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집은 뭐지?"
낡은 가옥이 한 채 있었어요. 낡은 가옥으로 걸어갔어요.
낡은 가옥은 꽤 오래된 집이었어요. 툇마루가 없는 구조가 인상적이었어요.
'갈 곳이 없네.'
딱히 떠오르는 곳이 없었어요.
'카페나 갈까?'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에도 카페가 여러 곳 있어요. 우리나라에 카페 없는 곳이 어디 있겠어요. 한국인은 커피를 사랑하는 민족이라 커피 없는 곳은 없어요. 카페 가서 쉬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어요.
'아냐. 아직 시간 너무 많이 남았잖아.'
제가 타고 갈 기차는 오후 6시 54분에 도계역에서 출발하는 기차였어요. 몇 시인지 봤어요. 오후 3시 51분이었어요. 아직 3시간이나 남아 있었어요. 카페에 죽치고 앉아서 세 시간 보내는 것은 고역이었어요. 2시간까지는 커피도 마시고 빵도 먹으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지만 3시간은 무리에요. 3시간 있으려면 커피 마시고 빵 먹고 여기에 글이라도 써야 하는데 가방에 들어 있는 노트북 꺼내고 싶지 않았어요. 게다가 일부러 도계까지 왔는데 고작 한다는 것이 카페 가서 시간 보내는 거라니 시간이 너무 아까웠어요. 이럴 거면 삼척에서 버스 타고 바로 동서울터미널로 가는 게 더 나았어요.
'물닭갈비?'
아침도 안 먹었고 점심도 안 먹었어요. 하루 종일 먹은 거라고는 콜라만 신나게 들이켰어요. 코카콜라는 인류 최강의 발명품이에요. 여행 다니며 코카콜라 마시면 열량 보충도 되고 시원한 탄산이 목을 박박 긁으며 내려가서 목에 낀 먼지가 씻겨내려가는 기분이 들어요. 하루 종일 먹은 게 코카콜라와 제주삼다수, 커피 정도였으니 저녁 식사를 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기는 했어요.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전두리도 물닭갈비 맛집이 있어요.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은 태백시 문화권이라고 봐도 되는 지역이에요. 도계는 통리재가 매우 높고 험하기는 하지만 통리재를 경계로 태백과 접하고 있는 곳이에요. 지역만 인접한 지역이 아니라 태백시와 도계읍은 둘 다 석탄 산업이 중심인 지역이에요. 실제 인적 교류도 과거부터 꽤 있었다고 하고, 문화도 비슷한 부분이 꽤 있어요. 태백시와 도계읍 문화는 광산 노동자 문화가 기층문화로 자리잡고 있어요.
강원도 태백시 대표 음식은 물닭갈비에요. 물닭갈비는 탄광에서 근무하던 광부들이 즐겨먹던 음식이에요. 도계도 물닭갈비 문화권이에요. 도계에는 물닭갈비 식당이 세 곳 있었어요. 강원도 태백시 도계읍 전두리에 있는 물닭갈비 식당은 텃밭에 노는 닭, 청춘닭갈비, 원희네 닭갈비에요. 세 곳 모두 닭갈비 식당이지만 볶아먹고 구워먹는 춘천식 닭갈비가 아니라 물에 닭을 풍덩 빠쳐서 전골처럼 끓여먹는 태백시 물닭갈비 식당이에요.
물닭갈비라면 혼자 가서 먹어도 되기는 했어요. 물닭갈비 2인분은 혼자 먹을 수 있어요. 물닭갈비는 양 자체가 많지는 않아요. 기본적인 양은 적지만, 대신에 사리를 넣어서 먹고, 물닭갈비 속 닭고기를 먹은 후 마지막으로 볶음밥을 만들어서 먹어요. 물닭갈비 2인분을 주문해서 사리 넣고 먹고 볶음밥은 생략하면 혼자 아주 배부르게 먹을 수 있어요.
텃밭에 노는 닭, 청춘닭갈비, 원희네 닭갈비 모두 이 지역에서 평이 매우 좋은 식당들이고 손님이 많은 식당이에요. 전에 왔을 때는 원희네 닭갈비를 가봤어요. 텃밭에 노는 닭이나 청춘닭갈비에 가서 물닭갈비를 저녁으로 먹는 것도 남은 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방법이었어요. 오후 6시 54분에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면 청량리나 의정부에서 저녁 먹기는 글렀거든요.
'물닭갈비도 별로인데...'
그렇게 배고프지 않았어요. 결정적으로 발이 많이 아팠고 다리도 아팠어요. 물닭갈비 식당이 모여 있는 곳까지 걸어갈 의지가 없었어요. 물닭갈비 식당이 있는 곳은 도계역에서 북쪽으로 내려가야 했어요. 물닭갈비를 먹으러 갈 의지가 있었다면 애초에 도계역 주변에서 맴돌고 있지 않았어요. 최소한 도계여자중학교 맞은편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95호 도계 긴잎느티나무와 그 주변 광부사택을 다시 보러 갔을 거에요. 많이 걷고 싶은 의지 자체가 없어서 물닭갈비 식당까지 갈 의욕이 없었어요.
멀리 도계역 저탄장이 보였어요. 거리는 매우 조용했어요.
'도계전두시장이나 갈까?'
딱히 가고 싶은 곳도 없고 가야할 곳도 없었어요. 남은 시간에 걸어서 갈 만한 곳은 모두 다 가본 곳이었어요. 만만한 것이 도계전두시장이었어요. 오십천 산책로 따라서 걷다가 도계전두시장이나 가보기로 했어요.
조용한 길을 걸었어요. 차도 거의 안 지나다니고 있었어요.
'아주 예전에는 여기 사람 엄청 많았겠지?'
지금은 사람이 매우 없는 도계읍 전두리지만 석탄산업 호황기에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을 거에요. 강원도 삼척시는 과거 삼척군과 삼척시가 분리되어 있었어요. 석탄산업이 쇠락하면서 삼척군과 삼척시 모두 인구가 급격히 감소해 삼척군과 삼척시가 통합된 것이 오늘날 삼척시에요. 삼척군은 1995년 1월 1일부로 삼척시와 통합되었어요. 과거 삼척군이 존재할 때 도계읍 전두리가 삼척군의 중심지였어요.
도계전두시장 자체가 도계의 석탄산업 때문에 생긴 시장이에요. 1951년에 전두리 83번지 자리에 라이터 돌을 파는 상점을 시작으로 작업복, 장화, 허리띠 등을 판매하는 상인들이 노점을 펼치면서 시장으로 발전한 곳이에요. 왜 라이터 돌을 파는 상점으로 시작되었냐 하면 옛날에는 광부들이 '간드레'라 부르던 카바이드 등을 사용했어요. 카바이드와 물과 만나서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발생하는 아세틸렌 가스에 불을 붙이는 카바이드 등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라이터가 있어야 했고, 라이터 부싯돌을 구입하기 위해 광부들이 전두리 83번지쪽으로 몰려들었어요.
강원도 도계시 전두리 지역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하는 것이 있어요. 바로 도계역 바로 뒤가 탄광이라는 점이에요. 도계역 바로 뒤가 현재도 가행중인 탄광인 대한석탄공사 도계광업소 도계갱이에요. 탄광이 바로 지척에 있어서 탄광 입구 근처에서 라이터 돌을 팔던 상점이 있었고, 광부들이 라이터 돌을 구입하려고 몰려오자 다른 상인들이 이것저것 팔려고 몰려오며 형성된 시장이 도계전두시장이에요.
도계전두시장은 유래부터 탄광과 관련있고, 구조 또한 탄광촌 가옥 구조와 관련있어요. 도계전두시장 건물 뒷모습은 오십천 산책로에서 볼 수 있어요. 좁은 산골에 갑자기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오면서 건물 올릴 공간이 부족해지자 최대한 토지를 덜 차지하고 건물 면적을 넓히기 위해 하천변에 기둥을 세우고 하천 쪽으로 공간을 확장해 지은 까치발 건물을 많이 지었어요. 도계전두시장 뒷편 오십천 산책로에서 보면 도계전두시장 까치발 건물을 볼 수 있어요.
도계전두시장 뒷편 까치발 건물 모습은 진짜 여러 차례 봤어요. 도계 올 때마다 봤어요. 또 볼 필요가 전혀 없었어요. 그래도 남은 시간에 할 게 없었어요. 도계역에서 멀리 가지 않는다면 결국 갈 만한 곳이라고는 오십천 산책로와 도계전두시장 뿐이었어요.
'도계전두시장 안에도 카페 비슷한 거 하나 있지 않았었나?'
도계전두시장 안에 카페 비슷한 곳이 하나 있었어요. 정확히 카페인지는 모르겠지만 카페 비슷한 것은 분명히 하나 있었어요. 오십천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도계전두시장으로 가기로 했어요.
강원대학교 도계캠퍼스 기숙사 건물이 보였어요. 강원대학교 도계캠퍼스 기숙사는 현재 도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에요.
오십천을 따라 계속 걸어갔어요.
"여기 예전에 집 있었나 보다."
오십천 산책로 다리 아래에는 콘크리트 블록으로 만든 벽이 있었어요. 다리 하중을 지탱하기 위해 만든 임시 벽 기둥이 아니었어요. 건물 하중을 지탱하는 내력벽을 저렇게 지어놨을 리 없었어요. 내력벽이라고 아예 볼 수 없는 것이 콘크리트 블록으로 만든 벽은 다리에 닿아 있지도 않았어요. 저건 아마 예전에 오십천변에 있던 가옥의 흔적일 거에요. 옛날에는 도계 오십천변에 가옥이 빼곡했다고 해요.
"이것도 유적이라면 나름 유적인가?"
오십천 산책로를 따라가다 발견한 콘크리트 블록 담장. 과거에는 여기에 집이 있었다는 흔적이었어요. 1000년이 지나가면 탄광촌 유적이라고 사적으로 지정될 지도 몰라요. 그리고 1000년이 지나간 후에는 국사시간 때 학생들이 대한민국 현대 산업화 역사 연표를 달달달 암기하고 있을 거고, 수학여행에서 경주 가는 것처럼 도계로 가서 과거 대한민국 현대 산업화 유적을 찾아다닐지도 몰라요.
망상이나 과장이 아니에요. 전국에 산재해 있는 가마터, 마을터 같은 게 다 먼 옛날 과거에는 이랬을 거에요. 사라지고 잊혀진 채 많은 시간이 흐르고 흐른 후에 발굴하고 복원하고 유적 지적하고 사람들 일부러 찾아가고 있어요.
'다시 부는 미풍 도계전두시장'이라는 슬로건이 적힌 벽부착형 판형 시설물이 있었어요.
석탄도시에서 관광, 문화, 복지 도시로의 재창조
블랙다이아몬드 도계
'저 말대로 되었으면 좋겠다.'
도계가 잊혀지고 사라지는 지역이 아니라 다시 도약해서 활기를 찾았으면 좋겠어요. 도계는 돌아다닐 때마다 애잔한 마음이 들곤 했어요. 이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석탄산업의 몰락과 예정된 대한석탄공사 도계광업소 폐광 일정으로 시한부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요.
그래도 희망이 아예 없지는 않아요. 운탄고도1330 7길과 8길이 완공되고 성공한다면 관광객들이 꽤 찾아올 거에요. 중년층과 장년층이 많아지면서 걷기 여행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거든요. 여기에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재택근무도 많이 활성화되었고, 정보 및 콘텐츠 생산 자체가 하나의 생산적 노동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어요.
과거 석탄산업합리화정책이 시행되며 강원도 남부 탄광이 우루루 폐광하면서 강원도 남부 지역이 붕괴되고 초토화되다 못해 완전히 대자연으로 회귀해버렸을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어요. 저 당시만 해도 강원도 남부 일대는 교통이 상당히 열악한 지역이었고, 석탄산업을 대체할 만한 산업이 아예 없었어요. 농업은 같이 망해가는 상황이었고, 관광업 육성도 홍보가 잘 되어야 하는데 홍보 방법이라고 해봐야 방송과 신문에서 홍보하는 수준이었어요. 또한 국내여행산업이 그렇게 크게 발달했을 때도 아니었구요.
그렇지만 지금은 시대가 많이 변했기 때문에 희망이 조금씩 보이고 있어요. 뭔가 발상의 혁명적 전환 하나만 있다면 이 지역을 사라지는 것을 막고 과거 석탄산업 호황기보다는 한참 못하겠지만 그래도 반등할 수 있을 거에요.
오십천을 따라 계속 걸어갔어요. 오십천 물줄기는 북쪽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어요.
오십천 산책로에 넓은 공터가 있었어요.
'여기 뭐 해보려다가 잘 안 되었구나...'
공터에는 조그마한 건물이 있었어요. 현수막에는 '전두시장 포장마차 상설운영'이라는 문구가 있었어요. 도계전두시장 뒷편에 조그마한 먹거리 시장, 만약 더 잘 된다면 먹거리 야시장으로 발전시켜보려고 했던 것 같았어요. 당연히 잘 안 되었어요. 실제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안 봐도 뻔했어요. 잘 되었다면 상설운영이라는데 이렇게 문을 닫고 공터로 남아 있겠어요.
조그만 무대에 벽화가 그려져 있었어요.
벽화 속 아이들은 매우 밝은 표정이었어요. 모두가 즐거워하며 벽화를 그리고 밝게 웃으며 빛나는 미래를 상상하는 모습이었어요. 도계읍에는 초등학교가 세 곳 있어요. 도계초등학교, 흥전초등학교, 장원초등학교가 있어요.
'거기 아이들도 아마 대충은 눈치채고 있겠지?'
도계가 소멸 위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아이들이 모를 리 없어요. 정확한 내용까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 정도는 아이들도 읽으니까요. 여기 아이들이 저렇게 활짝 웃었으면 좋겠어요.
말없이 계속 걸었어요.
도계전두시장 안으로 들어왔어요.
도계전두시장은 휑했어요. 사람들이 없었어요. 할머니 몇 분이서 손님 없는 가게를 지키고 계셨어요. 할머니들이 모여서 화투를 치며 시간을 보내고 계셨어요.
시장 안에서 돌아다니는 할머니와 마주쳤어요. 할머니께 인사를 드렸어요. 할머니께서 저를 보자 매우 반가워하셨어요. 할머니께서는 제게 어디에서 왔냐고 물어보셨어요. 제주도 출신인데 탄광촌 궁금해서 여행 왔다고 대답했어요. 할머니께 시장에 사람이 참 없다고 하자 할머니께서는 항상 이렇다고 하셨어요.
"다른 할머니들은 화투 치고 있는데 나는 화투 안 치니까 말할 상대가 있어야지. 말동무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할머니께서는 제게 연신 말동무해줘서 정말 고맙다고 하셨어요.
도계전두시장 고객지원센터 근처까지 왔어요. 이 근처에 카페 비슷하게 생긴 곳이 있었어요. 할머니께 카페 비슷하게 생긴 곳 문 안 여냐고 여쭈어봤어요. 할머니께서는 요새 문 안 열고 있다고 하셨어요.
할머니께 인사드리고 저는 또 제 갈 길을 걷기 시작했어요.
고추가 말라가고 있었어요.
도계전두시장에서 나왔어요.
참 오랜만에 보는 바른손이었어요. 어렸을 적에는 바른손 문구류도 많이 썼었어요.
2022년 11월 2일 오후 4시 27분이었어요.
'이제 카페 가서 시간 보내다 기차 타야겠다.'
카페 가서 2시간 정도 앉아 있다가 기차 타러 도계역으로 들어가기로 했어요. 도계역 역전에는 카페 로이가 있어요. 전에 도계 왔을 때도 마지막에 카페 로이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며 기차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었어요.
도계역으로 갔어요. 카페 로이로 갔어요.
카페 로이 안으로 들어갔어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