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다기역 플랫폼으로 내려갔어요.
이제 가야 할 지하철역은 신오차노미즈역 新御茶ノ水駅이었어요. 지하철이 오기를 기다렸어요. 조금 기다리자 지하철이 왔어요.
지하철에 빈 자리가 몇 곳 있었어요. 빈 자리로 가서 앉았어요.
'이제 진짜 마지막 일정이다.'
신오차노미즈역으로 가서 그쪽을 돌아다니면 드디어 이번 일본 여행 일정이 모두 끝날 거였어요. 이제 2019년 8월 30일 마지막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가는 것이었거든요. 이거 말고는 이날 계획이 아무 것도 없었어요. 기껏해야 숙소 돌아가서 짐 꾸린 후 롯자 아카이시 카페 가서 밥 먹고 커피 마시는 것 정도였어요. 더 이상 어디 갈 계획이 전혀 없었거든요. 야밤까지 열심히 돌아다닐 생각이 없었어요.
다음날인 귀국하는 날에는 딱히 갈 곳이 없었어요. 계획을 세워놓은 것도 없었어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게 된다면 아사쿠사 센소지 주변이나 한 바퀴 더 둘러볼 생각이었어요. 점심때 하네다 공항으로 출발해야 했어요. 새벽에 일어나 일찍 체크아웃하고 짐 맡기고 전철 타면 한 곳 정도 더 가볼 수 있었어요.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또 땀범벅이 되어서 공항에서 보안검색할 때 상당히 난감할 거였어요. 이 습기가 다음날 싹 사라져서 보송보송한 공기가 될 리 없었거든요.
'이제 4시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센다기역으로 거의 다 와서 비 몇 방울 맞았어요. 그게 신경쓰였어요. 비가 내리면 사진 찍기 매우 고약해지거든요. 게다가 하늘이 다시 흐려지고 있었기 때문에 밝은 상태에서 사진 찍을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오후 4시 5분. 신오차노미즈역에 도착했어요.
'여기는 무슨 물맛 좋은 동네인가?'
신오차노미즈역. 新御茶ノ水駅. 新은 새롭다는 뜻. 御 는 보통 お 로 많이 써요. 일본어에서 먹고 마시는 것 앞에 お, ご 같은 접두사를 붙여요. 해석할 때에는 큰 뜻 없어요. 그러나 먹거리 단어에서 이런 것이 습관적으로 붙는 단어들은 사전 찾아볼 때 이 접두사를 제외하고 찾아야 해요. 茶 는 차. ノ 는 '~의'라는 조사. 水 야 한국인 99.9999999% 다 아는 '물'. 해석해 보면 '새로운 찻물 역'이었어요.
그런데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오차노미즈역 御茶ノ水駅도 있어요.
'하나는 옛날에 고갈되었고 이제 여기서 생수 길어다 차 끓이는 거야?'
지하철역 이름이 너무 직설적이었어요. 가운데 ノ 라도 없으면 여기도 한자어로 바꿔서 이렇게 쓰는가 할 텐데 ノ도 있었어요. 게다가 역명 발음도 '신오차노미즈'였어요.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없었어요. 찻물역과 새로운 찻물역.
신오차노미즈역 출구에는 무려 '에스컬레이터'라는 것이 설치되어 있었어요. 한국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일본 도쿄 지하철역에서는 아니었어요.
"이거 경사 뭐야?"
에스컬레이터 경사가 사진에 찍힌 그대로였어요. 속도도 전혀 느리지 않았어요. 그리고 미세하게 바닥 수평이 안 맞는 느낌이 있었어요. 아주 조금 뒤로 쏠리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허리를 조금 숙이고 난간 손잡이를 꽉 잡았어요. 올라가는 동안 난간 놓고 허리 쫙 펴면 속도와 미세하게 안 맞는 것 같은 바닥 수평 때문에 갑자기 무게 중심이 뒤로 확 이동해 뒤로 자빠질 것 같았어요.
'왜 이런 일상 공포 체험을 만들어놨지?'
일본 도쿄 지하철역만큼은 무엇을 상상하든 더 의외의 것을 보여주고 있었어요.
이러면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무서움을 느끼고 보다 안전한 자세를 취하고 난간을 꽉 잡아서 더 안전해지는 건가?
이런 나름 과학적인 가설을 세워봤어요.
안전하다고 확신이 생기면 꼭 그거 맹신하고 더 난리치다가 제대로 사고나는 경우가 있소. 한국 에스컬레이터는 지나치게 안전하오. 너무 안전을 고려해서 수평이 칼 같이 잘 맞소. 경사도 몇몇 역을 제외하면 상당히 완만하게 만드는 편이오. 여기에 속도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느리게 운행하는 곳도 여러 곳 되오. '신속정확'이 아니라 '둔속안전'을 추구하는 것이 한국의 에스컬레이터. 그래서 이거 믿고 난간 안 잡고 뛰어올라가고 몸 틀고 기지개 켜고 하는 사람들 꽤 많소. 그러다 사고나곤 하오.
이렇게 애초에 불안감을 조성하면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그렇게 강조하는 '난간 꽉 잡고 정신 바짝 차려서 타는 자세'를 취할 수 밖에 없소. 안전하다고 믿고 날뛰다 사고 나는 경우가 많은 걸 감안하면 이렇게 조금은 안 안전하다고 느끼게 하는 것도 괜찮지 않소?
물론 당연히 이래서 이런 건 아닐 거에요. 뭔가 다른 이유가 있겠죠.
지하철역에서 나왔어요.
"어? 여기 무슨 성당 있다는데?"
나오자마자 성당이 있다는 표지판이 보였어요.
"가보자. 온 김에 성당도 가봐야지."
일본에서 기독교의 위세는 매우 약한 걸로 알고 있어요. 여기 전까지 성당을 못 봤어요. 일본 성당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졌어요.
성당 모습이 보였어요.
"저거 동방정교 교회 같은데?"
가톨릭 성당이 아니라 동방정교 교회처럼 생긴 모습이었어요. 성당을 향해 걸어갔어요.
ニコライ堂前
니코라이 당전.
'니콜라이'를 '니코라이'라고 표기해놓은 것은 놀랍지 않았어요. 흥미로운 것은 ニコライ堂前 옆에 있는 라틴 문자 표기였어요.
Nikorai doumae
라틴 문자 표기조차 '니코라이'야!
'니코라이'라고 해서 우리가 많이 들어본 '니콜라이'와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어요. 아마 같은 것일 거에요. 슬라브어권에서 많이 보이는 이름 '니콜라이'일 거에요. 그 니콜라이를 일본어로 '니코라이'라고 표기하는 것까지는 전혀 놀라울 게 없었어요. 원래 외국어와 외래어는 다른 거니까요. orange 를 오렌지라고 쓰든 아륀지라고 하든, Paris 를 파리라고 하든 빠기라고 하든 이상할 거 없어요. 외국어는 다른 나라 말이고, 외래어는 우리말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니까요. 외국어가 외래어로 바뀔 때 발음 변화가 일어나는 건 당연해요.
그러나 보통 이런 라틴 문자 표기할 때는 제대로 원래 발음 및 철자에 맞게 적어주는 것이 일반적이에요. 우리가 아무리 오렌지 오렌지 거려도 오렌지를 라틴 문자로 표기할 때 orenji 라고 적지는 않잖아요. orange 라고 적죠.
그렇지만 여기 라틴 문자 표기는 nikorai 였어요. 이거 분명히 아무리 봐도 Николай 에서 온 거였어요. 니코라이라면 Николай 가 아니라 Никораи 라는 소리.
저거 왜 이렇게 불가리아 소피아에 있는 성당처럼 생겼지?
예전 발칸 유럽 국가들을 여행할 때였어요. 불가리아 소피아에는 매우 크고 유명한 동방정교 교회가 하나 있어요. 알렉산드르 넵스키 교회에요. 모습이 그때 봤던 그 커다랗고 뚱뚱해보이는 동방정교 교회인 알렉산드르 넵스키 교회와 매우 비슷하게 생겼어요.
입구 간판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봤어요.
日本ハリストス正教会教團
일본 하리스토스 정교회 교단?
하리스토스는 뭐지?
'하리스토스'가 뭔지 감을 전혀 잡을 수 없었어요.
'이거 무슨 기독교 종파인가?'
여행기 쓸 때가 되어서야 하리스토스가 뭔지 알게 되었어요. 하리스토스 ハリストス 는 일본어로 동방정교에서의 그리스도를 의미한대요. 어원은 러시아어 Христос 라고 해요.
일단 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이니 맞을 거에요. 그런데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이 있었어요. Христос 라면 '흐리스토스'에요. 일본어라면 '후리수토수'가 될 거 같은데 하리스토스였어요. 어째서 이것은 발음이 이렇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어요.
слава в вышних богу
입구에는 слава в вышних богу 라는 문구가 달려 있었어요. 번역기 돌려보니 '가장 높은 곳에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다'라는 러시아어래요.
경내로 들어갔어요.
일단 건물 외관 사진을 하나씩 찍기 시작했어요.
서울에 있는 동방정교 교회와의 공통점이라면 여기가 러시아인들의 중심지라는 점이었어요. 차이점이라면 건물 외관 모양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었어요.
일본 도쿄 치요다구 신오차노미즈역 동방정교 교회 니콜라이 성당 日本 東京 千代田区 新御茶ノ水駅 東京復活大聖堂 ニコライ堂 외관 사진을 계속 찍었어요.
별 생각 없이 니콜라이 성당 안으로 들어갔어요.
니콜라이 성당 내부로 가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한 장 찍었어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한 장 찍은 후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려고 할 때였어요. 러시아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오시더니 사진 찍지 말라고 하시며 따라오라고 하셨어요.
'왜 그러지?'
아주머니께서는 안내 표지판을 보여주셨어요. 여기는 성스러운 곳이기 때문에 내부에서 사진 촬영하면 안 된다고 되어 있었어요. 스마트폰으로 이미 찍은 사진에 대해서는 삭제하라고 하지 않았지만, 여기 안에서 사진 찍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니 사진 찍으면 안 된다고 일본어로 말했어요.
"러시아어 아세요?"
"예."
아주머니께서 러시아어로 말하기 시작했어요. 이때부터 머리 속이 엉망이 되기 시작했어요.
나 우즈베키스탄에 있었을 때 우즈베크어만 공부했어. 러시아어는 몇 마디만 알아.
우즈베키스탄에 있을 때 러시아어는 전혀 공부하지 않았어요. 어쩔 수 없이 몇 마디 강제로 알아야만 했지만 러시아어 자체를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러시아어를 공부하지 않았어요. 원래부터 러시아어를 싫어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우즈베키스탄 가서 러시아인들이 '어떻게 러시아어를 모를 수 있어?'라고 당당히 이야기하면서 정작 자기들은 우즈베크어 모르는 모습에 혐오감이 생겼어요. 그 태도가 딱 식민지 점령자들 같았거든요. 그래서 러시아인들이 말을 걸어도 꿋꿋히 우즈베크어로 말했어요. 우즈베크어만 열심히 공부했구요.
러시아어 자체를 잘 모르는데 아주머니가 러시아어로 막 이야기하자 머리 속은 혼돈 그 자체가 되어버렸어요. 일본어도 외국어, 러시아어도 외국어. 내 모국어는 한국어. 외국어 2개를 동시에 처리할 능력은 없었어요. 머리 속에서 러시아어가 떠올랐다가 일본어가 떠올랐다가 하는 것으로 끝나면 다행이었어요. 아주머니가 일본어는 유창하게 구사했거든요. 문제는 이렇게 예전에 조금 공부했었던 러시아어가 떠오르자 쓸 데 없이 우즈베크어, 아랍어, 프랑스어 같은 것이 뒤죽박죽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어요. 아주머니가 아주 어려운 내용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 뭔 말을 하는지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어요.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어요. 문제는 말을 하려고 하면 그때부터 그간 공부해봤던 온갖 언어가 다 떠오르면서 말이 안 나왔다는 거였어요.
혼자 머리 속에서 온갖 외국어 다 떠오르며 혼란스러워하다 아주머니께 일본어로 이야기해달라고 했어요. 다시 머리 속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어요.
"300엔 내세요."
"예?"
아주머니가 표지판을 가리키며 말했어요.
"코레와 루루데수."
예, 일본인들이 규칙 정말 엄격하게 엄수하죠. 이것은 룰입니다. 코레와 루루데수. 표지판을 봤어요. 니콜라이 성당은 입장료가 있었어요. 300엔이었어요. 300엔을 내었어요.
'야박한 러시아인들. 모스크는 공짜에 무려 대추야자까지 그냥 먹으라고 주는데...'
속으로 툴툴대었어요. 300엔 내고 입장해야 한다고 하지만 사진 한 장 찍을 수 없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여기 내부가 특별히 볼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어요. 서울에 있는 동방정교 교회보다 볼 것이 훨씬 더 없었어요. 그래도 찍은 사진 지우라고 하지 않은 게 어디냐고 스스로 위안했어요.
대충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어요.
입구 위에 그려진 성화. 예수님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들고 있는 책에 일본어가 적혀 있었어요.
니콜라이 성당 안내문이 적혀 있는 팻말이 있었어요.
일본 도쿄 치요다구 신오차노미즈역 동방정교 교회 니콜라이 성당은 건축 면적이 약 800 평방미터이고, 녹청을 두른 35m 규모의 돔 지붕이 특징인 러시아 정교 교회에요.
니콜라이 교회는 1891년에 건설된 러시아 정교 교회로, 당시 건설비용이 24만엔이었대요. 이 비용 대부분은 러시아 정교 신도들의 헌금으로 충당했다고 해요. 그러나 돈이 부족해서 내부를 화려하게 꾸미지는 못했다고 해요.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관동대지진 때 니콜라이 성당도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해요. 벽돌 구조의 종탑이 파괴되었고, 이때 지진으로 인해 발생한 화재로 인해 이코노스타시스 같은 것을 포함한 내부와 목조부분 상당수가 소실되었대요. 또한 니콜라이 성당 내부 도서관, 신학교 등도 불타버렸대요.
일본 관동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자 1923년 10월 20일에 이 대성당을 복구하기로 결정했어요. 그러나 재정상의 이유로 인해 1927년부터 1929년에 걸쳐 복구가 원형 그대로 형태가 아니라 설계를 약간 변경해서 복구가 이루어졌어요.
니콜라이 성당은 다행히 태평양전쟁 시기 도쿄 대공습에서 전쟁의 화마를 피했어요. 도쿄대공습 직후 시신 안치 장소가 부족해 니콜라이 성당도 시신 안치 장소로 사용되었다고 해요. 1962년 6월 21일에 일본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90년 10월부터 1994년 3월까지 재단법인 문화재건조물보존기술협회이 니콜라이 성당을 감리했고, 부분적으로 보수 및 보강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1994년 6월부터 보수공사가 진행되었대요. 이 보수공사는 9년 정도 소요되었다고 해요.
크게 볼 것은 없었어요. 일본의 동방정교 역사를 대표하는 곳이기는 하겠지만, 외관 외에는 딱히 볼 것이 없었어요.
이제 간다 고서점 거리로 갈 차례였어요.
하늘은 매우 우중충했어요. 여전히 더웠고 습도가 엄청나게 높았어요. 그래도 비가 오고 있지 않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워할 상황이었어요.
"저기가 간다 고서점 거리구나!"
딱 봐도 헌책방 같이 생긴 서점들이 길가에 쭉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어요.
드디어 마지막 일정인 간다 헌책방 거리에 도착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