텐데요.


키릴 문자 외운 게 억울했어요. 글자는 이제 다 아는데 정작 그 글자를 써먹을 일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서점에 갔어요.


알기쉬운 불가리아어 입문.


책을 펼쳤어요. 키릴 문자였어요. 게다가 불가리아어는 명사 격변화도 없었어요. 이거라면 독학해볼 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구입했어요.


책을 조금씩 보아나가면서 러시아어를 가르쳐주겠다고 했다가 차일피일 미루기만 한 그 사람들에게 불가리아어로 된 글을 구해서 보여주고 이거 러시아어라는데 뭐냐고 물어보았어요. 그때마다 그 사람들은 인상을 박박 쓰고 읽어보다가 '이거 러시아어 아니지?'라고 되물었어요. 그 사람들이 인상을 박박 쓴 이유를 나중에 알게 되었어요. 불가리아어와 러시아어는 비슷한 점이 꽤 많다보니 러시아어를 알고 보면 왠지 알 수 있을 거 같아보인대요. 글자도 키릴 문자를 사용하니 대충 보면 러시아어 같은데 막상 제대로 보면 뭔가 많이 이상하대요. 어떤 건 알겠고 어떤 건 또 모르겠고 해서 인상을 찌푸리게 되었대요. 사실 비슷한 점이 별로 없다면 인상 찌푸릴 것 없이 바로 보고 '이거 다른 말이네'라는 반응이 나오죠.


명지출판사 세계어학 시리즈 알기쉬운 불가리아어 입문은 꽤 오랫동안 우리나라에서 한국어로 된 유일한 불가리아어 교재였어요. 한국외국어대학교에 그리스-불가리아 학과가 생기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책이에요. 이후 불가리아어 교재가 하나 나왔고, 그 이후에 최근에 ECKBOOKS 에서 'The바른 불가리아어 첫걸음'이라는 책을 출간했어요. 그 이전까지 불가리아어를 공부하고 싶다면 선택의 여지 없이 이 책을 봐야 했어요.


명지출판사 세계어학 시리즈 알기쉬운 불가리아어 입문 책은 이렇게 생겼어요.


명지출판사 세계어학 시리즈 - 알기쉬운 불가리아어 입문


한결같이 똑같은 디자인이에요.


머리말


머리말이 아주 간단하고 짧아요.


머리말 다음에는 이 책에 대한 안내가 있어요.


교재 설명


교재 설명 중 '3. 텍스트' 내용을 보면 테이프도 있다고 나와 있어요. '테이프에서는 아주 천천히 읽는 것과 보통의 속도로 읽는 텍스트가 녹음되어 있으므로 듣기와 읽기 연습에 활용하도록 한다.'라는 문장이 있거든요.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이 책에는 원래부터 테이프가 없었다는 거에요. 이 책의 원서에는 테이프도 같이 있었나봐요. 여기에서부터 뭔가 삐그덕거리기 시작해요.


목차는 아래와 같아요.





역시나 문법 사항이 아주 빼곡히 담겨 있어요.


불가리아어 문자


목차 다음에는 불가리아어 문자 및 발음이 나와요. 자음 분류 및 자음 동화 설명도 나와요.


그리고 그 다음에 본문이 시작되요.


불가리아어 입문


1과부터 8과까지는 불가리아어 지문 아래에 한글로 발음이 적혀 있어요.


1과 지문을 보면 커피를 권하는 내용이에요. '이것은 무엇입니까?'도 아니고 '안녕하세요'도 아니에요. 상당히 독특한 1과에요. 그래도 불가리아어로 '고맙습니다'라는 표현인 благодаря 를 배울 수 있어요.


그리고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삽화가 아예 없어요. 다른 시리즈를 보면 최소한 본문 아래에 삽화 하나는 있는데 이건 그 어디에도 그림이 단 한 개도 없어요.


불가리아어 단어


본문 옆에는 단어와 본문 해석이 있어요. 그리고 그 뒤에는 문법 설명이 있어요.


불가리아어 문법 설명


각 2과마다 연습문제가 있어요.


불가리아어 연습 문제


연습문제 맨 마지막에는 불가리아 문화에 대한 설명이 있어요. 바로 위의 사진은 맨 처음 연습문제에요. 보면 불가리아인들은 '예'라고 대답할 때 고개를 가로젓고, '아니오'라고 대답할 때 고개를 끄덕인다는 설명이 있어요. 저도 저걸 보고 설마 저러겠나 했는데 불가리아 가보니 진짜 저래서 놀랐어요. 그런데 이게 조금 많이 햇갈려요. 불가리아인들도 자기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과 '예', '아니오' 고개짓을 반대로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거든요. 그래서 외국인들 위한다고 외국인한테 대답할 때 '예'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니오'는 고개를 가로젓는 불가리아인도 있고, 자기들 원래 방식대로 '예'는 고개를 가로젓고 '아니오'는 고개를 끄덕이는 불가리아인도 있어요.


이 책 지문은 명수, 수미, 돈까, 비딴, 뻬떠르 - 이렇게 다섯 명의 이야기에요. 읽다 보면 재미있는 지문들이 나와요.


예를 들면 10과는 이래요.


불가리아어 10과


3월 8일이라고 뻬떠르가 수미에게 꽃을 줘요. 꽃을 주며 하는 말이 상당히 근사해요.


"Пожулавам ти да бъдеш най-радостното и щастливо момиче в света."

"네가 이 세상에서 제일 기쁘고 행복한 소녀였으면 하고 바라고 있어."


그런데 왜 3월 8일에 꽃을 줘? 수미 생일이 3월 8일인가?


왜 3월 8일에 꽃을 주는지 그 어떤 설명도 언급도 없어요. 그냥 3월 8일이니까 꽃을 준대요. 사실 3월 8일은 여성의 날로, 과거 공산권 국가에서는 이 날을 크게 기념해요. 남자들이 주변 여성들에게 꽃과 선물을 주는 날이에요. 수미가 3월 8일에 꽃을 받은 이유는 뻬떠르가 수미를 좋아해서도 아니고 그날이 수미 생일이라서도 아니에요. 여성의 날이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 책만 봐서는 절대 알 수 없어요.


불가리아어 지문 내용


이 지문도 재미있어요. '비딴'이라는 남자와 '돈까'라는 여자가 집에서 같이 식사하기로 약속했어요. 그런데 비딴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토내었어요. 당연히 돈까는 머리 끝까지 화났죠. 하지만 비딴이 돈까를 위해 특별히 사과, 포도, 배를 샀다는 말에 돈까가 기분을 풀어요.


페터르


뻬떠르는 몰래 여자를 만나다 수미에게 걸리고, 한국인들이 안경 낀 모습을 스스로 별로 좋게 여기지 않는다는 내용도 나오는 지문이에요. 이 교재가 우리나라에서 독자적으로 만들었을리는 없고, 일본인들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안경 낀 자기 모습을 썩 좋아하지 않나봐요.


여기까지 글을 읽으셨다면 이 책의 문제가 무엇인지 눈치채셨을 거에요.


빠진 내용이 너무 많아!


이 책을 쭉 봐가며 제가 느낀 것은 혼돈의 카오스라는 것이었어요. 빠진 내용이 너무 많았어요. 설명이 적당히 빠져 있어야 하는데 너무 뭉텅이 뭉텅이 빠져 있어요. 그래서 책을 봐나갈 수록 '그럼 이건 뭐지?'라는 생각이 점점 더 극심해져요. 게다가 한국인이 이해하기 상당히 어려운 내용 설명도 아주 간략하게 설명하고 끝내요. 그 설명이 제대로 된 명쾌한 설명이라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 설명해줘야 할 내용을 뭉텅이로 빼고 분량을 통편집해 만든 것에 가까워요. 그래서 읽어도 그게 뭔 말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요.


이후 한참 뒤에 러시아어를 조금 공부했어요. 그 후에 이 책을 봐도 설명만 봐서는 뭔지 알 수가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아요. 명지출판사 세계 어학 시리즈 중 가히 최악이라고 해도 될 정도에요. 이 책을 끝까지 다 보고 여기 수록된 모든 내용을 이해했다면 그 사람은 둘 중 하나에요. 러시아어든 뭐든 슬라브어 계통을 하나 공부한 경험이 있거나, 아니면 거기에 빠진 내용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고 있거나요.


그런데 정작 이 책은 명지출판사 세계어학 시리즈 중 제 인생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책이에요.


7박 35일로 발칸 유럽을 여행할 때였어요. 이 책으로 불가리아어를 공부해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키릴 문자는 완벽히 다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발칸 유럽 여행하는 동안 글자 못 읽어서 불편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이 책을 보며 키릴 문자에 매우 충분히 적응되어 키릴 문자를 라틴 문자 읽듯 매우 편하게 읽었거든요.


게다가 이 책을 보며 불가리아어를 공부한 경험이 있어서 발칸 유럽 돌아다닐 때 상당히 큰 도움을 받았어요. 제가 다녔던 때에는 아직 발칸 유럽에서 영어가 잘 안 통할 때였어요. 그래서 짧은 현지어를 해야만 했어요. 그래도 이 책으로 불가리아어를 공부한 적이 있어서 여행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필수 현지어를 매우 빨리 외울 수 있었어요. 야간 이동하는 동안 여행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필수 현지어를 싹 다 외우고, 여기에 불가리아어 단어를 섞어가며 이야기하며 돌아다녔어요. 만약 이 책으로 불가리아어를 조금이라도 공부하지 않았더라면 7박 35일 여행 당시 언어 문제 때문에 엄청 고생했을 거에요.


게다가 불가리아 여행 중, 어디 가야할지 전혀 몰랐지만, 단 한 곳만큼은 꼭 가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그것은 바로 벨리코 터르노보였어요. 교재에 언급되거든요. 그 도시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벨리코 터르노보에 갈 수 있었어요.


좀좀이의 여행 7박 35일 여행기 : 링크


그래서 명지출판사 세계어학 시리즈 알기쉬운 불가리아어 입문은 불친절하고 부실한 면에서 이 시리즈 최정상이지만, 이 시리즈 책 중에서 제 인생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책이기도 해요. 이 책 보며 욕도 많이 하고 머리를 쥐어뜯고 했지만, 어쨌든 이 책 갖고 불가리아어를 조금이라도 공부했던 기억 덕분에 7박 35일 여행 당시 현지어를 금방금방 외우고 말하며 다닐 수 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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