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고도 길었던 이야기 (2015)

길고도 길었던 이야기 - 02 왜 태국어를 공부하자고 하셨나요

좀좀이 2015. 6. 2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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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2006년 가을. 당시 저는 여러 외국어 학습 및 학습 자료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이 언어, 저 언어 건드려보고 있었고, 어느 한 인터넷 카페에서 채팅을 즐기며 놀고 있었어요. 당시 채팅에서 만난 사람이 두 명 있었는데, 한 명은 저보다 형이었고, 한 명은 저보다 동생이었어요. 셋 다 다른 나라와 외국어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죽이 잘 맞았고, 밤 늦게 새벽까지 채팅을 하는 일이 종종 있었어요. 처음에는 카페 채팅을 이용해 채팅을 했지만, 나중에는 스카이프를 이용해 음성채팅을 즐겨 했어요. 형은 P형, 동생은 T동생이라고 할께요.


그때 T동생은 태국어를 같이 공부하자고 하고 있었어요.


"태국어 글자 이상하잖아."

"에이, 그런 건 형이면 금방 외워요."

"태국어 성조 없어?"

"성조 있는데요."

"아, 싫어."


성조 언어라면 일단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었어요. 왜냐하면 일단 구분이 가지 않았거든요. 이때에는 중국어 2성과 3성이 구분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1성과 2성조차 구분이 되지 않았어요. 게다가 이 시기, 갑자기 중국인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온갖 민폐란 민폐는 다 저지르고 있던 시기였어요. 제가 다니던 학교에 있는 중국인들이 수업이고 학교 생활이고 민폐를 끼치고 다니는 것도 부족해서 옆 대학교를 다니던 중국인 학생들까지 넘어와서 민폐를 끼치고 있었어요. 참고로 옆 대학교는 중국인들을 이때 왕창 왕창 받아들이고 있었어요. 학교에서 중국인 학생들이라 하면 '무개념, 몰지각, 민폐'의 상징같은 존재였어요. 어느 정도였는지 예를 들자면 학교에서 컴퓨터를 사용해본 적이 있는 학생이라면 QQ를 모를 수가 없었어요. 학교 컴퓨터로 인터넷 딱 켜는 순간 뜨는 qq. 교실 바닥에 침뱉기, 불 붙은 담배 휘두르며 건물 복도 다니기 정도는 흔히 볼 수 있는 이들의 만행. 그리고 당연히 이들 중국인들이 쓰는 말은 성조가 있는 중국어. 이러한 연유로 인해 '성조 언어' 자체에 대한 혐오감이 하늘 높이 치솟고 있을 때였어요. 더욱이 '태국'이라는 나라는 워낙 사람들이 많이 가던 나라이다보니 그다지 크게 가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어요.


T동생이 같이 태국어를 공부하자고 할 때마다 철저히 무시해주고 있던 어느 날. P형이 희안한 동영상 하나를 보여주었어요.


아시아어락기행 태국어

アジア語楽紀行タイ語



"어? 여자 예쁘네요!"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오직 '사왓디 카'. 그 다음부터는 단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어요. 하지만 일단 여자가 왠지 예뻐 보였어요. P형은 여자가 축구 선수 김동진 닮았다고 별로라고 했지만, 제 눈에는 꽤 예뻐 보였어요. 발음도 예쁘게 들렸구요. 게다가 이 동영상을 보며 '사왓디 카'를 연습하자 정말 '사왓디 카'는 말할 수 있게 되었어요. 무슨 성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태국어 한 마디는 할 수 있게 되었어요.


"형, 태국에 미녀 많아요! 진짜 태국어 해야 한다니까요!"


순간 마음이 흔들렸어요.


"그래도 나 이제 더 이상 외국어 방랑은 안 하기로 했는데..."


이미 벌려놓은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더 이상 새로운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크게 들지 않았어요. 게다가 이것은 성조 언어에 글자까지 새로 외워야 하는 언어. 부담이 너무 컸어요. 게다가 사람들에게 더 이상 새로운 외국어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선언까지 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을 때였어요. 구해놓은 외국어 학습 자료들을 제대로 다 보지도 못한 데다 더 이상 새로운 외국어 공부는 안 하겠다고 선언까지 했는데 이 말을 번복한다? 매우 고민되었어요.


"형, 저 정도 미녀는 태국에 흔해요!"

"형, 새로운 언어에 도전을 더 이상 안 하시겠다니요! 그건 전혀 형답지 않아요!"


무엇이든 처음이 어려운 법. 한 번 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다시 하는 것이 겁나지도 않고 너무나 쉽게 하게 되요. 그것이 좋은 행동이든 나쁜 행동이든요. 태국어에 대한 도전 또한 마찬가지였어요. 이 언어에 대해 도전한다는 것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은 없었어요. 그냥 성조 언어에 글자를 처음부터 전부 새로 외워야한다는 것이 귀찮았을 뿐이었어요. 하지만 미녀가 많다? 직접 가기도 쉽다? 집요한 T동생의 설득에 일본 NHK 에서 제작한 아시아어락기행을 보니 밑져야 본전, 한 번 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네가 태국 미녀 소개해주면 공부한다."

"형, 형이 태국어를 알아야 제가 태국 미녀를 소개시켜주죠. 태국인들 영어 잘 못해요."


T동생은 자기 태국인 친구 사진을 보여주었어요. 역시나 매우 예뻤어요. 당시 동생은 그 태국인 친구와 사귀는 듯 사귀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어요. 동생은 계속 태국어를 하면 미녀들과 대화할 수 있다고 꼬드겼어요.


태어나서 지금까지 여자 인간인 친구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동생이 매우 부러웠어요. 채팅 친구로조차 여자 인간인 친구는 없었어요. 하지만 T동생은 태국어를 할 수 있었고, 미녀인 친구가 있다고 자랑했어요. 여자 친구는 있었던 적이 있었지만, 여자 인간인 친구는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더욱 T동생이 부러웠어요. 외국인 여자 인간 친구! 이것은 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외국인 친구'와 '여자 인간 친구'의 교집합이었어요.


지하철을 타고 교보문고 광화문점으로 갔어요.


책을 살까, 말까.


책을 사는 순간, 태국어 공부가 시작될 것이었어요. 책을 안 사고 얌전히 고시원으로 돌아간다면 태국어를 공부하지 않는 것.


"그래, 사자!"



태국어 교재 가운데 가장 저렴한 것은 바로 명지출판사에서 출판한 '알기 쉬운 태국어 입문' 이라는 책이었어요. 제대로 공부할지 안할지도 몰랐고, 그냥 책 보며 성조 흉내내보면 될 거라 판단했어요. 설령 도중에 공부를 그만둔다 하더라도 담배 두 갑 태웠다고 생각하면 되는 가격. 또는 밥 한 끼 먹었다고 생각하면 되는 가격. 즉, 몇 장 펼쳐보다 방구석에 처박아놔도 크게 아까울 것이 없었어요.


"나 오늘부터 태국어 공부한다!"



"형, 제가 도와드릴께요!"


일단 글자 외우기. 하지만 글자가 잘 외워지지 않았어요. 무언가 글자들 사이에 규칙이 확실히 있다면 외우기 쉬운데 이것은 꼭 그렇지 않았어요. 게다가 같은 발음을 나타내는 글자도 여럿이었어요. 이것은 글자 외우기 정말로 어려웠어요.


"아시아어락기행 보면서 일단 소리부터 익히자!"


어린 아이들은 말부터 배우고 글자를 익히지 않는가. 아시아어락기행을 보며 일단 말을 익힌 후 글자를 익히면 보다 수월하게 익힐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아시아어락기행을 보며 외운 것은 '사왓디 카'와 '니 타오라이 카' 뿐이었어요. 아시아어락기행 태국어편을 진행하는 '너이'라는 태국여성은 태국어로 계속 이야기하는데, 아무리 들어도 들리지 않았고, 그나마 따라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딱 저 두 마디 뿐이었어요.


"사왓디 카."

"형, 그거 여자들이 쓰는 말이에요!"


아시아어락기행으로 공부하니 이런 부작용이 있었어요. 진행자가 여성이다보니 당연히 여성이 쓰는 말을 쓰고 있었고, 이로 인해 여성이 쓰는 말을 익히게 된 것이었어요.


더욱이 이때 성조를 너무 만만히 본 것도 문제였어요. T동생이 성조를 잘 알려줄 거라고 믿고 있었는데, 이때는 T동생도 성조 언어를 공부해본 것이 태국어 밖에 없었기 때문에 성조를 어떻게 가르쳐주어야 하는지 잘 몰랐어요.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성조 언어를 공부하는 방법은 일단 많이 듣는 것이라고 나와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구입한 책에는 음성 파일이 아무 것도 없었어요. 사실 많이 듣는다고 저절로 깨우쳐질 성조라면 애초에 성조 익히는 것이 어렵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겠지요. 책에 나온대로 흉내를 내보려 해도 제대로 흉내를 낼 수 없었고, 아무리 들어도 뭐가 무슨 성조로 발음되고 있는지 단 하나도 구분해낼 수 없었어요. 성조를 처음 익힐 때에는 몇 배 길게 늘여서 발음하며 익혀야 하는데 이것을 그때는 저도, T동생도 몰랐어요.


그냥 아무 것도 모르고 문장과 발음을 통째로 외우려고 하니 머리만 아플 뿐이었어요. 글자라도 알면 그래도 연습장에 문자를 적어놓고 틈틈이 외우겠는데 글자를 모르니 그것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어요. 그냥 시작하자마자 총체적 난국이었어요.


글자도 안 외워지고, 성조도 안 익혀지고, 발음은 그냥 귀에 들리지 않았어요. 여기에 T동생은 군대를 가 버렸어요.


내가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지?


내가 대체 이 언어를 언제 써먹지?


태국에 갈 일이 있을지나 의문이었어요. 이것은 무슨 대학교 전공으로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무슨 자격증이 있어서 자격증을 목표로 공부할 수 있는 언어도 아니었어요. 그냥 순전히 재미를 위해 공부하던 것이었는데 시작하자마자 재미는 사라졌고, 계속 격려하고 동기부여를 해주던 T동생은 군대를 가 버렸어요. 공부해야할 이유도, 의욕도 아무 것도 없었어요.


책을 책장에 꽂았어요. 그때부터 책 위에 먼지가 쌓이기 시작했고, 기억에서도 잊혀져 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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