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석탄의 길 (2022)

석탄의 길 2부 24 - 운탄고도1330 9길 강원도 삼척시 마평교 마평1교 마평동 오사마을 구간

좀좀이 2023. 4. 2.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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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평교가 보였어요.

 

 

마평교를 향해 걸었어요. 마평교까지 다 왔어요.

 

 

 

2022년 10월 21일 오전 11시 32분, 운탄고도1330 9길 마평교 앞으로 다시 돌아왔어요.

 

"안녕!"

 

영동선 철도를 향해 손을 흔들었어요. 지금까지 저와 친구가 되어 함께 걸어주었던 영동선 철도, 기차와 작별할 시간이었어요.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어요. 여행에서 만난 길동무 영동선 철도는 동해시를 향해 뻗어나가고 있었어요. 제가 가는 길은 삼척시 동해 바다를 향해 뻗어나가고 있었어요.

 

 

 

마평교를 건넜어요. 철도와 완벽히 작별했어요.

 

 

 

 

배추밭이 나왔어요.

 

 

"여기는 진짜 배추에 진심인 동네야?"

 

 

과장 조금 더 보태면 강원도 남부 여행 와서 제가 태어나서 강원도 남부 여행을 가기 직전인 2022년 8월까지 살면서 본 배추만큼 배추를 봤어요. 딱히 과장도 아닌 것이 강원도 남부에는 배추 재배하는 밭이 진짜 많아요. 도처가 배추밭이에요. 조금이라도 텃밭 가꿀 공간이 있으면 텃밭을 만들어서 배추를 재배하고 있었어요. 배추는 정말 원없이 많이 봤어요.

 

'이건 강원도의 조폐공사 아냐?'

 

속으로 웃었어요. 싯누런 5만원권 지폐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초록색 1만원권 지폐가 우리나라에서 최고액권 지폐였어요. 그래서 이때만 해도 1만원권 별명이 배춧잎이었고, 거액의 돈을 비유할 때 배춧잎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어요. 돈 좀 받았냐, 돈 좀 먹었냐 할 때 배춧잎 좀 받았냐, 배춧잎 좀 먹었냐 소리를 하기도 했어요. 강원도 남부는 도처가 배춧잎. 배춧잎은 1만원권 지폐. 그러므로 강원도 남부 조폐공사는 배추밭. 말 되었어요. 실제로 배추 농사가 돈이 되니까 강원도 남부에서 배추 농사를 많이 하고 있는 것일 거구요.

 

인터넷에서 강원도 보고 화폐가 감자 아니냐고 놀리곤 해요. 그런데 강원도 여행을 몇 번을 갔는데 감자밭은 정작 제대로 본 기억이 없어요. 특히 강원도 남부로 여행 오니까 감자밭은 하나도 안 보이고 온통 배추밭이었어요. 강원도 대표 농산물은 감자와 옥수수에요. 옥수수는 강원도 남부로 여행 와도 많이 볼 수 있어요. 그러나 감자는 없고 온통 배추만 보였어요. 배추는 지폐, 옥수수는 동전. 혼자 웃었어요.

 

'강원도에서 배춧잎을 돈으로 쓴다고 하면 믿겠다.'

 

제 고향 제주도 보고 인터넷에서는 감귤이 화폐 아니냐고 놀리곤 해요. 이런 건 그냥 웃어넘겨요. 딱히 악의나 비하 의미가 있다고 느껴지지 않아서요. 웃자고 하는 소리에 웃어야지, 웃자고 하는 소리에 발끈하면 그건 열등감의 표출이에요. 그리고 제주도는 진짜로 감귤이 지천에 널려 있어요. 물론 감귤 수확기가 되어야 지천에 널려 있는 거긴 하지만요. 어쨌든 제 고향 제주도는 겨울만 되면 감귤의 바다에요. 제주도에서는 노란 플라스틱 상자를 컨테이너라고 불러요. 감귤 농사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감귤 파치를 아주 컨테이너로 하나 받아요. 감귤 농장에서는 파치는 그냥 가져가라고 쌓아놓기도 해요. 식당 같은 곳에서도 감귤 쌓아놓고 들고 가서 먹으라고 하구요. 감귤은 정말 질리게 먹을 수 있어요. 그러니 제주도에서 감귤이 화폐 아니냐고 하는 우스갯소리는 저도 웃으면서 넘어가요. 정말 감귤이 지천에 널려 있으니까요.

 

그런데 강원도에서 감자가 화폐 아니냐고 하는 우스갯소리는 아무리 강원도 여행을 몇 번씩 가도 아직도 영 안 와닿았어요. 감자밭 본 게 없는데요. 이렇게 배추가 제주도 감귤급으로 널려 있어야 우스갯소리로라도 돈 대신 작물 쓰는 거 아니냐고 하죠.

 

 

고양이가 있었어요.

 

 

 

 

고양이를 구경하고 사진 몇 장 찍고 다시 일어나서 걸었어요.

 

 

 

 

 

멀리 버스 정류장이 보였어요.

 

 

"저기 버스 정류장에서 쉬어야겠다."

 

발이 신발이 아직 길들지 않아서 근육이 아픈 것이 아니라 발 뼈가 아팠어요. 다리도 엄청 아팠어요. 전날 꽤 많이 걸었고, 이날도 꽤 많이 걷고 있었어요. 두 발을 질질 끌면서 걷고 있었어요. 한 번은 무조건 쉬어야 했어요. 버스 정류장까지 가서 쉬기로 했어요.

 

버스정류장으로 갔어요. 앉아서 조금 쉬었어요. 감상 같은 거 없었어요. 그저 힘들다는 생각 뿐이었어요.

 

다시 일어났어요. 또 걷기 시작했어요.

 

 

 

'진짜 흥이 안 나네.'

 

운탄고도 9길은 갈 수록 재미없어졌어요. 결정적으로 풍경이 갈 수록 밋밋해졌어요. 스프 다 넣어서 끓인 라면 먹다가 스프 1/3만 넣고 끓인 라면 먹는 기분이었어요. 풍경 보는 재미가 기본적으로 있어줘야 하는데 풍경 보는 재미가 없으니 흥이 날래야 날 수 없었어요. 오십천은 갈 수록 유량이 많아졌지만 유속이 빠르다는 느낌은 없었어요. 오십천도 오히려 갈 수록 밋밋해졌어요.

 

길도 재미있는 길이 아니었어요. 길조차 밋밋했어요. 오르막길도 오르고 내리막길도 오르고 이런 저런 길을 다니는 맛이 없었어요. 그저 도로 따라 쭉 걸어가는 길이었어요. 전날 운탄고도 3길 망경대산 등산로 걸을 때 표지판 보면서 계속 OX 퀴즈를 해야 했던 것 보다야 길 헤멜 걱정 없는 것이 더 낫기는 했지만 많이 걸어서 힘들 뿐 걷는 재미 자체가 좋은 길은 아니었어요. 스릴도 없고 탐험하는 맛도 없었어요.

 

'노래까지도 뭔가 안 맞아.'

 

운탄고도1330 8길 걸을 때 매우 재미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운탄고도 8길 걸을 때 딱 어울리는 노래를 찾았기 때문이었어요. 바로 아이유의 Eight 였어요. 아이유 eight 노래는 운탄고도 8길 걸으며 듣기 너무 좋은 노래였어요. 가사 하나하나가 운탄고도 8길을 따라 흘러가는 서사와 너무 잘 어울렸어요. 한때 번성했던 광산들과 마을들. 모든 건 기억 속 흔적으로 사라져가고 있었어요. 고사리역, 하고사리역, 마차리역은 기억 속에서 만나는 기차역이 되었어요. 도계역과 신기역도 추억을 찾아 떠나는 여행 속 기차역 같은 기차역이 되었어요. 도계는 지금도 탄광촌이지만 많은 탄광이 폐광하면서 지나간 한국 현대 산업화 역사의 흔적을 찾으러 가는 지역이 되었어요. 이 지역 출신이 아니라도 좋아요. 중학교 사회, 고등학교 한국지리 시간때 배웠던 강원도 남부 태백산 공업지대, 한국의 지하자원 중 강원도 남부 석탄에 대해 배웠던 기억을 만나러 가는 여정이었어요. 그래서 아이유 eight는 운탄고도 8길과 전혀 상관없는 노래였지만 너무 잘 어울리는 노래였어요.

 

운탄고도1330 9길을 걷는 중에도 여전히 아이유의 eight 노래를 듣고 있었어요. 그런데 운탄고도 9길과 아이유 eight 노래는 영 안 맞았어요. 얼핏 보면 맞을 거 같아 보이지만 막상 맞춰보면 전혀 안 맞는 너트와 볼트 같았어요. 노래와 길이 서로 헛돌았어요. 전에 운탄고도 8길 걸을 때 주구장창 아이유 eight를 들어서 노래 자체에 질린 게 아니었어요. 노래 자체는 여전히 하나도 안 질렸고 너무 좋았어요. 단지 운탄고도 9길과 아이유 eight가 안 어울릴 뿐이었어요.

 

풍경도 갈 수록 밋밋해지고 길도 재미없고 그나마 흥을 돋궈줄 노래마저 어울리는 노래를 못 찾았어요. 그러니 길이 진짜 지루했어요. 지루하기만 하고 길기는 또 엄청 길어서 힘들기는 힘들었어요.

 

'길이 흡입력이 없어.'

 

이렇게 운탄고도 9길이 재미없고 지루하게 느낀 여러 이유가 있었던 데에는 보다 큰 이유가 있었어요.

 

서사가 깨졌다.

 

운탄고도.

석탄을 나르던 길.

이제 이 길은 석탄이랑 무슨 상관이야?

 

운탄고도1330 3길부터 8길 고사리역까지는 석탄 생산 지대에요. 고사리역이 있는 늑구리를 벗어나면 석탄 생산지대에서는 벗어나요. 하지만 옆에 영동선 철도가 있어요. 영동선 철도는 석탄을 운반하는 철도이기도 해요. 그렇기 때문에 마평교까지는 석탄 운반의 길이라는 뜻인 '운탄고도'라는 서사와 맞는 길이었어요.

 

마평교에서 철도와 작별하는 순간부터 이 서사가 깨져버렸어요. 이제 남은 길은 딱히 의미있는 길이 아니었어요. 그저 오십천 따라 삼척 바닷가로 가는 길에 불과했어요. 이러니 몰입이 하나도 안 되었어요. 웅장한 서사에서 벗어나서 몰입이 안 되자 여러 이유가 떠오르며 길이 더욱 재미없어져버렸어요. 길이 재미없어지자 피로와 고통이 고삐 풀려서 마구 날뛰기 시작했어요.

 

"아..."

 

 

지금만큼은 보기 싫은 것이 보였다.

 

눈을 돌렸어요.

 

 

 

2022년 10월 21일 오후 12시 3분, 마평1교에 도착했어요.

 

 

 

마평1교에는 운탄고도1330 안내 표식 리본이 매달려 있었어요.

 

 

 

 

길 가에 흰색 차선 옆에 '보도'라고 적혀 있었어요. 아마 운탄고도 9길은 이 구간에서는 새로 데크 같은 것을 설치하지 않고 흰색 차선 옆 구석으로 걸으라고 할 거에요.

 

 

걸었어요. 걷고 또 걸었어요.

 

 

 

 

 

 

2022년 10월 21일 12시 23분, 오사마을 표지석에 도착했어요.

 

 

"끝이 보인다."

 

지도를 들여다봤어요. 여기에서는 길을 조금 찾아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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