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슬로베니아는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아요. 그래서 버스느 반드시 크로아티아를 통과해야만 해요. 구 유고 연방 국가 가운데 그 어떤 나라도 크로아티아를 거치지 않는 한 슬로베니아에 갈 수 없어요.
좋게 생각한다면 여권에 도장을 추가로 찍을 수 있는 기회이기는 해요. 여권에 도장이 두두두두 찍혀 가는 것을 볼 때마다 뭔가 기분이 좋기는 한데 이거는 솔직히 뻥치는 느낌이 있는 도장이에요. 그래도 안 찍어주는 것보다는 2개고 3개고 마구 찍어주는 것이 훨씬 좋은 것은 사실이었어요.
야이체를 지나자 더 이상 창밖 풍경을 보고 싶지 않았어요. 야심한 시각에 창밖에 보이는 것은 야경인데 불빛이 없으니 보이는 게 없었어요. 그냥 시커먼 창밖을 보느니 눈이라도 조금 붙이는 것이 낫겠다 싶었어요.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오듯 하루 숙소에서 잘 자고 잘 씻었다고 야간 이동이 끝나는 게 아니었어요. 그저께 했던 야간 이동 오늘 또 하고 있고 보나마나 내일도 또 야간 이동이었어요. 괜히 버스에서 뻘짓 하다가 잠을 못자면 다음날 일정이 피곤한 정도가 아니라 모레 일정을 아예 송두리째 망쳐버릴 수도 있었어요.
잠이 들었다 싶었는데 누군가 저를 툭툭 쳤어요. 졸려서 떠지지도 않는 눈을 겨우 떴어요.
"패스포트!"
여권을 내라고 하는 줄 알고 셔츠 단추를 푸르고 목걸이 지갑을 꺼냈어요. 그런데 여권을 걷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우루루 버스에서 내렸어요.
"아놔, 이 크로아티아...진짜 여행 도와주는 법이 없네."
후배를 흔들어 깨웠어요.
"왜요?"
"국경 심사요. 내려야 해요."
내려서 크로아티아 입국심사를 받았어요. 다행히 별 것 없었어요. 입국심사를 받고 다시 버스에 올라탔어요. 자다가 또 깨어나야 했어요. 이번에는 크로아티아 출국심사와 슬로베니아 입국심사였어요.
아침 7시,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에 도착했어요. 밤새 두 번이나 버스에서 내려서 입국심사 및 출국심사를 받아서 엄청나게 피곤했어요. 버스에서 내려서 심사받으니 잠이 확 깨었고, 겨우 잠들면 이번에는 휴게소라서 잠이 깨었고, 또 겨우 잠들면 또 심사 받으라고 내리라고 했거든요.
"오빠, 그냥 파리 가요."
베오그라드행 버스는 꽤 많았는데 후배가 파리로 가자고 했어요. 그래도 뭔가 망설여지는데다 졸려서 생각이 제대로 되지 않았어요. 파리 가는 것은 뭔가 내키지 않았고 비용도 엄청나게 많이 나올 것 같아서 일단 베오그라드행 버스표를 사고 수하물 보관소에 짐을 맡겼어요.
"저 자판기 뭐지?"
사과 자판기였어요. 장난감 사과인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진짜 사과였어요. 와...유로피안들은 과일 먹는 걸 매우 즐기는구나!
"하나 먹을래요?"
저는 사과를 안 좋아해요. 신 맛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무조건 싫어해요. 귤 같은 건 최악이고 사과도 셔서 싫어해요. 제가 먹는 과일은 참외, 수박처럼 신 맛이 하나도 없고 엄청나게 단 과일들이에요. 사과 자판기를 보니 신기해서 한 번 이용해보고 싶은데 저는 사과를 싫어하므로 사서 버릴 수는 없어서 이용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후배는 시큼한 맛을 좋아한다고 했어요. 게다가 후배는 과일이라면 무조건 좋아한다고 했어요.
"진짜 사과 자판기네요?"
"하나 먹어요. 아침에 과일...완전 딱이네!"
그래서 사과 한 개를 뽑아주었어요. 죽은 사과가 나와도 신기할텐데 진짜 살아있는 사과가 나왔어요. 후배는 아침부터 과일 먹는다고 매우 좋아하며 받아서 갉갉갉 먹기 시작했어요.
"오빠, 이거 뒤에는 썩었는데요?"
후배가 사과를 먹다가 뒤쪽을 보여주었어요. 진짜 썩어 있었어요. 이놈의 자판기, 반 죽은 놈을 팔고 있네. 무슨 땡처리 자판기냐? 이거 속박기 사용하네...연장 가져와야 쓰겠다! 어디서 밑장빼기 응용 기술을 쓰고 있어?
와...유로피안들은 반 썩은 과일 먹는 것을 매우 즐기는구나...이거 환상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네...
후배가 사과를 다 먹자 버스 터미널에서 나왔어요. 표지판을 보니 대충 어디로 가야할지 보였어요.
일단 건물은 매우 깨끗하고 거리도 깔끔했어요. 그러나 발칸 유럽의 냄새가 강하게 나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그냥 걸을만한 거리였어요.
"벌써 성수태고지 교회야?"
여행책자에 나온 지도를 보며 걷고 있는데 버스 터미널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성수태고지 교회 (Church of the Annunciation)이 나왔어요. 이게 분명 벌써 나오면 안 되는데 벌써 나오다니...내가 오늘 힘이 넘치나?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축지법을 사용했나? 믿을 수가 없었어요. 10일간의 야간이동을 해서 초능력이 생겼나 봐요.
뭔가 이상해서 지도 축적을 보았어요. 단위당 300m였어요. 버스 터미널에서 성수태고지 교회까지는 약 800미터 거리. 초능력을 쓴 것도, 제가 힘이 넘친 것도 아니었어요. 정말 정상적인 속도로 걸어서 여기 도착한 것이 맞았어요.
광장에 있는 동상이에요.
이것이 성수태고지 교회 정면이에요. 아직까지는 무언가 큰 특징이 있다기 보다는 그냥 평범한 유럽 도시라는 인상이 강했어요. 다른 발칸 유럽들의 도시와는 확실히 다르기는 했어요. 문제는 제가 좋아하는 풍이 아니라는 것이었어요. 이것과 비슷한 모습은 방송과 책으로 매우 많이 보았기 때문에 큰 자극이 없었어요. 당장 알파벳만 해도 그래요. 슬로베니아어 알파벳은 이렇게 생겼어요.
저 글자 중 무언가 눈에 확 띄는 글자는 하나도 없어요. 보스니아어, 크로아티아어, 세르비아어에서 사용하는 ć와 đ 처럼 보자마자 '여기는 유고슬라비아'라고 하는 글자가 없어서 시각적으로 일단 별로였어요. 슬로베니아어는 다른 구 유고 연방 언어들과는 꽤 다르다고 해요. 그래서 보스니아어, 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는 묶어서 BCS라고 하고 다른 언어로 인정도 안하는데 슬로베니아어와 이 세 언어가 같다고 하는 경우는 많이 않아요. 거리에 적힌 것들을 보니 확실히 뭔가 다른 것 같기는 했어요. 그래도 기분은 정말 사탕 먹고 식혜 마시는 기분이었어요.
20분만에 역에서 성수태고지 성당까지 와 버렸다는 데에 어이가 없었고, 첫 인상이 독특하거나 강렬한 것도 없었어요. 게다가 유로존. 아직 생각만큼 강렬한 것이 없었지만 시내로 들어가면 매우 강렬한 무언가가 나올 거라고 기대했어요.
"익스큐즈 미."
"아...예스."
한 예쁜 아가씨가 제게 말을 걸었어요. '노'라고 했다가는 슬로베니아어로 물어볼 거 같고, 간단한 영어야 어떻게 손짓 발짓으로 하면 되기 때문에 일단 '예스'라고 했어요.
"캔 유 스피크 잉글리시?"
"아...예스."
"저는 류블랴나 라디오 방송국의 리포터에요."
설마 여기서 나의 인기가 폭발하는 건가? 맨날 노안 소리 듣는 내게 한 줄기 광명이 찾아오는 것인가? 내가 여기 와서 방송인과 대화까지 해보는구나! 방송인이 나한테 관심 있는 거야? 슬로베니아에 대한 호감이 급상승했어요.
"솰라솰라 뭐라고 샬랴샬라 인터뷰 불라불라?"
"왓?"
대충 길 물어보거나 동양인이 신기해서 말 거는 거 아닌가 했는데 '인터뷰' 말고는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급히 후배를 찾았어요. 저 아가씨가 영어를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영어를 못 했기 때문에 더욱 난처한 상황이었어요. 아가씨는 제게 마이크까지 들이대었어요. 우스갯소리로 귀신보다 살아있는 영어 쓰는 외국인이 더 무섭다고 하는데 살아있는 영어 쓰는 외국인이 진짜 방송 인터뷰할 때 사용하는 큰 마이크를 제게 들이대니 이건 귀신보다 더 무서운 외국인이었어요. 아가씨 옆에는 꽤 비싸 보이는 녹음 장비를 들고 있는 아저씨가 서 있었어요.
"지금 뭐라고 하는 거에요?"
후배에게 급히 물어보았어요.
"류블랴나 관광하면서 부족한 점이나 단점 말해달라는데요?"
우리 이제 여기 온지 30분 되었어!
아침 일찍부터 열심히 돌아다니는 리포터와 녹음 기사의 직업 정신을 높게 사서 성의껏 말해주고 싶었지만 일단 이건 제 영어 실력이 안 되니 불가능. 그래도 이건 옆에 영어를 잘 하는 후배가 있었기 때문에 후배에게 제가 느낀 점 몇 마디 해주면 되는 일이었어요. 그러면 후배가 자기가 느낀 것과 제가 말한 것을 적당히 조합해서 영어로 인터뷰를 했겠죠.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구경한지 30분 되었다는 것이었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내린 그 순간부터 30분 되었어요. 아무리 날림으로 보고 빨리빨리 보고 매일 다른 도시를 돌아다녀서 무슨 능력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30분만에 도시 하나를 다 파악하는 것은 무리에요. 여기가 유로존인 것이 불만이기는 했지만 아침부터 지금까지 쓴 돈이라고는 사과 산 것과 베오그라드행 버스표 2장 산 게 전부였어요. 유로를 써서 물가가 비싼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었어요.
"우리 여기 온지 이제 30분 되었다고 말해요."
후배가 리포터에게 영어로 뭐라고 솰라솰라 샬라샬라 이야기를 했어요. 리포터는 알았다고 하더니 우리에게 좋은 여행 하라고 말하고 갔어요.
여기가 바로 3다리 앞. 다리 세 개가 모두 한 지점으로 연결되어요.
강을 따라 계속 걸었어요. 계속 걸어가면 뭔가 나올 것 같았어요.
봄이 오긴 왔나 봐요. 거리에서 꽃을 내놓고 팔고 있었어요.
무언가 볼만한 것이 나올 거라 믿으며 계속 걸었어요.
"저거 뭘 매달아 놓은 거야?"
새장에 새는 안 들어있고 사람 해골 인형이 들어 있었어요. 저거 웃자고 달아놓은 건가? 웃기는 웃었어요. 어이없어서요.
버드나무에 꽃이 폈어요. 이제 저 꽃이 우수수 떨어지면 길다란 푸른 잎이 나오겠죠. 그래요. 이제 봄이에요. 날씨가 이렇게 우중충하더라도 봄은 봄이에요.
뭔가 있어보이는 건물을 지나 계속 걸었어요. 걷다보니 성이 있다는 표지판이 나왔어요.
성이 엄청나게 멀 줄 알았는데 성 입구까지는 생각보다 멀지 않았어요. 정말 어떤 것을 상상하든 그것보다 가까운 류블랴나.
"저거 봐요!"
길 위로 집이 있었어요. 그냥 복도로 지어놓은 것 같지는 않았어요. 정말로 방이 있고 사람이 사는 집 같았어요.
"저런 집에서 살면 기분이 어떨까요?"
길바닥 위에서 산다고 하는데 저 집에 사는 사람은 진짜 '길바닥 위에서' 사는 사람이에요.
성으로 가는 길이라고 해서 길을 따라 걸었어요.
이렇게 생긴 길을 계속 따라 올라가자
드디어 성 입구가 나왔어요.
"아...힘드네."
별로 힘든 길 같지도 않았는데 은근히 힘이 들었어요.
성에서는 류블랴나를 내려다볼 수 있었어요.
성에 있는 동상. 무슨 동상인지 모르겠어요. 총을 들고 있으면 대충 2차 세계대전 당시 활동한 파르티잔 동상이겠거니 지레짐작할텐데 이건 총도 없으니 무엇을 기리기 위해 세운 동상인지 알 수 없었어요.
류블랴나 성을 보는 것보다 류블랴나를 내려다볼 수 있다는 것이 더 좋았어요.
내려다본 류블라냐의 모습은 그냥 밋밋했어요. 무언가 강렬한 인상을 주는 풍경은 아니었어요.
입구에 있던 큰 건물이에요.
둥글둥글한 언덕 뒤로 성벽이 보였어요.
윈도우 XP 바탕화면처럼 생긴 언덕 뒤로 보이는 류블랴나 풍경.
성에서 내려가서 가야할 곳이 보였어요. 다음에 가야할 곳은 바로 저 교회.
유고슬라비아에서 공업이 발달한 도시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공장 굴뚝도 보였어요. 하지만 공장 굴뚝에 감명 받을 리는 없었어요. 공장 굴뚝이라면 우리나라도 많이 있어요.
더욱이 성 곳곳이 보수 공사중이었어요. 성을 사진으로 찍어오고 좀 더 많이 돌아다녀보고 싶었지만 대부분이 공사중이라 사진 찍을 것도 없었어요.
성에 있는 윈도우 바탕화면처럼 생긴 풀밭에서 류블라냐 풍경을 감상한 후 다시 류블라냐 시내를 향해 내려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