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제대로 게임을 합시다.
당신은 선택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맞는 길, 하나는 틀린 길.
어느 길로 가시겠습니까?
이런 거 하나도 재미없다고!
나는 지금 운탄고도1330 3길 걸으러 왔어요. 이런 저질 게임하려고 온 게 아니에요. 게임은 도시에 있는 방탈출 카페에서 하게 하구요. 방탈출 카페가 부러우면 저기 모운동이나 영월읍내에 하나 만들라구요. 엄한 산길에서 이런 선택지 자꾸 띄우지 말구요. RPG 게임이면 아무 거나 찍어서 하나 해보고 아니면 세이브 파일 다시 로딩시키면 되지만 이것은 인생, 인생은 실전이에요. 인생에 세이브 파일 다시 실행시키는 게 어디 있어요. 선택하면 그게 끝이고 원웨이 노빠꾸 직진인데요.
나는 게임하기 싫은데 운탄고도1330은 게임을 강요해요. 진짜 게임 싫다구요. 게임 자체를 안 좋아한다구요. 내가 게임 안 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요. 머리 쓰는 거 진짜 싫다구요. 평소에도 머리 쓸 일 많아서 머리 안 쓰려고 여기 왔는데 왜 자꾸 게임을 시키고 머리를 쓰라고 그래요.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소설이 추리소설이고, 영화관에서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생각없이 볼 수 있는 닥치고 때려부수는 영화란 말이에요.
그래도 해야만 하는 게임.
왼쪽 길입니까, 오른쪽 길입니까
이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선택하기 싫어도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의 연속
"아 진짜! 어디로 가라는 거야?"
스마트폰을 꺼냈어요. 인터넷 검색 찬스로 힌트라도 얻어보려고 했어요. 역시나 통화권 이탈지역이었어요. 인터넷 찬스도 못 쓰는 곳이었어요. 게임을 강요하려면 최소한 인터넷 검색 찬스라도 쓰게 해주든가요. 힌트라고 주어진 거라고는 난잡하게 세워진 이정표 3개가 전부였어요. 이정표 3개를 보고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선택해서 가야 했어요. 둘 다 가는 건 없었어요.
강요된 게임, 강요된 선택이라구?
싫으면 모운동으로 돌아가든가.
이정표는 3개. 내 대가리도 3배로 뜨끈뜨근.
왔던 길 그대로 걸어서 모운동으로 돌아갈 게 아니라면 문제를 풀고 길을 골라야 했어요. 이정표를 하나씩 봤어요.
먼저 산꼬라데이길 이정표. 왼쪽은 망경대산 휴양림으로 가는 방향이었어요. 오른쪽은 화원리로 가는 방향이었어요. 제가 서 있는 쪽을 가리키고 있는 표지판에는 '망경대산 정상'이라고 적혀 있었어요.
두 번째 산꼬라데이길 이정표는 여기가 수라삼거리라고 나와 있었어요. 제가 온 방향이 망경대산 삼거리라고 나와 있었어요. 이건 도움 하나도 안 되었어요.
세 번째는 수라삼거리 운탄고도1330 이정표였어요. 운탄고도1330 이정표는 방향이 오직 2개 뿐이었어요. 왼쪽은 '운탄고도 1330 3길'이라고 적혀 있는 표지판 1개가 붙어 있었어요. 오른쪽은 '운탄고도 1330 3길'이라고 적혀 있는 표지판과 '수라리재'라고 적혀 있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어요.
'내가 내려온 방향이 운탄고도 3길이니까 저건 내가 내려온 길 가리키는 거일 거고...그러면 오른쪽이겠다.'
운탄고도1330 이정표 중 왼쪽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는 절묘하게 제가 걸어내려온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어요. 그러면 여기에서는 오른쪽 길로 내려가야 했어요. 이정표 보면 그렇게 되어 있었어요.
길을 봐도 그렇게 생겼어요. 오른쪽으로 난 길은 제대로 된 임도였어요. 왼쪽으로 난 길은 아무리 봐도 임도도 아니고 산에서 약초 캐러 다니는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개구멍처럼 생겼어요. 길 모르는 산에서 개구멍 같은 길은 어지간하면 안 들어가는 게 좋아요. 개구멍 같은 길로 들어가서 조금 가다 보면 본인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는 이상한 곳으로 빠지곤 해요.
월간 산 잡지에서 본 문구가 떠올랐어요. 북쪽 두릅산 방향으로 가라고 했어요. 두릅산 방향으로 가다 보면 배추밭이 나오고, 배추밭을 지나 한참 가면 무릎 시큰하게 만드는 험한 내리막길이 나온다고 했어요. 여기 오기 직전에 얼핏 길 왼편으로 배추밭을 살짝 봤어요. 오른쪽 길은 내리막길 경사가 45도 각도였어요. 길 생긴 것을 보나 운탄고도1330 이정표를 보나 아무리 봐도 오른쪽 길로 가야 맞아보였어요.
"오른쪽이겠다."
오른쪽 길로 갔어요.
나는 걷는다.
내 다리는 달린다!
그나마 길 같이 생긴 오른쪽 길은 바로 45도 각도로 떨어지는 비탈길이었어요. 비탈길을 걸어내려가려 했지만 가속도가 붙었어요. 마음은 걸어가고 있는데 두 다리는 냅다 달려내려가고 있었어요.
45도 경사 비탈길을 지나자 완만한 내리막길이 나왔어요.
위 사진 오른쪽을 잘 보면 길이 또 내리막으로 내려가는 게 보일 거에요. 평지 같은 길도 경사가 조금 있어서 계속 내려가는 길이었어요.
커다란 말뚝 기둥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어요.
소미원3천
소미원1천 합류점에서 1.55km
영월군
내리막길을 따라 열심히 내려갔어요.
"왜 자작나무 숲이 나오지?"
나오라는 고랭지 배추밭은 안 나오고 자작나무 숲길이 나왔어요.
'뭔가 이상한데?'
운탄고도1330 코스 중 자작나무 숲길이 유명한 곳은 운탄고도1330 6길이에요. 운탄고도1330 6길 지도 및 설명을 보면 함백산 소공원에서 시작해서 태백선수촌, 오투전망대를 지나 지지리골 임도 입구를 통과하면 지지리골 자작나무숲이 나온다고 되어 있어요. 운탄고도1330 3길 지도 및 설명에는 자작나무의 '자'자도 보이지 않아요. 6길의 명물 자작나무 숲이 왜 3길에 있는지 알 수 없었어요.
만약 운탄고도1330 3길에 이런 자작나무 숲길이 있는 게 맞다면 월간 산 잡지에서 자작나무 숲길이 있다고 알려줬을 거에요.
'빼먹을 수도 있지.'
고랭지 배추밭이 너무 굉장해서 이 정도 자작나무 숲길은 별 거 아니라고 넘겼겠거니 하고 걸었어요. 평평한 길과 아래로 내려가는 길만 돌아가면서 계속 나왔어요. 평평한 길이라고 여긴 길도 아마 미세하게 아래로 내려가는 길일 거에요. 눈으로 보는 풍경은 평지라고 하고 있었지만 두 다리와 두 발은 이게 내려가는 경사가 있는 비탈길이라고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었어요. 별 생각없이 평지를 걷는 거 같은데 이상하게 걸음에 가속도가 붙곤 했어요.
내려간드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까 첫 번째 45도 경사보다는 못 했지만 여기도 30도 경사였어요.
"이게 급경사라는 건가?"
아직까지 급경사 길이 없었어요. 45도 경사 비탈길과 30도 경사 비탈길이 있기는 했지만 무릎이 시큰거리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어요. 비탈길이 엄청나게 길고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어요. 경사가 급해서 재미는 확실했지만 딱 그 수준으로 끝났어요. 아무 것도 없이 평지에 가까운 길만 한없이 이어지면 지루하니까 가끔 조금 재미있으라고 양념으로 집어넣었다고 봐도 되었어요. 딱 이 정도 생각하고 내려오면 될 일이었어요. 이 정도라면 스틱도 필요없었어요.
"풍경 대박이다!"
앞에 둥근 산봉우리가 하나 나왔어요. 가을 단풍으로 불그죽죽했어요. 길 옆 자작나무와 앞에 있는 산이 어우러진 풍경은 다른 지역이었으면 우리 지역 꼭 가봐야 하는 비경 best 8 이런 데에 나올 법한 풍경이었어요.
"여기 무슨 공사하지?"
여기로 길을 만들 일이 없을 건데 도로를 만들고 있었어요.
"운탄고도 공사하나?"
멀리 보이는 둥글고 모발 빽빽한 머리 같은 산을 보며 자작나무 길을 걸어갔어요.
갈림길이 나왔어요.
"설마 여기인가?"
2022년 10월 1일부터 9일까지 운탄고도1330 3길에서 진행된 운탄고도1330 느리게 걷기 행사에서 폭우로 운탄고도1330 하산길이 유실되어서 코스가 수라삼거리에서 만봉사 주차장으로 되돌아가는 코스로 변경되었어요. 이날은 2022년 10월 20일이었어요. 설마 열흘만에 길을 다시 완벽히 재정비했을 리 없었어요. 행사 진행 코스를 바꿔야했을 정도면 상당히 크게 유실되었을 거니까요.
갈림길도 비가 많이 와서 흙과 돌, 잡목 같은 것이 아래로 쓸려내려가 쌓여 있었어요. 운탄고도1330 3길 관련 기사에서 본 폭우로 하산길이 유실되었다는 내용을 떠올리며 보니 여기가 맞는 거 같았어요.
"여기는 무슨 표식도 다 쓸려내려갔어?"
운탄고도1330 3길 표식은 하나도 없었어요. 괜찮아요. 이제 포기했어요. 그런 거 없어도 되요. 없어도 이상하지 않았어요. 올라오는 중에도 운탄고도1330 표식은 얼마 못 봤어요. 아니, 오히려 있는 게 사람 더 헷갈리게 만들었어요. 카카오맵을 켜서 위치를 확인하려 했지만 역시나 통화권 이탈지역이었어요. 통화권 이탈지역이니 여기는 진정한 오지라 할 수 있는 곳이었어요. 여기에서 다시 길을 선택해야 했어요.
"이거야 당연히 내려가는 길이겠지."
왼편 내려가는 길과 오른편 평지로 더 걸어가는 길 중 왼편 내려가는 길이 정답일 거 같았어요. 오른편 평지로 더 걸어가는 길은 다른 산으로 넘어가버릴 거 같았어요.
오른쪽 길로 내려가기로 결정한 후 왔던 길을 되돌아봤어요.
길이 꽤 잘 되어 있었어요. 사진 한 장 찍은 후 내리막길인 왼쪽 길로 내려가기 시작했어요.
내리막길 입구에 입간판이 하나 서 있었어요.
공사중!
제가 걸어온 길은 길을 만들다가 만 길 같았어요. 표지판이 왜 그런지 확실히 알려줬어요. 공사중이었어요.
"나는 공사중인 구간 다 걸어서 내려왔잖아?"
공사중이라고 출입금지라 되어 있었지만 저는 만경대산 정상에서 내려오면서 이 구간을 다 지나왔어요. 표지판 너머는 가도 되는 길이었어요. 표지판을 지나갔어요. 계속 줄줄 내려갔어요.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고 녹음 가득한 공기를 들이마셨어요.
"뭐가 험하다는 거지? 하나도 안 험한데?"
이게 험하면 동네 뒷산은 고사하고 동네 길도 못 다녀요. 서울 강남도 이 정도 되는 경사로는 허다해요. 험할 게 하나도 없었어요. 대체 이 길이 왜 험해서 무릎이 시큰거리고 스틱을 쓰는 게 좋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기자가 무슨 골다공증에 무릎 도가니 다 나간 사람이었을 리는 없었을 거구요.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주 쾌적한 길을 걸어갔어요.
강원도 영월 산림훼손 복구지 생태림 조성사업 안내판이 나왔어요. 계속 걸었어요.
차단기가 나왔어요. 차단기는 열려 있었어요. 차단기도 지나갔어요.
"길 더 좋아졌는데?"
비포장 운탄도로에서 포장된 운탄도로로 길이 바뀌었어요.
계속 걸어갔어요. 걸어가다가 오른쪽을 바라봤어요.
"설마 아까 거기에서 평지로 간 다음에 저기를 굴러떨어지듯 치고 내려오라는 거였나?"
제가 걸어온 길은 험한 길이 하나도 없었어요. 만경대산 올라가는 길과 비슷한 난이도였어요. 진짜 험한 길이라면 아까 갈림길에서 평지로 된 길을 따라 가다가 바로 아래로 치고 내려오는 방법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렇게 내려오게 생긴 길처럼 생긴 구역이 하나도 안 보였어요.
만경대산을 다 내려왔어요.
"된다!"
스마트폰에 안테나가 떴어요. 드디어 통화권 이탈지역에서 벗어났어요.
카카오맵으로 위치를 확인했어요. 앞에 아주 작게 보이는 푸른 지붕은 연상초등학교 화라분교장이었어요.
"화장실도 있는데?"
빛 바랜 망경대산 등산로 안내도가 있었어요.
수라리재와 망경대산 설명도 있었어요.
안내문은 다음과 같았어요.
수라리재
화원리에서 녹전으로 넘어가는 31번 지방도로 중 가장 험한 고개로 굽이굽이가 절경을 이루는 곳이며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恭讓王)이 삼척의 궁촌으로 유배될 때 이 고개에서 수라(왕이 먹는 음식)을 들었다 하여 "수라리재"라고 한다.
망경대산(望景臺山) 유래
망경대산(해발1088m)은 조선 태종 10년(1410)에 문과에 급재하여 한성부윤을 역임한 후 영월로 낙향한 충신 추익한(秋益漢)이 자주 오르던 곳이다. 이 곳 정승에서 바라보면 멀리 보이는 작은 산봉우리들이 망경산을 향하여 절을 하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어서 산세가 매우 아름답다.
이 산의 유래는 어린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채 한양에서 영월로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추익한이 산 봉우리에 올라 한양 땅을 바라보며 회하느이 눈물을 흘렸던 곳이므로 망경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추충신은 정성껏 준비한 머루, 다래를 가지고 어린 임금이 머물던 영월 관풍헌(觀風軒)을 찾아가 단종을 배알하고 그의 안위를 걱정하였다.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고 단종이 승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영월로 가던 추충신은 곤룡포에 익선관을 쓴 채 백마를 타고 가는 단종의 영혼을 만났다. 이때 단종은 추익한에게 "나는 태백산 산신이 되어 가는 길이요"라고 말하였다. 이에 태백산 주변 마을인 어평, 유전리 등지에서는 태백산 산신령이 된 단종을 수호신으로 모시고 매년 동제를 지내고 있으며 일설에 의하면 옛날에 봉화대가 있었다고 한다.
"너무 관리 안 되었는데?"
망경대산 등산 안내도와 수라리재, 망경대산 유래 안내판은 매우 빛바랬어요. 수라리재, 망경대산 유래 안내판은 녹도 슬었어요. 이 정도면 잊혀진 등산로였어요.
이제부터는 카카오맵을 보며 걸을 수 있는 구간이었어요. 31번 국도를 따라 석항삼거리까지 가야 했어요.
강원도 영월 만추 풍경을 감상했어요. 너무나 아름다웠어요.
들판에 가을이 제대로 내려앉았어요. 가을 붉은빛이 멀리 뒷산에서 바로 앞 들판까지 쫙 깔려 있었어요.
화원산업 레미콘 공장이 보였어요.
아름다운 강원도 영월군 가을 풍경을 감상하며 걸었어요.
"이거 조금 많이 먼데?"
31번 국도를 따라가는 길이 지도에서 보고 대충 파악한 것보다 더 길게 느껴졌어요. 상관 없었어요.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걷는 길이었어요. 단지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걷는 중이라 다리와 발이 매우 아팠을 뿐이었어요. 신발을 벗고 잠시 쉬고 싶었어요. 신발 벗고 10분 정도만 쉬면 통증이 많이 가라앉을 거 같았어요. 그러나 신발 벗고 쉴 만한 장소가 나타나지 않았어요. 아까 버스 정류장에서 신발 벗고 푹 쉬다가 출발해야 했어요.
산은 붉게 단풍이 들었고, 대지는 고추가 붉게 잘 익었어요.
"이건 산 다 내려오니까 나오네."
2022년 10월 20일 12시 정각, 드디어 운탄고도1330 3길 이정표가 다시 나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