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복습의 시간 (2016)

복습의 시간 - 28 중국 실크로드 카슈가르 인민공원, 교과서 구하기 실패

좀좀이 2016. 9. 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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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위구르어를 진짜로 열심히 공부해야지.'


정말 굳게 다짐하며 길을 걷는데 친구가 말했어요.


"나도 위구르어 알려줘."

"응?"

"위구르어 알면 완전 좋잖아. 그거 여기서만 써?"

"위구르어는 우즈베크어랑도 비슷하니 우즈베키스탄에서도 말이 통하기는 할 걸?"


둘 다 기분이 좋아져서 길을 걸어갔어요. 지금 당장 친구에게 우즈베크어 알려줄 것이 무엇이 있나 생각해 보다가 숫자를 알려주었어요. 숫자를 1에서부터 10까지 알려주고 하나씩 해보라고 했어요.


고추를 파는 가게가 보였어요.


위구르 고추


이드카 모스크 근처를 지나 신화서점 카슈가르 지점을 향해 계속 걸어갔어요.


kashgar


큰 길로 가는 길 입구에는 아름다운 위구르 아가씨 동상이 있었어요.



이 아가씨 동상은 과일과 야채를 들고 있었어요. 저런 포즈를 보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저 웃음이 거짓이라는 생각도 같이 들어요. 무슨 풍선을 담아놓은 것도 아니고, 야채와 과일을 저렇게 바구니에 담아놓으면 그 무게를 무시할 수 없어요. 저렇게 한쪽 어깨 위로 삐딱하게 들어올리는 것은 절대 쉬운 자세가 아니에요. 무슨 순간 포착을 한 것도 아니고 저렇게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 벌주는 것이에요. 물론 사실적으로 해서 바구니를 앞에 들고 있게 하면 덜 아름다워보이겠지만요.



남자 동상은 빵을 들고 있었어요. 그 옆에 서 있는 아저씨는 해바라기씨를 팔고 있었어요.


이드카 모스크를 등지고 서서 오른쪽으로 쭉 걸어가자 드디어 멀리 신화서점 건물이 보였어요.


新华书店


"여기는 도로 구조가 왜 이러냐?"


인도를 절반으로 갈라 차선쪽은 오토바이 및 자전거가 다니고 있었어요.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도 목격할 수 있는 구조에요. 도로가 넓고 오토바이가 많아서 도로를 이렇게 설계한 것 같았어요. 우리나라에서 인도 보도블럭을 다 없애고 빨간 페인트로 바닥을 칠한 후 흰색으로 자전거를 그려놓아 멀쩡한 인도를 자전거 도로로 만들어버리는 것보다는 일단 낫기는 했어요. 우리나라는 아무리 길이 좁다지만 인도 전체를 그대로 자전거 도로로 설정해버리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희안한 것은 이 오토바이 도로 끝에 맞은편으로 건너가는 지하보도 입구가 설치되어 있다는 것이었어요. 오토바이가 한두 대면 그러려니 하고 가면 되는데, 오토바이가 많다보니 오토바이 도로를 건너 지하보도 입구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상당히 신경쓰이는 일이었어요. 더욱이 여기도 어쨌든 중국이라 사람을 보고 차가 양보해주는 교통질서는 매우 희박했어요.


길을 건너 신화서점쪽으로 갔어요. 신화서점 옆에 작은 서점이 있어서 들어가서 교과서가 있냐고 물어보았어요. 서점 주인은 교과서를 구입하고 싶으면 옆에 있는 신화서점에 가서 물어보라고 알려주었어요.


'이제 드디어 위구르어 교과서를 다 구하는 건가?'


신화서점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점점 흥분되었어요. 이제 '위구르어 교과서 있어요?'라고 물어볼 필요가 없었어요. 정확히 '틸-애대비야트 교과서 있어요?'라고 물어보면 되요. 제가 구하고자 하는 것의 이름을 정확히 아니 일은 더 쉬워졌어요. 게다가 지금까지는 이 교과서의 존재 자체가 의문이었는데, 교과서를 2권 구하면서 이 교과서의 존재 자체는 매우 확실해졌어요. 교과서를 2권 구했으니 남은 교과서도 큰 무리 없이 구하겠지? 오늘 공터를 찾으러 갈 때 교과서 12권을 들고 다니는 것이 상당히 부담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목적을 달성했으니 기쁜 마음으로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 거야!


"여기는 교과서 안 팔아요. 신화교육서점으로 가세요."

"예?"


기껏 신화서점까지 걸어왔는데 교과서를 구입하고 싶으면 신화서점이 아니라 신화교육서점 新华教育书店 으로 가라고 했어요. 친구 스마트폰으로 바이두 지도를 이용해 신화교육서점을 찾아보았어요. 신화서점 옆은 인민공원이었어요. 아마 여기, 아니면 인민공원 너머에 있는 동호공원이 밤을 보낼 곳이 될 것이었어요. 신화교육서점은 신화서점과 아예 다른 곳에 있었어요.



그냥 방향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엉뚱한 곳에 있다고 해도 될 정도. 게다가 거리가 가까운 것도 아니었어요. 신화서점에서 인민서로를 따라 약 1km 를 걸어가야 했어요. 이드카 모스크에서 바로 신화교육서점으로 갔다면 어떻게 골목길을 따라 잘 가서 신화교육서점부터 가고 바로 공원으로 가면 될 것이었는데, 신화서점부터 왔기 때문에 신화교육서점까지 갔다가 갔던 길을 또 되돌아와야 했어요. 거리상 약 1km 떨어진 곳이기는 했지만, 실제 걸어야하는 거리는 약 2km 정도 되었어요.


진짜 한숨만 나오는 상황. 이제 슬슬 피곤해지기 시작했어요. 모든 짐을 다 들고 돌아다닌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서점이 저녁 8시까지는 한다고 하고, 시계를 보니 이제 저녁 6시라 걸어가도 서점 문이 닫힐 일은 없었어요. 확 택시를 타고 가 버릴까? 아니면 내일? 고민이 엄청나게 되었어요. 위치를 보니 다음날 갈 위치가 전혀 아니었어요. 쇠뿔도 단 김에 뽑으라는 말대로 지금 가야할지, 다음날 일부러 시간을 내서 가야할지 심각하게 고민했어요.


"아, 그냥 오늘 가자!"


친구가 오늘 신화교육서점까지 갔다가 공원 가서 쉬자고 했어요. 친구도 제가 교과서 구하는 문제를 어떻게든 끝내고 싶어했어요. 카슈가르 신화교육서점이 이 문제의 답을 줄 마지막 서점이었어요. 이름에서 보이듯 이 서점은 교과서를 제대로 취급하는 서점. 쿠처는 큰 도시도 아닌데다 6월 5일 일요일 일정이었어요. 이 한 곳만 가면 교과서 구하는 문제는 끝이었어요. 다음날로 미룰 바에는 차라리 오늘 신화교육서점까지 돌아본 후, 다음날 숙소에서 편하게 쉬는 것이 훨씬 나았어요.



길을 걸어가는데 한국어 간판이 보였어요. '성실하다'. 무엇을 한국어로 번역했길래 저런 말을 썼는지 궁금했지만 많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어요. 둘 다 점점 말이 없어지고 있었어요. 지도상으로 볼 때는 분명히 그렇게 멀다고 느껴지지 않은 거리였지만 실제로 걸어보니 상당히 멀게 느껴졌어요. 등에 짊어진 짐은 계속 다리를 짓눌렀어요. 많은 행인들, 많은 오토바이들이 사람을 더 피곤하게 만들었어요.


카슈가르 서점


저녁 7시 20분. 드디어 신화교육서점에 도착했어요.



위구르어로는 '신화 마아립 크탑카느스' 라고 적혀 있었어요. 위구르어로 kitapxana 는 서점, kutupxana 는 도서관이에요. kitap 은 아랍어원의 차용어로 아랍어에서 '책' 이라는 뜻인데, 이 'kitab' 의 복수가 'kutub'이에요. 책 한 권이 있으면 서점, 책 여러 권이 있으면 도서관. 하지만 여기까지 길을 물어볼 때, 절대 kitapxana 라고 물어보지 않고 일부러 kitap dukani '키탑 두카느'라고 물어보았어요. kitapxana 는 직역하면 '책방'이라는 말인데, 이렇게 말하면 도서관을 알려주는 경우가 왕왕 있었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서점을 우리말로 직역하면 '책 가게'인 '크탑 두카느'로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설레는 마음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어요. 안에 들어가니 진짜 딱 교과서와 참고서 등을 파는 서점 분위기가 확 났어요. 교과서를 구입하러 왔다고 하자 정문 왼편으로 가서 찾으라고 했어요.


'이건 다 중국어 교과서인데?'


중국어 교과서는 전혀 필요없었어요. 왜냐하면 중국의 중국어 교과서는 한국에서도 구입할 수 있거든요. 저 또한 우리나라에서 구입해 이미 갖고 있었구요.


"위구르어 교과서는 없나요? 틸-애대비야트요."

"어느 학년?"

"1학년 1학기부터 끝까지요."

"그거 8월에 들어와."

"한 권도 없어요?"

"내가 있으면 없다고 하겠니?"


할 말이 없었어요.


벼락이 머리를 강타했어요. 눈 앞이 깜깜해졌어요.


교과서 구입하는 것은 실패했어요. 카슈가르에서 교과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서점에서 교과서가 없다고 하니 이제 이 여행에서 위구르어 교과서를 구할 확률은 0이 되어버렸어요. 그나마 다행이라면 1학년 1학기 글자 익히는 책과 6학년 2학기 교과서를 선물받았다는 것. 그것을 통해 실제로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는 위구르어 교과서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 문제는 1학년 1학기에서 6학년 2학기로 바로 넘어갈 수가 없다는 점이었어요. 그것이 가능하려면 위구르어와 우즈베크어가 완벽히 같아야하는데, 둘은 다른 언어였어요. 생전 배워본 적이 없는 외국어로 된 6학년 2학기 교과서를 읽는 것은 무리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이었어요.


"인터넷으로 구입할 수 없나요?"

"인터넷으로 안 팔아."

"꼭 여기 와서 구입해야 하나요?"

"응."


정말 절박했지만 없는 교과서를 내놓으라고 할 수도 없었어요. 교과서가 있는데 안 판다고 해야 빌어보기라도 하지, 없는 교과서를 팔아달라고 빌 수는 없었어요.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인터넷 주문이 가능하냐고 물어보았지만 그것 또한 불가능이라는 대답이 0.1초의 망설임 없이 바로 돌아왔어요. 이 위구르어 교과서를 구하기 위해서는 다시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와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여기에 다시 올 확률은 거의 0이었어요. 교과서를 구하기 위해 여기로 또 올 수는 없었어요. 아직까지도 구하지 못한 투르크메니스탄의 투르크멘어 교과서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었지만, 이 역시도 구하기 거의 불가능한 것은 마찬가지. 교과서에는 중국어가 한 자도 안 적혀 있었어요. 사실 인터넷으로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여행에서 구하려 했어요. 타오바오니 알리바바니 다 뒤져보았지만 없었거든요. 그런데 결국 여기에서도 못 구했어요. 시기가 최악으로 안 맞았어요. 6월은 중국에서 학기 정도가 아니라 학년이 끝나는 달. 교과서 재고가 당연히 없는 달이에요. 우리로 치자면 1월에 교과서 찾는 것이라 생각하시면 되요. 우리나라에서 1월에는 교과서가 별로 없지요.


교과서가 없다는 사실에 충격받은 것은 친구도 마찬가지였어요. 어쨌든 교과서를 구입하는 것이 좋은 결말이었어요. 이 서점까지 찾아오기까지 친구도 저와 함께 고생했어요. 그러나 그 고생 모든 것이 허무해졌어요. 생각 깊은 친구는 '나중에 다시 와서 구입하면 돼' 같은 분통터지는 소리를 하지 않았어요. 인터넷으로도 구할 수 없어서 교과서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와야 하는데, 그것이 한두 푼 드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친구도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것이 제게 얼마나 비극적인 결말인지 친구도 잘 알고 있었어요.


"교과서 없네. 공원 가자."

"여행 책자나 있으면 조금 보고 가자."


친구가 이제 공원 가서 쉬자고 했지만, 아직 할 일이 있었어요. 머리가 멍했지만, 일단 이왕 서점에 왔으니 해결해야할 문제 하나는 해결하고 가야 했어요. 지금 이 여행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정보가 아무 것도 없다는 것. 친구는 정말 아무 것도 안 알아왔고, 제가 알아온 것이라고는 매우 유명한 관광지 몇 곳이 전부였어요. 한 도시에 일주일씩 머무는 것도 아니고, 고작 이틀 남짓 머무는 것이라 일정을 어떻게 짜야할 지가 정말 중요했어요. 친구가 생각하던 아무런 정보 없이 무계획으로 가서 사람들에게 추천 받아서 어디를 가보고 하는 여행은 애시당초 불가능이었어요. 그런 여행을 하려면 한 도시에서 일주일 정도는 머물러야 하거든요. 이것은 친구도 반박할 수가 없는 것이 실제 이쪽으로 오며 관광지 몇 곳을 추천받기는 했어요. 문제는 그곳에 갔다 오는 것 자체가 며칠 걸린다는 것이었어요. 제 비자에 약 열흘 정도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귀국 일정을 미루는 방법도 있기는 했지만, 친구가 다른 친구를 중국으로 부르면서 일정 자체의 탄력성은 아예 없어져 버렸어요. 신장 위구르 지역에서 남은 시간을 소중히 활용하기 위해서는 정보가 반드시 필요했어요.


신장 위구르 자치구 여행 책자가 한 종류 있었어요. 다른 지역은 볼 필요 없었고, 오직 카슈가르와 쿠처만 보면 되었어요. 먼저 카슈가르. 그다지 도움될 만한 정보가 없었어요.


그리고 쿠처. 이것은 매우 중요했어요. 쿠처에서 천산신비대협곡을 보러 가기로 했는데, 이것 보러 가는 경비가 상당히 비쌌어요. 여기는 입장료도 비싸고, 교통비도 비싼 총체적 난관이었어요. 쿠처 편을 펼치며 한 가지 기대를 했어요. 중국인이 어떤 사람들인가? 한 푼이라도 더 깎지 못해 안달인 사람이다. 아무리 우리가 중국인을 멸시한다 하더라도 중국인들의 경제에 대한 정보력 하나만큼은 인정해야 해요. 이 사람들이 전세계적으로 미움을 받는 이유는 한 나라에서 자국민을 대상으로 제공하는 서비스를 어떻게든 뚫어내고 자기들끼리 공유해서 최대의 이익을 얻어내기 때문이에요. 단순히 장사만 잘 하기 때문에 미움받는 것이 아니라요. 어떻게든 바퀴벌레처럼 편법적인 방법을 찾아내고 뚫어내기 때문에 다른 외국인들보다 더 미움을 받는 것이에요. 일본인들이 갖고 있는 여행정보가 세련되고 정확하다면, 중국인들이 갖고 있는 여행정보는 최대한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방법을 보여주어요.


그러나 아쉽게도 천산신비대협곡 가는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여줄 방법은 없었어요. 여기는 쿠처역에서 천산신비대협곡까지 가는 것 그 자체가 문제였어요. 그렇다면 여기를 가서 그 돈을 쓴 만큼 감동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남는데, 이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했어요. 쉽게 말할 문제는 아니었어요. 돈 문제와 시간 문제 둘 다 걸려 있었어요. 천산신비대협곡을 간다면 쿠처 시내 구경은 포기해야 했어요.


일단 비용이 제가 인터넷으로 알아본 것과 별 차이없음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신장 위구르 자치구 여행 가이드북을 하나 살까?'


비록 중국어로 되어 있었지만, 아직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신장 위구르 자치구 여행 가이드북이 없다보니 하나쯤 갖고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어요. 중국어 말하는 것이 안 되는 것이지, 중국어를 읽고 이해하는 것은 그래도 약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갖고 보면 못 볼 것도 아니었어요. 이제는 인터넷 사전도 좋아져서 예전처럼 부수 찾고 획수 세어서 찾을 필요도 없구요. 상태가 괜찮은 가이드북이 있나 살펴보았어요. 전부 상태가 좋지 못했어요. 어차피 이 여행에서 더 이상 가이드북의 도움을 받을 구석이 없었기 때문에 구입하지 않았어요.


서점 밖으로 나왔어요. 이제 왔던 길을 다시 걸어서 돌아가야 했어요. 열심히 공부했지만 결과가 참담한 성적표를 들고 귀가하는 학생의 심정이었어요.


喀什


그 긴 거리를 왕복하며 제대로 찍은 사진이라고는 이것 딱 한 장. 그만큼 충격이 컸어요.


친구는 다음날 잘 곳을 알아본다고 길에 숙소가 보이면 가격을 확인해보았어요. 그때마다 친구에게 빨리 오라고 소리쳤어요. 왜냐하면 모두 제가 알아본 숙소보다 가격이 비쌌거든요. 제가 알아본 숙소의 가격, 위치를 뛰어넘는 숙소가 길거리에 있을 리가 없었어요. 친구는 한 푼이라도 더 아껴보려고 거리에 있는 숙소를 계속 알아보았지만 다 부질없는 일이었어요. 제가 알아본 숙소는 도미토리였고, 친구가 알아보고 있는 숙소는 최소한 모텔급이었거든요.


드디어 카슈가르의 명물인 마오쩌둥 동상이 나왔어요.


인민광장


이 마오쩌둥 동상은 18m 로, 중국에서 그렇게 많지 않은 초대형 마오쩌둥 동상이라고 해요.


중국 쓰레기


그리고 이 마오쩌둥 동상 맞은편이 인민광장, 인민광장 너머서가 바로 인민공원이었어요.


카슈가르 인민광장


얼핏 보면 그냥 넓은 광장이었어요.



"저거 뭐냐?"


초록색으로 만든 조형물이 눈에 들어왔어요. 이 조형물을 보고 상당히 황당했어요. 저것이 무엇을 모티브로 만든 것인지 알고 있었거든요. 저것은 한족 고대 유물을 모티브로 만든 조형물이었어요. 카슈가르에 한족도 기어들어와서 살고 있으니 일단 그러려니 하며 넘어가기로 했어요.



입구에 보안검색대가 없었어요. 운이 따라준다면 여기에서 어떻게 밤을 보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친구는 일관되게 막무가내로 텐트를 치고 쉬어도 된다고 하고 있었지만, 그건 정말 아닌 것 같았어요. 이것은 15억 인민의 바이두 스타가 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치안 문제와도 관련이 있었어요. 그래도 적당히 사람이 안 보이고 평탄한 곳에 텐트를 치고 누워야지, 무턱대고 아무 곳에나 텐트를 치고 잘 수는 없었어요. 그렇다고 너무 으슥한 곳으로 가면 위험하구요. 감시가 심한 곳이라는 것을 충분히 확인했기 때문에 텐트를 치고 자기 위해서는 신경을 써야할 점이 많았어요.


중국 민족말살정책


마오쩌둥, 고맙습니다. 당신 덕분에 우리나라 문화 산업 발전에 많은 희망이 보이네요!


"야, 저거 진짜 어이없지 않냐? 여기에 무슨 만리장성이야?"

"중국 애들 만리장성을 자기네 상징으로 내세우잖아. 우리 비자 그림도 만리장성인데."


친구는 제가 왜 어이없어하는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만리장성 왜 세웠냐? 저거 이민족들이 한족 땅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세운 거 아니야?"

"아!"

"위구르인도 원래 유목민족인데 여기에 저런 조형물 만들어놓은 건 대체 무슨 대가리로 생각해낸 거라 해야 하냐?"

"그렇네!"


이것이 이해가 어렵다면 이렇게 비유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서 일본이 앞으로 전세계의 평화와 화합을 위해 욱일승천기 디자인을 내건다고 해봐요. 아시아를 하나로 합치는 대동아공영권의 새로운 해석이라고 하면서요. 과연 이것을 우리들은 좋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아마 서울 시청 광장, 광화문 광장에서 시위 일어나고 난리가 날 거에요. 대동아공영권, 욱일승천기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만리장성이 축조된 이유는 유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에요. 중국이 부르짖는 그 하나된 중국과 정면배치되는 유적이 바로 만리장성이에요. 워낙 유명하기는 하니 외국인에게 내주는 중국 비자에 만리장성 그림을 인쇄하는 것까지는 이해해요. 그러나 위구르인들의 도시에 설치된 거대한 마오쩌둥 석상과 만리장성 모형 조형물을 보며 이것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만리장성은 중화사상 - 그 중에서도 한족 우월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적이에요. 만리장성을 '중국을 구성하는 여러 민족 중 하나인 한족이 세운 거대한 유적' 정도로 하여 해외에 홍보하는 것이야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이 만리장성 모형 조형물이 여기 있는 것은 백만번 좋게 보아주어야 그냥 이것이 뭔지도 모르고 중국을 대표하는 유적이니 여기에도 설치해놓았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었어요. 오히려 이 조형물은 하나의 중국이 아니라 한족의 위구르인에 대한 폭압과 강점에 대한 상징이었어요.


문화 산업을 발전시키고 타국에 수출하는 것은 물량으로 되는 일이 아니에요.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한일문화개방 이전 일본 프로그램 베끼고 툭하면 일본 가요 표절 문제 터져나오던 그 시절까지 돌아가고, 가수 보아가 일본 진출에 성공했다고 열광하던 그 시기까지 한참을 거슬러올라갈 필요도 없어요. 아주 어릴 적부터 국제화, 세계화 소리를 귀에 딱지가 내려앉도록 들었지만 우리나라의 문화 산업 수출은 이제야 빛을 보기 시작했다고 과언이 아니에요.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요. 그놈의 김치 때문에 우리나라가 한식 문화 수출에서 얼마나 헛걸음을 치고 허탕을 쳤는지 생각해보면 되요. 당장 우리들 자체가 김치를 요리로 생각하지 않고 딱 곁반찬 및 양념된 식재료로 생각하고 있어요. 딱 서양의 피클, 동남아시아의 젓갈 같은 존재에요. 서양 음식 문화에서 김치와 정말 비슷한 용도로 써먹는 식재료가 바로 토마토에요. 당장 한식에서 반찬 첩수 셀 때 김치는 세지도 않아요. 김치에 맨밥 - 딱 이것 두 개만 덜렁 주고 밥 먹으라고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도 백이면 백 화내요. 그런데 그것을 자랑스러운 한국의 음식이라고 '요리'로써 수출하려 했기 때문에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렇게 외국인들에게 '한국 대표 음식은 김치에요' 하면서 억지로 외국인 입에 쑤셔넣다가 소금에 절여져 축 늘어진 배추포기로 뺨 맞는 수준의 실적만 내었어요. 오히려 김치 홍보에 비하면 홍보했다고 하기조차 민망할 지경인 불고기, 삼계탕 등이 외국인들에게 훨씬 더 빠르게 퍼졌고, 호응도 엄청나게 좋아요.


문화 수출을 위해서는 자기 것이 뭔지 똑바로 알아야 해요. 자기 것이 무엇이고,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꼼꼼히 따져보아야 해요. 크게 문제될 것이 없고,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파악되었을 때 상품화해서 수출할 수 있어요. 그리고 품질 낮고 똑같은 것을 왕창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고 화끈한 아이템 하나라도 똑바로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해요. 문화 상품 소비는 '싸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낫다고 인정해야' 이루어지거든요.


저 마오쩌둥이 일으킨 문화대혁명 덕분에 중국 역사가 엄청나게 퇴보한 것은 이제 국제 상식. 그나마 물량을 쏟아부어서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이제 어느 정도 많은 발전을 이루어냈지만, 이렇게 인간만 무지막지하게 때려넣는다고 해결될 수 없는 부분은 아직도 많이 뒤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에요. 자기들이 만리장성이 무엇인지 정확히 안다면 이곳에 차마 만리장성을 모티브로 한 조형물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에요. 문화대혁명 시기 너무나 많은 유무형의 모든 전통과 역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파괴했기 때문에 아직도 이런 쪽으로는 아직 많이 뒤떨어져 있어요. 덕분에 우리가 김치에 얽매여 그렇게 많은 시간을 날려먹었음에도 한국 문화를 수출할 기회를 여전히 갖고 있는 것이겠지요.


만리장성을 모티브로 한 조형물을 보며 딱 떠오른 말이 있었어요. '똥인지 된장인지도 구분 못한다'.


친구에게 이런 것들을 조용히 이야기해주며 공원 안으로 들어갔어요. 이런 이야기는 큰 목소리로 이야기하면 안 되었어요. 어디에 한국어를 아는 중국인이 있을지 알 수 없었거든요. 한류 덕분에 한국에 관심을 갖고 한국어를 공부하는 중국인들이 많아져서 이렇게 민감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혹시 모를 일 때문에 신경을 써야 했어요. 이것은 분명히 중국의 한족 전체에 대한 비판이었기 때문에 누가 이 대화를 알아듣는다면 문제가 크게 터질 수 있었거든요.


카드 놀이


공원 안에서는 카드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여럿 보였어요. 그리고 한족도 많았고, 위구르인도 많았어요.


"이제 텐트 치고 쉬자."

"벌써? 이렇게 훤한데?"

"아, 빨리 쉬자. 피곤해."


친구는 공원에 들어오자마자 텐트를 치고 쉬자고 졸랐어요. 아직 주변이 너무 환해서 텐트를 칠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친구는 계속 적당한 곳에 텐트 치고 들어가서 눕자고 했어요. 아직 8시 채 되지 않은 시각. 신장 타임은 고사하고 우리나라의 6월 낮과 밤을 떠올려보아도 당연히 어둡지 않을 때였어요. 친구가 계속 어서 텐트를 치고 누워서 쉬자고 졸랐기 때문에 텐트를 칠 만한 자리를 찾아보았어요.


중국 건축 폐기물


팔각정 비슷한 건물 근처쯤 오자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어요. 팔각정에서 다시 왼쪽으로 꺾어들어가자 진짜로 사람들이 거의 없는 곳이 나왔어요. 으슥하지도 않고, 나무 아래라 적당히 텐트를 가려주었어요. 물론 산책로에서 텐트가 아주 잘 보이기는 했지만 유동인구도 적고 대놓고 텐트를 드러내고 치는 것까지는 아니었어요. 땅도 평평했고 주변에 스프링쿨러도 없었어요.


텐트를 치자 친구가 안으로 들어갔어요. 저도 뒤따라 들어갔어요.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고 드러누웠어요.


"나 화장실 좀 다녀올께."

"그래라."


친구는 공원 입구쪽에 있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했어요. 친구가 화장실을 가자 텐트 문을 닫고 텐트 안에 드러누웠어요.


"무슨 화장실 땅파고 볼일 보나? 왜 이렇게 안 와?"


텐트 안에 누워 있는데 친구가 올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닫힌 문 밖으로 사람들이 지나가며 쳐다보는 소리가 들렸어요. 저라도 공원에 이렇게 텐트가 쳐 있다면 지나가며 한 번 보았을 거에요. 아무리 얼굴에 철판 깔고 무슨 짓을 하더라도 15억 인민의 바이두 스타가 될 수 없다고 한다지만, 사람들이 수근대며 지나갈 때마다 상당히 쪽팔렸어요. 물론 텐트 문을 닫아놓았기 때문에 밖에서 저를 볼 수는 없었지만요.


한참 뒤에야 친구가 텐트로 돌아왔어요.


"너 뭐 하다 왔냐?"

"여기 찾기 진짜 힘들어. 그리고 우리 텐트 진짜 안 보여!"

"안 보이기는 개뿔이 안 보여. 사람들 지나가면서 다 수근대더만. 어여 들어와서 누워."


친구가 들어오자 잠시 눈을 감았어요. 참 피곤한 하루였어요. 기차에서 그렇게 바닥에 드러눕고 싶었는데, 이제 드러누워서 쉴 수 있었어요. 짐에서 벗어났고, 누울 수도 있었어요. 그것 자체가 너무나 행복했어요.


눈을 떠보니 어두침침했어요.



시계를 보니 밤 10시 40분. 아직도 하늘이 까맣지 않았어요. 공원도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어서 친구에게 말하고 텐트에서 나왔어요.



아주 늦은 시각인데도 사람들이 공원에서 산책하고 있었어요.



또한 아직까지도 공원 한켠에서는 카드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공원에는 연못도 있었어요.



인민공원


이 시각까지 공원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더욱 놀라운 것은 밤 11시인데도 하늘이 아주 깜깜하지 않다는 것이었어요. 딱 초저녁 하늘이었어요. 카메라로 찍을 때 주변이 어두워서 흔들리지 말라고 어둡게 찍어서 그렇지, 실제 이때 밤하늘은 그렇게 어두운 편이 아니었어요. 카슈가르는 우루무치보다도 훨씬 더 서쪽. 베이징 시각에서 다시 2시간 빼는 신장 타임으로도 여기의 태양의 일주운동과는 맞지 않았어요. 3시간은 빼야 이곳 하늘의 변화와 시각이 맞았어요. 즉, 밤 11시에 올라다본 검푸른 하늘은 우리나라에서 한여름 저녁 8시에 볼 수 있는 그 하늘과 비슷한 어둡기였어요.


화장실을 갔다가 나오는데 화장실 입구에 있는 수도꼭지에서 발을 씻는 사람이 보였어요. 한 명만 발을 씻고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와서 발을 씻고 가고 있었어요.


'여기서 발도 씻고 양말도 빨아야겠다.'


여행 다니며 빨래하고 발 씻는 것은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 좋아요. 다음날 숙소에 아침 일찍 들어가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원래 규정 체크인 시각이 있으니까요. 게다가 여기는 건조기후. 양말과 신발 깔창을 빨아서 텐트에 널어놓으면 아침이 되었을 때 말라있을 것 같았어요. 신발 깔창이 안 마른다면 조금 문제이기는 했지만, 계속 물기를 털어주면 신발 깔창도 충분히 다 마를 것 같았어요.


텐트로 돌아와 보니 친구가 일어나 있었어요.


"나는 이제 씻고 양말이랑 신발 깔창 빨아야겠다."

"어디에서?"

"화장실 앞 수도꼭지. 이제 그쪽은 사람들 없어."

"같이 가자. 나도 씻을래."

"그러면 귀중품 챙겨."


친구가 졸래졸래 따라나섰어요. 화장실 앞 수도꼭지로 가서 세수를 하고, 발을 씻은 후, 양말과 신발 깔창을 빨고 텐트로 돌아왔어요.


펑 펑


"누가 이 시각에 폭죽 터트려?"


어디에선가 '펑 펑' 소리가 계속 났어요.


다행히 모기는 없었어요.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어졌어요. 생각보다 괜찮았어요. 잠을 잘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에 정말 감사했어요. 만약 여기에 텐트를 치지 못했다면 또 한참 걸어가서 동호공원까지 가야 했거든요. 친구와 이렇게 둘이 텐트를 치고 누워서 자는 것은 처음이었어요. 친구와 기차역 의자에 드러누워 자고, 적당히 의자 찾아 드러누워 자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장족의 발전이었어요. 예전 같았다면 적당히 벤치에 누워서 잤을 거에요. 자리에 누워 서로 예전의 이야기를 이야기했어요. 친구와 상당히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서로 모르는 이야기가 많았어요. 그렇게 이야기하다 잠이 들었어요.


눈을 뜨니 새벽 6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어요. 양말은 밤새 다 말랐고, 신발 깔창은 다 마르기 직전이었어요. 그때 한 위구르인 청년이 왔어요. 중국어로 뭐라고 말을 걸기에 친구를 불렀어요. 친구는 몇 마디 나누더니 미친놈이라고 말했어요. 위구르인 청년은 멀리 가는 척 하면서 텐트 주변을 맴돌고 있었어요. 친구 말로는 그 위구르인이 친구에게 아랫도리를 벗어서 보여줄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고 했어요.


"저거 도둑 아니야? 여기 털려고 왔다가 우리랑 마주치니까 괜히 헛소리하는 거 아냐?"

"몰라. 하여간 미친놈이야. 빨리 떠나자."


텐트 주변을 맴돌며 계속 우리를 주시하는 저 위구르인이 우리들에게 덤벼들 확률은 거의 없었어요. 다른 무리를 데려온다면 모르겠지만, 최소한 혼자라면 그럴 일이 발생할 확률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어요. 왜냐하면 2대 1의 상황이었거든요. 총을 갖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총만 아니라면 혼자 덤빌 리는 없었어요. 공격할 생각이었다면 이미 공격을 했지, 텐트 주변을 멀찍이서 맴돌고 있지는 않았을 거에요. 일단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위구르인을 주시했어요. 우리가 계속 자기를 감시하는 것을 보고는 한참 후에야 시야에서 사라졌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슬슬 공원에 돌아다니기 시작했어요.


"빨리 여기서 떠나자."


친구가 재촉했어요. 텐트를 접은 후,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자리를 옮겼어요.


"나 화장실 다녀올께."

"그래라."


친구는 짐을 제게 맡기고 화장실로 갔어요. 저는 벤치에 앉았어요. 신발 깔창이 아직 조금 축축했기 때문에 신발에서 빼내어 신발 입구에 끼워놓고, 신발을 밟고 앉았어요. 자세가 불편하기는 했지만 신발 깔창을 조금이라도 더 말려야 했어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열심히 운동하고 있었어요.



밤에 들렸던 폭죽 터치는 듯한 펑 소리는 이 팽이를 돌리는 소리였어요.


'위구르인들도 운동을 하는구나!'


사진으로 찍지는 못했지만, 위구르인들도 나와서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어요. 남자도 치고 여자도 치고 있었어요.


이렇게 위구르인들도 아침에 운동을 하게 만든 것은 분명히 중국 정부를 칭찬할 만한 일이었어요. 친한 동생이 이야기한 명언이 있어요. '후진국은 시간 나면 운동을 하고, 선진국은 시간 내서 운동을 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후진국은 돈이 없어서 운동을 하고, 선진국은 돈을 써가면서 운동을 한다' 에요. 동생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말 딱 맞는 말이라 무릎 탁 치며 명언이라고 생각했어요.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한다는 것은 상당히 고차원적인 생각이에요. 이것은 과학적 발견이에요. 사회가 발전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자연발생설로 설명이 불가한 것이에요. 남녀평등이 이루어지고 민족간 평등이 이루어졌다 해서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해요. 건강을 위해 일부러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은 이것을 깨우친 자가 강제로라도 계몽시켜서 하게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에요. 생활체육의 보급만큼은 정말 박수쳐주며 잘했다고 해주어도 되는 것이었어요.


배드민턴을 치고 있는 위구르인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친구가 돌아왔어요.


"숙소 찾자."


친구가 스마트폰으로 아고다에 접속해 숙소를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괜찮은 가격은 전부 중국인 전용이었어요.


"그냥 내가 알아본 곳으로 전화해."

"거기 이름 뭔데?"


숙소 이름을 알려주었더니 금방 검색되었어요.


"여기 지금 예약한다."

"예약하지 말고 거기 전화해봐. 아고다에 얼마로 올라와 있던데 조금 깎아줄 수 있냐고 하고, 지금 가서 짐 맡길 수 있냐고 물어봐."


친구가 숙소로 전화를 걸었어요. 뭐라고 중국어로 열심히 말하더니 전화를 끊었어요.


"야, 가자. 거기 지금 체크인할 수 있대. 그리고 가격도 깎았어."

"오! 잘 했어. 가자."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친구는 바이두 지도를 켜서 숙소 위치를 체크했어요.


morning in kashgar


이제 아침 9시가 되어가고 있었어요. 9시에서 3시간 빼면 오전 6시. 햇살이 딱 6월의 오전 6시 수준이었어요.


road in kashgar


길을 건너기 위해 육교 위로 올라갔어요. 카슈가르의 거리는 한산했어요.


"나 옥팔찌 좀 볼께."


육교 위에서 좌판을 벌여놓고 옥팔찌와 잡다한 것들을 파는 상인이 보이자 친구가 관심을 보이며 거기로 갔어요.


"에이, 없다. 가자."

"그래."

"아, 맞다. 저 상인이 '1위안짜리 물건은 1위안 값어치를 한다'고 말했거든. 이게 중국에서 상당히 유명한 말이야. 실제 중국에서 모든 것은 딱 그 가격만큼 가치를 해. 우리나라처럼 가성비 좋고 그런 거 없어. 그런데 이 말은 주로 장삿꾼들이 가격 가지고 사기칠 때 많이 해."


친구가 육교를 건너며 중국 문화 하나를 더 알려주었어요. 1위안짜리 물건은 1위안 값어치를 한다. 맞는 말이었어요. 그러니 우리가 타고 온, 그리고 앞으로 상하이에서 타고 갈 기차 좌석이 그 모양이지.


"저거 한족 애들 먹는 건데 여기도 파네?"

"뭔데?"

"저 튀긴 꽈배기랑 또장을 아침으로 많이 먹어."

"그래?"


중국 아침식사


거리에서는 아침 식사를 팔고 있었어요. 그리고 식당에서는 열심히 음식을 만들고 있었어요.


카슈가르 만두 가게


만두를 빚고 있는 가게를 지나 예약한 숙소로 가는 길에 딱 이 지역에 어울리는 간판이 보였어요.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글자가 지워져서 잘 알 수 없지만, 그림을 보아하니 치과 간판 같았어요.


카슈가르 숙소


아침 9시 30분. 드디어 카슈가르 인민공원에서 아침에 예약한 숙소에 도착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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