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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기적과 저주 60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2장 10화

시위가 진압된 지 며칠 지났다. 모든 것이 조용하고 평온하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모두가 자기 할 것을 하며 산다. 나와 라키사, 이고도 바뀐 것이 없다. 학교에 내려진 폐교령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아침부터 서점에서 책을 읽고 공부하는 일상.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이라면 이 일상이 너무나 다르게 보이겠지. 그러나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우리들에게는 달라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주변이 어수선하지 않아서 좋다고 해야 할까? 모두가 시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거리에는 경찰과 군인이 쫙 깔려 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거리에 치안 유지를 위한 병력이 깔려 있는 것과 날씨를 제외하면 바뀐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치롤라 병문안 갈 건데 너희도 갈래?" "치롤라요?" 이고가 갑자..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2장 09화

확실히 시위가 크게 발생하니 책 수거할 일이 확 줄어들었다. 책을 볼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전부 시위에 신경이 팔려 있어서 그런 것일까? 시위가 시작된 이후부터 책을 빌려가는 사람이 없다. 책을 사가는 사람이야 원래 별로 없었고 대부분 책을 빌려가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나마도 없으니 서점에 일이 정말 없다. 가만히 앉아있기 민망할 정도다. 일이 너무 없어서 이렇게 있다가 돈을 받아가도 되나 싶을 정도다. 이런 날이 계속 있으면 좋을 것이 없다. 그래도 가끔 책 수거하러 돌아다니기도 하고 다른 일도 있고 해야 이렇게 쉬는 날이 있을 때 운 좋은 날이라고 하지, 대놓고 계속 일이 아무 것도 없으니 신경이 안 쓰일 래야 안 쓰일 수 없다. 지금 정도라면 이고가 나와 라키사 모두 해고하고 혼자 서점을 보아도 충분하..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2장 08화

학교가 폐교되었으니 아침에 학교에 가야 할 필요가 없다. 느긋하게 일어나서 우물가에 가서 세수를 하고 돌아왔다. 정상적인 나날이었다면 지금쯤 학교에 가고 있어야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래야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학교에 가봐야 시위하고 있는 애들 뿐이겠지. 지금은 이른 아침이니 시위하는 애들도 얼마 없으려나? 수건을 벽에 걸어놓고 빗자루를 들고 서점으로 들어갔다. '앞으로 어떻게 하지?' 빗자루로 쓸고 있는 이 먼지와 함께 이 고민도 사라졌으면 좋겠다. 그러나 빗자루로 먼지를 쓸면 먼지만 쓸려나갈 뿐이다. 고민은 그대로 있다. 먼지가 말한다. '나를 치워봐야 내일 새로운 먼지가 쌓일 거야.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먼지가 아니야. 원래 있던 먼지가 제자리로 돌아온 것일 뿐. 네 고민도 마찬가지. 무슨 일이 있어..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2장 07화

라키사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서 이 자리를 최대한 빨리 떠야 한다. 여기는 위험하다. 위험하기 때문에 위험한 거다. 위험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타슈갈, 이거 꿈이지?" "빨리 가자!" 라키사의 손을 꽉 움켜쥐고 서점을 향해 달렸다. 달려가다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학교에서 계속 검은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아오르고 있다. 그렇게 한참 달렸다. 숨이 가빠서 더 달리지 못하겠다. 자리에 멈추어섰다. 라키사가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상황이 끝나지 않아. 분명 꿈이라면 이렇게 숨이 가쁘고 괴롭지 않겠지. 이것은 현실이다. 받아들일 수 없지만 현실이다. 머리 속이 하얗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괜찮아?" 이제야 내가 라키사의 손을 계속 쥐고 있다는 것을 알았..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2장 06화

벌써 개학한지 일주일이다. 학교는 하루가 다르게 시끄러워져갔다. 개학한 다음날부터 학생들끼리 편을 갈라 언쟁을 하기 시작했고, 점점 양쪽에 가담하는 학생들이 늘어만 갔다. 책을 다 읽은 학생들이 늘어나서 이런 현상이 더욱 격해지는 것일 거다. 이제는 이 언쟁에 참여하지 않는 학생이 없을 지경이다. 내가 들어가는 강의실에서 그 언쟁에 참여하지 않는 학생은 오직 나와 라키사 뿐이다. 나도 그 언쟁에 가담하고 싶다. 하지만 개학한 다음날 서점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라키사의 말을 들은 후 아무 말 하지 않기로 했다. 라키사 말대로 어느 날 갑자기 상황이 바뀌면 어떻게 해? '오늘도 학교 가면 또 애들 언쟁하는 꼴 봐야겠네. 그나저나 라키사는 엄청 속상해하는 거 아냐?' 나야 지난 학기 꼴등으로 시험을 통과했다. ..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2장 05화

1115년 9월 1일. 드디어 개학날이다. 방학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시험에서 합격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개학이라니 시간은 전혀 균일하게 흐르지 않나 보다. 그래도 이렇게 개학을 맞이하고 등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어디야? 만약 낙제를 했다면 이런 날을 맞이하지 못했겠지. 빨라야 내년 봄에나 '개학'이라는 것을 맞이했을 거다. '아다비아는 오늘 학교 올까?' 아다비아는 뮈젤로 교육받으러 갔다. 아마 오늘 등교할 리가 없을 거다. 거기 연구원이 되었다는 것은 아예 거기 학생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중앙학문연구소를 다니면서 에드자 대학교도 다닐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 불가능할 거다. 게다가 그 교육을 중앙학문연구소에서 받는 것도 아니고 뮈젤에서 받는다고 했으니 오늘 등교한다는 ..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2장 04화

계단 위에 한 여자가 있다. 나를 향해 손짓을 하며 내게 오라고 한다. 계단을 한 걸음 올라갔다. 여자는 한 걸음 뒷걸음질쳤다. "왜 뒤로 가?" "나는 너를 향해서 한 걸음 다가간 거야." "그래?" 다시 계단을 한 걸음 걸어올라갔다. 이번에는 여자가 세 걸음 뒷걸음질치며 올라갔다. "너 왜 계단을 올라가?" "나는 지금 너한테 가고 있는 거야." "그게 뭐 나한테 오고 있는 거야?" "너한테 가고 있는 거라니까!" 여자는 나에게서 멀어졌는데 오히려 나와 가까워졌다고 소리쳤다. "그러면 거기 가만히 있어! 내가 너를 향해서 달려갈께!" "응! 빨리 와!"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여자는 분명히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여자와의 거리가 전혀 좁혀지지 않는다. 나와 여자 사이의 계단 난간 수가 하나도 줄어들지 ..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2장 03화

벌써 8월 15일이구나. 방학이 이제 보름 정도 남았다. 예습을 많이 하지 못했는데 시간은 계속 빠르게 흘러간다. 날씨만 보면 아직 개학이 멀고도 먼 것 같지만 날짜는 하루하루 계속 흘러간다. 이고는 점심 먹고 인쇄소를 돌아보고 와야겠다며 지게를 짊어지고 나갔다. 라키사는 반납하지 않은 책을 수거하러 나갔다. 서점에는 나 혼자.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이 계속 머리 속에서 맴돈다. 그 책을 정말 수업 시간때 배울까? 날이 더운 만큼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아직 라키사는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을 읽지 않았다. 그 책이 서점 안에 있는 것조차 모르겠지. 당연한 거다. 나도, 이고도 라키사에게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 그리고 키란 연구소에서 출간한 키란 전기가 서점에 있다고 말해주지 않았..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2장 02화

얼굴이 답답하다. 누가 기름을 얼굴에 덕지덕지 발라놓은 것 같다. 세수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아직 밖이 어슴푸레한 것으로 보아 새벽이다. 깊게 잤다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오래 자지는 못했다. 이 더위 때문에 오랫동안 깊게 자는 것은 무리다. 잠을 깨든 말든 일단 세수를 하고 싶다. 얼굴이 답답해서 깔끔하게 세수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수건을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별로 더운 것 같지 않은데 왜 이렇게 얼굴이 답답하지?" 선선한 새벽 공기가 온몸을 자극한다. 커튼이라도 활짝 걷고 잘 걸 그랬나? 방 안에 나와 이고가 있으니 어지간해서는 도둑이 들어올 것 같지 않은데. 도둑보다 모기 때문에 커튼을 치고 자기는 하지만, 창문을 닫고 자니 방이 푹푹 찐다. 모기 때문에 잠을 설치는 것이나 더..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2장 01화

손님이 없는 조용한 서점. 근무 시간이라 자리에 앉아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이고가 나를 불렀다. "타슈갈, 너 주변에 괜찮은 애 하나 있냐? 저주술 타령 하는 애 말구." "괜찮은 애? 어떤 애?" "아무래도 서점에 일할 직원 하나 더 있어야 할 거 같아서." 서점에서 일할 직원? 순간 라키사가 전에 내게 이야기한 것이 떠올랐다. 시험을 치고 벤치에 앉아 있을 때 내 옆에 와서 혹시 서점에 일자리가 생기면 자기에게 알려달라고 했다. 그때 알려주겠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이 서점에서 직원을 하나 더 뽑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당장 지금 나나 이고나 할 일이 없어서 자리에 앉아서 자기 할 거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그런데 이고가 갑자기 직원으로 뽑을 만한 애가 없냐고 물어보았다. ..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1장 20화 (1장 종료)

달력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1115년 7월 20일. 시간 정말 잘 가는구나. 방학이 되니 시간이 학교 다닐 때보다 훨씬 더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서 혼자 책 몇 줄 보다보면 벌써 점심먹을 때가 되고, 점심 먹고 잠시 멍때리며 쉬다보면 일해야 할 시간이 된다. 그 다음부터는 평상시와 같은 시간의 흐름. 일이 끝나면 학기중과 달리 마음놓고 푹 잔다. 그리고 개운하게 아침을 맞이하지. 방학이 시작된지 벌써 보름도 넘게 지나갔구나. 책 좀 열심히 봐야겠다. 이러다가 진짜로 책 얼마 보지도 못했는데 내일이 개학이라고 우는 일과 목도하겠다. 누군가 서점 문을 거칠게 열었다. 이 아침부터 누구야? 이고 옆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문 여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서점에 어떤 놈이 이렇게 문을 부서지라고 ..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1장 19화

다음 학기부터는 아다비아가 내 공부를 도와줄 수 없다. 정말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아다비아에게 큰 소리 치기는 했지만 솔직히 자신없다. 이제라도 정말 마음 잡고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 이번 학기는 어떻게 넘겼다지만 다음 학기는 정말로 혼자 해야 하잖아. 감비르도 없고 아다비아도 없다. 책을 펼쳤다. 아드라스어와 대륙공통어를 공부해야만 한다. 이번처럼 기적이 또 일어날 보장이 없으니까. 기적이 두 번 연속 일어날 리는 없겠지. '그나저나 아다비아는 그저께 왜 화났지?' 그저께 집에 돌아온 후 계속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아다비아는 대체 그날 왜 화가 난 것일까? 걔 성격이 조금 이상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날은 정말 유난히 더욱 이상했단 말이야. 갑자기 내 손을 잡지를 않나, 혼자 신나서 팔짝팔짝 뛸 것 ..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1장 18화

드디어 그 날이 찾아왔다. 오늘은 1115년 7월 14일. 드디어 성적이 공개되는 날이다. 분명히 나는 합격할 거야. 수백번을 마음 속으로 되뇌였지만 과연 이것이 현실이 될까? 마음 한 켠에는 계속 불안한 마음이 자리잡고 있다.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나를 아는 척 하지 않고 철저히 무시했던 교수와 학생들. 그 모습들은 계속 내게 어차피 떨어질 거 실낱같은 희망을 갖지 말라고 귀에 외쳐대고 있다. 그 정도로 너를 계속 무시했다면 이제 좀 알아들어. 너는 절대 합격할 수 없어. 괜히 되도 않는 헛된 희망 부여잡지 말고 이제부터라도 편히 현실을 직시해.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귀로, 머리로 이 소리가 올라온다. 옷을 입고 서점으로 들어갔다. "야, 너 오늘은 일 쉬어." "오늘? 왜?"..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1장 17화

덥다. 아무리 부채질을 해도 시원하지 않다. 부채질로 만든 바람조차 뜨겁다. 가만히 있어도 더운데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더울까? 그래도 나는 실내에서 일하고 있으니 다행이다. 창밖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과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저 사람들은 정말 엄청나게 덥겠지? 이렇게 실내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더운데. 그래도 저 사람들보다는 내 처지가 낫다는 생각을 하며 참아보려 하지만 더운 것은 더운 거다. 지금 에드자에서 어디에 있든 다 덥겠지? 냇가에 있는 사람들은 덜 더울 건가? '새벽에 비라도 내릴 것이지.' 비라도 한바탕 퍼부었으면 좋겠다. 비가 퍼붓고 나면 더위가 많이 사그라들텐데. 이왕이면 새벽에 말이야. 정확히는 서점 문 닫은 후부터 서점 문 열기 전까지 그 사이에 비가 한바..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1장 16화

아침에 학교를 갈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서점에서 일을 해야 할 필요도 없다. 방학이 시작되자 너무나 여유로운 아침도 같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바로 방학이라는 건가! 모처럼 아침 늦게까지 잤다. 자리에서 일어나 물 한 컵을 마셨다. 미지근한 물이 목구멍을 부드럽게 어루어만지며 아래로 내려간다. 아직 잠기운이 남아 있다. 다시 드러누워서 잠을 잘까? 안 일어나도 되잖아? 아직 내 일이 시작될 시간은 멀었다. 일어날 필요가 없다. 드러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오늘부터 교수가 채점을 시작할까? 교수가 낙제만은 안 주었으면 좋겠는데. 시험 통과할 거야. 그건 이제 그만 생각하자. 천장의 나뭇결을 유심히 쳐다본다. 나뭇결이 나의 시각을 자극한다. 나뭇결은 천천히 여러 개의 선으로 분리되어 간다. 검은..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1장 15화

이고가 흔들어 깨우지 않았다면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을 거다. 이고가 세수하라고 물을 길어왔다. 이고가 갑자기 왜 이러지? 무슨 계시라도 받은 건가? "야, 시험 잘 봐라!" "고마워. 나 오늘 시험친다고 물까지 떠온 거야?" "어. 잠은 똑바로 깨고 시험쳐야 할 거 아냐? 전력을 다 해서 시험쳐도 될까 말까잖아." 이고가 떠온 물이 담긴 양동이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잠기운이 조금 가신다. 오늘 시험 잘 치를 수 있을까? 아다비아도, 라키사도 모두 내가 간절히 믿고 노력하면 분명히 낙제만은 피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이렇게 시험을 치러 갈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다비아와 라키사 덕분이다. 아다비아가 거의 매일 서점에 와서 내 공부를 도와주었고, 라키사가 나와 같이 서..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1장 14화

학교로 가기 전 달력을 보았다. 오늘은 1115년 6월 23일. 이제 시험이 딱 일주일 남았구나. 심장이 굳어간다. 단단해져서 아래로 떨어져 내릴 것 같다. 일주일. 저 시험이 끝나면 나의 이번 학기도 끝난다. 시험을 치루는 것은 안 두렵다. 그 이후가 두려운 것이지. 지금은 택도 없는 일말의 희망을 갖고 매일 수업에 들어가지만, 시험이 끝나면 그 희망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거다. 희망이 사라지고 보지 않으려 애쓰던 현실만 남겠지. 이렇게 눈을 비비며 아침에 학교를 향해 걸어갈 날도 얼마 안 남았다. 시험이 끝나면 다음 학기에도 이렇게 아침에 걸어서 학교를 갈 수 있을지 결정이 날 거다. 나도 알아.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이 이제 곧 여기 올 거라고 신호를 보낼 즈음에야 다시 이 ..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1장 13화

모처럼 바하르가 서점에 놀러왔다. "타슈갈, 뭐해?" "보면 몰라? 일하잖아." "그게 일하는 거야?" "뭔 말이야?" "그냥 자리에 앉아 있잖아." "야, 이것도 일하는 거야." 바하르가 웃는다. 나도 같이 웃었다. 바하르가 과자를 꺼냈다. "오는 길에 샀어. 여기 맛 괜찮아." "고마워." 바하르가 가져온 과자는 보자마자 꽤 좋은 과자 같아보였다. 살짝 갈색 빛이 도는 둥근 과자였다. 지름이 검지 손가락 정도 크기였다. 과자를 한 입 베어물었다. 안에 향긋한 사과 잼이 들어 있었다. 과자도 잘 구워서 적당히 바삭하고 고소했다. 이런 것은 또 어디에서 파는 거지? 내가 본 수레정거장과 키란 동상이 에드자의 전부가 아니구나. "이고, 이거 먹어." 이고에게 과자 하나를 주었다. 이고가 한 입 먹었다. "..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1장 12화

"타슈갈, 이 문장 해석할 수 있어?" 이거는 대충 무슨 말인지 알겠다. 꾸준히 공부하다보니 이제 조금씩 책을 읽을 수 있다. "단어는 의미와...이건 잘 모르겠어. 단어는 의미와 이것으로 구성된다고 하는 거 같은데." "이 단어는 '외형'이라는 뜻이야. 이제 이 문장 이해돼?" "글쎄...단어가 의미와 외형으로 구성된다고?" "응. 우리가 보고 있는 이것은 '책'이지만 마딜어와 아드라스어 단어는 서로 다르지?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물체를 네가 말할 때 의미는 이 '물체'가 되는 거고, 외형은 네가 발음하는 소리가 되는 거야. 이해되니?" "응." "너 아드라스어 정말 많이 늘었어!" "고마워. 네 덕분에 이 정도까지 할 수 있게 되었어." 아다비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활짝 웃었다. "나 정말 대단한 것 ..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1장 11화

아다비아는 오늘 일이 있어서 서점에 못 온다고 했다. 이고는 책을 읽고 있다. 손님들도 오지 않는다. 너무나 조용한 오후. 아다비아가 내 공부를 도와주겠다고 서점에 오기 전까지는 이것이 일상이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들. 창문을 넘어 서점으로 들어오는 햇살. 이렇게 오늘 하루가 지나간다는 느낌이 드는 시간. 나도 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한다. 오늘 본 다음 부분을 본다. 그래도 이제 조금은 알아볼 수 있다. 이렇게 조금씩 좋아지다보면 언젠가는 나도 아드라스어와 대륙공통어를 잘 할 수 있겠지? 언제까지고 아다비아가 내 공부를 봐줄 리 없잖아. 지금은 혼자 이 책을 보는 것이 무리지만 영원히 무리일 리는 없겠지. "그래도 전보다 읽는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이고가 나를 쳐다보다니 웃으며 말했다. "하도 보..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1장 10화

"타슈갈, 같이 가!" 강의실을 나가려는데 아다비아가 불렀다. 비록 수업 끝난 후에 부르는 것이기는 하지만 너무 반갑다. 이 강의실 안에서 나를 불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아다비아가 나를 부르는 일 자체야 거의 매일 있는 일이다. 서점에 내 공부 도와주러 오면 내 이름을 부르니까. 하지만 강의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일은 거의 없다. 교수가 나를 없는 인간 취급하기 이전부터 아다비아는 강의실 안에서 나를 부른 적이 없었다. 꼭 수업 끝나고 감비르와 사이좋게 벤치에 앉아서 담배 뻑뻑 태우며 우리 처지를 한탄하고 있을 때 와서 속을 뒤집는 말을 던지곤 했지. 강의실 애들이 다 나와 아다비아를 번갈아 쳐다본다. 아다비아가 뜬금없이 나를 불러서 놀랐나보다. 나도 놀랐는데 다른 애들이야 오죽하겠냐. 모두의..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1장 09화

"수업 계속 들어가야 하나?"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 모금 깊게 빨았다. 오늘도 역시 교수는 나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학생들 그 누구도 이제 여기에 신경쓰지 않는다. 교실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모두에게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 학교에 오기만 하면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이 하늘에서 내 위로 쾅 떨어진다. 그 투명한 벽이 모든 것을 가로막는다. 나는 밖을 볼 수 있는데 밖에서는 나를 못 본다. 못 보는 건지, 안 보는 건지...정확히는 안 보이는 척이겠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 나 분명 여기 있는데! 내가 나의 존재를 알리는 신호는 투명한 벽 안에서만 맴돌 뿐. 내가 대륙공통어와 아드라스어를 못 하는 것이 투명인간 취급 당해야할 정도로 큰 잘못인가? 진심으로 수업 들어가기 싫다. 한두 번도 ..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1장 08화

"나 인쇄소 다녀온다." "책 주문하게?" "어. 가서 이야기해봐야지. 지금 들고 올 수 있는 것은 바로 들고오구." 이고는 수레와 지게 앞에서 곰곰히 생각에 빠졌다. "왜?" "수레를 끌고갈까, 지게를 짊어지고 갈까 고민중이다." "설마 오늘 책 많이 받아올까? 급한 거 있어?" "아니." "그러면 지게 짊어지고 가. 바로 나갈만한 책만 몇 권 가져오고 나머지는 나중에 한 번에 서점으로 보내달라고 하면 되잖아." "그럴까..."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고민하네. 나 같으면 무조건 지게 짊어지고 간다. 아직 서점에 책이 부족하지 않다. 사람들이 와서 찾는 책이 없는 경우도 별로 없고. 어떤 책이 새로 들어올 지는 잘 모르겠지만 급한 책은 거의 없을 거다. 최소한 내가 근무하고 있는 시간에 서점에 아예 ..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1장 07화

"이고, 뭐해?" "일한다." "아까 하던 거 계속 하고 있어?" "어." 그러고보니 아침에 학교 갈 때 이고가 '오늘은 머리아픈 날이네' 라고 중얼거렸었다. "무슨 일이길래 머리 아파?" "그동안 밀린 도서 구입 목록 쫙 작성하려구." "그거 일 많아?" "어. 한동안 새로 구입하지 않아서. 팔린 책도 꽤 있고 새로 나온 책도 많아서 그것들 참고하면서 정리 한 번 해야 해." 아침에 이렇게 간단히 대화를 하고 학교에 갔다 돌아왔다. 이고는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종이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아침에 머리아픈 날이라고 하더니 진짜 머리가 많이 아픈가 보다. 이고 표정을 살펴보았다. 표정이 썩 밝지 않다. 책상 위에는 지금까지의 대출 목록, 판매 목록, 도서 카드가 쫙 펼쳐져 있다. 저거 지금 잘못 건드렸다..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1장 06화

"너 오늘 뭐하냐?" "나?" "응. 오늘 서점 문 닫잖아." "글쎄?" 이고가 며칠 전에 오늘 서점 문을 닫을 거라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 딱히 특별한 일이 있어서 문을 닫는 것은 아니고 쉬는 날이라 문을 닫을 거라고 했다. 이고의 말을 들었을 때 쉬는 날이니 잘 되었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날 특별히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놓은 것은 없었다. 그런 문제를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 수업에서 쫓겨나게 생긴 것 고민하기도 바빴으니까. "오늘 서점에 그냥 있으려구. 이따 아다비아도 올텐데." "그럴 줄 알고 내가 아다비아한테 미리 이야기해놨어." 그러면 오늘 정말로 할 게 없네? 서점 안에서 쉬다가 아다비아가 오면 같이 공부하고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할까 생각했다. 아다비아가 내 공부를 도와주고 있으니..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1장 05화

"이고, 가게 창문 열어도 돼?" "어. 좀 열자. 뭐 이렇게 덥냐?" 어제보다 더 덥다. 날이 빠르게 더워지고 있다. 별 생각 없이 창문을 닫아놓았더니 덥다. 이고도 어지간히 덥나 보다. 이고는 어지간하면 창문을 닫으라고 한다. 밖에서 먼지 들어오면 책 상할 수 있다고 항상 창문을 꼭 닫는다. 사실 꼭 책 때문은 아니다. 밖에서 먼지 들어오면 청소하기 귀찮거든. 나도 청소하기 귀찮아서 어지간하면 이고 말대로 창문을 안 여는데 오늘은 정말 어쩔 수 없다. 창문을 열고 자리로 가서 앉았다. "야, 창문 열은 거 맞아?" "응. 열었어." "그런데 왜 시원한 바람이 하나도 안 들어오냐?" "기다려봐. 조금씩 시원해지겠지." 이고는 의자에 기대어 축 늘어져 있었다. 어지간히 졸린가 보다. 웬일로 어제 밤 늦게..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1장 04화

앞자리에 앉는 것이 좋을까, 뒷자리에 앉는 것이 좋을까? 어제 수업 들어오지 말라고 했는데...맨 앞에 앉아서 교수가 나가라고 하면 빌어야할까, 뒤에서 아예 티나지 않게 숨어 있는 것이 나을까? 강의실로 걸어가며 계속 이것만 생각했다. 대체 어느 자리에 앉는 것이 좋을까? 그나저나 감비르는 왜 안 오지? 감비르랑 같이 앉는 것이 그래도 따로 앉는 것보다는 나을 거 같은데. '뒤에 앉자.' 아무리 생각해도 교수가 빈말로 수업 들어오라고 한 것은 아닐 거다. 홧김에 내뱉은 말도 아니었다. 맨 앞에 앉았다가 학생들 앞에서 확인사살당하는 것보다는 맨 뒤에 조용히 숨어 있는 것이 낫겠다. 오늘 수업을 듣기 위해 진짜 노력했다. 어떻게든 몇 페이지라도 읽으려고 노력했다. 읽은 것은 마딜어로 정리까지 했다. 단어만 ..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1장 03화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자." "예!" 살았다! 교수가 내 과제 제대로 안 봤다! 감사합니다. 기적이 있었군요. 이렇게 기적을 내려주시다니! 그거 걸릴까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요. 오늘 무사히 넘어간다. 이렇게 신날 수가! 저 꼼꼼한 교수가 왠 일로 내 과제를 안 보았대? 큰 고비 하나 잘 넘겼어. 오늘은 과제도 없으니 마음 편하게 잘 수 있겠어. 감비르를 바라보았다. 감비르도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다. 과제 표지에는 확인했다는 교수의 서명만 있을 뿐이다. 그래, 이런 날도 있어야지. 가끔은 이런 기적같은 날도 있어야 당연하잖아. "아, 그리고 타슈갈, 감비르! 너희들은 나 좀 따라와." 망했어요. 꿈이 무너진다. 그래, 약 10초간 즐거웠다. 왜 따라오라고 했는지 당연히 알고 있다. 오..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1장 02화

"감비르, 과제 다 했어?" "응. 너는?" "못했어." "야, 어쩌려고 그래?" 뭘 어째? 망한 거지. 밤새도록 과제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다섯 장을 넘길 수가 없었다. 요약은 고사하고 사전 찾아가며 읽은 부분을 다시 읽기도 벅찼다. 나름 메모를 해가며 읽었지만 메모를 정리하려 하면 기억이 또 흐릿해졌다. 제대로 읽지 못 했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다시 읽으려고 하면 또 다시 처음부터 반복. 몇 번 그렇게 하다보니 도저히 짜증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창밖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릴 즈음, 눈을 잠깐 붙이고 다시 보기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잠깐 바닥에 드러누웠는데, 이고가 깨워줄 때까지 못 일어났다. "너 과제한 것 좀 빌려줄 수 있어?" "나도 엉망으로 했는데...내꺼 베끼면 바..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1장 01화

"이고, 걔 또 책 반납 안했어." "또? 아..." 이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일부러 형을 화나게 하려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진짜로 걔가 책을 반납 안 했기 때문이었다. 집으로 찾아가서 책과 연체료를 받아와야 한다. 이것은 이고가 하는 일. 나는 내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내가 걔에게 연체하라고 부탁한 것도 아니고. 하여간 걔가 문제야. 얘는 심심하면 연체야. 얘가 연체할 때마다 이고는 상당히 화가 났다. 이해한다. 책을 빌려갈 때 한두 권 빌려가는 것도 아니고 혼자 대여섯 권 빌려간다. 그리고 꼭 연체를 한다. "내가 가?" "됐다. 내 일인데." 이고에게 연체된 책의 대출 카드를 건네주었다. 이고는 하나하나 꼼꼼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오늘 조금 힘들 거야. 받아와야 하는 책만 10권이다. 걔 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