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두 개의 장벽 (2012)

두 개의 장벽 - 41 아제르바이잔 바쿠

좀좀이 2012. 10. 3.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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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드는 밤.


이제 여행이 진짜 끝나간다는 것이 진짜 실감났어요. 그 생각이 생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껴졌어요. 모레면 돌아가는구나.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요. 정말 다행이에요.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니까요.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꿈에서 깨어난다는 것. 그렇다면 지금 내가 아제르바이잔에 있는 것은? 이것은 꿈 속의 꿈. 정말로 행복한 꿈.


꿈 속의 꿈에서 깨어나 꿈 속으로 돌아가기. 사실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가는 것에 비한다면 별 거 아니에요. 그러나 아무리 꿈 속이라도 행복한 꿈 속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은 건 어쩔 수 없었어요. 아무리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자각몽이라 하더라도 그 꿈이 즐겁다면 깨고 싶지 않은 것 처럼요.


마음이 심란하니 잠이 오지 않았어요. 밖에서 바람 좀 쐴까 하고 창밖을 보았어요. 주인 누나의 둘째 딸이 창밖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어요. 쟤도 내일 시험이라 마음이 심란한가 보구나. 그런데 오늘 늦게 자면 내일 아침에 일어나기 꽤 힘들텐데?


수첩과 볼펜을 꺼냈어요. 이제 돌아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많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그러고보니 할 일이 매우 많았어요. 안 해도 되는 것도 있고, 반드시 해야 하는 것도 있었어요. 현실이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것부터 무조건 먼저 하고 안 해도 되는 것은 뒤로 미루는 것이 당연한 일. 하지만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직 꿈 속의 꿈에서 깨어난다는 것. 꿈 속의 꿈에서 깨어나 꿈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몇 번 다시 생각해야 했어요.


안 해도 되는 것을 무조건 반드시 해야 하는 것보다 의미가 없는 것일까?


그것이 이익을 가져오느냐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정말 내가 원하느냐의 문제였어요. 사실 안 해도 되는 것은 오히려 하기 어렵더군요. 현실에서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무조건 우선이니까요.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보니 언제나 안 해도 되는 것은 밀리기 마련. 그래서 이래 저래 미루고 미루다 보면 잊혀지고 끝. 분명 잘 생각해 볼 문제였어요. 이렇게 긴 여유가 있는 시간은 그렇게 흔한 기회가 아니니까요.


일단 여행기를 다 써야지.


여행을 출발하기 전, 정신 없고 공부도 손에 안 잡힐 때였어요. 그때 세운 목표가 있었어요. 작년에 카프카스 여행을 다녀온 이야기인 '두 개의 장벽 (2011)'을 다 써서 끝내기. 그런데 결국 다 못 썼어요. 마지막으로 조지아 들어간 후의 일을 쓸 때 여행을 떠났어요. 이번 여행을 갈 때에도 당연히 노트북은 안 들고 갔기 때문에 여행기 작성은 중단. 돌아가면 이것부터 후딱 끝내고, 이 여행 이야기를 다 써야겠다. 올해는 내가 반드시 지금껏 밀린 여행기를 어떻게든 끝내버리고야 말겠어! 앞으로 이 여행이 끝난 후, 여행 하나가 더 남아 있었어요. 그것은 바로 우즈베키스탄 여행. 타지키스탄 가는 길에 사마르칸트를, 투르크메니스탄 가는 길에 부하라를 지나갔어요. 두 도시 다 제대로 본 적은 없어요. 게다가 히바는 아예 가 본 적도 없어요. 일단 이 여행기는 우즈베키스탄에 온 이상 숙제. 이것 외에 또 다른 여행을 하게 될까? 이것에 대한 생각이 시작되었어요. 어차피 우즈베키스탄에서 제가 더 여행을 간다면 갈 곳은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즈스탄. 내가 여기에 가야 하는 이유는? 생각해보니 없었어요. 이들 국가들이 자국어인 카자흐어와 키르기즈어를 우즈베키스탄처럼 많이 사용하는 국가도 아니고, 이 지역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단순히 가 본 국가 갯수나 늘리기 위해서 가는 일은 항상 여행을 꿈꾸는 저도 안 해요.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고, 마음이 바뀌고 무언가 목표를 찾았기 때문에 갈 수도 있어요. 어쨌든 앞으로의 여행은 일단 하나 더 남았어요. 그 여행과 관련한 여행기까지 모두 올해 안에 끝내서 더 이상 밀린 여행기를 언젠가 써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게 첫 번째 목표. 이것은 저 자신이 제게 준 숙제.


그리고 구입한 책을 다 읽어야지.


책을 또 많이 샀어요. 우즈베키스탄에서 구입한 책들도 한 무더기. 하지만 우즈베키스탄에 온 후 지금까지 제대로 읽은 책은 아직 한 권도 없었어요. 외국어 실력이 부족했던 것도 있고, 5월부터는 계속 여행과 여행 준비의 나날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책 한 권을 꾸준히 잡고 읽은 적이 없었어요. 물론 이것도 스스로에게 둘러대는 핑계. 그냥 모든 정신이 여행과 여행기에 쏠려 있어서 끈덕지게 책 한 권을 다 읽어내야겠다고 목표를 잡지 않은 것 뿐이죠. 그냥 이 책 조금 읽어보다 저 책 조금 읽어보다 했을 뿐이었어요. 이제는 정말 책을 읽어 치울 때가 되었어요. 한국 가면 읽을 시간이 많지 않을 것이고, 전부 영어가 아닌 외국어 원서들이다보니 읽는데 시간이 엄청나게 많이 걸리니까요.


외국어 공부도 제대로 하자.


우즈베키스탄에서 공부하고 싶은 언어는 많았어요. 예전에 공부하다 손 놓아버린 것도 있고, 지금 공부하고 있는 것도 있고, 앞으로 하고 싶은 것도 있었어요. 이것에는 약간의 우열을 두었어요. 일단 지금 하고 있는 우즈벡어를 어떻게든 스스로 만족스러운 수준까지 하도록 노력한 후, 우즈벡어를 바탕으로 다른 언어들을 공부하는 것. 이 목표는 구입한 책을 다 읽어야겠다는 목표와도 잘 어울리는 목표였어요.


그 외에도 많았어요. 하나하나 앞으로 우즈베키스탄에서 머물 시간 동안에 하고 싶고, 해야할 일들을 하나 하나 적다 보니 수첩 한 쪽에 꽉 찼어요.


"내가 우즈베키스탄에서 해야 할 일이 이렇게나 많구나!"


창밖에서 책을 보던 주인 누나의 둘째 딸은 자러 갔어요. 그래서 조용히 밖에 나왔어요. 시원한 여름의 밤공기를 깊이 들이마셨어요.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들인데 후회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늦었다는 생각이 드니 진짜로 후딱 시작해야겠다. 더 미루다가는 아무 것도 안 되겠어. 이대로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가는 나중에 한국 돌아가서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 뼈저린 후회만 들 것 같아.


방에 들어와 침대로 올라갔어요. 드러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어요. 할 일이 많은 게 아니었어요. 저 자신을 되돌아보니 이것은 할 일이 많은 것이 아니라 여태껏 하지 않아서 밀린 숙제들이었어요. 비자 때문에 심란해서 아무 것도 못 하고 TV만 멍하니 볼 때 우즈벡어 교과서라도 한 줄 읽을 걸. 그랬으면 지금 이렇게 일이 산더미 같이 많아지지는 않았을 텐데.


이게 앞으로 할 일이 아니라 과거에 해야했는데 밀린 일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마치 내일 개학인데 방학 숙제를 하나도 안 하고 자정까지 놀다 정신 차린 학생처럼요. 별로 졸리지 않아서 앞으로 우즈베키스탄에서 할 일을 정리해본 것이었는데, 진짜로 잠이 확 깨었어요.


책이라도 읽자.


책을 펼쳤어요. 천천히 읽기 시작했어요. 핸드폰에 있는 사전을 뒤져가며 천천히 읽고, 메모를 하는 수첩에 모르는 단어를 적었어요. 딱 한 문단 읽는데 한 시간 걸렸어요. 그냥 다 모르는 단어였다는 말이 정확할 거에요. 그렇게 책을 읽은 후, 노래를 들었어요. 일단 밀린 일의 아주 미미한 일부라도 했다는 사실 하나가 지독한 수면제가 되었어요.


눈을 뜨니 아침 11시. 일단 샤워를 하고 옷을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후 밖으로 나왔어요. 사람들이 친구와 할머니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어요.


"누나 어디 계세요?"

"시험 치러 대학교에."


11시이니 아직 한창 시험 치르고 있겠구나.


"아저씨 어디 계세요?"

"4일 연속 근무해서 자고 있어."


정말로 조용했어요. 친구는 밖에서 차를 마시며 인터넷을 하고 있었어요.


"이제 일어났어?"

"응."

"어제 몇 시에 잤는데?"

"4시 조금 넘어서."

"뭐 하느라 그때 잤어?"

"책 읽고 이것 저것 생각하느라."


친구가 탄 차를 한 잔 부어서 저도 같이 마셨어요. 자리에 앉아 어제 읽은 부분을 다시 읽었어요. 단어를 다 찾아놓고 읽는 것인데도 힘들었어요.


점심 즈음 되어서 주인 누나와 둘째 딸, 그리고 둘째 딸의 친구들이 돌아왔어요. 둘째 딸과 친구들은 신나서 웃으며 들어왔고, 주인 누나의 표정은 시원하다는 얼굴이었어요.


"시험 잘 쳤어요?"

"자기 말로는 잘 쳤대."

"잘 되었네요!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거에요!"


주인 누나가 돌아오고 나서 호스텔에서 여유를 즐기다가 오후 2시가 되어서야 밖으로 나갔어요.


"오늘 충혼공원 갈까?"

"그러자."


그래서 충혼공원으로 가는 전동차가 있는 곳으로 갔어요. 오늘은 운행한다고 했거든요.




정말 맑은 날씨. 이 정도 날씨라면 충혼공원 가서 바쿠 전망을 보는 데에 아무 문제 없겠군. 오히려 살짝 덥지 않을까? 어차피 무료 전동차 타고 갔다 내려올 거니까 이거보다 더 더워도 별 문제는 없겠다.


천만에!


"오늘도 운행 안 해."

"오늘도요?"


오늘 전동차를 지키고 있는 직원은 다른 직원이었어요. 직원은 오늘도 일을 안 하고 내일 일한다고 했어요. 아...망했네...



정말 야속하게 보인 전동차.


이것을 내일 보러 갈까? 그런데 내일 가고 싶지는 않은데...내일은 바쿠에서의 사실상 마지막 날. 내일 반드시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있었어요.


짐 싸기!


이번에는 책을 매우 많이 샀어요. 저 혼자 구입한 책이 총 38권. 이것을 잘 분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 수하물 중량 초과 걸리면 절대 안 되니까요. 사실 수하물 중량 초과만 없다면 그다지 고민할 문제도 아니었어요. 그냥 적당히 커다란 가방에 다 우겨넣으면 되거든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잘못 짐을 쌌다가는 무조건 수하물 중량 초과에 걸리고, 그러면 꽤 많은 돈을 물어야한다는 것이 문제.


게다가 우리가 돌아갈 비행기는 오전 11시 30분 출발. 이 비행기를 타려면 늦어도 아침 9시에는 출발해야 해요. 아침에 짐 싸고 정리할 시간이 충분하지는 않았어요. 무조건 일찍 일어나서 씻고 나가야 했어요. 그나마 다행이라면 호스텔에서 제공하는 택시 서비스로 공항까지 가기 때문에 택시를 잡을 필요는 없다는 것 정도. 하여간 돌아가는 날은 아침 일찍 공항으로 출발해야 했기 때문에 모든 준비를 전날 다 끝내고 자야 했어요.


요즘 계속 늦게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늦어도 아침 9시에 나가야 한다는 것이 신경쓰였어요. 돌아가서 몇날 며칠 주구장창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것도 아니었구요. 돌아가자마자 저를 기다리는 반가운 일이 있었으니, 그것의 이름은 바로 '거주지 등록'. 돌아가자마자 거주지 등록과 비자 갱신을 해야 했어요. 완전 겹경사. 너무 좋아서 생각만 해도 표정이 썩어버리는 두 단어가 한 번에 겹쳤어요.


어쨌든 내일은 정말 푹 쉬고 싶었어요. 짐만 싸고 푹 쉬다 적당히 돌아다니고 싶으면 돌아다니고 말고 싶으면 말고 싶었어요. 마지막 날에 '오늘은 마지막 숙제를 끝내야지'라는 마음으로 돌아다니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걸어올라가?"

"우리에게는 버스가 있잖아!"



그래서 버스 정거장에 가서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어요. 사람들이 버스를 알려주었는데 그 버스가 와서 운전 기사에게 물어보면 현충공원에 가지 않는다고 했어요. 심지어는 버스 기사가 알려준 버스에 가서 현충 공원 가냐고 물어보면 안 간다고 했어요. 그래도 물어보고 안 간다는 답을 계속 듣다 193번 버스에 올라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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