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인도네시아. 창밖을 보며 '슬리맛 씨앙'이라고 중얼거렸지만, 그다지 썩 밝은 마음은 아니었어요. 하늘이 너무나 우중충했거든요. 일단 목표가 버스를 타고 감비르역 stasiun gambir 으로 간 후, 므르데까 광장 medan merdeka 을 가로질러 숙소로 가는 것이었어요. 숙소에 짐을 던져놓고 나와서 다시 기차역으로 간 후 기차표를 구입하고, 자카르타 시내를 돌아다니며 구경하다가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가는 것이 오늘 일정.
친구 말에 의하면, 공항에서 '담리 버스' 라는 것을 타고 감비르역까지 바로 갈 수 있었어요. 거리상으로는 26km 조금 넘는 거리. 친구 말도, 그리고 제 경험상으로도 길이 막히거나 서행으로 달리지 않으면 30분이면 갈 거리였어요. 비행기는 오후 1시에 도착했고, 입국 심사에 짐 찾고 공항으로 나와서 버스를 타고 가면 넉넉잡아 3시에는 감비르역 도착 예정. 여기는 당연히 낮이 우리나라보다 길겠지? 감비르역에서 기차표 구입하고 얼추 3시간 정도는 밝은 하늘 아래에서 돌아다닐 수 있을 거야.
이때까지 저는 정말로 인도네시아에 대해 너무나 모르고 있는 상태였어요. 저 생각은 완벽히 틀린 생각이었어요.
먼저 자카르타 역시 교통체증이 상당한 대도시라는 점을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자카르타는 "완벽한 승리"라는 의미의 Jayakarta 라는 산스크리트어 어원의 자바어에서 온 이름을 가진 도시로, 인도네시아 최대 도시에요. 단순히 그냥 큰 도시가 아니라 인구가 950만명을 넘으며, 인구수로는 동남아시아 제1의 도시에요. 도시 거주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에 당연히 교통 상황이 좋을 리 없었어요. 하지만 이런 사실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두 번째로, 인도네시아는 적도에 위치한 국가에요. 적도를 중심으로 위아래로 섬이 퍼져 있지요. 이때까지 착각하고 있던 것 중 하나가 저위도로 갈 수록 낮시간이 길어질 거라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이는 겨울에 해당하는 것이고, 여름에는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에요. 이것은 남위도가 겨울이네 여름이네를 따지는 문제가 아니에요. 간단히 설명하자면, 고위도 지역 여름에는 백야가, 겨울에는 흑주가 발생해요. 고위도로 갈 수록 계절에 따른 낮과 밤의 길이차가 커진다는 것이고, 이는 반대로 저위도로 갈 수록 계절에 따른 낮과 밤의 길이차가 작아진다는 것을 의미해요. 즉, 여름철에는 저위도 지역이 우리나라보다 낮 시간이 짧아요. 이것 역시 정말 나중에야 깨닫게 된 사실이었어요.
이런 착각들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그 어떤 예상도 하지 못한 채, 비행기로 나와 공항 건물로 들어갔어요.
"공항 내부 모습 진짜 특이하다!"
가끔 TV에서나 보던 태평양 어느 섬의 문양 같은 모습이었어요. 하지만 한가하게 공항 내부를 구경하며 갈 시간까지는 없었어요. 도착비자를 받고 입국 심사를 받아야 했거든요. 기차표를 구입하기에는 한국에서 환전한 인도네시아 루피아가 턱없이 부족했어요. 당장 시내 나가서 환전부터 해야 했어요. 밍기적거리다가 오늘 환전을 못한다면 모든 게 엉망이 되어버릴 수 있었어요. 다음날 무조건 욕야카르타로 떠나야하는데, 여기에서 꼬여버리면 인도네시아 일정 전체가 꼬일 수 있었거든요.
표지판을 보며 쫓아가니 입국비자를 구입하는 창구가 나왔어요. 입국 비자 수수료는 35달러. 달러 소액권을 충분히 챙겨갔기 때문에 35달러를 딱 맞추어서 지불했어요. 창구에서는 돈을 받자 작은 표 같은 것을 주었어요.
"이것을 여권에 붙여주는 건가?"
입국비자 구입 창구에서 받은 표 같은 것과 비행기에서 작성한 입국 카드, 여권을 들고 어떤 창구로 갔어요. 창구 직원에게 입국 카드, 여권, 그리고 저 표 같은 것을 건네주자 별 말 없이 여권을 스캔하고 무언가 입력하더니 표 같은 것을 부욱 뜯었어요. 그러고는 바로 여권과 입출국 카드, 그리고 표 같은 것 한 장을 돌려주었어요. 여권에는 인도네시아 입국 비자 스티커가 예쁘게 붙어 있었어요.
"이제 비자 발급도 받았으니 입국 심사를 받아야겠네."
입출국 카드는 아직 멀쩡했어요. 입국 심사라면 분명히 입출국 카드에서 입국 부분을 떼어 가든가, 아니면 출국 부분에 도장이라도 찍어주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아까 그 창구에서는 입출국 카드는 아예 건드리지도 않았어요. 제가 제출한 그대로 돌아왔고, 그 어떤 흔적도 없었어요. 아니, 솔직히 말해서 펼쳐보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입국 심사 창구를 찾아 두리번거리며 표지판을 따라가니 수하물 찾는 곳이 나왔어요. 수하물 찾는 곳에서는 제 캐리어가 컨베이어 밸트 위를 떠다니고 있었어요. 수하물을 찾고 또 표지판을 찾아서 따라가려고 보니 진짜 공항에서 나가는 문이었어요.
"어? 뭐지? 입국 심사는 대체 어디에서 받는 거야?"
당황스러워서 직원에게 입출국 카드를 보여주며 이거 문제 없냐고 물어보았어요. 직원은 문제 없으니 그냥 가라고 알려주었어요.
"아까 비자 심사라고 생각했던 창구가 입국 심사대였던 거야?"
그러면 대체 입출국 카드는 왜 작성하라고 한 거지? 직원이 문제 없다고 하니 일단 캐리어를 끌고 공항 밖으로 나가기는 했지만, 뭔가 찝찝했어요. 비행기에서 내려서 공항 밖으로 나가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20여분. 제가 무슨 입국 심사 하이패스 달고 있는 줄 알았어요. 입국 비자도 바로 구입하고, 입국 비자 구입하자마자 바로 입국 심사 받고, 입국 심사 받아서 수하물 찾는 곳으로 갔더니 이미 짐은 나와서 뱅뱅 돌고 있고, 짐 들고 나가는데 그 어떤 시간을 잡아먹는 일도 없었어요. 진짜 눈 깜짝할 사이에 비행기에서 공항 밖으로 순간 이동한 기분이었어요.
드디어 인도네시아에 상륙했어요. 수카르노-하타 국제 공항 Bandar Udara Internasional Soekarno-Hatta 의 첫 이미지는 충격이었어요.
입국장 출구가 바로 바깥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공항 1층 입국장 앞에 엄청나게 많은 것은 놀랄 것까지는 없었어요. 공항 건물에서 나오자마자 코와 입을 확 틀어막는 것 같은 습기도 전혀 놀랍지 않았어요. 우리나라 거리에서 가끔 보던 인도네시아인들이 바글거리는 것도 전혀 놀랍지 않았어요. 여기까지만 보면 그렇게까지 크게 놀랄 것은 없었어요. 습하고 더운데 사람들 득시글한 공항이라면 휴가철 제주 국제공항에서 흔히 보는 장면이니까요.
정말 저를 놀라게 한 장면은 여기저기 바닥에 주저앉고 누워 있는 인도네시아인들이었어요.
'저 사람들 노숙자 아니야?'
서울역 앞 돌아다니고 앉아 있고 누워 있는 노숙자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바닥에 앉아 있고 누워 있었어요. 순간 이 사람들 모두 인도네시아의 노숙자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캐리어 손잡이를 꼭 쥐고 공항 앞을 걸어다니며 천천히 그 사람들을 관찰해 보았어요. 그 결과 순간 느꼈던 그 느낌과 달리 노숙자들은 아니었어요. 그냥 사람들이 적당히 괜찮은 바닥에 앉거나 누워 있는 것이었어요.
이 나라 사람들 정말 아무 데에나 잘 앉고 눕네...
공항에 자판기가 있어서 음료수를 하나 뽑아 마셨어요. 차를 뽑아 마셨는데 너무 달았어요. 설탕물을 들이마시는 기분이었어요.
음료수를 다 마신 후, 사람들에게 담리 버스를 타는 곳을 물어보았어요.
"담리 버스 디 마나?"
"저쪽으로 쭉 가."
참고로 '디 마나' di mana 는 인도네시아어로 '어디에' 라는 뜻이에요. 여행 중 매우 유용하게 잘 써먹을 수 있는 표현이지요. 담리 버스를 어디에서 타냐고 물어보자 공항 건물을 등진 상태에서 왼쪽으로 쭉 가면 있다고 알려주었어요. 어느 방향인지 잘 모르겠다면 공항 건물 바로 앞에서 차가 가는 방향으로 걸어가면 되요. 인도네시아는 차량이 좌측 통행이에요.
인도네시아인들이 알려준 대로 공항 바로 앞에서 차량이 가는 방향을 따라 쭉 걸어가자 Damri 버스 티켓을 판매하는 곳이 나왔어요.
버스표 판매 창구로 갔어요.
"Selamat siang." (안녕하세요.)
"Selamat siang." (안녕하세요.)
"Satu tiket ke stasium gambir." (감비르역행 표 한 장이요.)
"Empat puluh ribu rupiah." (4만 루피아요.)
한국에서 환전해간 돈으로 4만 루피아를 지불했어요. 표를 받는 순간...
갑자기 직원들이 인도네시아어로 뭐라고 뭐라고 질문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직원들이 인도네세아어로 제게 계속 질문을 하기 시작했어요. 문제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는 것. 인도네시아어를 할 줄 아는 것도 아니었고, 정말 몇 마디만 알고 있었어요. 인도네시아어 수업을 들은지 10년도 훨씬 넘었고, 그 당시 인도네시아어를 열심히 공부하지도 않았어요. 그나마 저거라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벼락치기로 책을 조금 보았기 때문이었어요. 결국 밑천 드러나서 웃으며 영어로 '저는 한국인이에요'라고 말해야만 했어요.
담리 버스 표를 구입한 후, 버스를 기다렸어요. 20분쯤 기다리자 버스가 왔어요.
버스는 에어컨을 가동하고 있어서 시원했어요.
'늦어도 오후 3시에는 도착하겠다.'
공항을 매우 빠르게 빠져나왔고, 버스를 20분간 기다리기는 했지만 아직 3시까지는 50분이나 남아 있었어요. 설마 26km 를 50분 안에 가지 못하는 일은 없겠지? 시속 40km로만 달려도 50분 안에는 충분히 도착할 거리였어요.
버스는 국내선 청사로 간 후, 거기에서 승객을 태우고 공항을 빠져나갔어요.
"저기 호수도 있다!"
그리고 시작된 교통체증.
고가도로에서 차가 아예 멈추어 버렸어요.
그래도 금방 도착하겠지?
어느덧 3시가 넘었어요.
거리에 걸려 있는 맥도날드 광고. '한국의 맛을 느껴보세요' 라고 한국어로 적혀 있었어요.
모스크.
꽃마차.
"차 진짜 엄청 막히네. 대체 언제 도착하는 거야?"
분명히 감비르역 근처까지 왔어요. 시간상으로나, 직감적으로나 버스는 감비르역 근처에 있었어요. 예, 단지 근처에 있었을 뿐이었어요. 버스는 엉금엉금 기어갔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워낙에 차가 막혀서 기어간다는 것조차 고마울 지경이었어요. 어딘지 위치만 알면 확 내려서 걸어가버리고 싶은데 인도네시아에서 심카드를 구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디에 있는지 알 수도 없었어요.
이제 3시 반도 넘었어요.
버스가 멈추었어요.
여기는 또 어디야?
이제 4시가 되어 가고 있었어요. 3시에 도착하겠다는 예상은 이미 완벽히 틀린 것이 밝혀졌어요. 바라는 것은 그저 4시 이전에 도착하는 것. 그런데 버스 기사가 내리라고 했어요. 이곳이 바로 감비르역이었어요. 오후 2시 10분에 출발한 버스는 26km 를 달려서 오후 3시 35분에야 감비르역에 도착했어요.
숙소는 여기에서 또 한참 걸어가야 하는 거리. 숙소로 가서 짐을 놓고 감비르역으로 돌아오면 표를 구입하는 건 둘째치고, 환전을 못할 수도 있었어요. 어떤 일이 있어도 오늘 환전만큼은 해야 했어요. 환전을 하지 않으면 루피아가 너무 부족했거든요. 게다가 만약 재수없게 오늘 환전을 못 한다 했을 때, 당장 기차표 구입은 날아가는 것은 물론이고, 다음날 일과의 시작이 환전이 될 수 밖에 없었어요. 은행은 빨라야 아침 8시에 열 테고, 이때 환전을 하면 야간 이동이 확정적이었어요.
안정적인 선택지는 환전부터 하고, 기차표를 구입한 후에 숙소로 가는 것. 그래서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기차역 환전소를 찾아 100달러를 인도네시아 루피아로 환전했어요. 환전을 하고 나서 기차표를 구입하기 위해 매표소 앞에 줄을 섰어요.
사람들이 많이 줄을 서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단지 일처리가 매우 느렸을 뿐이었어요. '여기는 인도네시아야. 현지의 속도에 익숙해져야 해' 라고 아무리 속으로 되뇌어봐도, 여행자인 만큼 여기 문화에 익숙해져야 된다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려 해도 정말 심각하게 느렸어요. 도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오래 걸리는지 진심으로 궁금했어요. 줄을 처음 섰을 때 제 앞에 서 있는 사람은 10명 채 되지 않았어요. 그러나 한 사람당 기차표를 끊는 데에 기본 5분은 걸리는 듯 싶었어요. 우리나라에서 표 끊어주는 속도는 이곳 표 끊어주는 속도에 비하면 사람 날려보내는 수준.
결국 한 시간 기다려서 제 차례가 돌아왔어요.
"내일 욕야카르타요."
"여기에서는 당일 표만 판매해요. 내일 표는 예약 창구로 가야 해요."
기껏 한 시간 기다렸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다른 창구로 가라는 것. 역을 가로질러 가려고 했는데 역 한가운데 전체가 탑승 창구라서 역을 나가서 가야 했어요. 일단 역을 나가기는 했는데 표 예약 창구가 어디에 있는지 표지판에 전혀 적혀 있지 않았어요. 경찰에게 물어보니 경찰이 방향을 알려주었어요. 이제 날까지 개어서 습하고 덥고 뜨거운 상황. 고작 그거 걸었다고 또 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어요.
캐리어를 덜덜덜 끌고 예약 창구로 가보니 상황은 좌절적이었어요. 일단 줄이 장난 아니게 길었어요. 아까 당일표 판매 창구에서는 고작 예닐곱 명씩 서 있었는데 한 시간 기다려야 했어요. 여기는 줄마다 기본 열 명은 깔려 있었어요. 여기도 한 명이 표를 구입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당일표 판매 창구와 별반 다를 것 없었어요. 아니, 그 보다 훨씬 더 걸리는 것 같았어요. 아까 상황과 비교했을 때, 제 차례가 오려면 최소 한 시간 반은 기다려야 하는 상황. 그리고 기차표 예매를 위해 무슨 서류를 작성해야 했어요. 서류를 작성해준다는 사무실이 있기는 했는데 거기는 문이 잠겨 있었어요. 스스로 서류를 작성해야 하는데 자신의 ID 번호를 적는 칸이 있었어요. 우리나라의 주민등록번호 같은 것을 적는 칸이었어요. 일단 서류를 작성하기는 했는데 인도네시아 ID 번호 같이 제대로 작성하지 못한 칸도 있었기 때문에 만약 제대로 채워서 오라고 돌려보내면 언제까지 기다려야할지 감도 안 잡힌다는 것이었어요.
이렇게 창구가 암담한 상황인데 비해, 기차표 자동 발매기는 매우 한산했어요. 정상적으로 잘 돌아가고 있는데 그 누구도 사용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어요. 어차피 답이 없는 상황이라 발권 기계를 이용해 표를 구입해보려고 했지만 핸드폰 번호가 있어야만 표를 구입할 수 있었어요. 이 기계를 이용하면 예매도 금방 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 누구도 이 기계를 이용해 기차표를 구입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어요. 만약 사람들이 기계를 이용해서 표를 구입하고 있었다면 이렇게 줄이 길지도 않았을 거에요. 다행히 정말 운좋게 한 인도네시아인이 기계를 이용해 기차표를 구입해 주었어요.
기차표를 구입하니 오후 5시. 비행기가 자카르타에 착륙한지 4시간이 흘렀어요. 아직도 숙소에 들어가지 못했어요. 공항에서 빨리 나오기는 했지만, 교통체증으로 시간을 날리고, 기차표 구입에서 또 시간을 날렸어요. 이제부터 숙소로 걸어가야 했어요. 감비르역에서 숙소로 가기 위해서는 므르데까 광장을 관통해야 했어요.
이건 또 무슨 황당한 경우야?
므르데까 광장을 통과해 가려는데 광장 출입구가 잠겨 있었어요. 처음에는 이 문만 잠겨 있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이 문만 잠겨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이 광장 자체가 시간이 되면 문을 걸어잠그고 사람들 출입을 막고 있었어요.
"뭐 이런 광장이 다 있어?"
그냥 작은 공원도 아니고, 이렇게 큰 광장을 출입 시간을 정해 딱 그 시간에만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경우는 또 처음이었어요. 진짜 '개그지깽깽이 같은 상황'이었어요. 이 광장을 통해 가지 못하면 광장을 뱅 돌아서 가야 했어요. 제 숙소는 므르데까 광장을 중심으로 감비르역과 정확히 대각선 반대 위치에 있었거든요. 이것도 모자라서 광장 내부는 캐리어를 돌돌돌 끌고 가는 땅인데, 광장 주변을 뱅 돌아가려면 캐리어를 탈탈탈 쿠당탕 탈탈탈 쿠당탕 끌고 가야 하는 땅이었어요.
"대체 광장은 왜 또 문을 걸어잠그는 거야?"
저 모나스 쪽으로 가면 금방 가는데! 그러나 저 모나스 근처로 갈 수가 없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모나스를 보며 계속 므르데까 광장 주변 길을 걸어가는 것 뿐이었어요.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거라면 교통체증. 하노이도 길이 막히고 오토바이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여기는 그보다 더 심했어요. 하노이는 그래도 자동차가 그렇게까지 많지 않아서 정신은 없어도 나름 길이 크게 막히는 편은 아니었는데, 여기는 차도 많고 오토바이도 많아서 제대로 길이 꽉 막히고 있었어요. 그냥 걸어가는 것도 아니고 울퉁불퉁한 인도 위에서 캐리어를 끌고 가는데도 차보다 더 빨리 가고 있었어요. 교통체증이 심하면 농담으로 '걸어가는 게 더 낫겠다'라고 하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는 진짜로 걸어가는 것이 차를 타고 가는 것보다 더 빨랐어요.
"저건 또 뭐야?"
거대한 열매들이 혹부리 영감의 혹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어요. 나뭇가지에 큰 것이 하나 매달려 있었는데, 그것은 제대로 잘 큰 건지 마대로 쌓아 놓았어요. 딱 보자마자 '저거 떨어지는 거 맞았다가는 그냥 인생 끝장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 커다란 것이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열매 아래로 가서 자세히 살펴볼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저렇게 커다란 잭프루츠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어요. 한편으로는 나무 기둥에 매달려 있는 작은 잭프루츠들을 왜 솎아내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저렇게 무수히 많이 달려 있으면 열매가 분명히 제대로 클 수 없을 텐데요.
이제는 날이 더운 건지 내가 열받고 있는 건지 모를 지경. 그냥 할 말이 없었어요. 땀은 비오듯 나는 게 아니라 이미 비오듯 다 쏟아져서 폭우 속에서 길바닥에 드러누운 정도로 옷이 다 젖어버렸어요. 여기에 우리나라와 달리 차량 좌측 통행이라 길을 건너야하는 상황에서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건 덤. 교통체증으로 길이 꽉 막혀 시간이 오래 걸린 것, 이해할 수 있어요. 업무 처리가 느려서 줄을 선 사람 몇 명 있지도 않은데 제 차례까지 한 시간 넘게 걸린 것,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광장 문을 시간이 되었다고 걸어잠가서 광장 제일 외곽으로 뺑 돌아가야 하는 이 상황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간신히 숙소에 도착해서 체크인하고 바로 샤워를 했어요.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오니 6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어요.
"이 나라 태양은 또 왜 이렇게 빨리 저물어?"
6시 조금 넘은 시각이었는데 벌써 어둑어둑해졌어요. 인도네시아 역시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와 2시간 시차. 자카르타는 베트남보다 서위도 지역이기 때문에 같은 표준시를 사용할 경우 일몰 시각이 더 느려야 했어요. 이제 하지가 코앞인데 해가 벌써 퇴근하다니 이건 진정 먹튀 정신 투철한 태양이었어요. 물론 이것은 저의 착각 때문에 발생한 오해이기는 했지만, 6시 조금 넘었다고 벌써 어두워진 이 상황이 그저 황당하게 여겨질 뿐이었어요.
이미 깜깜해져버렸기 때문에 어디 멀리 나가기도 애매한 상황이었어요. 리셉션에서 코타 지구에서 야시장이 열린다고 알려주기는 했지만, 이렇게 날이 저물어버렸으니 굳이 지금 바득바득 코타 지구를 가야할 필요가 있나 싶었어요. 어차피 코타 지구는 자카르타에서 볼 것들이 몰려 있는 곳이니, 나중에 자카르타 돌아와서 갈 곳이었어요. 내일 일찍 출발해야 하니 오늘은 적당히 감비르역 근처에서 열리는 야시장이나 구경하기로 했어요.
당연히 아까 감비르역에서 숙소로 걸어왔던 길을 똑같이 되짚어 걸어가야 했어요.
모나스를 바라보며 므르데까 광장 바깥을 뱅 돌아서 감비르역으로 갔어요.
야시장은 매우 한산했어요. 가게들도 이제야 자리를 잡고 음식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어요.
끄루뿍 Kurupuk 을 튀기고 있는 가게로 갔어요. 사진 속에 있는 알새우칩처럼 생긴 것이 바로 끄루뿍이에요. 끄루뿍은 타피오카 전분에 새우나 생선 분말을 섞어 튀긴 것으로, 밥에 곁들여 먹는 것이에요. 맛은 딱 우리나라에서 파는 과자인 알새우칩 맛이에요. 이 가게에서 끄루뿍을 튀겨 다른 가게로 팔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저녁을 먹기로 결정했어요. 저녁은 당연히 나시 고렝 nasi goreng. 인도네시아식 볶음밥이었어요. 이태원에서 한 번 먹어보았는데 너무 맛있어서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만드는 나시 고렝의 맛이 매우 궁금했어요.
"맛있다!"
한국에서 먹었던 나시 고렝도 맛있었는데 이건 그 나시 고렝에 비할 바가 아니었어요. 한국에서 먹던 나시 고렝은 이 나시 고렝에 비하면 Nike 짝퉁 Nice 급이었어요. 삼발 소스의 살짝 매콤한 맛이 느끼함을 확 잡아주고 있었어요. 게다가 불맛도 살아 있었어요.
나시 고렝을 다 먹은 후 야시장을 구경하는데 희안한 음식을 만들고 있는 사람이 보였어요.
후라이팬에 쌀을 넣고 얇게 펴가며 구운 후, 계란을 위에 올려 발라주고 가루들을 뿌리고 다시 굽는 음식이었어요. 이 음식의 이름은 바로 Kerak telor. 자카르타 지역 전통 음식이라고 했어요.
이것이 바로 재료들. 흰 알은 오리알이고, 살구색 알은 계란이에요. 워낙 신기해서 하나 사서 먹어보았어요. 이것 역시 상당히 맛있었어요. 식감은 누룽지와 비슷한데 맛은 과자였어요.
저녁과 간식까지 먹고 나서 음료수를 구입하기 위해 근처에 있는 편의점으로 갔어요. 편의점 안에서는 꼬마들 몇 명이 놀고 있었어요. 직원은 이 꼬마들에게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어요. 심지어는 냉장고 문을 열어서 유리에 서린 김에 낙서를 하며 놀고 있는데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어요. 애들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김에 낙서했다가 하며 놀고 있었고, 이 모든 것은 그냥 방치되고 있었어요.
'유제품은 절대 안 사먹어야지.'
애들이 냉장고 문을 계속 열었다 닫았다 하며 놀고 있는데 아무 제지도 하지 않고 있는 점원을 보며 굳게 다짐했어요. 저렇게 열었다 닫았다를 자꾸 반복하면 유제품이 쉽게 상하는데 그걸 그냥 놔두고 있으니, 가뜩이나 여행 중 예민하게 신경써야 할 유제품의 상태에 대한 믿음은 완전 나락까지 떨어져 버렸거든요.
음료수 3개를 사서 밖으로 나왔어요.
이것들은 맛이 대체 왜 이러냐...
더워서 그 자리에서 커피 두 개를 마시고, 숙소로 돌아가며 과일 주스를 마셨는데 전부 맛이 없었어요. Good day white vanilla coffee 는 내심 기대하고 있었어요. Good day 커피 자체가 맛이 상당히 좋았기 때문에 같은 회사에서 만든 이 커피도 맛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나 전혀 아니었어요. 이 음료에서는 바닐라 제품 잘못 만들었을 때 나는 그 특유의 약품 냄새 비슷한 향기가 났어요.
므르데까 광장 문은 당연히 잠겨 있었어요. 이쪽으로 올 때와 마찬가지로 므르데까 광장 바깥을 뱅 돌아서 숙소로 돌아왔어요.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컴퓨터와 핸드폰을 켰어요. 인도네시아에서는 심카드를 구입할 계획이 전혀 없었어요. 숙소도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있는 곳으로만 골라서 갈 계획이었구요. 그렇지만 인도네시아 친구 및 태국 친구와는 계속 연락을 주고받아야 했어요. 둘 다 언제 만날지 구체적인 날짜를 정해놓지 않았거든요. 선물이라도 없으면 만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여유를 가지겠지만, 선물을 준비해서 갔기 때문에 꼭 만나야 했어요. 특히 유자차 스틱이 꽤 무게를 차지하고 있었어요. 이 유자차 스틱을 선물로 주면 짐의 무게가 확실히 가벼워질 것이었어요. 반대로 유자차 스틱을 주지 못하면 여행 끝날 때까지 낑낑 끌고 다녀야했어요. 물론 못 만났을 때 우체국 가서 부쳐주는 수도 있기는 했지만, 그건 정말 하기 싫었어요. 여행중 소포를 부치는 것은 시간도 많이 잡아먹고 무지 귀찮은 일이거든요. 소포 부치는 그 자체가 귀찮고 시간이 걸리는 건 아니에요. 여행중 현지에 주소와 전화번호가 없기 때문에 귀찮고 시간이 걸리는 것이지요.
일단 둘 다 켜고 와이파이가 연결된 것을 확인한 후, 컴퓨터에 설치한 pc용 카카오톡으로 인도네시아 친구와 태국 친구에게 말을 걸었어요.
"안녕!"
"안녕! 자카르타 잘 도착했어?"
"응. 지금 숙소야."
"기차표는 구입했어?"
"응, 샀어. 내일 아침에 감비르역에서 출발해."
"진짜? 내가 내일 마중나갈께!"
인도네시아 친구는 욕야카르타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오겠다고 했어요.
"너 내일 아르바이트는?"
"나 내일 쉬어."
인도네시아 친구는 다음날 아르바이트를 쉬니까 마중을 나오겠다고 했어요. 친구를 다다음날 낮에 만날 거라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깜짝 놀랐어요. 친구는 저녁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녁에는 못 만날 거라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친구에게 제가 예약한 숙소 위치를 보여주자 바로 어디인지 알아보았어요.
"이 숙소 어떻게 가야 해?"
"버스 타고 가야 해."
"걸어서는 못 가?"
지도로 보았을 때 조금 멀기는 했지만 못 걸어갈 거리는 아니었어요. 사실 욕야카르타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보로부두르 사원과 프람바난 사원이 전부였어요. 어디가 중심가이고 어디가 거주지역이고 어디는 조심해야하는지 전혀 몰랐어요.
"내가 버스 타는 것 도와줄께."
"고마워. 그리고 내일 환전해야 하는데 환전은 어디에서 해?"
"그건 감비르역 근처에 있어. 내가 도와줄께."
인도네시아 친구는 환전, 숙소 찾기 모두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했어요.
"안녕."
"안녕."
태국 친구로부터도 답장이 날아왔어요.
"지금 자카르타야."
"그래?"
"응. 우리 언제 만날까?"
"음...어디 보자...내가 주말만 시간이 돼."
"그러면 다음주 토요일에 만날까?"
"내가 확인하고 연락줄께."
태국 친구는 요즘 바쁘기 때문에 평일은 곤란하다고 대답하고는 다음주 토요일에 시간이 되는지 확인해보겠다고 이야기했어요.
베트남 후에에서 살고 있는 친구가 인도네시아가 어떻냐고 물어보았어요.
"여기 광장은 시간 되면 문 잠가버려. 그래서 1km 넘게 더 걸어야 했어."
"그래? 그거 참 이상하네. 광장은 모두를 위한 공간 아니야?"
나도 이해가 안 돼. 솔직히 왜 잠그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어요. 그냥 잠겨 있으니까 잠겨 있다고 말할 뿐이었어요.
이렇게 컴퓨터로 채팅을 하다가 핸드폰을 확인해 보았어요.
"어? 이게 왜 자동 업데이트 되고 있어?"
핸드폰 어플들이 자기 멋대로 업데이트 되고 있었어요. 절대 자동 업데이트 되지 않게 설정을 해 놓았는데 뭐가 문제였는지 자동 업데이트가 진행되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Line 도 포함되어 있었어요.
"아, 짜증나! 원래대로 돌려놓아야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절대 그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때까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상상을 못하고 있었어요. 자기 멋대로 업데이트가 되자 짜증이 났고, 이것을 예전 버전으로 되돌리기 위해 라인을 초기화시켜버렸어요. 그 순간 라인은 이메일을 등록해야만 사용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떴어요. 게다가 PC 버전 라인도 이때부터 먹통이 되어 버렸어요. 결국 귀찮아서 미루고 미루던 라인에 이메일 등록하는 작업을 인도네시아 와서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어요. 어쩔 수 없이 라인에 이메일을 등록하려는 순간...
본인 인증을 해야 합니다.
본인 인증을 하려면 한국 전화번호로 인증 번호를 받아야 한다는 창이 떴어요. 혹시나 다른 방법이 있나 찾아보았지만 그런 건 없었어요. 무조건 한국 전화번호로 인증 번호를 받아야 이메일 등록이 완성된다고 했어요. 이메일 등록을 미루고 미루던 저도 바보같았지만, 이 역시 상당히 거지같은 일이었어요. 해외에 있는 사람이 라인 이메일 등록을 할 방법은 없었어요. 인도네시아 심카드가 없어서 새로 아이디를 만들 방법도 없었지만, 설령 새로 아이디를 만든다 해도 그건 의미 없는 일이었어요. 왜냐하면 새로 아이디를 만들면 라인에 등록되어 있는 친구는 싹 다 날아가버릴 테니까요.
라인에만 등록되어 있는 친구들은 주로 두근두근 우체통을 통해 알게 된 타이완, 카자흐스탄 친구들이었어요. 이들과 연락을 할 방법은 한 달 뒤 한국 돌아가서 연락하는 것 외에는 없었어요.
어떻게든 외국에서 라인 이메일 등록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인터넷을 뒤져보았지만 방법이 없었어요. 그리고 이 과정에서 덤으로 자카르타가 남위 6도에 위치한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내가 지금 남위도에 있구나!"
비록 적도 근처라 남위도에서 나타나는 북반구와 계절이 정반대인 현상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남위도에 왔다는 사실이 신기했어요.
라인을 여행 내내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짜증과 태어나 처음으로 남위도에 왔다는 감동이 뒤섞인 깜깜한 밤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