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 친구가 타이완 다녀와서 선물을 주었어요.
"이건 뭔 라면이야?"
"그거는 조금 비싼 거야."
기쁘게 선물을 받았어요. 그리고 방치하기 시작했어요. 방에서 방치되기 시작했고, 기억속에서 방치되기 시작했어요.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어요. 그렇게 6개월 정도 흘러갔어요. 드디어 이 라면을 먹어보고 싶어졌어요. 방을 뒤졌어요. 라면이 나왔어요.
"이거 꽤 묵직한데?"
친구에게 처음 받았을 때에는 중량에 대해 별 생각 없었어요. 왜냐하면 다른 선물들도 같이 한 봉지에 넣어서 받았거든요. 다른 것들과 섞여 있었고, 그 봉지를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라면 1개의 중량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어요. 그러다 이번에 끓여먹어보려고 라면 봉지를 드는 순간 이 라면이 매우 묵직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순간 퍼뜩 드는 생각이 있었어요.
'이거 레토르트 스프 들어간 거 아냐?'
인스턴트 라면계에서 레토르트 스프 들어간 라면은 닥치고 사기. 이건 공정경쟁에서 벗어난 거에요. 남들은 두 발 자전거로 경주하는데 자기 혼자 오토바이 악셀 마구 땡기며 달리는 꼴이에요. 레토르트 스프가 들어가면 일단 맛은 일반 인스턴트 라면과 확실히 격에서 차이가 나버려요. 이것은 노력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엄청난 차이. 제 아무리 인스턴트 라면에 건더기가 많다 한들 3분 카레 속에 들어 있는 당근 쪼가리 하나만 못한 것이 비정하고 차가운 현실이니까요.
친구에게 선물받은 타이완 라면은 바로 만한대찬 진미우육면 滿漢大餐 珍味牛肉麵 이에요. 통일기업에서 나온 라면이에요.
봉지 뒷면은 이렇게 생겼어요.
빼곡히 번체 한자로 적혀 있는 설명.
잔인한 놈들. 끓이는 방법 그림도 안 그려주냐?
끓이는 방법조차 전부 한자로 적혀 있었어요. 이거 해독하다가는 먹기 전에 해독하다 분노에 배가 부를 듯. 보통은 라면 끓이는 방법 그림이 있기 마련인데 이건 대체 얼마나 자신있길래 한자 모르는 인간들은 먹지도 말라는 식으로 한자를 빼곡히 써놓은 거지?
역시 레또르트 스프가 들어 있었어요. 이로써 이 라면은 일단 격이 다름 보장. 오른쪽 보라색은 분말 스프로 회색 가루였고, 그 아래 귤빛 스프는 기름 스프에요. 이것은 아주 딱딱히 굳어 있지 않고 걸쭉한 상태였어요. 손으로 짜도 매우 잘 짤 수 있었어요.
냄비에 레또르트 스프를 부었어요.
역시 레토르트!
탱탱한 고기가 들어 있었어요. 중국 음식 특유의 향이 살살 올라오기 시작했어요.
조리법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스프 다 쏟아넣고 물 적당히 붓고 끓였어요. 물이 끓자 면을 집어넣었어요.
참고로 저는 물을 상당히 조금 잡았어요. 짜면 물 더 넣으려구요.
1인당 GDP 차이의 맛!
쇠고기 향이 진하게 퍼졌어요. 그 사이에 가끔 중국 음식 특유의 향기가 살짝 살짝 고개를 내밀었어요. 마치 좋아하는 이성을 바라보다 눈 마주치면 갑자기 눈길을 홱 돌리는 것처럼 중국 음식 특유의 향기가 간간이 고개를 들고 나오곤 했어요. 그 향기를 느끼려 하면 부끄러워하며 다시 쇠고기 냄새 속으로 숨어버렸어요.
국물맛은 농심 안성탕면 국물과 약간 비슷했어요. 그러나 당연히 안성탕면 따위와 비교될 맛은 아니었어요. 친숙하면서 이질적이고, 이질적이면서 친숙한 매력적인 맛이었어요.
란저우 라면이 이랬으면 내가 열 안 받았지!
이 라면도 뉴러미엔. 란저우 뉴러미엔 같은 뉴러미엔. 우육면. 내가 란저우에서 라면 먹고 기대했던 맛이 바로 이 맛이었어! 다시 몰려오는 그날 그 시각의 분노.
다시 보는 중국 여행기 속 란저우 라면 : http://zomzom.tistory.com/1725
란저우에서 저는 이런 맛을 기대했어요. 친구가 하도 맛있다고 하길래 익숙하면서도 어색한, 어색하면서도 익숙한 그런 맛을 기대했어요. 그러나 거하게 혓바닥을 두들겨맞고 분노했어요. 친구가 중국인들 중 란저우 라면 매니아들도 있다고 했는데 그 인간들 미뢰 구조가 궁금할 지경이었어요.
그래요. 이것은 1인당 GDP 차이의 맛. 타이완 1인당 GDP 는 24028 달러. 중국 1인당 GDP 는 8481달러. 타이완이 1인당 GDP는 중국보다 무려 3배 높아요.
어렸을 적 광고를 보면 공장에서 대량생산한 제품이 가정에서 만든 것보다 품질이 더 뛰어나다는 뉘앙스의 광고가 종종 있었어요. 이건 그렇게 광고해도 사실이었어요. 란저우 현지에서 먹었던 란저우 뉴러미엔에 비해 이게 압도적으로 맛있었으니까요. 진짜 광고를 '나는 맛있는 타이완 통일기업의 만한대찬 진미우육면 끓여먹는다!' 고 잘난척 하는 뉘앙스로 양복 입은 부잣집 아이가 이 라면을 고급 중식 레스토랑에서 후루룩 좝좝좝 먹는 광고로 만들어도 전혀 과대광고라 할 수 없었어요. 보통 이런 제품은 인스턴트보다 원래 그 음식을 먹던 지역 식당에서 먹는 것이 훨씬 맛있는 것이 정상인데, 이건 반대였어요.
솔직히 란저우에서 식당들이 차라리 이 라면을 끓여서 주었다면 화가 나지 않았을 거에요. 오히려 친구와 둘이 후루룩 후루룩 먹으면서 하오빵 쩐빵 했겠죠. 물론 그랬다면 란저우 여행기가 밋밋하게 나왔을 테니 란저우 라면은 맛대가리 없어서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여행기를 쓰려고 간 게 아니라 여행을 다녀온 후 기록을 남긴 것이니 이런 발상조차 말도 안 되는 발상. 진짜 란저우에서 먹은 우육면은 참 맛이 없고 중국 봉지라면과 똑같다고 생각했어요. 이 타이완 우육면은 중국 봉지라면은 물론이고 란저우의 식당에서 먹었던 란저우 라면들보다 다섯 배는 더 맛있었어요. 식당보다 맛있는 인스턴트 라면이라니...아무리 '레토르트 스프'라는 사기 아이템을 써서 이룩한 맛이라지만 그래도 이것은...
타이완과 중국의 1인당 GDP 차이의 맛이라는 것 외에는 설명이 되지 않았어요. 타이완 봉지 라면이 중국 식당 라면보다 더 맛있다니...
라면을 먹으며 생각했어요.
식당에서 타이완 만한대찬 진미우육면 (인스턴트 라면) 과 말레이시아 알리티 쁘라짬뿌르 등안 똥깟 알리 (인스턴트 밀크티) 를 묶어서 '타이완 진미우육면 정식'이라고 5000원에 팔면 어떨까? 이건 잘 팔리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줄 서서 먹는다. 만한대찬 진미우육면은 식당의 우육면보다 낫고, 알리티는 카페의 밀크티보다 나으니 이걸 대량으로 수입해서 라면 하나에 밀크티 한 컵으로 5천원에 팔면 사람들 줄 서서 먹겠다.
타이완 라면인 만한대찬 진미우육면 滿漢大餐 珍味牛肉麵 은 정말로 매우 맛있었어요. 우리나라 어지간한 인스턴트 라면들보다도 더 맛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