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고도 길었던 이야기 (2015)

길고도 길었던 이야기 - 01 인도네시아어라니요, 수강신청을 잘 했었어야죠

좀좀이 2015. 6. 1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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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단추를 잘못 꿰면 다 망한다.


매우 흐렸던 그날, 제주국제공항.


"이만 갈께요."


그렇게 떠나고 싶어했던 제주도였는데 막상 떠나려니 무언가 울컥하는 것이 올라오려 했어요. 그렇게 꿈꾸어왔던 서울! 이 날이 오기를 얼마나 갈망했는지 몰랐어요. 항상 떠나고 싶어했던 제주도. 드디어 대학을 서울로 진학하며 떠날 수 있게 되었어요. 이 날을 위해 얼마나 긴 시간을 기다려야했단 말인가! 마지막으로 서울땅을 밟아본 것이 고등학교 1학년 11월에 있었던 수학여행.  그 이후 단 한 번도 비행기를 타보지 못했어요. 바다는 그저 속을 갑갑하게 만드는 원망스러운 장벽.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그렇게 탈출하고 싶어했던 제주도에서 이제야 드디어 탈출한다는 생각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어요.


하지만 친구들 중 그 누구도 서울로 대학교를 오지 못했어요. 처음 집에서 나와 혼자 살아보는 것이다보니 모든 것이 막막했고,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어요. 게다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도 가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 저 혼자였어요. 뭐가 뭔지도 몰랐고, 그렇다고 뭐가 뭔지 물어볼 사람도 없었어요. 아는 것이라고는 학교 위치와 입학식 날짜. 그나마 다행이라면 논술을 치루기 위해 지하철을 타본 적이 있어서 지하철은 탈 줄 안다는 것 정도였어요.


입학식날. 혼자 입학식에 갔는데 아는 사람이 당연히 하나도 없었어요. 제가 입학한 학과 팻말이 있는 곳에 줄을 서서 입학식 참석하고, 수강신청을 하기 전에 시간이 조금 많이 남아 있어서 간단히 밥 먹고 거리를 배회하다 오후에 있는 신입생 수강신청 설명회를 갔어요. 제가 속한 학과가 속해 있는 단과대학을 위한 수강신청 설명회는 오후에 잡혀 있었어요.


"수강신청 설명은 한 시간 동안 진행될 것이고..."

"지금 다른 과는 수강신청 할 수 있는 거죠?"

"예."

"그러면 어떻게 해요? 자리 다 차버리잖아요."


제 뒤에 앉아 있던 다른 과 학생들이 진행자에게 격하게 따지기 시작했어요.


'와...서울 사람들은 듣던대로 자기 주장 확실히 하는구나!'


속으로 깜짝 놀랐어요. 고향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어요. 참고로 저는 교사들의 학생에 대한 체벌 규제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때 학교를 다녔어요. 초등학교 1학년때 이미 교사들의 따귀와 발길질, 초등학교 5학년 때에는 어지간한 기합은 다 받아본 상태였어요. 한강철교니 원산폭격이니 하는 것은 모두 초등학교때 수시로 경험해보았던 것. 당연히 저런 행동을 할 생각 자체를 할 수 없었어요. 저렇게 했다가는 '피떡'이 되도록 맞았을 테니까요. 대학생이 되어서 저렇게 행동한 것인지, 다른 지역은 원래 학생들이 어른에게 저렇게 당당히 자신의 뜻을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잘 몰랐지만, 어쨌든 처음 겪는 문화 충격이었어요.


격하게 따진 학생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진행자는 화난 티를 팍팍 내며 학번 받아서 수강신청 하러 가라고 말했어요.


학번을 받아 근처 피씨방으로 갔는데 자리가 남아있을 리가 없었어요. 학교에서 점점 멀어져만 갔지만, 자리가 있는 피씨방은 보이지 않았어요. 한참을 걸어서 겨우 도착한 피씨방에 들어가 수강신청편람을 펼치고 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했어요.


망했네.


시간표를 짜는데 아무리 잘 짜려고 해도 좋은 시간표가 나오지 않았어요. 좋은 시간, 왠지 재미있어 보이는 과목은 전부 자리가 꽉 차 있었어요. 의욕은 넘쳐서 한 학기 최대 이수 가능 학점인 20학점을 다 듣고 싶은데, 전공 수업 신청 이후 더 신청할 수 있는 과목 자체가 거의 보이지 않았어요. 게다가 이때 아무도 몰랐고,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에 당연히 몰랐던, 그리고 반드시 알아야만 했던 것이 하나 있었어요.


대학교는 점심 시간이 없다.


대학교에는 점심 시간이 따로 없기 때문에 공강 시간을 만들어서 점심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자체를 몰랐어요. 당연히 고등학교때처럼 4교시 이후 1시간 정도 점심시간이 있고, 그 이후에 5교시가 시작되는줄 알았어요. 시간표를 꾸역꾸역 만들어나가는데 이 점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이 점을 설령 알았다 치더라도 괜찮아 보이는 시간대, 괜찮아 보이는 수업은 전부 자리가 없었어요.


'에라, 학교 오기도 힘든데 월요일 8연강 만들어야지.'


8교시 수업이라지만 고등학교에서 흔히 하던 것이었잖아? 아침 7시 반까지 등교해서 아침 8시 0교시 수업부터 오후 4시 50분 마지막 보충수업까지 이어지던 나날들. 이거 또 못할 것은 없어. 그냥 월요일 하루 고생하면 돼.


월요일 시간표를 8연강으로 만들기로 결심하자 그 다음부터는 의외로 수강신청이 술술 풀릴 것 같아 보였어요.


어떤 수업을 들을까?


순간 교양과목 중 '인도네시아어'가 보였어요.


"이왕 하는 거 특별한 거 해볼까?"


어렸을 적부터 영어를 제외하고 다른 외국어들을 공부해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집에서는 영어를 못하는데 영어부터 공부하라고 하며 다른 외국어 공부하는 것을 전혀 도와주지 않았어요. 더욱이 이때는 다양한 외국어 학습 교재가 출판되던 시절도 아니었고, 하필이면 제가 살던 곳은 제주도였어요. 영어 말고 새로운 다른 외국어를 공부하고 싶은데 그나마 혼자 공부해볼 수 있는 거라고는 일본어 정도였어요. 그러던 차에 '인도네시아어'를 보자 딱 '이거다!' 라는 느낌이 왔던 것이었어요.


여담이지만, 이후 저는 타의적으로 8연강 매니아가 되었고, 8학기 다니는 동안 8연강이 있었던 학기가 4학기였어요. 6연강 이상 연강이 포함된 경우로 - 즉 수업 듣느라 점심 못 먹는 날로 범위를 조금 더 확대해보면 딱 한 학기 외에는 전부 수업 듣느라 이른 점심도, 늦은 점심도 못 먹는 날이 꼭 하루는 있었어요.


"너 시간표 어떻게 짰어?"


첫 전공 시간 들어갔을 때, 그제서야 알게 된 동기들이 제게 시간표를 어떻게 짰냐고 물어보았어요.


월요일 1,2,3,4,5,6,7,8

화요일 1,2,7,8

수요일 6,7,8

목요일 6,7,8

금요일 2,5,6


"너 시간표 완전 망했구나. 그런데 8연강? 너 괜찮겠어?"

"응."

"8연강이면 밥 못 먹어!"

"응."


속으로는 매우 깜짝 놀랐지만 알고 있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어요.


"너 이러면 시험때 엄청 빡셀텐데..."

"괜찮아."

"그런데 이건 뭐야? 인도네시아어? 너 학점 망칠텐데..."


동기들도, 선배들도 제 시간표를 보며 수강신청을 심각하게 망쳤다고 걱정했어요.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그때 들은 생각은 오직 '아...대학교에서는 점심 시간을 따로 보장해주지 않는구나' 라는 큰 깨우침 뿐이었어요. 하지만 점심 안 먹는다고 무슨 큰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그냥 하루 안 먹으면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어요. 사실 이때 궁금했던 것은 1학년 수업하는 강의실에 왜 '선배'라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수업을 같이 듣고 있냐는 것이었어요. 그 이유는 1학기 중간고사가 끝나고야 알았어요. 대학교에는 '재수강'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요.


어쨌든 주변의 만류와 걱정을 모두 뿌리치고 인도네시아어 수업을 들었어요.



이거 꽤 쉬운데?


일단 발음은 쉬웠어요. 라틴 알파벳을 쓰기 때문에 발음에서 크게 어려울 것 까지는 없었어요. 주의할 점이라면 h 의 발음이 묵음이 될 때가 있고 소리가 날 때가 있다는 정도.


동사변화 없음, 격변화 없음.


어? 그러면 단어만 외우면 되는 거야?


8연강은 그 자체가 힘들다기 보다는 1교시 때문에 힘들었어요. 처음 경험하는 1시간을 가뿐히 뛰어넘는 통학시간이 주는 피로는 누적만 되고 풀리지 않았어요. 그러다보니 아침에 1분이라도 더 자기 위해 발악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희생시키기 만만한 것이 바로 아침 식사였어요. 아침을 안 먹으니 8연강이 있는 날은 당연히 점심도 먹을 수 없었고, 학교 끝나면 집에 돌아가서 저녁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빨리 과제하고 잠이나 자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어요. 이때 깨달았어요. 식욕과 수면욕 중 앞서는 것은 수면욕이에요. 배가 고파서 잠을 못 자는 게 아니라 잠이 별로 오지 않기 때문에 배가 고픈 거에요. 이런 생활 속에서 밥을 먹었다는 것조차 잊고 학교와 잠만 반복하다 3일을 굶은 적도 몇 번 있었어요. 이때마다 먹은 거라고는 인스턴트 커피 뿐이었어요.


게다가 8연강 중 1교시부터 4교시는 전공 수업. 교수님들이 깐깐하셨기 때문에 잠을 청할 수도 없었어요. 이러니 5교시 인도네시아어 수업을 들으러 가면 뇌의 절반은 이미 가수면상태. 나머지 뇌의 절반은 그냥 간신히 정신줄 부여잡고 있는 상태. 여기에 인도네시아어 수업을 하시는 교수님의 목소리는 작고 낮은 목소리였어요. 마이크도 없이 수업을 하셨기 때문에 교실 중간에 앉으면 그냥 자장가일 뿐이었어요.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후루룩 훑어보니 인도네시아어는 격변화도 동사변화도 없는 언어였어요. 책 구성도 매우 잘 되어 있었어요. 그냥 책 보며 혼자 독학해도 되겠다고 판단했어요. 출석이야 어쨌든 할 테고, 와서 자든 말든 태도 점수를 따지는 것도 아니었으니 시험만 잘 치면 끝이었어요. 5교시에 들어와서 출석 부를 때 출석만 하고 6교시까지 쭉 자다가 7교시 들어가도 별 상관 없겠구나!


문제는 외워야할 단어가 너무 많았다는 것. 이것에 대해 별 신경을 안 쓰고 있었어요. 이게 쉬우면 쉬운 대로 안 좋은 점이 있어요. 독학할 때야 쉬우면 좋지만, 수업으로 들을 때 쉬우면 쉬운 것대로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무엇이었냐하면, 한 주에 한 과씩 나가는데, 한 과에 외워야할 단어가 기본 30~40개였다는 점이었어요. 일주일간 꾸준히 외운다면 30~40개를 못 외울 것도 없었어요. 하지만 전공 언어도 공부해야 했고, 너무 피곤해서 인도네시아어 책을 펼치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어요.


그래도 중간고사는 그럭저럭 보았어요.


중간고사를 넘긴 후, 저의 인도네시아어 수업 듣는 태도는 아주 파탄으로 치달았어요. 그래도 중간고사 때까지는 가끔 책을 펼쳐서 단어도 외우고 문법 공부도 하고 해서 괜찮았는데, 중간고사를 넘긴 이후에는 그야말로 저의 인도네시아어 수업에 대한 태도는 쓰레기가 되어 버렸어요. 책을 안 펼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수업시간은 2시간 쉬지 않고 잠만 잤으며, 심지어는 과제를 해서 갔는데 앞으로 걸어나가 제출하기 귀찮아서 제출하지 않기까지 했어요. 그리고 다가온 기말고사. 단어만 외우면 된다고 자신만만하게 큰소리쳤는데, 외워야할 단어가 몇백 개. 게다가 격변화도, 동사변화도 없는 언어라면 '문형'이 매우 중요해져요. 그런데 막연히 '단어만 외우면 된다'고 추측만 하고 있었을 뿐, 이때는 경험이 너무 적어 이런 언어는 문형을 익히고 외워야한다는 생각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어요. 결국 시험은 포기. 성적은 C+ 받았고,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bibit 가 씨앗이라는 것 뿐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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