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무계획이 계획 (2008)

무계획이 계획 - 마지막화

좀좀이 2011. 11. 11. 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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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그 날이 찾아왔어요.

말 그대로 소심한 복수. 어차피 더 짤릴 월차도 없어요. 8월에 때려치니까요.


눈은 일찍 떴어요. 그러나 오늘 하루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하다보니 아침 9시가 되었어요. 친구는 곤히 자고 있었어요. 슬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어요. 뭐라고 이야기해야 정말 약오르고 화나게 할 수 있을까? 사실 무단결근 자체가 열받는 일이겠지만 어설픈듯 하면서 그럴싸한 거짓말을 해야 더 열받게 되는 법. 오늘 하루 무엇을 해야 보람찰지 생각하고 무슨 말로 열받게 할까 생각하다보니 드디어 전화를 할 시간이 되었어요. 아침 10시 반. 오전 작업 지시 및 회의가 아무리 길어져도 오전 10시 반 이전에는 끝났어요. 즉 지금이 전화를 걸 타이밍.


뚜루루루

"여보세요."

"파트장님, 저에요."

"왜 안 오세요?"

짜증 가득 담긴 목소리. 화내면 어쩔건데?

"아...첫 비행기 타고 돌아가려고 공항 근처 PC방에서 밤 새다가 깜빡 잠들었는데 지금 깨어났어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당연히 말이 안 되지. 하지만...

"진짜라니까요. 첫 비행기 타려면 공항 근처에서 밤 새야한다구요. 전철이 안 열려요."

나름 타당한 논리. 실제로 서울 김포공항에서 첫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는...지하철 첫 차를 타도 된다고는 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것이구요. 공항 근처가 아닌 이상 솔직히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해 첫 비행기를 타는 것은 약간의 무리가 있었어요. 어쨌든 중요한 것은 첫 비행기를 타면 제주 국제공항에 8시 이전에 도착할테고, 집에 가서 옷 갈아입고 바로 출근한다면 안 될 것도 없었어요. 억지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말이 되었어요.

"지금 못 내려와요?"

"이미 늦었죠. 표도 없는데요."

저도 같이 짜증을 내는 시늉을 했어요. '공식적'으로는 저 역시 무단결근하게 된 상황에 매우 짜증난 거에요. 절대 고의적으로 좀 열받아 보라고 무단 결근을 한 것이 아니에요.

"알았어요."

짜증 버럭버럭. 속으로 즐거웠어요. 이 말도 안 되지만 반박하기도 그런 논리 때문에 아마 꽤 열받았을 거다. 차라리 헤엄쳐서 오라고 하지...그러면 아마 퇴사 예정일까지 제주도 가지도 못하겠지? 친하게 지냈던 동료들에게 문자를 보냈어요. 모두 화가 나 있었어요. 별 것 아니었지만 속이 조금 후련했어요. 알아서 되라지. 어차피 며칠 후면 회사도 끝이고, 나는 다시 고향을 탈출하는데.


"아! 시원해!"

그냥 시원했어요. 별 것도 아닌데 너무 즐거웠어요. 제가 신나서 웃는 소리에 친구가 잠에서 깨어났어요.

"야, 씻어. 나가자."

"어디 갈 거?"

아, 맞다! 이거 미처 결정해 놓지 않았구나.

"너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아니."


어디를 갈까? 그러나 문제는 저도 서울에서는 마땅히 가보고 싶은 곳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더욱이 친구의 여행 경비는 이제 사실상 다 떨어져서 제가 친구의 여행 경비까지 어느 정도 부담해야 하는 상황. 그리고 저녁에는 내려가야 했기 때문에 멀리 갈 수도 없었어요. 저도 서울 안에서 이곳 저곳 돌아다녔지, 서울 바깥으로 나간 적은 거의 없었어요. 왠지 일산, 고양, 수원, 오이도 이런 곳은 그냥 무지 멀게 느껴졌어요.


"두물머리나 가자."

"거기는 또 어디라?"

"좋은 곳. 경치 예뻐. 가면 팔당댐도 볼 수 있어."

두물머리에 간 적이 있긴 했어요. 그때는 2006년 초여름. 처음 디카를 산 후 사진에 미쳐서 정신없이 밖을 돌아다닐 때였어요. 그때 두물머리를 다녀오기는 했는데 어떻게 갔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았어요.

'팔당댐은 팔당역에서 갈 수 있겠지.'


친구에게 저만 믿으라고 하고 일단 팔당역으로 갔어요.

한산하고 아무 것도 없는 팔당역.


하지만 망했어요. 여기서는 팔당댐을 볼 수 없었어요. 볼 수 있다고 해서 갔더니 식당 건물들이 완벽히 시야를 가리고 있었어요. 결국 물어물어 버스를 타고 두물머리에 갔어요.



정말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했던 두물머리였지만 정말 갈 곳이 없어서 돌아왔어요.


사진기 들고 와서 두물머리와서 꼭 하는 짓은?



배 사진 찍기.


푹푹 찌는 여름. 두물머리라고 그렇게 시원하지도 않았어요. 더욱이 친구는 피로와 짜증이 극에 달해 보였어요.

"이제 돌아가자."

"그러자."



고향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김포 공항에 가까워질수록 기분이 안 좋아졌어요. 비록 며칠 남지 않았지만 또 회사에 나가야 하고, 다시 서울 올라오려면 얼추 한달은 더 있어야 했어요. 고향에 내려가서 항상 다시 서울로 올라갈 날을 기다렸어요. 환상은 모두 사라졌고, 남은 것은 현실이었어요. 그 현실 속에서 내린 결론은 탈출이었어요. 마침 일자리를 잡아서 서울로 다시 올라가게 되기는 했지만 한달간 머무른다는 것 자체가 끔찍했어요.



버스를 한참 타고, 다시 전철을 한참 타서 드디어 김포 공항에 도착했어요. 기분이 정말 안 좋았어요. 여행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어요. 여행이 너무 짧았어요. 정말 눈 감았다 뜨니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것 같았어요. 조금만 더 여행을 하고 싶었어요. 문제는 돈도 시간도 없다는 것. 시간이 주어져도 섣불리 여행을 더 할 수는 없었어요. 어쨌든 비행기 탑승 시각은 계속 다가오고 있었어요. 담배만 계속 뻑뻑 태워댔어요.


"가자."

끌려가듯 비행기에 올라탔어요. 비행기에 타자마자 순식간에 제주 공항에 도착했어요. 버스를 타고 동네로 와서 항상 그 친구와 만나고 헤어지는 지점까지 갔어요.

"맥주나 한 캔 할까?"

"나 피곤해. 집에 가서 쉴래. 나중에 먹게."

"잘 가라. 수고했다."

"너도."

친구가 피곤하다고 먼저 집에 들어갔어요. 혼자 남았어요. 이제는 여행이 아니에요. 이제부터 돌아다니는 것은 그저 떠돌아디는 것에 불과할 뿐이었어요.



편의점에 들어가 콜라 한 캔을 사서 나왔어요. 하늘을 바라보았어요. 맑은 하늘에 별이 떠 있었어요. 나를 위하여

"건배!"


시원하게 콜라 한 캔 마시고 집에 들어갔어요. 이렇게 이 진짜 계획없이 친구와 떠난 여행은 끝났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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