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석탄의 길 (2022)

석탄의 길 - 프롤로그

좀좀이 2022. 12. 20. 0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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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가는 불씨가 남기는 마지막 빛.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사라져가고 잊혀져가는 것이 매우 많아요. 작게는 특정 물건, 상품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어떤 특정 동네, 산업까지 있어요. 오늘도 많은 것들과 많은 사람들이 잊혀져가고 있고 사라져가고 있어요.

 

사라져가고 잊혀져간다는 것은 즐겁지 않아요. 사라져가고 잊혀져가는 모든 것에게 한때 밝고 빛나던 시절이 있었어요. 즐거운 축제가 끝나고 조명이 하나씩 꺼지기 시작하면 어둠과 공허함이 공간을 집어삼키고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요. 여운조차 사라지고 아무 것도 안 남은 어둠과 공허함만이 남을 때, 희미하게 흔들리던 불빛 하나마저도 꺼지며 모두에게서 잊혀진 존재가 되요.

 

사라져가고 잊혀져가는 것들은 마음을 파르르 떨리게 하는 잔잔한 파동을 뿜어내요. 잔잔한 파동은 아직 기억하고 있는 과거의 추억과 공명하여 마음을 떨리게 해요. 과거는 과거로 남아야 아름답다는 것을 알기에 사라져가는 것을 바라만 봐요. 그렇게 하나하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보며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느껴요. 시간은 많은 것을 데리고 과거로 사라져가요.

 

연탄.

 

제가 아주 어렸을 적만 해도 겨울철이 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연탄이었어요. 가을이 깊어가면 집집마다 집에 연탄을 쌓아놓기 시작했어요. 찬바람이 불면 연탄 타는 냄새가 한 집 두 집 퍼지기 시작했어요. 연탄 보일러에 불이 들어가고 연탄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겨울의 시작이었어요. 연탄 보일러 위에는 커다란 황동 솥이 올라갔고, 그 안에서는 항상 뜨거운 물이 펄펄 끓었어요. 아주 흔하고 전형적인 겨울 풍경이었어요.

 

기름 보일러가 보급되면서 연탄은 서서히 아래로 아래로 밀려났어요. 무관심과 빈곤의 영역으로 쫓겨났어요. 겨울의 보편적인 이미지였던 연탄은 계속 아래쪽으로 쫓겨나면서 빈곤의 상징으로 바뀌었어요. 겨울이 되면 차가운 도시의 쌀쌀한 겨울 공기 속에서 여전히 무언가 타는 매캐한 냄새가 맡아지지만 그 냄새는 연탄 냄새가 아니에요. 연탄 타는 냄새와 연탄재 냄새는 달라요.

 

2019년이었어요. 디지털 카메라를 새로 구입한 김에 여기저기 출사를 다니기로 마음먹었어요. 카메라를 들고 사진 찍으러 나가지 않은지 너무 오래되었어요. 사진도 촬영하고 글도 쓸 만한 곳으로 어떤 곳이 좋을지 고민하던 중이었어요. 그때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어요.

 

서울의 달동네!

 

제 고향 제주도에는 달동네가 없어요. 제주도에도 낙후된 동네와 빈민가가 없지는 않아요. 그러나 육지처럼 달동네가 있는 곳은 아니에요. 제주도는 달동네가 생길 만큼 산업화가 크게 진행되고 이촌향도 현상이 심한 지역이 아니에요. 달동네는 제주도에서는 볼 수 없고 타지역 가야만 볼 수 있는 '신기한 육지의 풍경'이었어요. 달동네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본 것은 대학교 진학한 후였어요.

 

처음 서울 올라왔을 때만 해도 달동네는 매우 신기했어요. 그러나 금새 적응되었어요. 제가 다니던 대학교 근처에 달동네가 있는 것이 처음에는 매우 놀라웠지만 이것도 어느새 익숙해졌어요. 나중에는 제 고향 친구들이 저를 보러 서울에 오면 친구들 놀라게 해주기 위해 일부러 제가 다니던 대학교 근처에 있는 달동네로 데려가서 달동네를 구경시켜줄 정도로 달동네가 매우 친숙하고 당연한 존재가 되었어요.

 

 

카메라를 들고 서울의 달동네 여기저기 돌아다녔어요. 사진도 많이 찍었고, 달동네를 돌아다니며 여러 사람을 만났어요. 다양한 사연을 들었고, 많은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어요.

 

달동네를 돌아다니며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바로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집 대 집'의 문제라는 점이었어요. 영화 기생충에서 박사장과 기택이 '냄새'에 해석을 전혀 다르게 하고 서로 소통이 안 되고 이해도 못 하는 것처럼 것과 비슷한 모습이었어요. '충분한 보상 주면 된 것 아니냐'는 박사장 같은 사람들과 '여기는 내 집이자 내 삶의 터전'이라는 기택 같은 사람들의 괴리는 상당히 컸어요.

 

 

서울의 달동네를 돌아다니며 매우 많이 본 것이 있었어요. 바로 연탄재였어요. 서울 도처에 있는 달동네에서는 여전히 연탄을 사용하고 있었어요. 완연한 봄이 되었고 날이 따뜻해졌지만 달동네에 가보면 연탄재가 나와 있었어요. 그리고 빈민가 특유의 냄새 속에는 연탄 타는 냄새와 연탄재 냄새가 뒤섞여 있었어요. 아주 어렸을 적 어느 동네를 가나 일상적으로 맡았던 냄새가 서울 달동네에 희미하게 남아 있었어요.

 

2019년에 때마침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많은 사람들이 영화 기생충을 보러 영화관으로 갔어요. 영화 기생충은 영화 자체도 매우 잘 만든 편이었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의 소감이 극명히 갈리며 다시 한 번 화제가 된 영화였어요. 감독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소감이 극명히 갈리고 특정 부분을 도저히 이해 못 하는 모습이 많이 등장하며 계층간의 괴리와 상호 몰이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드러났어요.

 

영화 기생충에서 매우 중요한 소재는 바로 '냄새'에요. 박사장은 영화에서 끊임없이 기택의 냄새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요. 아내인 연교에게 기택의 냄새에 대해 '무말랭이 같은 냄새'라고 묘사해요. 이 냄새는 가난의 냄새로, 서울의 달동네 가면 쉽게 맡을 수 있어요. 이 냄새는 여러 냄새가 섞여서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그 중에는 연탄 냄새가 진하게 섞여 있어요.

 

연탄의 재료는 석탄.

 

매우 눅눅했던 2022년 여름. 그동안 막연히 한 번 가보고 싶다고만 생각하던 강원도 남부 지역을 여행했어요. 처음에는 동해시 여행을 갔고, 그 다음에는 삼척시 도계읍과 정선군 사북읍, 정선군 신동읍으로 여행을 갔어요. 동해시로 갔던 첫 여행과 강원도 남부 탄광지대를 여행했던 두 번째 여행 사이에는 그 어떤 연결고리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같은 강원도 남부 지역이기는 하지만 첫 번째 여행에서 간 곳과 두 번째 여행에서 간 곳은 완전히 다른 지역이었어요. 단순히 바닷가와 산지 정도의 차이가 아니었어요. 아예 태백산맥 동쪽과 서쪽으로 완전히 다른 지역이었어요. 별로 크지 않은 제주도도 한라산을 기준으로 남부와 북부 차이가 꽤 존재하는데 여기는 산 하나 차이가 아니라 아예 커다란 산맥을 기준으로 동편과 서편이었어요. 그만큼 완전히 다른 지역이었어요.

 

"이어지잖아!"

 

놀랐어요. 이어질 것이 하나도 없을 것 같던 두 지역을 연결하는 것이 있었어요. 거대한 서사가 두 지역을 잇고 있었어요. 바로 석탄이었어요. 한때 우리나라 산업을 이끌고 모든 가정을 따스하게 데워주던 석탄. 석탄산업의 거대한 서사가 전혀 연관없을 것 같은 두 지역을 관통하고 있었어요.

 

내 인생에서 없어져버린 2년을 건너뛰고 이어지는 이야기.

 

서울의 달동네와 강원도 남부 쇠락한 탄광지대. 석탄으로 이어졌어요. 강원도 남부의 석탄은 서울의 달동네에서 연탄이 되어 오늘도 달동네에서 달동네 특유의 냄새를 만들고 있었어요. 2020년과 2021년을 건너뛰어 2022년에 여행의 길은 다시 이어지고 있었어요. 기차와 시외버스로 강원도 남부 탄광지역으로 달려가고 있었어요. 2019년에 끝낸 이야기는 다시 살아나서 강원도 남부 탄광지역으로 뻗어나가려 하고 있었어요.

 

저 자신도 몰랐어요. 의도한 것이 아니었어요. 아무 생각 없이 막연히 한 번 가보고 싶다고 여겼던 지역이 그렇게 2019년 서울 달동네 탐방기에서 이어지는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었어요.

 

 

도계에서 느꼈던 기분이 이것 때문이었을까

 

도계를 돌아다니며 자꾸 2019년에 서울 달동네를 돌아다닐 때가 떠오르며 묘한 기분이 들곤 했어요. 도계에 있는 광부사택이 서울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초기 연립주택 형태와 많이 비슷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러나 단순히 그것 뿐이 아니었나봐요. 저도 모르게 무의식 속에서 막연히 2019년과 연결되는 이야기가 있다고 느꼈나봐요.

 

그렇다, 석탄의 길.

 

석탄의 길이 나를 부른다.

 

석탄의 길이 저를 부르고 있었어요. 2019년 서울 달동네 여행기 '사람이 있다' 이후 새로운 연재물을 만들 것을 못 찾아 방황하던 제게 아직 이야기가 끝난 것이 아니니 빨리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어요. 서울 달동네를 돌아다닐 때마다 느꼈던 흥분과 설렘이 가득한 여기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으니 부지런히 오라고 재촉하고 있었어요. 거대한 이야기가 준비되어 있으니 저는 와서 흐름만 타며 걸으면 된다고 유혹하고 있었어요.

 

 

"그래, 가자!"

 

석탄의 길. 가기로 했어요. 많은 사연과 이야기, 모험이 있는 그 땅으로 가기로 했어요. 거대한 서사의 흐름에 몸과 머리를 맡기고 걷기로 결정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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