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에 타자마자 캐리어 속에 카메라 가방을 우겨넣고 화장실에 가서 간단히 씻은 후 객실로 돌아와 드러누웠어요. 오늘도 역시 잠자다 도중에 깰 필요가 없는 날.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는 쉥겐 조약 가입 국가라서 국경 심사가 없어요. 프라하 올 때에는 얼마나 걸리는지도 잘 모르고 처음 가는 도시인데다 다음 여행 일정을 생각하느라 잠을 잘 못 잤지만 오늘은 정말 푹 자도 되는 날이었어요.
객실 의자에 누워 잠을 자는데 너무 더웠어요. 그래서 외투 위에 입고 있던 점퍼를 벗고 외투 지퍼를 열고 뒤집어서 입었어요. 그래도 아무 것도 안 덮고 자는 것보다는 외투라도 덮고 자는 게 조금 나을 것 같았거든요. 그냥 외투를 덮으면 바닥에 떨어질 수도 있고 분실 위험도 있고 해서 외투를 거꾸로 입었어요. 이렇게 누우니 좀 잘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탁!
잠을 자고 있는데 무언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손을 더듬어 보았어요. 외투 한쪽 끝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어요. 그래서 외투를 다시 잘 덮고 다시 잠들었어요.
아침. 외투가 가볍다고 생각했어요.
"왜 외투가 가볍지?"
외투를 더듬어 보았어요. 있어야할 것이 없었어요. 분명 외투 안주머니에 무언가 있어야 했는데 안주머니에 있어야할 그것이 없었어요.
"지갑!"
안주머니에 넣어놓고 잘 잠갔다고 생각했는데 지갑이 없어졌어요. 당황해서 후배를 깨웠어요.
"왜요?"
"지갑 없어졌어요!"
둘이서 객실 안을 샅샅이 뒤졌어요. 그러나 지갑은 보이지 않았어요. 제발 의자 매트 아래에 떨어져있기를 바랬지만 당연히 거기 없었어요.
급히 기차 승무원을 찾았어요. 기차 승무원 두 명은 복도에서 잡담하고 있었어요.
"지갑 도둑맞았어요!"
"언제?"
"아까요."
"여기는 슬로바키아야. 신고하려면 체코 돌아가서 신고해."
승무원은 귀찮게 굴지 말라는 투로 말했어요. 화가 나서 뭐라고 할까 생각했어요. 그러나 순간 생각해보니 승무원의 말이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었어요. 아니, 승무원의 말이 완벽히 옳았어요. 제가 지갑을 잃어버린 곳은 체코. 승무원은 슬로바키아 철도청 직원. 하지만 승무원의 귀찮아하고 시큰둥한 태도는 분명 사람 열받게 만드는 태도였어요.
객실에 돌아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객실을 뒤지며 생각했어요. 일단 불행인지 다행인지 잃어버린 것은 오직 지갑 뿐이었어요. 가장 중요한 여권과 돈 대부분은 목걸이 지갑에 집어넣고 옷 속에 집어넣었기 때문에 잃어버리지 않았어요. 목걸이 지갑 속에 집어넣은 이유는 강도를 만나면 어쩔 수 없지만 최소한 도둑이 제 옷을 홀라당 벗기고 가져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목걸이 지갑 끈을 끊어버려보았자 목걸이 지갑은 제 옷 속으로 떨어질 테니까요. 솔직히 옷을 홀라당 벗기면 그건 도둑이 아니라 강도죠. 전날 캐리어에 카메라를 우겨넣고 잤는데 이건 정말 현명한 판단이었어요. 후배는 다행히 잃어버린 것이 없었어요. 도둑맞은 것은 오직 저의 지갑 뿐.
지갑 속에는 100달러, 110유로, 그리고 체코돈 약간과 한국에서 인천 도착했을 때 당장 필요한 11,000원이 있었어요. 피해 금액도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더 짜증나고 화가 나는 것은 그 지갑 안에 들어 있는 카드들이었어요. 해외사용을 신청해놓지 않은 체크카드였기 때문에 당장 금전적 피해가 발생할 리는 없었지만 이것을 그냥 두고 돌아다니자니 매우 찝찝했어요. 가장 열받은 것은 그 지갑 안에 전역증, 대학교때 사용했던 학생증, 주민등록증이 들어있었다는 것이었어요. 목걸이 지갑이 무거워서 필요 없는 것도 목걸이 지갑에 넣지 않고 그냥 지갑에 넣어서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전역증과 대학교때 사용했던 학생증은 재발급 받을 수도 없는 것. 전역증이야 다시 만들 수는 있는데 다시 만들면 전역 부대명으로 전역증이 나오는 게 아니라 소속 예비군 부대로 나와요. 거기에 여행 다니며 구입한 우표도 지갑에 집어넣었기 때문에 우표도 몽땅 잃어버렸어요. 진짜 우체국에서 우표를 구입하기 위해 손짓 발짓 해가면서 엄청나게 고생하고 시간도 꽤 걸렸는데 그 피곤한 짓을 다시 하려고 생각하니 끔찍했어요. 차라리 돈 미화 100달러, 110유로, 체코돈만 가져갔다면 덜 열받고 짜증났을 거에요. 문제는 현금을 잃어버린 것보다 그 외의 것들을 잃어버린 것 때문에 더 열받고 짜증났어요.
"오빠, 미안해요."
후배도 깜짝 놀라고 당황해서 제게 미안하다고 했어요.
"괜찮아요. 지갑을 잃어버린 제가 멍청이죠. 어제 사이좋게 둘 다 골아떨어졌잖아요."
웃으며 후배를 진정시켰어요. 냉정을 되찾아야 했어요. 열받고 난리친다고 지갑이 되돌아오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리고 여행자 보험도 가입하지 않았어요. 즉, 경찰에 신고할 필요도 없었어요. 보상받을 길도 없다는 것이 냉정을 찾는 데에는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어차피 되찾을 방법도 보상받을 방법도 없었어요. 이 상황에서 흥분하면 더욱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 일단 제 분노는 후배 기분까지 엉망으로 만들 수 있었고, 더 나아가 2차적 피해가 발생할 수 있었어요. 평정을 잃었다가 새로운 범죄를 당하거나 시비가 붙을 수 있는데, 여기는 외국. 말도 잘 안 통하는데다 여기 현지인들 입장에서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 지난 여행 (첫걸음)에서 일행 하나가 호텔에서 핸드폰을 도난당한 사건을 보았기 때문에 지금 중요한 것은 화내고 분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냉정을 되찾고 여행을 망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후배를 보며 웃었어요. 속으로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밝을 표정을 지으며 '아...결국 여기 와서 나도 당하는구나. 이제야 동유럽에 왔네'라고 중얼거렸어요. 듣기는 '아...결국 여기 와서 나도 당하는구나. 이제야 동유럽에 왔네'라고 듣고, 해석은 '이 쓰레기같은 체코!'라고 해요.
기차 승무원이 바뀌었어요. 이제부터는 헝가리.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분노와 저의 실수에 대한 저의 방심에 대한 질책이 계속 되고 있었어요. 동구권 기차는 범죄 발생하기 정말 좋아요. 일단 우리나라 기차와는 달리 국제 기차라서 책임을 묻기 어려워요. 지갑을 가지고 도중에 도망가 버리면 잡을 방법이 없어요. 게다가 더 문제인 것은 현지인들은 표를 안 사고 타는 경우가 많다는 것. 일단 기차에 무임승차한 후 승무원에게 걸리면 흥정을 해요. ('쇼부를 쳐요'라는 표현이 더 어울려요.) 승무원은 무임승차했다고 쫓아내거나 벌금을 물리는 게 아니라 제대로 표를 사는 것보다 더 싸게 돈을 받아요. 이 돈은 당연히 승무원의 짭짤한 부수입. 이러니 동구권 기차탈 때 조심하라는 말이 그렇게 많이 돌아다니는 거였고, 저도 이미 이것은 직접 봐서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방심하다가 당한 것이었어요. 이것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냥 제가 병신짓을 한 것이었어요. 스스로에게 용서가 안 되는 행동.
부다페스트에 도착하자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찾으러 돌아다녔어요. 그러나 한참을 전철 타고 동네를 돌아다녔지만 게스트하우스를 못 찾았어요.
"우리 그냥 내일 베오그라드 가서 자요."
후배에게 다음날 베오그라드 가서 1박 하자고 했어요. 이왕 1박 할 거라면 물가 저렴한 베오그라드에서 노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길까지 잃어버려서 도저히 게스트하우스 찾아 돌아다닐 기분이 아니었어요.
다음날 베오그라드 가서 자기로 하고 전날 못 보았던 곳을 가서 보기로 했어요. 일단 켈레티역에 가서 짐을 수하물 보관소에 맡기고 성 이슈트반 성당으로 갔어요.
부다페스트의 하늘은 정말 푸르렀어요. 정말 돌아다닐 맛이 나는 날씨였어요. 전날 프라하의 미친 날씨와는 정말 대조되는 날씨라 프라하에 대한 기억이 더욱 나빠졌어요.
성 이슈트반 성당의 좋은 점은 공짜라는 것이었어요.
성 이슈트반 성당 내부에는 전시실이 하나 있었어요. 입장료 따위는 없었어요.
이건 공산 헝가리 정권에 반대해서 만든 것 같았어요.
성 이슈트반 성당의 모형.
성 이슈트반 성당에서 가장 중요한 유물은 바로...
성 이슈트반 대왕의 오른손 미라! 신기한 것은 성 이슈트반 대왕의 관에서 이 오른손만 미라가 되어 있었대요. 이것 역시 관람료 없이 그냥 볼 수 있었어요.
성 이슈트반 성당에서 나와 국회의사당을 향해 걷기 시작했어요.
러시아어와 헝가리어로 적혀 있어서 무언지 알 수 없는 기념물. 하지만 소련과 관련있는 것은 확실했어요. 참고로 헝가리는 자발적으로 2차세계대전에서 추축국에 가담한 국가에요. 그리고 그 결과는 공산화.
어부의 요새에서 보았던 지붕을 줄줄이 달아놓은 건물도 보였어요.
성 이슈트반 성당에서 국회의사당까지 가깝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못 걸어갈 거리도 아니었어요. 더욱이 하늘이 여행을 도와주고 있었어요. 성질 더러운 프라하의 하늘과는 정반대인 부다페스트의 하늘이었어요. 날씨가 너무 좋아서 후배와 이런 저런 잡담을 하며 국회의사당까지 걸어갔어요. 덕분에 기분이 매우 많이 나아졌어요.
드디어 국회의사당 도착.
어머...피부에 트러블 많으시네...관리 좀 받으셔야겠어요.
멀리서 볼 때에는 그저 아름다워 보였어요. 그러나 다가가서 보니 한쪽은 이끼가 끼어서 그런지 시커맸어요. 이건 뭐 얼룩 수준이 아니라 검은 돌로 쌓았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어요.
원래 검은 돌로 만든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면 흰 돌로 쌓아 만든 건데 이끼가 많이 껴서 시커멓게 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어요.
이쪽은 좋은 피부를 가진 쪽이에요. 확실히 비교가 되었어요.
국회의사당 근처 정원이에요. 드디어 꽃이 피기 시작했어요! 꽃이 핀 것이 너무 반가웠어요. 불과 바로 전날 저는 폭설을 헤치며 거리를 걸었어요. 봄이라고 전혀 느낄 수 없었어요. 시간적으로는 하루가 흘렀을 뿐인데 계절로는 열흘은 더 빨리 지나간 것 같았어요. 드디어 따스한 봄날씨 속에서 여행을 하는구나! 생각만 해도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아래 적혀 있는 것은 라틴어 같았어요. 무슨 동상인지 알 수 없었지만 헝가리 위인 중 한 명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