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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소설 이방인이 매우 난해하고 어려운 소설인 정확한 이유 - 뫼르소는 왜 허무주의의 아이콘이 되었을까? 특유의 난해함의 원인과 카뮈가 자초한 8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재앙과 오독

좀좀이 2026. 1. 10.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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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소설 이방인이 매우 난해하고 어려운 소설인 정확한 이유 - 뫼르소는 왜 허무주의의 아이콘이 되었을까? 특유의 난해함의 원인과 카뮈가 자초한 8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재앙과 오독

 

1. 서론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난해하고 어려운 소설이라고 많이 알려져 있어요. 외면상 드러나는 것만 보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매우 쉬운 소설이에요. 프랑스어 원문으로 보면 문장이 쉬운 데다 단순과거가 아니라 복합과거를 사용해서 엄청난 프랑스어 문법 지식을 요구하지 않아요. 분량도 얼마 안 되어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어요. 줄거리도 복잡하지 않고 단순해요. 등장인물이 엄청나게 많고 관계가 복잡한 것도 아니에요. 이렇게 표면상으로는 상당히 단순하고 쉬운 편에 들어가는 소설이에요. 게다가 이 소설은 무려 작가가 직접 쓴 해설집에 해당하는 책도 있어요. 그것이 바로 동일한 철학적 문제를 이론적으로 전개한 저작인 시지프 신화에요. 더욱이 순수 문학이 아니라 자신의 철학을 대중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소설이기 때문에 철학적 문제의식이 강하게 개입된 소설에 해당해요. 이 정도면 정말 쉬운 소설 맞아요.

 

그러니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어려울 이유가 없어 보이지만, 1942년에 발간된 이래 현재까지도 매우 많은 논란과 논쟁이 있어요. 그리고 상당히 난해하고 어려운 소설로 유명해요. 이런 표면상 드러나는 모습과 독자들이 느끼는 난이도 때문에 문학에 흥미를 갖고 독서를 취미로 시작해보려는 사람들에게 권하는 '골탕먹이기 소설'처럼 여겨지기도 해요. 만만해보이니까 쉽게 읽을 수 있고 집어들었다가 머리 터지게 만들기 딱 좋으니까요. 그래서 독서 초보자들에게 절대 이방인 권유하지 말라는 말이 꽤 있어요.

 

알베르 카뮈 소설 이방인 관련해서 매우 재미있는 점이 있어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 어려운 이유 정확히 말해봐.

 

읽은 사람들 대부분이 어렵다고 하는데 정작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 왜 어려운지 정확히 말해보라고 하면 정확히 말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감각적으로 어렵다고 말할 뿐이에요. 납득되게 이유를 정확히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에요. 뫼르소를 분석하랬더니 감각을 그대로 감각적 언어 '어렵다'고만 말하는 '뫼르소화 증세'에 걸려 버린 모습을 보여요.

 

그래서 수많은 상징적 장치가 있고, 카뮈 철학이 담겨 있어서 카뮈 철학을 이해해야 한다고 해요. 더 나아가 왜 어려운지 설명을 똑바로 못 하니까 기껏 한다는 말이 '문학 전공자들도 어렵다고 한다, 전문가들도 어려운 소설이라고 한다'며 권위에 호소하며 어렵다고 이야기해요. 어렵다고 느끼기는 하는데 왜 어려운지 정확히 파악을 못 하고 정확히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을 못 한 결과 권위에 호소해서 어렵다고 하는 거에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분명히 표면상 드러나는 모습은 극히 쉬운데 이해가 안 되니 자기 스스로도 왜 어려운지 이해를 못 하는 거에요. 이해가 안 되니 어려운 건 맞는데 본인조차 그 상황이 논리적으로 잘 납득되지 않는다는 거에요.

 

더 나아가서, 알베르 카뮈는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이 허무주의의 아이콘으로 읽히는 것을 상당히 싫어했어요. 또한 카뮈는 자신이 실존주의 철학자로 분류되는 것도 매우 싫어했구요. 그런데 카뮈는 실존주의 철학자로 분류되고 있고,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허무주의의 아이콘이에요. 오늘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이방인을 허무주의 소설처럼 느끼고 있구요. 심지어는 아예 카뮈 철학 관점에서 실패한 인간을 다룬 소설이 이방인 아니냐는 말까지 있을 정도에요.

 

더 충격적인 사실은 이방인을 아무 생각도 사전 정보도 없이 오직 소설 그 자체에 집중해서 쭉 읽은 사람들은 뫼르소를 살인마이며 어디에 공감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정작 마지막 문단에서 카뮈 철학적 해결 구현은 꽤 잘 발견해요. 그런데 정작 많이 공부한 사람들일 수록 이 마지막 문단에서 심각하게 헤매고 상징적 장치와 난해한 해석이 많다고 하며 어떻게 마지막 문단에서 카뮈 철학적 해결 구현을 증명해야 하는지 극도로 어려워해요. 대충 읽은 사람이 쉽게 찾고 진지하게 많이 공부하고 읽을 수록 더 헤매게 되는 희안한 소설이에요.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소설이 진짜 별로 없어요. 이게 하루 이틀의 일도 아니고 출간 이후 오늘날까지 무려 80년 넘게 지속되고 있어요. 이건 정말 진지하게 관심을 갖고 관찰하고 분석해볼 가치가 있어요. 문화 소비 행태 및 현상에서 상당히 드문 경우에 속하거든요.

 

그래서 이 글에서는 알베르 카뮈 소설 이방인이 매우 난해하고 어려운 소설인 정확한 이유를 다룰 거에요. 전세계에서 80년 넘게 지속된 특이한 문화 소비 행태 및 현상에 대한 고찰이기도 해요.

 

이 글에서는 전체 독자 공통으로 겪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 어려운 이유와 깊게 읽고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겪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 어려운 이유에 대해 나눠서 보도록 할 거에요. 그리고 이게 왜 사실상 카뮈가 자초한 결과인지 마지막에 설명할 거에요.

 

2. 전체 독자 공통으로 겪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 어려운 이유

 

2.1. 1인칭 시점 특유의 서술 생략

 

카뮈의 이방인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되어 있어요. 1인칭 시점은 독자들에게 몰입감을 높여 주고 생생함을 강조하는 효과가 있어요. 이와 더불어 1인칭 시점이 갖는 고유한 특징은 모든 것이 작중 화자 '나'의 인식에 존재하는 것들만 소설에 나온다는 점이에요. 이는 생략을 통한 서술 트릭을 사용하기 매우 쉽게 만들어줘요. 1인칭 시점 소설 속 화자 '나'가 인식하지 못 한 사실이라고 생략하면 되거든요.

 

이러한 1인칭 소설 특유의 구조와 그로 인해 파생되는 효과인 서술 트릭을 사용하기 매우 쉬워진다는 점은 작가에게 상당히 강력한 이점이 되요. 왜냐하면 작가가 설명하기 힘들거나, 쓰고 싶지 않은 부분은 과감히 작중 화자 '나'가 인지를 못 했거나 소설에서 다루는 순간들에서만큼은 생각하지 않았다고 생략해버려도 아무 문제가 안 되거든요. 내용상 큰 혼선과 단절을 야기할 정도만 아니라면, 작가는 글에서 제외하고 싶은 내용과 정보를 그저 작중 화자 '나'의 인지적 한계로 과감히 제거해댜 되요.

 

대신에 독자들은 1인칭 소설을 읽을 때 항상 모든 것이 작중 화자인 '나'를 증인으로 한 '나'의 주관적 사실이라는 걸 인식해야 해요. 또한 누락된 부분을 스스로 인과관계를 부여하며 추측하고 채워가며 읽어야 해요. 그래서 기본적으로 읽는 순간에는 1인칭 소설이 몰입감은 높아서 3인칭 소설보다 잘 읽히지만, 후에 해석하고 분석할 때는 3인칭 소설보다 훨씬 어렵고 까다로워요.

 

이런 부분이 폭발하는 부분이 바로 1부 6장 마지막인 뫼르소의 아랍인 살인 사건 장면이에요. 이 장면은 1차 총격 한 발과 2차 총격 4발로 구성되어 있어요. 그런데 정작 제일 중요한 이 총격 부분으로 들어가면 마치 기자가 진술서를 읽어주는 듯한 모습을 보여요. 총격 전까지는 상황 설명까지 매우 친절하게 해주다가 정작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할 실제 총격의 순간으로 들어가면 모든 게 다 생략되어 있어요.

 

특히 1차 총격 한 발 후 2차 총격 4발로 넘어가는 순간에 대해 나오는 거라고는 뫼르소가 땀을 닦고 태양의 열기에서 벗어났으며, 아랍인이 죽었음을 확인했다는 것 뿐이에요. 딱 두 문장 뿐이에요. 1차 총격도 어떤 식으로 총을 쐈는지 알 수가 없는 상황에서 바로 정신 차리고 아랍인이 사망했음을 확인했다고만 나온 후 바로 두 번째 총격으로 이어져요.

 

뫼르소의 아랍인 살인 사건에서 독자들이 마지막으로 소설 텍스트에 의지해 정확한 장면을 그릴 수 있는 순간은 정확히 뫼르소의 눈에 땀이 들어갔고, 그때 칼날에 반사된 햇볕이 눈을 찌르는 순간이에요. 그 후에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고, 어떻게 총을 발사했는지 아무 것도 몰라요. 1차 총격의 미스테리 이후 그대로 아랍인의 사망을 확인하고 2차 총격을 가하는 뫼르소가 등장하구요. 여기에서도 어떻게 아랍인의 사망을 확인했는지 안 나오고 첫 발 이후 2차 총격을 가했는지 아무 것도 없어요. 그냥 총을 쐈다고만 나와요.

 

이 과감한 생략 속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독자들은 스스로 추측해야 해요. 2부 내용을 보면 이렇게 발사된 총알 5발은 전부 아랍인에게 명중했다고 유추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정작 마지막에 주어진 장면은 뫼르소와 아랍인 사이의 거리는 10m 정도 되는 거리에서 뫼르소가 힘겹게 몇 걸음 걸어가서 서로 대치하고 있는 장면이에요.

 

이러면 여러 장면을 상상할 수 있어요. 1차 총격 후 뫼르소가 아랍인 시체로 다가가서 거리를 좁혔을 수 있어요. 직접 걸어가서 물리적 거리를 좁혔을 수도 있고, 조준 사격을 가해서 심리적 거리를 좁혔을 수도 있어요. 또는 반대로 뫼르소는 그저 위협사격으로 정면 수평 사격을 가했는데 하필 아랍인이 그때 빈틈이라고 여겨서 일어나 습격하려다가 진짜 운 없게 총에 맞고 사망했을 수도 있어요.

 

https://zomzom.tistory.com/556409

 

프랑스 소설 알베르 카뮈 이방인 아랍인 살인 사건 총성 해설, 해석 및 그날의 진실 - 문학 속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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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부분은 마지막에 주어진 장면은 뫼르소와 아랍인 사이의 거리는 10m 정도 되는 거리에서 뫼르소가 아랍인을 향해 몇 발 걸어간 정도가 유지되고 있는 중이라 상상하며 읽어요. 독자들이 스스로 소설에서 생략된 부분은 인과관계를 만들어서 생략된 부분을 채워가며 읽지만, 1인칭 시점에서는 장면 서술이 지속되고 있다면 그 사이에 언급되지 않은 공백 같은 게 있을 거라 생각을 잘 안 하거든요. 하지만 실제로는 만약 순간 1인칭 화자의 인지가 끊어졌다면 공백이 있을 수도 있어요. 당장 이 소설만 봐도 1차 사격과 아랍인 사망 확인 사이에는 분명히 공백이 존재해요.

 

이런 1인칭 시점 특유의 서술 생략은 소설 전체에서 꽤 확인할 수 있고, 독자들이 뫼르소라는 개인부터 소설 전체 해석을 할 때 중요한 정보들이 생략되어 있어요. 1부 6장 뫼르소의 아랍인 살인 사건의 정확한 장면 뿐만 아니라 뫼르소가 평소 주변의 평판이 어땠고 생활 모습이 어땠는지, 어머니와 원래 어떤 관계였는지 등이 싹 다 생략되어 있어요. 이런 점이 전체 독자 공통으로 이 소설을 어렵게 느끼게 만드는 원인이에요.

 

2.2. 윤리적 문제 - 범죄자에 대한 공감 범위와 정도의 문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독자들이 이 소설을 어렵다고 느끼기 시작하는 부분은 바로 1부 6장 마지막 장면인 뫼르소의 아랍인 살해 사건부터에요. 여기에서부터 사람들은 기괴한 감정에 빠져들게 되요.

 

멀쩡한 살인자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뫼르소의 성격은 변한 게 없어요. 나름대로 환경에 열심히 적응하려고 하고, 1부와 마찬가지로 주변에 무심하고 자기 자신에 충실한 태도를 지켜요. 캐릭터 자체는 매우 일관성 있게 유지되요. 자신의 고유한 성격을 잘 유지해요. 문제는 이게 독자들에게는 상당한 충격을 야기한다는 점이에요. 왜냐하면 상황과 캐릭터의 지위가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에요.

 

1부 6장 마지막 장면인 뫼르소의 아랍인 살해 사건부터 뫼르소는 살인자에요. 단순한 범죄도 아니고 살인을 저지른 최악의 범죄자에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뫼르소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요. 하지만 소설을 보면 뫼르소는 그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아요.

 

이때부터 독자들은 뫼르소에게 얼마나 공감해줘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해요. 이 고민은 뫼르소가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사회 통념에 맞는 슬픔의 표현을 안 하는 장면을 보았을 때의 당혹감과는 차원이 완전히 달라요.

 

사실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보인 뫼르소의 모습이 주는 당혹감은 1부 5장에서 어느 정도 해소되요. 왜냐하면 살라마노 노인과 대화하는 장면에서 뫼르소가 어쩔 수 없이 양로원에 보내드렸다고 나오거든요. 그리고 소설 전체에서 어머니를 사랑했다는 말이 여러 차례 등장해요. 그러니 이건 그래도 넘어가줄 수 있어요. 그 정도야 공감은 안 되더라도 나름대로 많이 슬펐고 표현 방식이 완전히 다른 인간이라고 합리화시키면 되거든요.

 

문제는 어머니의 사망은 뫼르소가 어머니를 죽인 게 아니라 그렇게 넘어갈 수도 있지만, 살인은 뫼르소 자신이 직접 죽였다는 점이에요. 뫼르소 자신이 직접 저지른 최악의 범죄에 대해서 반성을 하든 후회를 하든 해야 하는데 이런 게 전혀 없어요. 그나마 후회중이라고 볼 수 있는 말도 '후회라기 보다는 지루함'이라는 이상한 말을 해요. 이 대목 외에는 자신이 죄책감을 느끼고 있음을 확실히 뫼르소의 대사로 나타나는 일이 없다시피해요. 오히려 행동을 보면 1부와 2부 모두 그저 감옥 독방 환경으로 인한 변화 수준의 변화로 넘어갈 수준만의 변화만 존재하구요.

 

그래서 소설을 읽고 나면 이번에는 이 반성 전혀 없는 살인마를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커다란 문제가 생겨요. 재판이 살인 사건에서 사회 통념을 어긴 것에 대한 재판으로 변질되어 사회 통념을 어긴 이유로 처형당하는 것에 어이없어하며 뫼르소에 공감을 해주려고 하는 순간 살인 사건이 떠오르며 공감해주면 독자 자신에게 윤리적 자살이 일어나요. 반대로 공감을 안 해주고 살인마라고 읽으면 이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거고 작가는 이걸 왜 썼는지, 더 나아가 이게 왜 명작 소설이라는지 의문에 빠져요.

 

더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오직 소설 텍스트에만 집중해서 보면 마지막에 카뮈 부조리 철학 해결 방식 구현은 매우 뚜렷하게 나와요. 이러니 더 의문이 생겨요. 상당히 깔끔하고 쭉 읽히는 소설인데 윤리적 문제 처리에서 크게 애를 먹게 되요. 이럴 때 나오는 말이 바로 '이걸 뭐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거야?'에요. 어려운 건 없는데 반성과 후회 모습이 안 보이는 살인마에게 어떻게 공감하고 무엇을 공감하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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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이 잘 모르는 카뮈 이방인 비평과 해석에서 에드워드 사이드의 문화와 제국주의 저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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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를 해결해준 것이 바로 에드워드 사이드에요. 괜히 이방인에 대해 다룰 때 에드워드 사이드가 언급되는 것이 아니에요. 뫼르소의 아랍인 살해에 대한 죄책감을 실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논리적으로 타당한 방식으로 소거하고 읽는 방법을 제시했기 때문이에요. 식민지 알제리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 등장한다면 기본적으로 에드워드 사이드의 비판에서 출발한 독서법이자 관점이라고 보면 되요. 이때부터 식민지 알제리 특성으로 뫼르소의 아랍인 살해에 대한 죄책감을 소거하는 것이 이방인 읽을 때 사실상 기본 전제로 자리잡았거든요. 장담컨데 에드워드 사이드의 카뮈와 이방인 비판이 없었다면 현재까지도 이방인 리뷰 및 분석에서 반성 기미가 안 보이는 범죄자에 대한 공감 여부가 무조건 등장했을 거고, 이로 인한 논쟁이 전체 논쟁에서 30% 넘게 차지하고 있었을 거에요. 과장이 아니라 실제 이방인 비평을 보면 이 방법이 등장하기 전에는 뫼르소의 아랍인 살해에 대한 죄책감 처리 방법에 상당히 애를 먹었거든요. 애를 먹는 정도가 아니라 이 문제가 이방인 비평 및 분석에서 핵심 문제 중 하나였어요.

 

2. 깊게 읽고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겪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 어려운 이유

 

2.1. 마지막에서의 카뮈 철학식 해결 구현 증명 문제 - 죄책감의 극단값에서만 나오는 구조적 문제

 

이 특징은 카뮈의 이방인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이에요. 이것도 카뮈의 이방인을 상당히 어려운 소설로 만드는 이유에요. 이것이 이 소설에 대해 깊게 읽고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겪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 어려운 이유 중 상당히 큰 몫을 차지하고 있어요.

 

카뮈의 이방인은 카뮈 본인이 자신의 철학을 담고 표현한 소설이라고 밝혔어요. 이방인, 시지프 신화, 칼리굴라 - 이렇게 셋을 철학 3부작으로 묶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깊게 읽고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은 카뮈의 이방인을 카뮈의 부조리 철학에 맞춰서 읽으려고 해요.

 

각자 어떻게 느끼고 해석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작가가 어떤 의도와 목적으로 어떤 구조로 집필했을지 추측하며 읽는 것은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밝힌 바에 맞춰서 읽는 것부터 해야 하거든요. 이런 기초 작업 후에 자기 나름대로 작가가 이런 의도로 이 소설을 이렇게 썼다고 개인의 견해를 밝혀야 해요. 이런 면에서 카뮈의 이방인은 작가 의도와 목적이 매우 확실한 작품이에요. 작가 본인이 자신의 철학을 소설로 구현한 작품이라고 밝혔으니 무조건 작가의 철학에 맞춰서 먼저 깔끔히 해석해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작가 의도와 목적을 고려하며 읽는다면 이방인 마지막에서의 카뮈 철학식 해결 구현 증명 문제가 있어요. 제일 마지막 문단을 카뮈 부조리 철학 관점으로 봤을 때 행복한 뫼르소로 나와야 해요. 제일 마지막 문단의 뫼르소 모습이 불행한 뫼르소, 허무한 뫼르소로 나왔다면 작가 의도와 목적을 고려해 읽기에서는 실패한 독서에요. 시지프 신화를 보면 부조리를 이겨내고 행복한 엔딩이 나와야 하거든요. 만약 불행한 뫼르소, 허무한 뫼르소로 나온다면 카뮈가 주장한 부조리 극복을 백날 천날 해봐야 결국은 극단적 선택으로 귀결이라는 황당한 결과가 나오니까요.

 

카뮈 부조리 철학에서는 부조리를 직시하고 수용하되, 그것을 바탕으로 삶을 긍정하는 자세가 핵심이에요. 마지막 문단에서 뫼르소는 행복하거나, 최소한 삶을 긍정하는 상태로 나와야 해요. 만약 불행하거나 허무하게만 묘사된다면, 카뮈가 의도한 부조리 극복과 삶의 긍정이 반영되지 않은 것이고, 이는 작가가 설정한 철학적 구조에서 벗어난 독서가 되요. 왜냐하면 카뮈가 한 세트로 묶은 다른 책인 시지프 신화에서 시지프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부조리한 노동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상황을 직시하고 수용하며 의식을 완전히 깨닫는 순간, 그 부조리 속에서 행복을 경험하니까요. 마찬가지로, 이방인의 마지막 문단에서 뫼르소 역시 자신의 삶과 죽음을 직시하며 부조리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모습이어야만 카뮈 철학식 해결이 구현되요.

 

문제는 이방인이 다른 소설들과는 상당히 다른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이에요. 바로 죄책감 설정을 극단값으로 맞춰놓고 읽어야 맨 마지막에서 카뮈 철학식 해결 구현 증명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죄책감이 극단적으로 없으면 0, 죄책감이 극단적으로 많으면 100이라고 했을 때, 죄책감을 0이나 100에 맞춰야 제일 마지막에서 카뮈 철학식 해결 구현 증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이에요. 죄책감을 0이나 100에 맞추면 마지막에서 카뮈 부조리 철학식 해결 구현이 매우 선명하게 드러나요. 완전히 소시오패스라고 보든가, 아니면 완전히 죄책감에 짓눌린 가해자 유발 외상 스트레스, 도덕적 상해 (Moral Injury)로 봐야 한다는 점이에요.

 

죄책감을 완전히 양극단으로 맞춰놨을 때 소설 2부 전체가 말끔히 해석되고 마지막에 카뮈 철학식 해결 구현 방식과 그에 따른 해석을 할 수 있다는 점 자체가 상당히 특이한 점이에요. 보통 죄책감이 있는 쪽이든 없는 쪽이든 한쪽은 해석이 잘 안 나오는데 이방인은 둘 다 깔끔히 나오거든요. 이렇게 극단적으로 다른 가정을 해도 해석이 다 되는 문학은 흔하지 않아요. 다른 관점으로 보자는 수준이 아니라 제일 중요한 설정을 완전히 정반대로 설정해도 둘 다 해석에 아무 문제가 없는 일이 일어나는 소설은 오히려 매우 드물어요.

 

그런데 이렇게 죄책감을 완전히 양극단으로 맞춰놨을 때 둘 다 해석이 잘 나온다는 문제로 끝났다면 이 소설이 어렵고 난해하다는 평을 받지는 않았을 거에요. 더 문제는 이 소설이 이렇게 죄책감을 양극단으로 맞춰놓고 보면 말끔히 잘 읽히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해석이 진짜 잘 안 나와요. 특히 마지막에서의 카뮈 철학식 해결 구현 증명 문제가 매우 어려워져요. 죄책감 유무 수준을 중간값으로 맞춰갈 수록 - 죄책감이 어느 정도 있었을 거라고 보면 해석이 꼬이고, 특히 마지막 마지막에서의 카뮈 철학식 해결 구현 증명 문제는 한없이 어려워져요.

 

사람들은 소설을 읽을 때 아무리 악당이라도 인간적인 면과 착한 모습이 아주 약간은 존재할 거라 가정하고 있어요. 100% 나쁜 놈인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를 가정하고 읽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그래서 어느 정도는 선한 마음이 있을 거라고 보정하고 읽는 것이 보편적인 모습이에요. 왜냐하면 그래야 독자가 소설 속 등장인물이 아무리 악당이라 하더라도 공감할 여지가 생기거든요. 그런데 이방인은 이렇게 선한 마음이 어느 정도는 있을 거라고 보정하고 읽으면 2부 뫼르소 모습이 도저히 해석이 안 되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일관되게 선한 마음이 있으면 해석이 아예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이것을 또 완전히 최극단값으로 올려서 뫼르소가 가해자 유발 외상 스트레스, 도덕적 상해 (Moral Injury)에 시달리고 있다고 보면 또 해석이 깔끔하게 나오고, 마지막에서의 카뮈 철학식 해결 구현 증명 문는 완벽히 잘 해결되요.

 

죄책감이 극단적으로 크다고 가정하고 읽으려면 판사가 뫼르소에게 후회하냐고 물어봤을 때 '후회라기 보다는 지루함'이라고 답변한 부분에 집중하고 여기에 의미를 매우 크게 둬야 해요. 소설에 나와 있는 뫼르소의 대사들로 보면 '후회라기 보다는 지루함'은 후회에 대한 상당히 강한 긍정 표현이에요. 하지만 이 점에 집중해서 죄책감을 극단적으로 크다고 가정하지 않으면 그 이후에 뫼르소가 죄책감을 극단적으로 크게 느끼고 있다고 추측할 만한 장면이 별로 안 나와요. 오히려 이방인 2부 뫼르소 장면은 얼핏 보면 죄책감이 없어 보이기만 하구요.

 

죄책감이 완전히 없다고 보고 읽을 때는 마지막에서의 카뮈 철학식 해결 구현 증명 문제는 완전히 잘 해결되지만, 이 결과에 공감하는 순간 독자의 윤리적 자살이 발생해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구요.

 

그래서 대부분의 독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어느 정도 죄책감이 있다고 읽으면 오히려 마지막에서의 카뮈 철학식 해결 구현 증명 문제 해결이 어려워지는 구조적인 특징이 있어요. 죄책감을 아예 전혀 없든, 너무 극단적으로 심한 상태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깔끔히 읽혀요. 이것은 일반적인 소설들과는 상당히 다른 특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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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소설 이방인 해석 - 시지프스가 행복하다면 단두대 위 뫼르소 또한 반드시 행복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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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순수 텍스트만으로 윤리 문제 해결 문제 - 납득되도록 설명해야 하는 문제

 

바로 앞에서 카뮈의 이방인은 뫼르소의 죄책감을 아예 전혀 없든, 너무 극단적으로 심한 상태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깔끔히 읽힌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죄책감이 너무 극단적으로 심한 상태로 읽기 위해서는 판사가 뫼르소에게 후회하냐고 물어봤을 때 '후회라기 보다는 지루함'이라고 답변한 부분에 엄청난 중점을 둬야 하고, 이 단서를 놓치면 이 설정은 거의 불가능해진다고 했어요.

 

만약 죄책감이 너무 극단적으로 심한 상태로 읽지 않는다면, 이 소설은 죄책감이 아예 없다고 읽어야 해요. 이렇게 읽는 사람들은 은근히 꽤 많아요. 이방인을 읽고 살인마 이야기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렇게 읽은 사람들이에요.

 

하지만 죄책감이 완전히 없다고 읽으면 그 결과를 윤리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이고 공감할 수 없다는 문제가 생겨요. 에드워드 사이드의 카뮈 및 이방인에 대한 비판 이후부터는 이방인을 읽을 때 식민지 알제리 특수성을 기본 전제로 삼아서 뫼르소의 죄책감을 개인 차원에서 정치-사회 구조 차원의 문제로 이동시키는 방식으로 윤리적 문제를 해결하고 읽는 것이 일반적이에요.

 

에드워드 사이드의 카뮈 및 이방인 비판은 1990년대에 그의 저서 문화와 제국주의를 통해 발표되었어요. 그 이전 사람들은 전부 이 죄책감 처리 문제로 골치를 앓았어요. 예외가 단 한 명도 없었어요. 이건 100%에요. 1%의 예외도 없었어요. 예외가 존재한다면 소설을 읽기 전부터 윤리적으로 완전히 붕괴되어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라면 사람을 그냥 죽여도 된다는 사람이겠죠.

 

그리고 이 문제는 오늘날에도 계속 지속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해요. 모두가 이방인 읽기 전에 에드워드 사이드 비판에서부터 출발하는 식민지 알제리 특수성으로 뫼르소의 죄책감을 소거시키는 방법을 알고 읽는 것은 아니에요. 또한 설령 이것을 알고 있더라도 그런 외부 요소 없이 순수하게 소설 텍스트에 나와 있는 것만 집중해서 읽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이런 사람들은 전부 다 순수 텍스트만으로 윤리 문제를 해결해내야만 해요.

 

그래서 과거에는 아예 1부 뫼르소와 2부 뫼르소를 나눠서 보는 경향이 있었어요. 1부 뫼르소는 감각주의자 뫼르소, 2부 뫼르소는 카뮈의 철학적 인형인 뫼르소라고 분리해서 접근하는 방법이에요. 이렇게 보면 윤리 문제가 조금 줄어드는 효과가 있기는 해요. 2부 뫼르소에 공감할 때 느껴지는 심각한 윤리적 붕괴의 충격을 작가의 철학적 인형에 불과할 뿐'이라고 죄다 넘겨버리면 되니까요. 대신에 이러면 이런 대답과 동시에 작품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답해야 하는 문제가 생겨요.

 

아니면 애써 살인이라는 범죄를 외면해버리거나요. 문학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퉁쳐버리는 방식이에요. 정확히는 문학에서 일어난 가상의 일이라고 설명하며 살인의 충격을 최대한 낮춰버리는 거에요. 살인은 지나가는 일처럼 최대한 의미 부여하지 않고 가볍게 다루고, 대신에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사회 통념에 따라 슬픔을 보이지 않은 행위에 대한 재판으로의 변질에 최대한 무게를 실어주는 방법이에요. 죄책감을 느낄 새도 없었다는 식으로 비중 조절을 해버리는 거에요. 이 방식도 상당히 많이 사용되었어요.

 

중요한 건 과거나 지금이나 뫼르소가 죄책감을 안 느낀 이유에 대해서 순수 텍스트만으로 설명하고 사람들이 뫼르소에게 공감할 수 있도록 납득되게 설명하는 건 진짜 어려운 일이라는 점이에요.

 

2.3. 뫼르소 행적에서 인과관계의 복원 문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보면 인과관계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꽤 있어요. 읽을 때야 쭉 읽으면 되지만, 이 소설을 설명하고 이해하려 들면 인과관계를 복원해야 해요. 그런데 뫼르소는 가뜩이나 자신의 육체적 감각에 충실한 사람이라 판단 근거가 감각인 경우가 많고, 이 감각을 사회 통념상 보편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그 감각 그대로 표현해요. 그래서 인과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과관계를 복원하려고 하면 상당히 어려워져요.

 

대표적인 장면이 바로 맨 처음 어머니의 장례식이에요. 소설에 뫼르소는 자신의 말을 통해 어머니를 사랑했음을 몇 번 밝혀요. 그런데 어머니의 사망을 슬퍼하는 장면으로 유추할 부분이 하나도 없어요. 정말 깔끔할 정도로 없어요. 어머니를 사랑했다면 어머니가 사망했을 때도 나름대로 슬퍼했음을 밝혀야 하지만 소설 그 어느 부분에도 뫼르소가 어머니가 사망했을 때 어떤 식으로 슬픔을 느꼈는지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어요. 정작 이 부분은 엉뚱한 곳에 있어요. 바로 독자들이 시작하자마자 충격을 받는 첫 부분 - '오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제인가, 모르겠다' 여기에 있어요. 사람들은 이 첫 부분에서 상당히 충격을 받고 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를 기억하고 많이 언급해요. 그런데 이 충격에 가려져서 그렇지, 진짜 중요한 건 바로 '어제인가, 모르겠다'에요. 이게 바로 뫼르소식 슬픔이에요.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게 어제인지 오늘인지 시간 감각마저 잃어버렸다는 것이거든요.

 

마리와의 대화도 이런 식이에요. 마리가 사랑하냐고 물어보니까 아니라고 대답해요. 마리가 다른 여자가 뫼르소에게 청혼하면 뫼르소는 그걸 받아줄 거냐고 물어보니까 그렇다고 대답해요. 보통 이 상황에서 마리라면 노발대발해야 정상이에요. 이상한 인간은 뫼르소이지, 마리가 아니니까요. 그런데 마리는 좀 이상해하는 반응을 보이더니 오히려 결혼하자고 해요.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상당히 이해가 안 되는 장면이에요.

 

뫼르소의 아랍인 살인 사건도 마찬가지에요. 첫 발이야 우연이라고 넘어가더라도 두 번째 4발 사격은 소설만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어떻게 첫 발에 아랍인이 사망했다고 확인했는지 알려주지 않아요. 아랍인 죽었다고 나오고 바로 4발을 추가로 발사해요. 이건 매우 유명한 부분이라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을 거에요. 오죽하면 이 두 번째 4발까지 합쳐서 적당히 우연이라고 퉁쳐버리는 해석이 아주 넘쳐나니까요.

 

인과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에요. 인과관계가 있기는 한데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사람들이 간과하고 넘어가기 좋은 자리에 원인이 위치해 있어요. 게다가 1인칭 시점 서술 특징인 서술 생략과 시야의 한정까지 겹쳐지기 때문에 인과관계를 제대로 복원하려면 책을 몇 번씩 뒤적여야 해요.

 

3. 해석 지옥으로 가는 급행열차를 탄 사람들 - 사르트르 철학 관점으로 해석하는 사람들

 

지금까지 다뤄온 카뮈의 이방인이 어렵고 난해하다는 평가를 듣는 이유를 보면 수긍할 만 하기도 하지만 의문이 들 거에요. 고작 이거 가지고 그렇게 이방인이 어렵고 난해한 소설이라고 유난을 떨 것이 있냐는 생각을 할 거에요. 소설 중 이 정도 난이도를 갖고 있는 소설이야 한둘이 아니니까요. 다의적으로 해석되는 소설들은 상당히 많고, 머리 쥐어짜내며 읽어야 하는 소설들도 많아요. 쉽지는 않고, 분명히 경험이 없다면 왜 어려운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이기는 하지만요.

 

그런데 전문가, 권위자들조차도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 쉽지 않고 어렵고 난해하다고 평하는 이유는 사실 이것 때문이 아니에요. 해석 지옥으로 가는 급행열차를 탄 사람들이기 때문이에요. 바로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사르트르 철학을 끌고 와서 해석하려 들기 때문에 해석 지옥 무저갱에 떨어져버렸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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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과 카뮈 부조리 철학의 근본적 핵심 차이 및 혼동 발생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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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어떤 관점으로 보고 해석할 지는 자유에요. 그건 마음대로 해도 되요. 그거야 개인의 자유니까요. 하지만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을 때 절대 해석의 관점으로 끌고 와서는 안 되는 것이 딱 하나 있어요. 바로 사르트르 철학이에요. 이것만큼은 절대 하면 안 되요.

 

카뮈 부조리 철학과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은 완벽히 상극이에요. 어떻게 보면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의 약점에서 카뮈 부조리 철학이 출발한다고 볼 수 있거든요. 카뮈 부조리 철학과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은 대척점에 있고, 이방인은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으로 해결이 안 되는 모아놓은 소설에 가까워요. 그러니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으로 카뮈 이방인을 설명하려 하면 애초에 틀린 거에요. 원래는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으로 카뮈 이방인을 해석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으로 카뮈 이방인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석해야 한다는 거에요.

 

물론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 연구자들이라면 이방인을 사르트르 철학의 발전을 위해 이 철학에서 제대로 답하기 어려운 문제들의 사례로 삼아서 연구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이것은 사르트르 철학 내부에서 일어날 일이지, 보편적인 해석 방법으로 사용되면 안 된다는 거에요. 해결 안 나는 걸 가져와서 해결하려 하면 쓸 데 없이 일만 엄청 많아지고 난이도만 폭증하니까요.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났고 지금도 진행중이에요. 이 소설을 80년 넘게 매우 어렵고 난해한 소설로 만들고 있는 것이 바로 잘못된 수준을 넘어 절대 사용하면 안 되는 해석도구인 사르트르 철학으로 카뮈의 이방인을 설명하려 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이게 가장 널리 알려지고 일반적인 해석 방식이라 가히 8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재앙이라고 할 수 있구요.

 

3.1. 이방인에서 사르트르 철학 관점 해석시 장점

 

당연히 아무 이유 없이 사르트르 철학 관점으로 이방인을 해석하는 것은 아니에요. 당시 사르트르가 유명한 거물 철학자이자 실존주의 철학이 인기가 있어서 사르트르 철학을 끌고 와서 이방인 해석을 시도하는 게 일반적이었던 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어요.

 

3.1.1. 우연으로 설명하는 강력함

 

사르트르 철학에서는 우연을 상당히 강조해요. 그런데 이방인은 인과관계 찾기가 꽤 어려워요. 이 문제는 특히 1부 6장 마지막인 뫼르소의 아랍인 살해 사건, 그리고 1부와 2부 사이의 뫼르소 변화에서 폭발해요. 그런데 사르트르 철학 관점으로 접근하면 이런 급격한 변화를 다 우연이라고 해석하고 넘어가면 되요. 이게 웃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에요. 사건은 우연으로 처리하고, 사건 앞뒤의 인물이 갖는 의미에 집중하면 되거든요.

 

대표적으로 1부 6장 마지막인 뫼르소의 아랍인 살해 사건은 첫 발과 두 번째 4발로 구성되어 있어요. 그런데 사르트르 철학 관점으로 접근하면 첫 발을 발사할 때의 실존적 존재로써의 뫼르소와 두 번째 4발을 발사할 때의 실존적 존재로써의 뫼르소가 어떻게 다른지 봐도 되기는 하지만, 이 둘을 하나로 묶어서 아랍인 살해 사건 전의 실존적 존재로써의 뫼르소와 사건 후의 실존적 존재로써의 뫼르소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집중해서 보면 되요. 이러면 머리 아프게 소설에 나오지 않는 첫 번째 사격과 두 번째 사격 사이의 서사적 공백을 머리 아프게 유추할 필요가 아예 없어요. 이게 진짜 상당히 강력한 무기에요. 안 그러면 전부 다 이 첫 사격과 두 번째 사격 사이에 있었던 사건을 재구성하느라 골머리 앓아야 하거든요. 이 소설 속에서 제대로 묘사 안 된 장면에 따라 상당히 달라질 수 있어서요.

 

3.1.2. 명확한 용어를 통한 설명으로 인한 전달력 상승

 

카뮈 이방인은 카뮈 본인이 자신의 철학과 상당히 큰 연관이 있다고 밝힌 소설이에요. 문제는 시지프 신화에 있어요. 시지프 신화를 보면 카뮈의 철학 집필 기술의 미숙함을 의심해볼 만한 점이 있어요. 이 부분은 이후 '카뮈가 자초한 80년간의 재앙과 오독인 이유'에서 다룰 거에요. 일단 여기에서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시지프 신화에 나오는 카뮈 부조리 철학이 복잡하거나 어려운 건 아닌데 철학 집필 기술의 미숙함 때문에 부조리가 뭔지 한 번에 명쾌히 말하기가 쉽지가 않아요. 반면 사르트르는 자신의 철학 개념 표현 및 철학 용어를 철저히 엄격한 기준에 맞춰서 사용했어요. 그래서 사르트르 철학의 개념 표현 및 철학 용어를 사용하면 전달력은 매우 좋아져요.

 

또한 이방인이 출간될 때 사르트르는 이미 유명한 거물 철학자였어요. 또한 이후에도 카뮈와 사르트르 둘 다 실존주의 철학자로 구분되고 있어요. 그러니 계속 사르트르 철학을 가져와서 이방인을 해석하는 것도 있어요.

 

3.2. 이방인에서 사르트르 철학 관점 해석시 단점

 

단점은 명확해요. 설명 및 해석, 분석에 절대 써서는 안 되는 잘못된 해석의 도구를 썼으니 그 결과가 뭐겠어요. 소설 해석은 안 나오고 난이도는 폭등하고 쓸 데 없이 어려워지는 총체적 난국의 대환장 파티에요. 문학을 해석하랬더니 사르트르 철학 약점을 해결하려고 철학적 문제에 달려드는 꼴이 되었어요. 그러니 완전히 산으로 가고 한결같이 어렵고 난해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거에요. 사르트르 본인도 힘들어하고 심지어 제대로 답도 못 내놓은 문제를 문학 해석하는 사람들이 풀겠다고 덤벼든 꼴이 되었으니 무슨 일이 발생하겠어요.

 

이제부터 몇 가지 사례를 들 거에요. 이 세 가지 사례가 이방인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로 악명 높아요. 더 웃긴 건 머리 텅 비우고 대충 읽어도 별 거 아닌 문제에요.

 

3.2.1. 태양

 

카뮈의 이방인을 읽은 사람들은 태양이 중요하다는 건 알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석할지를 고민해야 해요. 특히 이 소설에서 1부 6장 마지막인 뫼르소의 아랍인 살해 사건에서의 태양은 유난히 잔인한 태양으로 나와요. 뫼르소를 아찔하게 만들고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게 만드니까요. 2부에서 뫼르소가 자신의 살인 원인이 태양이라고 밝혀요. 그러니 태양은 분명히 중요해요.

 

아예 특별한 생각을 안 하고 읽은 사람이라면 정말 그날 태양이 유난히 뜨거웠다고 이야기할 거에요. 소설에 그렇게 나와 있으니까요. 카뮈 철학에 맞춰서 태양이 어떤 상징적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는 사람이라면 '영원성의 부정', '부조리의 메카니즘' 등으로 해석할 수 있을 거에요. 태양이 항상 온화하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한 사람을 파멸로 몰아넣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특정 상태가 영원히 이어지지 않는다는 영원성의 부정을 상징한 것이라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리고 이렇게 믿었던 세상이 뒤통수를 제대로 갈기며 파멸로 몰아넣는 부조리의 메카니즘으로 읽을 수도 있어요. 이 정도는 아예 특별한 생각을 안 하고 읽은 사람이라도 뭐 좀 더 말해보라고 시키면 아주 짧게 생각한 후 말할 수 있는 정도에요.

 

그러나 이게 사르트르 철학 관점으로 다가가면 문제가 완전히 달라져요. 사르트르 철학에서는 행동하는 자신의 실존적 의미가 중요해요. 그러면 평소의 뫼르소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산책하는 뫼르소의 실존적 의미는 어떻게 달라지는지 해석해야 해요. 뫼르소의 첫 발을 우연이라고 넘어간다면 두 번째 사격을 가할 때의 뫼르소는 첫 발 발사하기 전의 뫼르소와 어떤 실존적 의미 차이가 있는지 해석해야 해요. 게다가 두 번째 사격은 아예 우연이라고 해석 못 하도록 카뮈가 소설에 써놨어요. 아랍인이 죽은 걸 확인하고 쐈으니 이건 분명히 우연이 아니거든요.

 

이게 태양에 맞춰서 보면 쉬운데 사람에 맞춰서 어떻게 실존적 존재로써 의미가 달라지는지를 따지면 문제가 진짜 어려워져요.

 

더 웃긴 건 특별한 생각 없이 읽는 사람이 오히려 카뮈 철학에 맞춰서 제대로 읽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진 셈이에요.

 

3.2.2. 마지막 문단

 

이방인에서 마지막 문단은 사르트르 철학 관점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에게는 재앙, 폭탄 같은 존재에요. 어찌저찌 넘어온다고 하더라도 여기에서는 무조건 막혀요. 왜냐하면 마지막 문단 전체가 사실상 카뮈 철학과 사르트르 철학이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사르트르 철학의 약점을 다 보여주거든요. 또한 뫼르소가 허무주의의 아이콘이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요.

 

3.2.2.1. 마지막 문단에서 어머니에 대한 회상

 

이방인 마지막 문단에서 뫼르소는 어머니에 대해 회상해요. 어머니가 양로원에서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순간에 왜 사랑을 다시 시작했는지 공감해요.

 

아예 특별한 생각을 안 하고 읽은 사람이라면 딱히 어려울 거 없어요. 그냥 죽을 때 되니 어머니 생각났다 봤다고 넘어가버려요. 조금 더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죽음이 다가왔을 때 이런 기분이었다고 어머니에게 공감했다고 생각할 거에요. 어머니가 죽기 전에 사랑을 다시 시작한 건 남은 인생 즐기고 싶었나 보다고 생각할 거구요. 그런데 카뮈 철학으로 보면 맞아요. 어머니는 자신의 감각적 행복에 충실한 선택을 한 거에요. 새로운 남자와 사랑을 하면 사랑의 기쁨을 감각적으로 느끼고, 그 감각이 좋았던 거에요. 그래서 어머니는 삶의 의미가 사랑이었던 거고, 마지막까지 그 자신의 행복한 감각에서 출발한 인생의 의미를 지키며 부조리를 극복하며 살았던 거에요. 즉, 뫼르소는 어머니의 마지막 사랑의 의미에 공명하게 된 거에요.

 

카뮈 부조리 철학에 맞춰서 여기에서 조금 더 생각해보면 뫼르소가 어머니의 인생의 의미가 사랑이라고 깨닫는다고 해석하면 이 장면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장면이에요. 왜냐하면 뫼르소는 어머니와의 대화가 적어지고 어머니는 홀로 집에 방치되는 시간이 많았다고 1부 5장 살라마노 노인과의 대화에서 밝혔어요. 그래서 어머니의 상황, 그리고 자신의 처지 때문에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내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고 나오구요. 그런데 어머니는 그렇게 집에 방치되고, 뫼르소와의 대화가 줄어들어도 단지 뫼르소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던 거라는 해석이 나와요. 그러면 뫼르소가 더욱 어머니를 그리워하게 되고, 독자들도 그런 상황에 공감하게 되며 마음이 아파지죠.

 

그러나 이게 사르트르 철학 관점으로 보면 매우 난해해져요. 대충 느끼고 넘어가면 되는 부분을 실존적 의미로 해석해야 하거든요. 뫼르소가 어떤 실존적 깨달음을 얻었는지 설명해야 해요. 정 안 되면 어머니는 죽음에 저항하는 자세를 마지막까지 유지하셨다고 깨달았다고 둘러되면 되요.

 

그나마 그럴싸하게 해결하는 방법은 어머니가 세상에서 강요하던 자신과의 인연을 정리하고 자신의 인생을 결정한 실존적 선택을 한 것처럼 자기 역시 이 세상과 맞서서 잘못된 주장을 억지로 강요하는 자들과의 인연을 단절하고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는 실존적 선택을 한다고 해결하는 방법이에요. 이러면 뫼르소가 장례식장에서 안 슬퍼한 것에 대해 뫼르소 스스로 마지막에 자기합리화하는 아주 좋은 해석이 되요. 읽는 사람은 더욱 씁쓸해지지만요.

 

말이 좋아 이런 해석이지, '엄마도 나를 버리며 세상의 강요에 저항했는데 나라고 세상 못 버리고 저항 못 하겠냐' 이런 장면이 되어버리니까요. 뫼르소가 어머니가 양로원에서 새로운 연인을 만들었음을 어머니 사망 후 장례식장 가서야 알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더욱 그래요. 특히 실존적 선택을 한다고 해석하려면 단순히 연락이 소원해진 게 아니라 어머니가 사실상 인연을 끊었다는 쪽으로 가야 하구요.

 

애미는 자신의 실존적 혁명을 위해 자식 버리고 자식은 자신의 실존적 혁명을 위해 세상 버리고 집안 꼴 잘 돌아간다

 

그런데 이게 억지가 아니라 사르트르부터 시작해서 후대까지 계속 내려와서 사실상 정설처럼 떠들던 비평이에요.

 

특별한 생각 없이 어머니가 마지막까지 인생 참 즐기고 싶으셨다고 넘겨버리면 오히려 카뮈 철학에 대체로 맞아떨어져요. 딱히 머리 쓰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3.2.2.2. 마지막 문단에서의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

 

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은 뫼르소가 처음의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에 마음을 열었다는 내용이에요.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은 자신과 닮았고, 형제처럼 느껴졌고, 자신이 예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내용이 이어서 나와요.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은 카뮈 부조리 철학을 알고 보면 어렵지 않아요. 오직 이 표현 하나에 집중해서 보자면, 카뮈는 세상은 원래 자신에게 관심 없다고 해요. 그런데 다정한 무관심이라 한 건 세상이란 인간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이에요. 모두가 각각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세상이 그렇게 존재해주기를 바라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타인이 맞춰지기를 바라고 그렇게 해석하려 든다고 이해하면 되요. 타인에게는 타인 그 자신 기준으로 뫼르소는 하나의 세상을 이루는 존재니까요. 그러니 이후 그런 세상에 마음을 열고 형제처럼 느껴졌다고 할 수 있어요. 예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했다는 거야 이제 다시 자신의 감각에서부터 출발한 삶의 의미를 되찾고 부조리를 극복했다고 보면 되구요.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읽으면 여기에서부터 허무주의로 완벽히 빠지게 되요. 가뜩이나 세상에 무신경한 것 같던 뫼르소였어요. 그런데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그것이 자신과 닮았다고 느꼈다는 말이 나오면 독자들은 허무의 공감에 빠진 거라 보기 딱 좋아요. 그렇지 않아도 무신경해서 다 의미없고 허무하다고 여기는 거 같아보였는데 대놓고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자신과 닮았다고 나와버리니까요. 마지막 문단 자체가 상당히 차분하고 잔잔하고 감성을 자극하는 분위기인데 여기에서 딱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이 등장하니 급격히 허무주의로 감상이 쏠리게 되요.

 

특별한 생각 없이 읽는다면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이 '세상의 무관심'에 대한 예쁜 표현처럼 보이며 허무주의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요. 허무주의적 해석을 뒤엎는 게 아니라 강한 긍정을 하게 만들어요. 이렇게 보면 세상이 자신에게 무관심하다는 것까지는 잘 읽었는데 이 해석에서 카뮈가 원하는 방향으로 감상이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 전개되는 셈이에요.

 

문제는 사르트르 철학 관점이에요. 사르트르 철학에서는 세상은 의미가 없는 존재이고, 인간이 의미를 부여한다고 봐요. 그러니 사람이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데 정작 사람이 세상에 동조화를 이뤘어요. 자신이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데,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의미가 없는 존재에 도리어 동조화되면 이건 허무로 읽혀도 이상할 것 없어요. 그러면 여기에서 해석이 뫼르소의 실존적 행동의 의미가 의미 없음, 허무라고 나와요. 이건 진짜 심각한 문제에요. 왜냐하면 사르트르 철학에서 의미 부여가 허무로 나오면 허무 특성상 계속 허무로 나와서 허무주의로 빠져버릴 수 있거든요. 이게 사르트르 철학에서 일종의 오류 코드에요.

 

사르트르 철학 관점에서는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에 대해 세상도 근거 없고 나도 근거 없으니 우린 형제라는 식의 논리로 설명하기도 해요. 근거 없음의 연대라는 거에요. 얼핏 보면 카뮈 철학이나 사르트르 철학이나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을 비슷하게 해석한 것 같지만 완전히 반대에요. 왜냐하면 카뮈 철학에서는 자신은 항상 존재했어요. 오히려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 하나만이 유일한 진실이었어요. 게다가 카뮈 철학으로 보면 이건 과거의 뫼르소와 이 순간의 뫼르소의 동질성이 복원되는 회복이에요. 반면 사르트르 철학으로 보면 '실존적 존재'로써 회복이기는 한데 실제로는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해요. 과거와 단절하고 완전히 새로 태어났다는 거에요.

 

사르트르 철학 관점으로 다르게 해석하려 든다면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은 세상이 뫼르소를 평가하지도, 규제하지도 않고, 도와주지도 않는 상태이기 때문에 자유와 책임의 가능성을 준다는 뜻이에요. 잔혹한 현실 속에서 자기 실존을 확인할 기회로 해석할 수 있어요. 그래서 과거에도 자신은 항상 능동적으로 살아왔고, 지금도 능동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의미가 나와요.

 

3.2.2.3. 소설 가장 마지막 문장

 

Pour que tout soit consommé, pour que je me sente moins seul, il me restait à souhaiter qu'il y ait beaucoup de spectateurs le jour de mon exécution et qu'ils m'accueillent avec des cris de haine.

모든 것이 완성되고, 내가 덜 외로움을 느끼기 위해 남은 것은 단 하나,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나를 증오의 함성으로 맞이해주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가장 마지막 문장의 해석은 따스한 무관심에서 완벽히 이건 허무주의라고 확정지은 사람 외에는 다 어려워요. 카뮈 소설 이방인을 허무주의 소설이라 확정했다면 이 문장은 그냥 허무한 감정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어요. '어차피 덧없는 세상, 그래, 알아서 죽여라' 이 정도로 받아들이면 되거든요.

 

카뮈 철학에서도 이 문장 해석은 쉽지 않아요. 카뮈 철학에서도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어요. 사형은 일종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는 점이에요. 그리고 자기의 삶이 끝나는 순간이라는 의미에요. 삶을 포기한 게 아니라 단순히 삶이 끝나는 지점으로 읽거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치르는 대가가 사형이라면 사형을 받아들이겠다는 정도에요. 죄책감을 아예 극단적으로 싹 제거한 소시오패스로 설정하고 읽으면 아랍인 총 쏠 때 스트레스 날린 대가가 사형이라면 사형을 받아들이겠다고 해석한다는 거에요. 그리고 이왕 대가 치를 거면 사람들 좀 많이 와서 쓸쓸하지 않게나 해달라는 거구요. 죄책감을 극단적으로 아예 없다고 설정하면 텍스트에만 충실해도 카뮈 철학적 해결 구현은 이렇게 깔끔히 잘 나와요. 이걸 받아들이고 공감하는 게 문제인 거죠.

 

하지만 이 한 문장은 사르트르 철학에서 완전히 폭탄이에요. 사르트르 철학의 약점을 다 건드리는 문장이에요.

 

먼저 사형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이건 이유가 뭐든 능동적으로 사실상의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의미가 되요. '억울한 사형을 당하는 자신'에 대해 실존적 의미를 부여해야 해요. 또한 이렇게 억울한 사형을 당하는 것도 능동적으로 선택한 결과여야 하구요. 온갖 미사여구와 이것저것 합리화를 다 동원한다고 해도 자기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기본 구조는 안 바뀌어요. 여기에서 사르트르 철학에서 핵폭탄이 터져요.

 

능동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는 것도 실존적 존재인가?

그러면 자살은?

 

이게 진짜 핵폭탄이에요. 자살이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자기 스스로 자신을 능동적으로 죽이는 거잖아요. 이 문제는 심지어 사르트르도 자신의 철학 논리로 끝까지 못 푼 문제에요. 나름대로 해결하려 했지만 그 해결이란 게 제대로 된 해결이 아니라 일종의 선언에 가까웠어요. 그냥 다짜고짜 안 된다고 한 거에 가까워요. 가뜩이나 뫼르소의 최후는 억울한 사형을 받아들이는 건데, 이걸 능동적으로 선택한다면 이건 정말로 남의 손 빌린 자살이 되어버려요.

 

'억울하게 사형당하는 나'를 선택하고 실존적 의미를 부여하면 자살과 사실상 똑같아요. 무슨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살하는 건 일반적인 자살과 다르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런 논리라면 세상이 의미없다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살하는 건 뭐냐고 하면 이건 진짜 할 말이 없어요. 말꼬리 잡고 트집잡는 게 아니라 그 철학 안에서는 이렇게 나와요.

 

그러면 이번에는 반대로 억울한 죽음을 수용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 그러면 이건 실존적 존재가 아니잖아요. 자신이 선택한 게 아니라 강요당해서 선택당한 거잖아요. 자신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의미 부여를 전혀 할 수 없어요. 이러면 허무로 귀결되요. 실존적 존재로써 의미 부여에 실패했으니 사르트르 철학에 맞춰서 의미 부여한다면 의미 부여한 값이 허무라는 거에요. 앞서 사르트르 철학은 의미 부여한 값이 허무로 나오면 우연히 바뀌지 않는 한 허무의 순환을 멈출 수 없다고 했어요.

 

부당한 사회에 저항하기 위해 죽음도 받아들인다고 해석하면 이번에는 또 다른 윤리적 문제가 폭발해요. 공식상으로는 어머니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이유만으로 사형당하는 게 아니에요. 어머니 장례식 관련은 인물의 심성, 동기가 불순하다고 본 거고, 어쨌든 뫼르소는 살인 사건으로 사형당하는 거에요. 저항의 대상이 사회이기는 한데, 사회가 사형시키는 게 공식적으로는 문제가 아닌 상황이에요. 그러면 실종된 죄책감 문제가 폭발해서 범죄자가 자신의 범죄를 능동적으로 결정한 것이라면 이것도 실존적 존재로 봐줘야 하냐는 문제가 터져버려요.

 

사르트르 철학 관점 비평에서는 뫼르소의 처형 장면을 완전한 자유의 클라이막스로 봐요. 뫼르소는 증오의 함성 속에서 모든 굴레에서 단절하고 세상의 규칙과 의미를 거부하며 자기 존재를 완전히 확인하다고 봐요. 처형 순간이 죽음이 아니라 실존적 자기 확인이자 자기 재탄생이라는 거에요.

 

죽음을 통해 실존적 자기 확인을 한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논리야? 죽었으니까 살아 있었음을 확인한다는 거야, 뭐야?

자기 재탄생?

어디에서 재탄생해? '시체가 된 자신'에서 무슨 실존적 의미를 찾을 건데? 무신론자 뫼르소가 사후세계라도 가? 풀떼기 구성입자라도 될 거야?

 

이런 비평들이 웃자고 하는 게 아니라 진짜에요. 그래서 이방인 해석할 때 사르트르 철학만큼은 절대 선택하면 안 된다는 거에요. 사르트르 철학 시스템에서 치명적 오류나는 것들만 다 모아놓은 거에요. 사르트르 및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자들도 머리 싸매고 연구해도 제대로 된 답을 못 내놓는 문제들인데 문학 분석한다는 사람들이 왜 이런 문제를 잡고 있냐구요. 그러니 이방인이 어렵고 난해하다고 하는 거에요. 애초에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의 약점을 지적하고 대척점에 있는 것이 카뮈 부조리 철학인데, 그런 카뮈 부조리 철학의 소설을 사르트르 철학으로 설명하려고 하니 이게 제대로 되겠냐는 거에요.

 

그러니 소설 하나 설명하는데 자꾸 쓸 데 없는 책들 자꾸 가져오고 어려운 여러 가지 철학 이론 다 끌고 오고 그래도 답이 제대로 안 나와서 이해가 안 되는 소리를 하고 그 이해가 안 되는 소리를 이해해야 하니 또 자꾸 쓸 데 없는 책들 동원해야 하고 어려운 여러 가지 철학 이론 다 끌고 오고 난리가 나는 거에요. 이게 무려 80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일이에요. 못을 빼기 위해 장도리를 가져오라고 했더니 못을 박는 망치를 가져와서 못을 빼겠다고 들면 어떤 결과가 나오겠냐는 거에요.

 

이 따위 비평을 받아들라구?

그냥 허무주의로 읽으련다.

 

괜히 뫼르소가 허무주의의 아이콘이 된 게 아니에요. 농담이 아니라 80년 넘게 학계, 비평계 주류 해석이 저렇게 사르트르 철학 관점 접근이었어요. 저걸 받아들일 바에는 그냥 오직 텍스트만 보고 그 특유의 느낌과 독특한 성격에 모든 걸 맡기고 허무주의로 읽어버리는 게 낫다는 거에요.

 

4. 카뮈가 자초한 80년간의 재앙과 오독인 이유

 

철학계에서 사르트르의 명성과 영향이 매우 컸던 당시 시대상도 있고, 카뮈를 사르트르와 실존주의 철학자로 묶는 바람에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 관점으로 이방인을 읽으려고 시도한 학자, 전문가, 비평가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이런 80년간의 재앙과 오독이 발생했어요.

 

하지만 문제는 저 사람들이 과연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안 읽어보고 무턱대고 사르트르 실존주의로 카뮈 이방인을 해석하려고 했겠냐는 것이에요. 카뮈가 이방인, 시지프 신화, 칼리굴라를 자신의 철학 3종 세트라고 했으니 대부분 시지프 신화를 읽었다고 봐야 맞아요.

 

시지프 신화까지 읽은 사람들이 대체 왜 이런 끔찍한 해석 지옥으로 가는 급행 열차인 사르트르 실존주의 관점을 택하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사실 카뮈가 자초했다고 봐야 해요.

 

시지프 신화를 토대로 카뮈 철학을 간단히 요약하면 부조리를 수용하고 부조리를 직시하고 부조리에 저항하자고 해요. 사르트르는 부조리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어요. 부조리는 카뮈 철학의 용어에요. 그러니 시지프 신화를 읽고 카뮈 철학을 이해하려면 부조리가 뭔지 정확히 이해해야 해요.

 

문제는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를 다층적으로 사용했어요. 부조리를 약간씩 의미에 변화를 주어가면 사용했어요. 이게 바로 이런 8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대참사를 야기한 근본 문제에요.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는 특정한 감정, 의식 상태, 관계, 살아야 할 조건을 의미해요. 그런데 이것들이 약간씩 의미가 달라요. 그리고 이 의미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 웃어넘길 일이 아니에요. 오히려 꽤 심각한 문제에요.

 

카뮈 부조리 철학을 간단히 요약하면,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느낀 세상에 느끼는 극단적 허무함을 느낄 때 새로운 삶의 의미를 못 찾으면 자살하게 되요. 그래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서 극단적 허무함을 극복해야 해요. 이때 삶의 의미는 자신의 감각적 행복에서 출발한 것이자 감각적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어야 해요. 삶의 의미는 영원하지 않고, 이 세상은 절대 답을 주지 않아요. 세상은 영원히 항상 개인에게 무관심해요. 이렇게 보면 어렵지 않아요. 그리고 부조리가 뭔지 정확히 나와요. 바로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느낀 세상에 느끼는 극단적 허무함 - 즉 감각(정동)이에요.

 

카뮈 철학을 보면 설명과 표현이 바뀌지만, 부조리를 유발하는 원인은 다층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요. 부조리는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불합리한 침묵이 서로 대면할 때 생겨난다고 해요. 그러면 부조리의 원인은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불합리한 침묵이고, 이것은 세계 중심으로 보면 인간에게 답을 안 주는 세계라고 할 수 있어요. 인간이 이때 느끼는 감정은 이 세상이 가치 없음, 무가치함, 무의미함이에요. 부조리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이처럼 다층적 표현이 가능해요.

 

그렇지만 부조리는 다층적으로 표현하면 안 되는 개념이에요. 이건 완벽히 고정되어 있어요. 카뮈 철학에서도 의미적으로는 원래 일관된 의미에요. 바로 감각(정동)이에요. 극단적 허무함이에요. 그냥 극단적 허무함이 아니라 자살을 하게 만드는 극단적 허무함이에요. 이건 확실히 정해져 있어요.

 

그런데 카뮈가 실제 시지프 신화에서는 이 부조리에 대해서 특정한 감정, 의식 상태, 관계, 살아야 할 조건 등으로 사용해요. 이게 약간씩 의미가 다른데, 카뮈가 사용한 용법만 그대로 이용해서 카뮈 철학 붕괴 시나리오를 만들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서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를 관계의 의미로 사용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부조리를 세계와 인간의 관계라고 보면 카뮈 철학 붕괴 시나리오인 자살 예찬 시나리오가 도출되요.

 

<부조리를 관계로 정의할 경우>

부조리를 수용한다

-> 응답없는 세계와 나의 관계를 받아들인다

부조리를 직시한다

-> 세계는 영원히 내게 응답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부조리를 극복한다

-> 응답없는 세계를 어떻게 극복할 건데?

-> 응답없는 세계는 그대로인데 응답없는 세계를 극복한다고 응답이 있어? 응답 계속 없잖아!

->응답없는 세계가 안 변하잖아!

-> 스스로 죽는 게 이 관계에 대한 저항이잖아!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를 세계와 자신의 관계라고도 사용한 적이 있는데, 만약 부조리를 세계와 자신의 관계라고 설정하면 자살을 반대하는 카뮈 철학과 정반대의 결론이 도출되요. 즉, 부조리는 관계가 아니라는 거에요.

 

반면 카뮈 철학에서 부조리를 감각, 감정으로 의미를 고정시켜 놓으면 카뮈 철학을 매우 깔끔하고 명쾌하게 정의내리고 설명할 수 있어요. 그리고 카뮈 철학이 어렵지 않고 오히려 우리 일상에 적용하기 좋은 실전형 생존 철학임도 확인할 수 있어요. 부조리를 감각, 감정으로 의미를 고정해서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느낀 세상에 느끼는 극단적 허무함'이라고 고정하고 보면 모든 게 술술 다 풀려요.

 

하지만 카뮈는 부조리에 대해 완전한 정의는 불가능하다고 했어요. 이게 진짜 큰 문제였어요.

 

문학 작품을 설명하고 해석하려면 정확한 용어가 필요해요. 그런데 카뮈는 정작 그 중요한 부조리에 대해 완전한 정의는 불가능하다고 했고, 심지어 자신의 저서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 absurde 를 사용한 것을 보면 약간씩 의미가 달라지고, 카뮈가 '부조리'라는 용어를 사용한 용법 중 잘못 선택했다가는 카뮈 철학 자체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야기해요. 또한 당장 부조리를 그런 뜻으로 쓰는 게 맞냐는 지적과 비판에 시달려야 하구요.

 

그러니 카뮈의 이방인을 설명하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다른 유사한 철학에서 용어를 차용해오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고 봐야 해요. 카뮈 부조리 철학과 비슷해 보이는 철학은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이니 여기에서 용어와 개념을 끌어와서 설명하게 된 거라 봐야 해요. 시지프 신화에 나오는 카뮈 철학대로 설명하려면 부조리가 뭔지 매우 명확히 정의되어 있어야 하는데 카뮈는 이걸 의도적으로 피했구요. 단지 의도적으로 피하겠다고만 했다면 사람들이 시지프 신화를 읽고 부조리가 뭔지 명확히 정의내려서 그에 맞춰서 쓰면 되었을 거에요. 문제는 카뮈 본인이 부조리를 약간씩 의미를 변형해서 사용했기 때문에 명확히 정의내리는 게 부담스러웠다는 점이에요.

 

이것은 카뮈 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카뮈의 철학 집필 기술의 미숙함이에요. 부조리가 카뮈 철학에서 가볍게 볼 것도 아니고 카뮈 철학의 중심에 위치한 것인데 이걸 정확히 정의내리지 못한 건 문제에요. 극단적으로 비판하자면 카뮈는 세계의 부조리성을 감각적으로 포착하고 관찰하는 데에는 탁월했으나, 이를 논리적 유개념으로 내재화하여 완벽한 이론적 토대 위에 구축하지 못한 상태였고, 이는 그가 부조리라는 실체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문학적 수사로 그 한계를 은폐하려 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다고 할 수 있어요. 이론은 논리적으로 잘 짜여 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부조리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한 상태로 시지프 신화를 집필했다고 의심할 만 해요.

 

이건 충분히 의심해볼 만 한 부분이에요. 전체적으로 보면 부조리라는 것이 상당히 명확하고 논리도 일관적이에요. 그런데 카뮈가 부조리를 사용한 것을 하나씩 떼어놓고 비교해 보면 부조리 의미가 불안정해요. 애초에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느낀 세상에 느끼는 극단적 허무함'이라고 부조리 정의를 고정시켜 놓고, 부조리의 원인을 인간에게 응답하지 않는 세계, 세계에 대한 극단적 비관이나 절망이나 분노처럼 다층적으로 표현하면 되었을 건데요. 그래서 부조리가 뭐냐고 물어보면 깔끔한 답변이 나오는 게 아니라 어렵고 난잡하고 복잡한 설명만 나와요.

 

이렇게 카뮈가 부조리를 정확히 정의해놓지 못했으니 그 틈새들에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이 스며들었다고 보면 맞아요. 그리고 이렇게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이 스며들며 카뮈 이방인을 넘어서 카뮈 철학 자체가 더 어렵고 난해해져 버렸다고 봐야 하구요. 대표적으로 부조리를 자꾸 우연과 엮는데, 부조리는 우연과 별 상관 없어요. 우연한 사건이 발생해야만 부조리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어느 날 갑자기 부조리를 느낄 수도 있지만, 점점 비관적이 되어 부조리를 겪게 될 수도 있어요. 이와 더불어 카뮈 저작을 읽는데 의지를 강조하고 저항을 투쟁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 역시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의 관점으로 왜곡해서 봤을 때 나타나는 특징이구요.

 

80년 넘는 시간동안 전문가, 비평가들이 생각이 없어서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을 끌어와서 카뮈 이방인을 해석하고, 일반인들은 허무주의로 읽는 등 카뮈가 싫어하는 행태로 이방인을 읽은 근본 원인은 카뮈가 부조리를 너무 허술하게 정의해놨기 때문이라고 봐야 맞아요. 오늘날까지도 부조리에 대해 정의내려 보라고 하면 말이 길어지고 혀가 길어지니까요.

 

결론

 

카뮈의 이방인은 재미있는 소설이에요. 80년 넘게 이 소설이 어떻게 다뤄져 왔는지까지 고려하면 더욱 재미있는 책이에요. 카뮈 본인은 이방인이 허무주의 소설이나 실존주의 소설로 읽히는 것을 매우 싫어했는데 정확히 반대로 읽히고 있어요.

 

카뮈의 이방인은 1인칭 시점 특유의 서술 생략과 감각을 그대로 감각적 언어로 표현하는 뫼르소의 특징 때문에 어렵다고 느낄 수 있어요. 여기에 윤리적으로 가장 심각한 문제인 살인이 소설의 중심 사건이기 때문에 뫼르소의 죄책감 처리 문제가 상당히 중요하구요. 또한 마지막에서 죄책감을 극단값으로 설정해야만 카뮈 철학적 해결 구현이 선명히 드러나는 점은 다른 일반 소설들과 상당히 다른 부분이구요.

 

그러나 이 소설을 계속 어렵고 난해하게 만드는 이유는 바로 잘못된 해석 도구인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을 끌어와서 해석하려 하기 때문이에요. 이 때문에 문학을 읽고 설명하고 해석하는 게 아니라 엉뚱한 사르트르 철학 난제를 잡고 씨름하는 꼴이 되었어요.

 

카뮈 이방인을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으로 해석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우주의 움직임을 천동설로 설명하려는 것과 같아요. 프톨레마이오스가 천동설로 우주의 움직임을 주전원 이론으로 설명하기는 했어요. 대신에 수많은 원이 필요했고 매우 복잡했어요. 당연히 완벽히 설명이 되지도 않았구요. 카뮈 이방인 해석에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을 끌어와서 해석의 도구로 사용하면 필연적으로 이렇게 매우 복잡해지고 완벽히 설명되지 않아요. 그러면 매우 어렵고 난해하다고 평가되구요.

 

이런 일이 발생한 근본 원인은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에 대해 정동(감정)이라고 정의 및 용법을 명확히 고정시켜놓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설명과 해석을 위해 명확한 용어가 필요했던 사람들이 비슷해 보이는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을 빌려서 사용하기 시작했구요. 게다가 사르트르의 비평 자체가 사르트르의 명성으로 많이 읽히고 많은 영향을 끼친 것도 있어요.

 

문학 역사에서 이런 흥미로운 현상이 일어나서 몇십 년째 진행중인 것은 거의 없어요. 이방인은 소설 자체도 재미있지만, 이렇게 설명, 해석, 비평 행태를 관찰하는 것도 상당히 재미있는 작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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