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 하늠 모스크에서 나와서 간 곳은 시욥 보조르 Siyob bozori 였어요. 시욥 보조르에 간 이유는 바로...
시장밥을 먹기 위해서!
시장에서 오쉬를 먹어보기 위해서였어요. 식당에서 오쉬를 사 먹는 방법도 있으나 이러면 비교가 어려워져요. 당연히 비싼 식당에서야 조금이라도 더 신경을 쓸 테니까요. 게다가 사마르칸트는 온통 관광객투성이. 여기는 단지 외국인 관광객만 넘쳐나는 곳이 아니라 우즈베키스탄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관광하러 온 사람들도 넘쳐났어요. 이러니 식당에서 오쉬를 먹은 후 타슈켄트의 오쉬와 맛을 비교하는 것은 아무래도 문제가 있었어요. 타슈켄트에서 식당에서 오쉬를 먹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일 잘 알고 흔히 먹는 시장통에서 먹는 오쉬끼리 비교를 해야 더 공정할 거 같았어요.
시욥 보조르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비비 하늠 모스크였어요.
히바 동문과 마찬가지로 여기도 유적 바로 옆이 시장이었어요.
"오쉬는 역시 시장에서 먹는 오쉬이지!"
시장을 찾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어요. 시장을 금방 찾았기 때문에 이제 시장 안을 돌아다니며 식당을 찾는 일만 남았어요. 아직 시간이 1시였기 때문에 점심 시간을 못 맞추지도 않았어요. 1시에는 어느 시장을 가든 오쉬는 있기 마련. 작은 솥으로 파는 것이 아니라 큰 솥으로 가득 만들어서 파는 데다, 사람들이 전부 오쉬만 먹는 것이 아니라 여유가 있었어요.
시장에 들어가자마자 오른쪽으로 갔어요. 그쪽에 식당처럼 생긴 건물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인파를 헤치며 오른쪽 식당 건물처럼 생긴 곳에 가니 정말로 식당이었어요. 밥 시간이라서 그런지 비어 있는 자리가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도 모든 자리에 사람들이 꽉 차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어떻게 낑겨서 앉아 밥을 먹을 수는 있을 것 같았어요. 일단 자리를 잡고 안기 전에 사람들이 무엇을 먹는지 훑어보았어요. 오쉬를 먹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어요.
'이 식당도 안디잔에서처럼 오쉬 안 파는 거 아니야?'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어요. 그래서 식당 안으로 들어갔어요.
"오쉬 있어요?"
"아니, 없어."
밖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오쉬를 먹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이유는 오쉬가 다 팔려서가 아니었어요. 아예 처음부터 오쉬를 만들어 파는 식당이 아니었던 것이었어요. 오쉬를 판다면 분명히 커다란 솥이 보여야 하는데 식당 그 어디에서도 커다란 솥은 보이지 않았거든요. 식당 주인이 다른 음식들 있다고 말해주었지만, 저의 결정을 돌릴 수는 없었어요. 제가 원하는 것은 바로 사마르칸트 오쉬였거든요.
우즈베키스탄 사람들도 자존심이 강한 편. 그리고 자기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한 지역으로는 타슈켄트와 사마르칸트가 있어요. 이 두 도시 모두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는데, 하나는 매우 오래된 도시라는 점, 또 하나는 지진으로 도시가 폭삭 무너진 적이 있다는 점이에요. 타슈켄트 사람들은 타슈켄트를 매우 '지하철이 있는' 매우 현대적이고 아름다우며 우즈베키스탄의 수도라는 자부심이 있고, 사마르칸트 사람들은 사마르칸트가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는 자부심이 있어요. 일반적으로 우즈벡인들이 '오쉬'라 하면 주로 타슈켄트 오쉬 및 안디잔을 비롯한 동부 지역 오쉬를 최고로 치는데, 사마르칸트 사람들은 자기들 오쉬가 최고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이 두 지역은 손님 대접할 때 가장 기본적 예의인 '찻잔 채워주기' 방식도 100% 정반대에요. 타슈켄트는 찻잔에 차를 가득 채우면 '계속 채워주기 귀찮다'는 의미로 결례가 되고, 사마르칸트는 찻잔에 차를 조금 채우면 '너에게는 차 주기도 아깝다'는 의미로 결례가 되어요. 오쉬 또한 마찬가지. 타슈켄트식 오쉬는 재료를 모두 섞어서 내요. 반면, 사마르칸트 오쉬는 누가 먹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재료를 섞지 않고 쌓아서 내요.
다른 지역 오쉬는 못 먹어보아도 그렇게 아쉬울 것이 없었지만, 사마르칸트 오쉬 만큼은 꼭 먹어야만 했어요. 이것은 타슈켄트와 사마르칸트의 자존심 대결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먹어보아야 했어요. 이 나라 사람들 주식인 빵 '논'은 사마르칸트 논이 가장 맛있다는 데에 모두 인정하고 있는 것. 이것 - 사마르칸트 논을 먹고 맛을 평가하는 것은 솔직히 '한국 대 우즈베키스탄'의 대결이었어요. 사마르칸트 논은 매우 치밀하고 빡빡한 조직을 가지고 있어서 빵을 정말 잘 먹지 않는 한 많이 먹기 힘들었거든요. 그러나 오쉬는 달랐어요. 이것은 우즈베키스탄 안에서 자기들끼리의 자존심 대결. 게다가 저도 나름 쌀 문화권에 속해 있던 사람이라 오쉬를 먹는 것이 전혀 부담스럽지도 않았어요. 이번 여행을 다니며 밥 먹는 것을 매우 소홀히하고 있기는 했지만,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었어요.
방향을 틀어 반대쪽으로 걸어갔어요. 시장 왼쪽 경계까지 갔을 때, 밥을 배달하는 사람이 보였어요. 여기도 한국 시장과 마찬가지로 점심때가 되면 식당에서 밥을 배달해 주기도 하거든요. 그 사람이 들고 가는 것이 왠지 오쉬 같아 보였어요. 일단 무거운 음식들을 들고 가는 사람을 잡고 식당을 물어보기는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았어요.
"오쉬 파는 식당 있나요?"
"응. 있어."
행인이 알려준대로 갔더니 식당이 있었어요. 이 식당은 무려 론니플래닛 중앙아시아편에도 소개된 식당. 그렇다고 비싸고 특별한 식당은 아니고, 평범한 시장통에 있는 식당이었어요.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것은 커다란 솥과 그 안에 담긴 오쉬. 자리를 잡고 오쉬를 시켰어요.
"오오! 정말 안 섞어서 주네?"
일단 넓은 접시 같은 그릇인 라간에 담아 준 것으로 보아 이 집은 제대로 오쉬를 주는 곳이었어요. 1인분을 사기 밥공기처럼 생긴 '코사'에 담아주면 일단 -50점인데, 이 집은 제대로 라간에 오쉬를 담아주었어요. 당근과 밥, 다양한 재료를 잘 섞고, 그 위에 고기를 올려주는 타슈켄트 오쉬와 달리, 이 오쉬는 정말 듣던 대로 밥과 당근을 섞지 않고 밥 위에 당근을 올려 놓았어요.
"과연 어느 것이 더 맛있을까?"
타슈켄트 시장통 오쉬 vs 사마르칸트 시장통 오쉬
드디어 그렇게 꿈꾸어왔던 순간이었어요. 밥알을 입 안에서 굴려보고 세심하고 깊은 맛을 느껴보려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타슈켄트에서 오쉬 먹을 때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냥 마구 푹푹 퍼먹었어요. 정말 평소 먹던 것과 똑같이 먹었어요. 말은 두 도시의 오쉬 중 어느 것이 더 맛있는지 비교하기 위해 먹는다고 거창하게 써 놓았지만, 타슈켄트 오쉬를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음미하듯 먹어본 적은 없었거든요. 아니, 지금까지 살면서 음식의 깊은 맛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며 맛을 음미하며 먹어본 기억이 없어요.
어쨌든 승자는?
타슈켄트 오쉬, 역시 네가 낫다.
아무래도 화려하게 여러 재료가 들어간 타슈켄트 오쉬가 더 맛있었어요. 이것은 제가 타슈켄트에 살아서, 또는 사마르칸트에 두 번이나 왔다가 허탕을 쳐서 결국 또 왔기 때문에 악감정이 생겨서 이런 판정을 내린 것이 아니었어요. 일단 단 맛. 단 맛에서 타슈켄트 오쉬가 사마르칸트 오쉬보다 뛰어났어요. 게다가 타슈켄트 오쉬는 재료들의 맛이 조화를 이루며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는 반면, 사마르칸트 오쉬는 조화를 이루고 있기는 한데 무언가 부정합이 있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그냥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곳의 오쉬는 타슈켄트에서 제가 먹어본 식당 오쉬 가운데 가장 별로였던 오쉬와 맞먹는 수준이었어요. 당연히 타슈켄트에서 제가 시장통에서 먹어본 오쉬 중 가장 맛있는 오쉬와 맞붙을 상대는 이번 여행에서 아무도 없었구요.
"타슈켄트 가서 그 집 오쉬나 또 먹어야지."
타슈켄트 돌아가면 시장 가서 3000~4000숨 내고 오쉬를 먹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이 가게는 저도 오쉬 가격을 정확히 모르는 것이 자기가 많이 퍼주고 4000숨 받는 날도 있고, 조금 퍼주고 3000숨 받는 날도 있거든요. 그래서 가격이 1000숨 안에서 들쭉날쭉한 가게. 사마르칸트 오쉬를 먹고 나니 타슈켄트 시장에서 사 먹던 오쉬가 그리워졌어요. 무슨 전래동화 결말도 아니고 가장 맛있는 것은 집 근처 시장에 있는 음식점 오쉬라니....
밥을 먹고 다시 시장 안으로 들어갔어요. 쇼히 진다는 제가 밥을 먹은 식당과 정반대편에 있어서 시장을 건너가야 했어요.
시장에서 정말 찍고 싶었던 사진은 바로 이것이었어요.
우즈베키스탄 멜론 너무 커요, 수박보다 더 커요...아무리 말을 해도 보지 않으면 상상이 어려운 법. 저도 이쪽 멜론이 크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수박보다 더 크다는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어요. 게다가 더욱 중요한 것은 멜론의 크기. 정말 거대한 멜론은 사진이나 방송으로 보기 어려워요. 주로 나오는 멜론 품종이 '샤카르 팔락' Shakar palak 이라는 종류거든요. 이 종류는 생각만큼 크지 않아요. 작은 크기도 많은 편이구요. 진짜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호라즘 크르크마나 굴로브 같은 녀석들은 보는 순간 멜론이라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큰데, 이 멜론들이 가을 멜론이라 더욱 잘 안 알려진 편이에요. 이 사진을 보면 가을 멜론이 얼마나 크고, 왜 혼자서 먹어보고는 싶은데 감히 엄두를 못 내고, 멜론을 다 들쳐가면서까지 작은 것 찾기에 열중했는지 알 수 있어요. 사람 무릎에서 발까지의 길이가 되는 저런 크기의 멜론은 혼자 다 먹어치울 수도 없는데다 먹고 남은 것을 냉장고에 보관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니까요.
갈림길이 나왔어요. 공동묘지쪽으로 가면 쇼히 진다로 가는 것이었고, 다른 길로 가면 하즈라티 히즈르 모스크를 거쳐 울루그벡 천문대로 가는 길이었어요.
"잠깐 쉴 자리 없나?"
걷기 너무 힘들었어요. 다리 통증이 너무 심했어요. 솔직히 오늘 일정 다 때려치고 호스텔에 드러누워 쉬고 싶었어요. 탑 4개는 정말 무리였어요. 운동도 제대로 안 하고 등산 한 번 안 간데다, 밥도 제대로 안 챙겨먹고 여행 다니다 결국 이렇게 되었어요. 하지만 앉을 곳이 없어서 공동묘지쪽으로 갔어요.
"집시 아닌가?"
공동묘지쪽으로 가는데 걸인처럼 생긴 무리가 제쪽으로 왔어요. 이들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이들은 분명 집시였어요.
저는 외국 여행을 2007년에 처음 해 보았어요. 그 당시에는 북아프리카인과 라틴 민족의 얼굴도 구분하기 힘들었어요. 이것도 훈련이 되어야 분간을 하는 것인데 그때까지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도무지 분간을 할 수 없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 기초적인 구분은 할 수 있지만 어려운 단계로 나아가면 외모를 보고 민족을 분간해내기 힘들어요. 우즈벡인을 보면 우즈벡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타지크인을 보면 타지크인이라는 것을 대충 짐작할 수 있구요. 하지만 이 둘을 섞어놓고 고르라고 하는 어려운 단계에서는 잘 구분을 하지 못해요. 더욱이 이 지역은 여러 민족이 섞여 살고, 오래 전부터 민족간의 혼혈이 이루어졌던 지역이라 딱 보고 '이것은 우즈벡인!'이라고 짚어내기 어려운 외모도 많거든요. 타지크인들은 눈동자 색깔이 초록색이라고 하는데, 초록색이 아닌 연갈색 타지크인들도 종종 보이구요.
우즈베키스탄에서 집시처럼 구걸하고 돌아다니는 까무잡잡한 사람들은 '롤리'와 '찌간'으로 다시 구분해요. '롤리'는 타지크쪽 사람들이고, '찌간'은 말 그대로 집시. 롤리와 찌간은 우즈베크인들에게 엄연히 다른 민족이기 때문에 이를 마구 섞어 쓰거나 같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그다지 좋지 않아요. 즉, 롤리를 '집시'라 번역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이 나라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오역이라는 것이죠.
롤리는 저도 종종 보았어요. 얼핏 보면 유럽에서 본 집시와 하등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데, 신경쓰고 보면 유럽에서 본 집시와는 다르게 생겼어요. 그리고 제 앞에 나타난 걸인 한 무리는 바로 '집시'였어요. 딱 보니 왜 이들이 롤리와 집시를 다른 민족이라 하는지 알 수 있었어요. 집시는 확실히 까무잡잡한 인도인처럼 생겼어요. 하지만 타슈켄트에서 보이는 롤리는 인도인처럼 생기지 않았어요. 롤리도 까무잡잡하기는 하지만 이들은 예전 TIME지 표지에 나왔던 공포에 질린 아프가니스탄 소녀처럼 생겼거든요. 이들도 막상 한 곳에 섞어놓고 구분해보라고 하면 참 구분하기 어렵겠지만, 이렇게 따로 떨어트려놓고 보니 확실히 분간할 수 있었어요.
다행히 집시들과 별 일 없었어요. 한 꼬마 집시가 돈을 달라고 들러붙었는데 돈을 안 주겠다고 하자 어른 집시가 아이를 불러서 갈 길을 갔어요. 저도 제 갈 길을 갔어요.
공동묘지 옆으로 계속 걸어갔어요.
"겨우 다 왔네."
여기도 역시나 유료. 아주머니께 우즈베키스탄 학생증을 보여드렸어요. 그러자 300숨을 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500숨 내고 200숨 돌려받았어요. 쇼히 진다는 일반인은 5000숨, 우즈베키스탄 학생은 300숨이었어요. 처음 우즈베키스탄에 와서 우즈베키스탄 학생증을 만들 때 돈을 내야 했어요. 그게 신분증 대용으로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단 한 번도 신분증 대용으로 쓸 수 없었어요. 지하철에서 여권 검사할 때 학생증을 제시해보았자 소용이 없었어요. 그래서 이따위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학생증을 왜 만들어야 하나 싶었어요. 언젠가부터는 그냥 방구석에 대충 던져놓고 아예 잊고 있었어요. 그런 학생증이 지금은 엄청난 활약을 하고 있었어요. 지금까지 학생증으로 할인받는 가격만 합쳐도 이미 본전은 뽑지 않았나 싶었어요.
쇼히 진다는 높고 훌륭하신 분들의 묘소가 모여 있는 곳. 당연히 이 높고 훌륭하신 분들이 한 번에 다 죽은 것이 아니라서 이곳은 9세기부터 14세기까지, 그리고 19세기에 세워진 곳이었어요. 이 묘소의 기원은 이곳에 사도 무함마드의 사촌인 쿠삼 이븐 압바스 Kusam ibn Abbas가 뭍히면서부터였어요. 여기에는 20개가 넘는 묘소가 있는데, 대부분은 14~15세기에 지어졌어요.
입구 근처에는 1812~13년에 지어진 마드라사가 있었어요.
"이건 뭐 별로잖아!"
규모가 큰 것도 아니고, 화려한 것도 아니었어요. 그냥 지극히 작고 평범한 모습이었어요. 굳이 특징을 꼽자면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다는 점.
입구를 지나 계단으로 갔어요.
계단을 올라가려는데 계단을 올라가는 사람이나 내려오는 사람이나 모두 열심히 무언가 세고 있었어요.
"대체 무엇을 세는 거야?"
대충 사람들이 계단 숫자를 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하지만 왜 이렇게 열심히 집중해서 세는지 알 수 없었어요. 마침 옆을 지나가는 우즈벡인이 보여서 잡고 물어보았어요.
"여기 계단 왜 세요?"
"이 계단 올라갈 때 계단 숫자와 내려갈 때 계단 숫자가 같으면 천당 가."
"다르면요?"
"지옥 가."
이 계단은 자기가 천국에 갈 지, 지옥에 갈 지 미리 시험해보는 계단이라고 했어요. 만약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 세어 본 계단 숫자가 같다면 죄가 없기 때문에 천당에 갈 수 있고, 만약 차이가 있다면 그만큼 죄가 있다는 의미라고 알려주셨어요. 그래서 저도 세어보려고 했으나 사진을 찍고 주변을 둘러보고 하다보니 올라가던 도중에 숫자가 햇갈리기 시작했어요.
"아, 몰라!"
음...나는 테스트해 볼 자격도 없는 것인가...무슬림이 아니라 무슬림용 천당과 지옥을 이용 못하는 건가? 아래 내려가서 처음부터 세면서 올라오기에는 다리도 너무 아프고 귀찮았어요. 그래서 계단 세는 것은 중간쯤 세다가 그만두었어요.
계단 세는 것을 포기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주변 사진을 찍으며 계단을 올라갔어요.
지도에 따르면 이곳에 있는 건축물은 총 44개.
여기는 진짜 아름다워!
레기스탄 광장처럼 웅장한 맛은 없는 곳이었어요. 하지만 작고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묘소들이 다닥다닥 모여 있어서 엄청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어요. 레기스탄 광장을 바라보았을 때보다 더 몽환적이었어요. 단, 이곳이 광장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묘소로 지은 곳이다보니 사람이 조금만 많아져도 북적거리고 미어터지는 듯 하게 되었어요.
게다가 성인 숭배 풍습이 남아 있는 우즈베키스탄이라 이 가운데 유명한 사람 묘소에서는 우즈벡인들이 기도를 드리고 나가기도 했어요. 원래 이슬람에서 성인 숭배 풍습은 엄연히 금지되어 있어요. 그러나 원래 이슬람 4대 학파 가운데 중앙아시아에 들어온 이슬람 학파가 율법 적용의 관용도가 높은 학파인데다, 원래 믿던 텡그리신을 알라로 바꾸고, 정복과 약탈을 지하드로 합리화하는 등 유목민의 토속 신앙과 문화와 밀접히 결합하고 변형된 형태로 수용되고 받아들여지다보니 중앙아시아에서의 성인 숭배 풍습은 널리 퍼진 모습이에요. 이렇게 성인 묘소에서 기도를 드리는 우즈벡인들이 있으면 아무래도 그들의 기도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어요.
이 건물을 구경하다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았어요.
"이 건물은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지은 건물로..."
단체 관광객을 이끌고 설명하는 가이드의 설명을 얼핏 들었어요. 이 건물은 바로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지은 건물이라고 했어요. 옛날에도 여기까지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왔었구나! 우즈베키스탄에서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지은 유적을 보니 느낌이 달랐어요. 마치 지난 여행중 아제르바이잔에서 만난 친구를 다시 만나는 기분이었어요.
계속 안쪽으로 걸어갔어요. 드디어 끝이 슬슬 보이기 시작했어요. 마지막 직전에 있는 9세기에 지어진 쿠삼 이븐 압바스 묘소 Qussam ibn Abbos maqbarasi 로 들어갔어요.
중요한 성인의 묘소라 확실히 멋있고 컸어요. 복원도 잘 되어 있었구요. 다리가 아파서 잠시 가만히 앉아 휴식을 취했어요. 휴식을 취하는 동안 사람들이 와서 기도를 드리고 갔어요. 앉아서 쉬다 시간을 확인했어요. 오후 3시. 이제 이곳 구경을 끝내고 다른 곳에 갈 때가 다가오고 있었어요. 의자에서 일어나 묘소에서 나왔어요.
마지막은 느낌이 레기스탄 광장 축소판이었어요. 단, 축소를 했는데 건물보다 광장을 많이 축소한 것 같았어요. 보았을 때에는 멋있었지만 사진으로 찍으니 참 마음에 들지 않게 나왔어요. 너무나 밝은 하늘과 그늘진 건물들 때문에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고, 세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사진 한 장에 다 넣기도 매우 어려웠어요. 게다가 건물이 이렇게 모여 있어서 한 번 들어온 관광객들은 빨리 빠져나가지 않았고, 세 건물을 한 장에 모아 찍어야 하는데 관광객들이 계속 들어와서 사진을 찍을 여유도 많지 않았어요.
"이제 거의 다 보았네."
쇼히 진다에서 나왔어요.
"너도 유적이었냐?"
쇼히 진다에서 레기스탄 광장으로 가든, 울루그벡 천문대로 가든 일단 똑같은 방향으로 가야 해서 걸어가는데 이런 것이 보였어요. 아까 지나칠 때에는 이게 유적이 아니라 그냥 무슨 기념물처럼 만들어놓은 것인 줄 알고 지나쳤어요. 그런데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는 길에 팻말이 있어서 팻말을 읽어보니 이것도 나름 유적이었어요. 이것은 15세기 함맘의 화장실.
유적 근처 벤치에 앉았어요. 다리가 너무 아파 또 쉬어야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