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첫 걸음 (2007)

첫 걸음 - 14 모로코 마라케시

좀좀이 2011. 12. 12. 0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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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왔습니다. 모로코으 아침은 언제나 흐렸죠. 밤에는 비가 내렸습니다. 그래서 아침은 항상 으슬으슬했어요. 한국 기준으로 추운 것은 아닌데 상당히 기분이 나쁜 날씨였죠.


"핸드폰 없어졌어요!"


남자의 예감은 1회 맞았습니다. 일행분 한 분께서 어제 나갈 때 손가방을 탁자 위에 놓고 나갔다고 하셨습니다. 그분 방이 바로 어제 문이 고장난 방이었죠. 돌아와보니 핸드폰이 없어졌고, 손가방은 열려있었답니다. 즉, 도둑이 들은 것이었죠. 안전하다는 호텔방도 절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조심조심하던 우리 일행에게 처음으로 사고가 터졌습니다. 핸드폰은 GSM방식이 아닌 CDMA방식. 모로코에서는 안 터져요. 그런데 여기에서 사신 경험이 있으신 분께서는 일단 그것은 팔린다더군요. 그 칩을 어떻게 바꾸면 실제 쓸 수도 있대요. 쓰레기도 팔리는 모로코이니 충분히 팔릴 만 했죠. 더욱이 전화가 안 터지더라도 계산기로 쓰든 아니면 장난감으로 쓰든 어떻게든 되겠죠. 하여간 일행분께서 핸드폰을 분실했습니다.


어두운 분위기. 웃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모로코에서 실제 사신 적이 있으신 분께서 우리 일행에게 항상 모로코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질리도록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경고를 제대로 듣고 조심한 사람은 저와 다른 일행 한 분 밖에 없었습니다. 모두 그분의 경고를 사실 무시하다시피 했죠. 그분은 내심 기분이 상한 것 같았지만, 사실 일행과 관련된 사건사고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분들에게 뭐라 행동을 통제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드디어 한 건 제대로 터진 것이었죠. 가장 안전하다는 호텔방에 도둑이 들었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참 큰 영향을 주더군요. 다른 일행분들은 처음 겪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황해하셨습니다. 물론 찾을 방법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죠. 어차피 며칠 후면 알아서 사라져줄 외국인과 관련된 사건을 그 며칠 내에 해결해 주겠다고 발벗고 나설 경찰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죠. 하여간 분위기는 최악이 되었습니다.


날씨는 비가 곧 내릴 분위기였습니다. 이 일에 대한 마땅한 해결책은 과연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날씨까지 우리 일행의 우중충한 분위기를 더욱 우중충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기차를 타고 마라케시로 가기로 했습니다.



정말 우중충함 그 자체였습니다. 모두 조용한 분위기였죠.



모로코의 역 분위기 역시 아주 우울했습니다. 마라케시는 라바트에서 남쪽으로 내려갑니다. 라바트에서 남쪽으로 당일치기 여행으로는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곳이죠. 지극히 우울한 분위기. 울고 싶을 지경이에요. 정말 날씨가 너무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더군요.



창에는 빗물이 떨어졌어요. 그리고 기차의 창밖으로 그동안 보지 못했던 모로코 일반인들의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멀리 미나렛(첨탑)이 보이고, 앞에는 매우 허름한 건물...아파트일까요?


기차는 계속 달렸고, 이제 판자촌이 등장했습니다.



판자촌은 한국이나 모로코나 큰 차이는 없더군요.



그런데 우리와 약간 다른 점이 보였습니다.



카펫이 걸린 거야 이 사람들이 카펫을 집에 많이 깔아놓으니 그렇다고 하지만, 이 하얀 동그라미들은 뭘까요?



바로 위성방송을 보기 위한 파라볼라 안테나였습니다. 모로코에서 정말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죠. 자국방송이 재미없어서 사람들이 다 위성방송을 본다고 해요. 더욱이 이 나라는 '밤문화'따위는 존재한 역사가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도시로 인해 모닥불 피워놓고 마주 앉아서 노닥거리는 문화가 사라진 것인지 밤만 되면 거리가 썰렁해져요. 사람들이 집에 들어가서 심심하니까 tv를 열심히 보는 것일까요? 이 사람들 보나마나 먹고 살기도 힘들텐데 파라볼라 안테나는 참 많이도 있더군요. 대체 이 파라볼라 안테나를 달 돈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요? 저 칩이야 도둑질한 칩이나 아니면 해적판 칩을 사서 끼웠다고 해도, 일단 안테나 설치비에서 많은 돈이 들텐데...


설마 텔레비젼이 집보다 훨씬 우위에 존재? 으음...그런 것일까요?



황무지의 시작. 사막의 시작이라고 해도 되요. 참고로 이 기차는 남행열차.



정말 건조한 땅. 나무들이 많이 힘들어 보였어요.



멀리 마을이 보였어요. 라바트, 카사블랑카와는 전혀 다른 풍경. 기차는 계속 달렸어요.



우리나라에서 가시나무로 밭의 경계를 두르는 것처럼 여기는 선인장으로 밭의 경계를 둘러 놓았어요. 선인장 담은 처음 보는 거라 매우 신기했어요.



흐린 하늘이 맑게 개었어요. 튀니지도 그랬고 모로코도 그렇고 둘 다 지중해성 기후라 겨울에는 비가 줄줄 내려요. 그러나 이때까지 비 때문에 여행을 망친 적은 없었어요. 어차피 비는 밤부터 새벽에 내리고 낮에는 맑았거든요. 그래서 이날도 하늘이 개는 것을 보며 '오늘은 그래도 비가 꽤 오래 내렸구나'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기쁨도 잠시...



하늘이 다시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비가 또 내리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아주 강한 신호가 왔어요. 화장실로 급히 달려갔어요. 정말 앉기 꺼려지는 더러운 변기였지만 대충 휴지로 닦고 앉았어요. 앉을 수 밖에 없었어요. 주르륵.


"괜찮겠지?"

...라고 스스로를 안정시키려 했지만 그 느낌이 괜찮아질 느낌이 아니었어요. 객실로 돌아와 앉아있는데 또 다시 짜릿한 통증. 다시 화장실에 갔어요. 생각할 필요도 없었어요. 망했다...



마라케시에 도착했어요. 기차가 연착해서 점심시간을 훨씬 지나서 도착했어요. 비가 주룩주룩. 제 배는 꾸룩꾸룩. 슬슬 눈이 돌아갈 것 같았어요. 아무리 힘을 주어도 한계가 있는 법.



우리나라 시골 도로의 제왕 경운기, 마라케시 도로의 제왕은 노새가 끄는 수레. 따그닥 따그닥 노새가 차도 위를 달렸어요. 이건 비켜줄 방법도 없고 한 개 차선을 혼자 독점. 따그닥 따그닥 꾸루룩 꾸루룩. 계속 제 배는 꾸루룩 꾸루룩. 날이 좋아도 볼까 말까한 상황인데 비까지 내리니 주변을 보고 말고 할 정신이 없었어요. 오직 목표는 화장실. 일단 화장실에 갔다 나오는 것이 중요했어요. 이마에서 땀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버스를 타고 가며 마라케시에서 가장 유명한 사원을 보았어요. 그러나 일단 열차가 연착한데다 비가 내렸기 때문에 점심을 먹고 마라케시 시장을 구경하기로 했어요. 밥을 먹든 뭘 하든 다 필요 없어. 화장실만 있으면 돼. 솔직히 그냥 기차타고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이건 몇 번 화장실 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어요. 그 정도 통증이었다면 지금 이 마라케시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이를 꽉 물을 필요가 없었어요. 손톱으로 손바닥을 있는 힘껏 세게 누르며 겨우 버티고 있었어요.


비내리는 마라케시. 보기만 해도 사람 울적하게 만드는 분위기인데 가뜩이나 아침 일 때문에 전부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고, 기차는 연착했어요. 거기에 저는 추가로 가장 걱정했던 사태에 직면했어요. 일단 점심을 먹으러 사진 속 붉그죽죽한 건물 안에 있는 식당에 갔어요.


"앗싸, 화장실이다!"


식당에서 자리를 잡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갔어요. 그나마 좀 살 것 같았어요.

"너 왜 그래? 속 안 좋니?"

"예...저 오늘 점심 안 먹을께요."

"그렇다고 굶으면 쓰나. 조금만 먹어."

"아니요. 진짜 지금 속 최악이라서요."

그래도 계속 굶지는 말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빵을 조금 먹었어요. 잠시후.


꾸루루루룩 꾸루루루룩

"저 손 좀 씻고 올께요!"

바로 화장실로 달려갔어요. 주르르르륵. 한숨이 푸욱 나왔어요. 난 망했다. 다시 자리로 돌아갔어요.

"너 속 진짜 많이 안 좋은가 보구나!"

"예...자꾸 과식했더니 드디어 탈났나 봐요."

식사가 끝났어요. 다시 화장실에 갔어요. 저절로 주르르르륵.

"여기는 그냥 시장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는 거니까 이제 자유시간 가지고 오후 4시 반에 만나도록 하죠."

원래 계획은 마차를 빌려타고 시내를 한 바퀴 돌고 시장 구경하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날씨가 하도 안 좋다보니 마차를 타고 시내 구경하는 것은 무리. 그냥 적당히 시장 구경하고 노는 것으로 남은 시간을 보내기로 했어요. 그리고 그때 저의 생각은 '드디어 지옥이 시작되는구나'.


삼삼오오 팀을 이루었는데 저 혼자 남았어요. 어쨌든 저는 이 지역에서 어떻게든 말이 통하니 제 걱정은 별로 하지 않았어요. 혼자 시장을 돌아다니는데 당연히 재미가 있을 리 없었어요. 날씨는 거지 같이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몇 번째 날씨처럼 화장실 가서 주룩주룩하니 힘도 다 빠졌고 머리 속은 온통 화장실 생각 뿐이었어요. 시장을 돌아다닌 이유는 화장실을 찾기 위해서였어요. 식당에서 나왔으니 식당 화장실을 가는 것은 아무래도 조금 그랬어요. 그러나 아무리 시장을 돌아다녀도 화장실은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선물이나 사자."


선물은 마라케시 시장에서 사라고 했어요. 모로코에서 토산품 가격은 마라케시가 가장 저렴하다고 했어요. 그래서 이왕 이렇게 된 거 선물이나 사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흥정이 안 돼!


이미 제 얼굴에서 모든 게 드러나 있었어요. 저는 쫓기는 사람. 예. 망했어요. 흥정이 될 리가 없었어요. 제 얼굴을 보자마자 모두가 무조건 배짱이었어요. 정석적인 방법이라면 안 사면 되요. 하지만 이 고통이 당장 내일 끝날 고통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어요. 아니, 내일 되면 더 심해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결국 모든 것을 포기. 시장을 몇 바퀴 돌았지만 화장실도 못 찾았고, 흥정이 되는 가게도 없었어요. 일단 대충 선물을 구입한 후 시장에서 걸어나왔어요.


시장 맞은편은 마라케시 우체국. 비도 피할 겸 해서 우체국 앞에 쭈그려 앉았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처량했어요.



내 영혼이 앓아눕는 기분이야...아무리 봐도 울적하고 우울하고 침울해 보이는 마라케시 시장. 날씨도 우중충한데 몸도 마음도 지쳐 버렸어요. 아무리 긍정적으로 보려 해도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았어요. 시계를 보았어요. 아직 약속시간까지 한참 남았어요. 한숨만 나왔어요.


'우체국 안에는 화장실이 있지 않을까?'


우체국 안에 들어가 경비원 아저씨에게 물어보았어요.


"여기 10디르함 짜리 우표 파나요?"

"예."

"그럼 화장실 있나요?"

"저 앞 건물 가세요."


원래 계획은 10디르함 우표를 사고 화장실 가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머리 속이 온통 화장실 생각인데다 질문하는 순간 아주 급히 밀려 내려오는 고통이 느껴져서 바로 화장실을 물어보았어요. 경비원 아저씨는 앞 건물로 가라고 했어요. 앞 건물 화장실이면 아까 점심 먹었던 그 식당 화장실.


이제 체면이고 뭐고 없었어요. 옷에 지리느냐 지리지 않느냐의 문제인데 체면 따질 상황이 아니었어요. 너무 급해서 뛸 수도 없었어요. 겨우 화장실까지 걸어갔어요. 화장실 청소부 아가씨에게 10디르함 동전 1개를 주고 화장실에 들어갔어요. 유럽과 달리 모로코는 화장실 청소부가 요금을 깐깐하게 받지는 않았어요. 주면 좋고 말면 말라는 식. 그런데 점심 먹을 때 계속 들락날락 거려서 미안한 마음에 10디르함을 주었어요.


나오고 싶었지만 나올 수가 없었어요. 멈추어야 나갈텐데 멈추지 않았어요.


"여행 기록이나 해 놓자."


수첩에 메모하는데 계속 주르륵 주르륵 나왔어요. 일어나려면 주르륵. 앉아있다가 일어나려면 또 주르륵. 결국 화장실 변기 위에 15분 동안 머물게 되었어요. 15분 동안 쉬지 않고 주르륵 거리자 그제서야 드디어 변기에서 일어날 수 있었어요. 눈과 볼이 푹 꺼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문을 열었어요.


어머? 국제 망신이네? 아이 좋아라...


화장실이 3층에 있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2층까지 줄을 서 있었어요. 아...고개를 들 수 없다. '저 인간 뭐야! 혼자 화장실 전세냈어!'라고 투덜거리고 욕해대면 차라리 덜 쪽팔릴텐데 제 몰골을 본 사람들 모두 저의 상태를 눈치챘어요. 벽을 짚고 내려가는데 예쁜 화장실 청소부 아가씨부터 줄 서 있던 모든 사람들이 제게 괜찮냐고 물어보며 걱정해 주었어요. 고개를 들 수 없었어요. 빨리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우체국 앞으로 걸어갔어요.


15분 동안 변기에 앉아 있었더니 속이 많이 괜찮아졌어요. 그러나 온몸에 힘이라고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고, 모든 신경은 저의 아랫배를 향해 있었어요. 제발 기차 탈 때까지 배가 아프면 안 되는데...저 화장실 이제 쪽팔려서 어떻게 또 들어가...


오직 화장실 생각을 하며 마라케시 시장을 휙 둘러보았어요.



확실히 여기부터는 미세하게나마 아프리카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어요. 건물에는 아랍어, 불어와 더불어 아마지기 문자도 적혀 있었어요.


약속시간을 30분 넘어서야 일행이 모두 모였어요. 그 사이, 마라케시의 명물 야시장이 열렸어요. 그러나 이와 동시에 비가 다시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어요.


"어떻게 할까? 저 야시장 구경할래?"

"아니요! 제발 기차 타요. 저 지금 진짜 견디기 힘들어요."

오직 기차. 내가 사는 길은 오직 기차. 기차 타고 돌아가는 것. 기차에는 화장실이 있어요. 우리가 머무는 호텔은 라바트 아그달 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였어요. 즉 기차만 타면 화장실이 주는 고민에서 해방되는 것이었어요. 해방 정도가 아니라 지옥 탈출이었어요. 날씨도 엉망이고 제 상태가 눈에 확 띄게 안 좋아서 모두 그냥 라바트로 돌아가기로 했어요.


기차에 오르는 순간. 행복했어요. 시원함을 느꼈어요. 이제 그 공포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어요. 날아갈 것 같았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기차에 올라타자 아까와 같은 극심한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어요.




돌아오는 기차도 연착했어요.


기차에서 나오는 순간. 정말 대단한 타이밍이었어요. 이때 다시 엄청난 고통이 찾아왔어요. 정말 사력을 다해 걸었어요. 열쇠를 받자마자 방으로 뛰어가 화장실에 들어갔어요. 또다시 주르륵.


그날 밤. 정로환을 먹고 뻗어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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