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7박 35일 (2009)

7박 35일 - 21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사라예보 구시가지, 라틴 다리

좀좀이 2012. 1. 4.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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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한국인이에요. 한국인이세요?"

"예, 반가워요!"


그분께서는 사라예보에 체류중이신 교민이라고 하셨어요. 그분께서는 우리를 보더니 매우 반가워하셨어요.


"여기 언제 도착하셨어요?"

"오늘이요."

"그러면 여기서 얼마나 머물다 가실 건가요?"

"지금 바로 크로아티아로 떠나려구요."

"지금 바로요?"

"예."


당연하죠. 이런 으스스한 동네는 살다살다 처음이었어요. 당장 무장단체가 총을 난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동네에 더 머무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구멍을 시멘트로 땜질이라도 해 놓았으면 그래도 좀 나았을텐데 그런 거 없었어요. 왠지 손가락을 구멍에 집어넣으면 탄두가 빠져나올 것 같았어요.


"여기 전에 와보신 적 있으세요?"

"아니요."

"그럼 왜 오늘 도착하자마자 떠나려고 하세요?"

"그게...여기 정말 볼 것 없더라구요. 온통 폐허에 전쟁의 흔적 뿐이구요."

"어디서 오셨는데요?"

"몬테네그로 포드고리짜요."

"아...그러면 동사라예보 터미널에서 내리셨겠구나! 그 동네는 원래 그래요. 하지만 여기도 하루는 충분히 볼 만 해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가이드해 드릴까요? 오늘 바로 떠나려면 시간 없으실텐데..."

"예!"


아저씨께서는 먼저 집에 전화를 하셔서 오늘 한국인들 만나서 간단히 가이드해주고 들어가느라 늦게 들어가겠다고 말씀하셨어요.


"따라오세요."


다리를 건넜어요.



"우와!"


다리를 건너자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어요. 이건 마치 람부탄 같았어요.



람부탄은 겉만 보면 참 해괴하게 생긴 과일이에요. 껍질채 입에 넣고 싶은 생각은 절대 안 들어요. 생긴 것은 영락없는 거대 도꼬마리에요. 그러나 껍질을 까면 하얗고 탱글탱글하고 매우 달콤하고 진주처럼 예쁜 과육이 나와요. 사라예보는 정말 이 람부탄 같았어요. 아니, 람부탄보다 더...정말 전설 속에서 나오는 동화 속 도시처럼 주변은 정말 폐허인데 폐허를 지나가면 폐허 한가운데에 아름다운 도시가 나타나는 것 같았어요.



할아버지들께서 엄청나게 큰 체스를 두고 계셨어요.



이 풍경 자체만으로도 이미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었어요. 뒤에 보이는 것은 사라예보에서 가장 큰 세르비아 정교회 성당이자 발칸 반도에서 가장 큰 세르비아 정교회 성당 중 하나인 성모 탄생 대성당이에요. (The Cathedral Church of the Nativity of the Theotokos, Саборна Црква Рођења Пресвете Богородице, Saborna Crkva Rođenja Presvete Bogorodice)


아래는 성모 탄생 대성당의 내부 사진이에요.






이 성당도 내전때 파손되어서 이때도 계속 복원 공사중이었어요.


"사라예보 주민 80%가 무슬림이에요. 그래서 정교회 교회에서 예배 보는 일은 거의 없어요."

단순히 복구중이라 사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주민 대부분이 무슬림이라 여기에서 예배 드리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설명해 주셨어요.


그 다음 간 곳은 로마 가톨릭 대성당인 Katedrala Srca Isusova 이었어요. 우리말로 번역하면 '예수님의 심장 대성당'.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가장 큰 대성당이에요.



아쉽게도 이 성당은 문이 잠겨 있어서 내부에 들어가보지는 못했어요.


"짐 들고 다니는 거 힘들지 않으세요?"

"괜찮아요."

"내가 아는 복사집이 있는데 거기다 짐 맡기고 다니죠. 그 짐 무거울텐데."

"감사합니다."


그래서 잠시 그분께서 아는 복사집에 짐을 맡겼어요. 복사집 주인은 흔쾌히 우리 짐을 잠시 맡아주시기로 하셨어요. 짐을 보관해주시는 대가로 5KM 드렸어요. 이제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닐 수 있게 되었어요.


이것은 막간 휴식이라 할 수 있었어요. 이제 본격적으로 구시가지 - Stari Grad 구경을 시작했어요.



지금까지 본 것도 굉장히 아름다워서 사라예보에 대한 두 번째 인상 - 즉 으스스한 폐허라는 인상은 싹 사라졌어요.


이제 갈 곳은 바슈차리쉬야 (Baščaršija). 구시가지에서 오스만 제국 당시 만들어진 상점과 모스크가 밀집한 지역이었어요. 먼저 가지 후스레브 베그 바자르 (Gazi Husrev-beg Bazaar, Bezistan)에 갔어요.


가지 후스레브 베그 바자르 입구.



내부는 이렇게 생겼어요.



이스탄불에서 부족한 시간 속에서 후배 손에 이끌려 급히 구경하고 나온 그랜드 바자르와 비슷하게 생겼어요. 차이라면 여기가 그랜드 바자르보다 훨씬 구획 정리가 잘 되어있고 깨끗하다는 것이었어요.


그 다음 간 곳은  가지 후스레브 베그 모스크였어요. 가지 후스레브 베그 바자르에서 정말 아주 가까웠어요.


 


위에 적혀 있는 것은 코란 바카라 장의 한 구절이에요. 도박 바카라가 아니라 '암소'라는 뜻이에요. 아래 적힌 것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금으로 보수를 했다는 내용으로 이 비는 1998년 6월 7일에 만들어졌어요. 왼쪽에 있는 것은 아마 같은 내용이겠죠.



모스크 안에 있는 분수.





모스크 한쪽 구석에는 묘지가 있었고, 그 묘지 너머로 Sahat-kula 즉 오래된 시계탑이 보였어요.



모스크 주변은 작은 가게들이 자리잡고 있었어요.



모스크 근처에는  가지 후스레브 베그 메드라사 - 우리말로 하면 가지 후스레브 베그 이슬람 신학교가 있었어요. 여기는 너무 시간이 늦어서 들어갈 수 없었어요.



그 다음 간 곳은 카라반사라이였어요. 카라반사라이는 카라반 - 즉 무역상들이 머무는 대형 여관을 말해요.


외관은 이렇게 생겼어요.




후배는 전통적인 터키식 가옥이라고 별로 신기해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저는 매우 신기했어요.


아래 사진은 내부에요.



내부는 평범한 여관처럼 생겼어요. 그런데 매우 컸어요. 천장은 왠지 얽기설기 엮어놓은 것 같았어요. 잘 짜서 만든 지붕이었는데 나뭇결 때문에 그렇게 보였어요.


시간이 되어서 다시 복사집으로 짐을 찾으러 갔어요.


"어? 이 친구 그냥 퇴근해 버렸네!"


복사집은 문이 잠겨 있었어요. 아저씨께서는 당황해 하시며 복사집 주인에게 전화를 거셨어요. 그러나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았어요.


"어쩌죠? 아무래도 내일 짐을 찾아야할 거 같은데...오늘 여기서 1박 해야될 거 같은데요?"

"예. 괜찮아요."


이제 사라예보의 매력이 푹 빠져버려서 1박 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어요. 아저씨께서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저녁을 먹고 돌아다니자고 하셨어요. 그래서 저녁을 먹으러 갔어요.


"뭐 먹을까요? 양고기 먹을 수 있어요?"

"예."


그래서 뷰렉과 닭고기를 시켰어요. 당연히 아저씨 저녁은 저희가 사드렸어요. 아저씨께서는 여기 사람들이 현지화를 '카엠'이라고 한다고 하셨어요. 돈을 보니 'KM'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이걸 여기 사람들은 카엠이라고 읽고, 유로도 통용된다고 알려주셨어요. 1유로는 2카엠이며 여기에 맞추어 유로를 내도 웬만해서는 다 받아준다는 매우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셨어요.


밥을 먹고 세빌 분수 (Sebilj fountain) 를 보러 갔어요. 키릴 문자로는 Себиљ 이에요. lj가 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 보스니아어에서는 한 글자에요. '세빌'이라는 말은 아랍어 'سبيل'에서 온 말로 뜻은 '길'이라는 뜻이라고 해요. 


보스니아 사라예보 Sebilj fountain


아저씨께서 이 분수의 물을 마시면 조만간 다시 사라예보에 돌아오게 된다는 전설이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분수에서 나오는 물을 열심히 많이 마셨어요. 이 분수가 예쁘기는 했는데 솔직히 우리가 생각하는 분수와는 정말 거리가 멀었어요. 물이 위로 쭉쭉 뻗는 게 아니라 나무로 된 부분 아래 돌로 된 부분에 달린 수도꼭지 비슷하게 생긴 것에서 물이 졸졸졸 나왔어요.



이 분수는 Baščaršija 광장 한가운데에 있어요. 이 분수와 바슈차르쉬야 광장의 모습이에요.


다시 거리를 지나서



강가로 갔어요.



앞에 보이는 아름다운 모스크는 짜르 모스크 (Tsar Mosque)였어요. 아저씨께서 우리를 강가로 데리고 오신 이유는 라틴 다리를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어요.


사라예보 라틴 다리


이것이 바로 1차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저격사건', 다른 이름으로는 '사라예보의 총성'이라고 알려진 사건이 일어난 라틴 다리에요.


아저씨께서는 우리나라에서 잘못 알려지고 잘 알려지지 않은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저격사건의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페르디난드 황태자 부부를 암살하려던 세르비아 청년단 6인은 모두 암살에 실패했어요.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 세르비아인 학생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세르비아인이기는 했지만 세르비아 청년단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인물이었어요. 당연히 세르비아 청년단의 암살 계획과는 전혀 무관한 인물. 암살 위기를 넘기고 시청에서의 행사를 마치고 나와 마차를 타고 가던 중 라틴 다리 위에서 길을 잘못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마차를 후진시켰어요. 사실 여기서 굳이 후진시킬 필요는 없었는데 이 좁은 다리에서 억지로 후진을 시키다보니 주변이 시끄러워졌어요. 레스토랑에 있던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이 소란을 보러 나왔다가 황태자비 부부가 마차에 타고 있는 것을 보고 품에 있던 권총을 쏘아 황태자비 부부를 저격했어요. 이 청년에게는 정말 운이 좋았고 황태자비 부부에게는 정말 운이 없었던 것이 이 청년의 권총에는 총알이 딱 2발 들어 있었다는 것이었어요. 황태자와 황태자비에게 권총으로 각각 한 발씩 쏘았는데 그게 정확히 명중한 것이었으니 황태자비 부부에게는 정말 재수없는 일이었고 이 청년에게는 정말 운이 좋은 일이었어요.



문제는 이 사건을 기념하려는데 이 근처에 마땅히 기념거리로 내세울 만한게 없었다는 것. 솔직히 '00동 00번지 00도로에서 1차세계대전의 총성이 울려퍼졌다'라고 하면 뭔가 김빠지죠. 이렇게 써 놓으면 그 누구도 외우려들지 않을 거에요. 오히려 저렇게 써 놓으면 있던 긴장감도 사라지고 '뭐 저렇게 구질구질하게 주소를 적어놓았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을 거에요. 그래서 근처에 있던 라틴 다리가 이 사건의 상징이 되었대요. 사진 속 왼쪽 박물관이 당시 프린치프가 있던 레스토랑이었고, 저격은 앞에 보이는 횡단보도 근처에서 일어났대요.


라틴 다리까지 본 후 아저씨께서는 좋은 숙소를 알려주시겠다고 하셨어요. 방을 따로 써야 했는데 가격은 한 명당 20유로였어요. 가격은 괜찮았어요. 더욱이 비수기라서 각자 3인실인 큰 방 하나씩 받아서 혼자 쓰게 되었어요. 아저씨께서는 다음날 9시에 만나자고 하고 댁으로 돌아가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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