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7박 35일 (2009)2012. 1. 9.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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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 타자마자 가방을 열고 수건과 세면도구를 꺼냈어요. 피곤해서 빨리 씻고 자고 싶었어요. 돌아다니기도 많이 돌아다녔고, 지갑을 잃어버린 것 때문에 그저 빨리 씻고 자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어요.


"먼저 씻고 와요."

"오빠는요?"

"저는 오늘 양말도 빨아야해요. 그러니까 먼저 씻고 와요."


후배가 먼저 세면도구를 들고 화장실로 갔어요. 저는 그동안 일기를 썼어요. 잠시후, 세수하고 양치를 한 후배가 돌아왔어요. 이제 제가 씻으러 갈 차례. 양치하고 세수하고 발 씻고 양말을 빨 준비를 했어요. 신발을 벗고 자야 하는데 제 발냄새로 객실 안을 오염시킬 수는 없었어요.


"혹시 모르니까 문 잠가놓고 있어요."


기차가 별로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배에게 문을 잠가놓고 있으라고 했어요. 후배는 알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후배가 객실 문을 잠는 것을 보고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했어요. 세수를 다 한 후 양말을 벗고 발을 씻었어요. 등을 벽에 대고 한 발로 물 나오는 버튼을 밟고 한 손으로 맞은편 벽을 짚고 한 손으로 한 발을 씻었어요. 매우 기괴하고 힘든 자세였지만 기차 화장실에서 머리 감는 것보다는 나았어요. 기차 화장실에서 머리 감으면 서너 번은 수도꼭지에 머리를 들이박거든요. 발을 다 씻고 양말을 빤 후 객실로 돌아왔어요. 확실히 야간 이동할 때에는 기차가 버스보다 나았어요. 사람이 없으면 누워서 잘 수도 있고 화장실이 있어서 간단히 씻고 잘 수 있었거든요.


"군대에서 하던 짓을 여기서 또 하다니..."

양말을 꽉 짰어요. 손으로 짤 만큼 짠 다음 양말만 열려 있는 화장실 문 밖으로 빼꼼히 내놓았어요. 이러면 탈수가 되요. 적당히 탈수가 되자 양말을 외투 주머니 속에 우겨넣었어요. 그리고 비누로 세면대 안을 닦고 물로 씻어냈어요. 이것은 최소한의 양심이었어요. 최대한 빨리 세면과 빨래를 다 마친 후 세면도구와 비누도 외투 주머니에 우겨넣고 화장실에서 나왔어요.


"문 열어요."


의자에 드러누워 눈 감고 있는 후배. 문을 열라고 했는데 반응이 없었어요.


"시끄러워서 안 들리나?"


문을 두드리며 외쳤어요.


"문 열어요."


그러나 후배는 미동도 없었어요. 아주 깊게 골아떨어졌어요. 일기 쓰고 있다고 했는데 불과 15분 만에 아주 깊게 잠이 들어버린 것이었어요.


"문 열어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어요. 그러나 후배는 아무 반응이 없었어요. 처음에는 조용히 문을 두드리고 문 열라고 부르며 제발 일어나주기를 바랬어요. 그러나 문 앞에서 기다린지 30분이 지나도 후배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아주 평온하게 잘 자고 있었어요.


"아놔...미치겠네!"


시계를 보았어요. 이제 슬슬 국경심사 받을 시각이 되어가고 있었어요. 문제는 여권, 기차표 둘 다 모두 후배에게 맡기고 나왔다는 것이었어요. 물론 여기는 과거 동구권. 당연히 기차가 시간을 정확히 지킬 리는 없었어요. 물론 기차가 국경까지 예정시간보다 훨씬 늦게 도착할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초조해졌어요. 후배는 시간이 갈수록 더 깊게 잠드는 것 같았어요. 이러다가는 진짜 '꿈은 이루어진다'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후배가 국경심사 받을 때까지 잠들어서 국경 직원에게 '제 여권과 표가 저기 안에 있어요'라고 말하며 제발 저 문 좀 열어달라고 싹싹 비는 꿈이 이루어질 것인가!


문을 주먹으로 쾅쾅 두들기고 큰 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했어요.


"문 열어요!"


일어난 것은 후배가 아니라 다른 객실 사람들이었어요. 사람들이 우루루 객실 밖으로 나왔어요.


"아...쏘리...쏘리..."


양쪽에 죄송하다고 영어로 말하며 객실 문 손잡이를 힘껏 잡아당기는 것을 보여주었어요. 당연히 문이 열릴 리 없었어요. 어차피 영어가 잘 안 통하는 지역임을 깨우쳤기 때문에 괜히 영어로 불라불라 하는 것보다 무조건 '쏘리'를 외치며 왜 제가 이 행패를 부리고 있는지 보여주는 게 백만배 더 효과적이었어요. 사람들은 제가 '쏘리'를 외치며 문을 못 여는 모습을 보자 알았다는 듯 별 말 없이 객실 안으로 들어갔어요.


"아...진짜 미치겠네! 야! 문 열어!"


소리치며 주먹으로 문을 쾅쾅 내리쳤지만 후배는 오히려 더 잘 자는 거 같았어요.


"아놔...진짜 돌아버리겠네."


창문을 열고 바람을 쐬었어요. 정말 문을 부수지 않는 한 후배가 잠에서 깨어날 것 같지는 않았어요. 잠시 바람을 쐬다가 다시 문을 두드리고 소리치기 시작했어요.


"야, 임마! 문 열라니까!"


다시 문을 열심히 주먹으로 내리치며 소리쳤어요. 이건 완전 국제 민폐. 사람들이 복도로 나올 때마다 '쏘리'를 연발했어요. 사람들이 다행히도 제가 왜 그러는지 알고는 별 말 하지 않고 넘어가 주었어요.


문을 두드린지 한 시간이 지났어요. 정말 지성이면 감천이고 낙숫물은 댓돌을 뚫는다는 옛말이 맞는 것인지 열심히 문을 두드리고 소리치자 후배가 잠에서 깨어났어요. 후배는 눈을 뜨고 왜 문이 시끄러운가 바라보는 것 같았어요. 순간 저와 후배의 눈이 딱 마주쳤어요. 후배는 깜짝 놀라며 부리나케 문으로 달려와 문을 열어 주었어요.


후배에게 지금 뭐하는 거냐고 화를 냈어요. 후배는 울면서 잘못했다고 했어요. 이러니 화를 더 낼 수도 없었어요. 울지 말라고 하고 앞으로 다시는 이러지 말라고 했어요. 마구 화를 내고 싶었지만 꾸욱 참고 의자에 드러누웠어요. 정말 최악의 하루라고 생각했어요. 잠시 후, 국경심사가 시작되었어요. 의자에서 일어나 별 일 없이 국경심사를 받은 후 잠을 청했어요.


다시 세르비아에 들어왔어요. 전날 기차에서 지갑을 도난당했기 때문에 문을 걸어잠그기는 했지만 쉽게 깊은 잠에 빠지지 못했어요. 자다가 깨서 곰곰이 말도 잘 안 통하는 베오그라드에서 어떻게 숙소를 찾을까 고민하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어요.


거주지 등록!


세르비아는 거주지 등록을 해야 하는 국가. 그런데 어떻게 거주지 등록을 해야 하는지 정보가 없었어요. 숙소를 찾는 문제보다 이게 더 중요한 문제였어요. 숙소를 찾는 것보다 당장 거주지 등록하는 것이 더 문제였던 것이 혹시나 거주지 등록 때문에 문제가 생겨서 나중에 세르비아 입국시 문제가 생긴다면 경로가 최악으로 꼬이기 때문이었어요. 보통은 벌금 물고 끝난다고 했지만 이것도 나중에야 안 것이고, 이때만 해도 거주지 등록이 의무라는 것 밖에 몰랐어요. 가뜩이나 코소보 입출국 도장이 찍힌 여권을 들고 다녀서 세르비아 국경심사 받을 때마다 조마조마했는데 여기에 거주지 등록까지 어기면 정말 최악이었어요. 왜 세르비아를 통하지 않은 입출국 기록이 문제가 되지 않았는지 몰라요. 이건 세르비아 입장에서는 분명 엄연한 밀입국 행위이고, 이 기록이 있으면 입국거부한다고 했거든요. 추측컨데 코소보 입국 도장과 출국 도장은 여권 맨 뒷장에 흐릿하게 하늘색으로 찍혀 있어서 그런 거 아닌가 싶기도 했어요. 기차에서의 입출국 심사는 약식 심사라고 봐도 될 정도였어요. 여권과 기차표  받아서 휴대용 기기로 그 자리에서 바로 작업하고 몇 장 휙휙 넘겨본 후 도장 철컹 찍어주고 끝이었어요. 아마 그래서 잘 넘어간 것이 아닌가 싶었어요. 아니면 그냥 봐주었거나요. 하지만 거주지 등록을 어긴 것이 국경에서 적발되면 분명히 출국 심사를 꼼꼼히 할 테고, 그때는 코소보 입출국 기록이 문제가 될 수도 있었어요.


'티라나 가서 1박 해야겠다.'


거주지 등록 문제 때문에 남은 방법은 하나. 베오그라드에서 물가가 가장 저렴했던 티라나로 가서 거기서 쉬는 것이었어요. 거주지 등록과 숙박 시설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 떠오른 대안은 이것 밖에 없었어요.


기차가 베오그라드에 도착했어요. 후배에게 문제를 설명해 주었어요. 베오그라드에서 1박 하고 싶기는 하지만 여기는 거주지 등록 문제가 있고, 아주 기초적인 영어도 제대로 안 통하는 이곳에서 거주지 등록같이 매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 제게 없다고 하자 후배도 티라나로 가자고 했어요. 그래서 기차역 바로 옆에 있는 버스터미널로 갔어요.


티라나행 버스 없어!


베오그라드에서 티라나까지 가는 버스가 없었어요. 베오그라드에서 알바니아까지 가는 방법은 오직 두 개 밖에 없었어요. 마케도니아 스코페로 가서 티라나로 들어가는 방법과 코소보 프리슈티나로 가서 티라나로 들어가는 방법이었어요. 스코페에서 티라나로 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굳이 모험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그래서 프리슈티나로 가서 티라나까지 가기로 했어요. 베오그라드에서 프리슈티나까지 가는 버스는 21시 30분에 있었어요.


가방을 기차역 수하물 보관소에 맡기고 베오그라드를 돌아다닐까 했지만 여기는 이미 다 본 도시. 거리에서 느적거리며 쉬는 것도 문제였어요. 카페에서 수다 떨며 버티는 것도 한 두 시간이지 하루 종일 그럴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이미 다 본 도시에서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혹시 남쪽으로 가면 프리슈티나 가는 버스가 더 많지 않을까?'


다행히 이때 제가 알고 있는 세르비아의 도시는 총 3개 있었어요. 첫 번째는 당연히 수도인 베오그라드. 두 번째가 세르비아 북부에 있는 세르비아 제 2의 도시 노비사드, 세 번째가 세르비아 남부에 있는 제 3의 도시 니슈였어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니슈로 가자! 거기 가면 아마 차가 있을 거야!'


그래서 아침 9시 버스를 타고 니슈로 바로 이동했어요.


13시 30분. 니슈에 도착했어요.



여기는 니슈. 세르비아 키릴 문자로는 Ниш, 세르비아 라틴문자로는 Niš. 네이버 백과사전에는 '니시'로 나와 있어요. 참 한국어로 표기하기 애매한 도시에요. 이건 fine를 '파인'으로 쓸지 '화인'으로 쓸지 고민하는 것보다 어려운 문제. 발음은 전혀 어려운 도시가 아닌데 막상 한국어로 쓰려고 하면 참 고민되는 도시에요. 니슈? 니시? 니쉬? 일단 저는 '니슈'로 쓰기로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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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좀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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