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해야 했던 숙제 (2012)

해야 했던 숙제 - 23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칸국 여름 궁전

좀좀이 2012. 11. 9.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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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서 빠져나오니 오후 3시를 훌쩍 넘어버렸어요. 빨리 빠져나오려 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어요. 확실히 여행 중 설사에 한 번 시달리면 체력을 다시 회복하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공원을 걸으며 깨달았어요. 빨리 걸어 나오면 30분 안에 나올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몸에 힘이 없어서 도저히 빨리 걸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앉아서 쉬다가 다시 걷고 앉아서 쉬다 다시 걷다 보니 돌아나올 때에도 시간이 예상보다 많이 걸렸어요.


'이대로 일정을 계속해도 될까?'


공원에서 빠져나오며 이 생각이 계속 들었어요. 평소같으면 이런 생각을 할 시각에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걷고, 바로 부하라 칸국의 여름 궁전인 시토라이 모히 코사로 이동했을 거에요. 하지만 공원을 빠져나오는 길이 힘들게 느껴졌기 때문이 이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어요. 설사가 무서운 것이 설사를 시작한 지점부터 굶었다고 딱 그때부터 굶은 게 아니라 설사를 했다는 것은 전에 먹은 것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 굶은 것과 같은 기간은 더욱 길다는 것. 여행중 설사를 시작했다면 굶으며 푹 쉬어주는 것이 좋은 대처 방법. 그러나 어제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화장실을 잘 빌려주지 않는 우즈베키스탄만의 특징 때문에 동선을 숙소를 중심으로 다른 곳에 갔다 오는 방식으로 바꾸어 돌아다녔어요. 전날 일정을 비록 늦게 시작했지만, 밤 10시까지 돌아다니고 사람들과 어울렸어요. 다행히 설사는 멎었지만 며칠간 먹은 것과 체력 소모를 감안하면 오늘 힘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


공원까지는 멜론의 힘으로 돌아다녔어요. 하지만 공원에서 빠져나올 때 멜론의 힘도 다 되고 말았어요. 게다가 오늘은 또 야간 이동이 있는 날. 단순히 야간 이동만 하는 거라면 그다지 신경쓸 필요까지는 없었어요. 문제는 다음날 오전 9시 31분에 우르겐치역에 도착해서 여기에서 다시 히바까지 차를 타고 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이러면 다음날은 아무리 빨리 무언가를 먹는다고 해도 점심이었어요.


'위기'는 아니었어요. 그렇게 위험한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단지 오늘 일정을 고려해보면 밥시간을 놓쳤을 경우 다음날 점심까지 굶어야할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었어요. 이러면 정작 히바에서의 일정에 또 차질이 생길 수 있었어요. 결론은 간단했어요. 멜론 먹은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았지만 다시 밥을 먹자. 제대로 푸지게 먹고 그 힘으로 내일 점심까지 버티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어요.


그래서 볼로 하우즈 옆에 있는 식당에 가서 '코부르독'이라는 쇠고기 볶음과 빵, 차를 시켜서 먹으며 쉬었어요. 오늘 일정을 생각하면 시간이 부족한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다음날 점심까지 숙소에서 가볍게 먹은 아침과 멜론 한 통으로 버티는 건 무리였어요. 여행은 하나도 안 힘든데 설사 때문에 힘들게 느껴지는 것을 겪으며 그저 웃었어요. 이번 여행은 너무 쉽게 잘 풀린다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꼬일 수도 있구나 하면서요.


아주 이른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이제 4시도 넘었어요. 길을 건너 아르크 바로 앞으로 가서 바로 택시를 잡았어요. 흥정이고 뭐고 없이 바로 5천숨 불렀어요. 흥정이고 뭐고 다 필요 없었어요. 타슈켄트에서 오래 머물며 택시 타고 천 숨이라도 깎아보려고 노력은 하며 다니고 있었지만, 사실 천 숨은 우리나라 돈으로 500원 채 안 하는 돈이었거든요. 제 추측으로 아르크에서 시토라이 모히 코사까지 적정 택시 요금은 약 4천숨. 1000숨 더 준다고 해 보았자 우리나라 돈으로 500원도 안 하는 돈. 500원으로 시간을 벌지 그 돈을 아낄지의 선택 앞에서 지금 제게 필요한 것은 무조건 시간이었어요. 괜히 얼마 되지도 않는 돈 가지고 흥정한답시고 시간을 날려서 일정이 망가지면 부하라 또 오든지 평생 아쉬움과 후회와 손잡고 살아야 하니까요. 참고로 타슈켄트에서 부하라까지 오는 침대칸 편도 기차 요금은 47347숨.


5천숨 부르니 택시 기사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타라고 했어요. 그래서 택시에 올라탔어요. 택시 기사의 반응을 보니 꽤 높게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여기 물가를 모르는 이유도 컸지만, 아까 아르크로 돌아오는 길에 탄 택시에서 택시 기사의 반응을 보고 일부러 가격을 높게 질러버린 것도 있었어요.


오후 5시를 조금 넘겨 드디어 시토라이 모히 코사에 도착했어요.




시토라이 모히 코사는 부하라 칸국의 여름 궁전이에요. '시토라이 모히 코사'라는 이름은 부하라 칸국의 마지막 지도자인 알림 칸 Amir Muhammad Alim Khan bin Abdul-Ahad 가 붙인 이름이에요. стора 는 타지크어로 '별', моҳ 는 타지크어로 '달', хостан은 타지크어로 '만나다' 라는 의미. 그래서 '시토라이 모히 코사'는 '별과 달이 만나다'는 뜻이에요.


이 궁전은 지어진 지 아주 오래된 궁전은 아니에요. 부하라 칸국이 1920년에 멸망하는데, 이 궁전은 19세기 말부터 지어지기 시작해서 1910년대에 완성된 궁전. 부하라의 마지막 지도자인 알림 칸이 1910년에 즉위한 것을 생각해보면 조금 안타까운 역사이기도 해요. 왕궁을 완성해서 몇 해 살아보지도 못하고 소련 적군에 국가가 점령당해 쫓겨났으니까요.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갔어요. 여기도 역시나 외국인 가격과 내국인 가격은 차이가 있었어요.


시토라이 모히 코사는 3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어요. 먼저 입구쪽은 기술자들의 구역이고, 그 안쪽은 왕의 집무실, 가장 안쪽이 하렘이에요.



이것이 기술자들의 구역. 지금은 기념품 가게로 사용되고 있었어요. 특별히 볼 것도 없고 시간도 없어서 빨리 안쪽으로 들어갔어요.


"저건 뭐지?"


칠면조같이 생긴 것이 돌아다니는데 칠면조는 아니었어요. 깃털을 보니 공작이었어요.


'설마 공작을 풀어놓았으려구.'



동유럽풍으로 지은 이 문을 통과하자 드디어 본격적인 부하라 칸국 여름 궁전이 나타났어요.



들어가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한 인물의 흉상. 이 인물은 우스토-쉬린 무라도프 Usto-Shirin Muradov 였어요. 이 사람이 이 왕궁을 지은 사람이에요. 부하라 칸국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지도자 압둘 아하드 Abdul-Ahad bin Mazaffar al-Din 는 이 궁전을 짓기 위해 러시아로 건축가들을 연수보내었어요. 그리고 이 건축가들과 러시아인들에게 이 궁전을 짓게 시켰고, 그때 책임자가 우스토-쉬린 무라도프였어요.


흉상 근처에서도 공작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어요.




왜 그런가 하고 주위를 둘러보다 이유를 알게 되었어요. 왕의 집무실이 있는 남자들 구역과 이어진 통로 근처에 팻말이 하나 서 있어서 무엇이 적혀 있나 읽어보았어요. 내용은 공작과 관련된 것으로, 이 궁전에서는 공작을 풀어놓고 키운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어요.


"빨리 구경해야겠다."


공작에 대한 질문도 해결되었고, 이 건물을 지은 사람의 흉상도 보았어요. 이제 본격적으로 구경할 일만 남았어요.





이것이 바로 남자들의 구역에 있는 칸의 집무실.



입구는 대리석을 조각해서 만든 돌사자가 지키고 있었어요. 돌사자의 눈은 바깥을 향하고 있었어요. 크기도 크지 않아서 다 큰 어른 사자보다는 새끼 사자를 가져다 놓은 것 같았어요.


이 궁전을 세울 때 우스토-쉬린 무라도프가 세운 가장 커다란 공은 바로 궁전 내부를 꾸미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해낸 것이었어요. 우스토-쉬린 무라도프가 개발한 방법은 왜곡이 없는 베니스 거울 위에 치장 벽토 (stucco)로 꾸미는 것.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코칸드에서 본 궁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깜짝 놀랐어요.









밖에서 빛이 별로 안 들어와서 다행이었어요. 만약 밖에서 빛이 들어와 사방팔방으로 빛이 반사되었다면 정신을 차릴 수 없었을 거에요. 다른 방으로 갔어요.





그리고 또 다른 방.




예전에 지배자의 자리가 있었다는 방.





이 방은 1912~14년에 지어진 방으로, 부하라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어요. 이 방도 매우 화려했어요. 이 방이 있었기 때문에 이 궁전이 더욱 강렬한 인상을 주고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다는 느낌을 주었어요. 앞서 본 방들은 번쩍이는 색색깔의 장식으로 되어 있었던 반면, 이 방은 온통 하얀색이었어요. 너무나 극단적으로 대조적인 두 모습이 한 건물 안에 있었고, 그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 변화가 아찔할 정도였어요.





이 궁전에도 옛날에 사용했던 식기들이 보관되어 있었어요. 이것들 역시 대부분 중국제였어요.


왕의 집무실에서 나와 돌아다니는데 원래 궁전 안에 있는 건물들을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었어요. 먼저 '부하라 19~20세기 전통 복장 박물관'부터 갔어요.


"들어갈 수 있을 건가?"



여기도 입구가 어마어마하게 화려했어요. 이 안은 또 얼마나 화려할지 너무나 기대가 되었어요.


"응? 잠겼잖아?"


문을 못 열어서 못 들어가는 거 아닌가 하고 문고리도 돌려보고 문도 밀어보았지만 확실히 잠겨 있는 문이 맞았어요. 문고리는 돌아가지 않았고, 문은 밀리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입구와 천장 사진만 찍고 다른 곳으로 갔어요.



어느덧 5시 반을 넘겨버렸어요. 마음이 급해졌어요. 한가하게 여기를 둘러보고 왕궁 건물도 다시 들어가서 또 보고 싶었어요. 그러나 그랬다가는 정말로 낙쉬반드 묘소를 가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빨리 발걸음을 옮겼어요.



공작들은 한가하게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다가가면 도망가서 직접 만져볼 수는 없었어요. 그래도 사람을 보자마자 도망다니는 정도는 아니라서 사진 정도는 찍을 수 있었어요.


이제 남은 곳은 오직 하나 - 하렘 뿐이었어요. 여기 역시 들어가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시간도 늦은 데다, 툭하면 보수중이라고 못 들어가는 곳 투성이라 여기도 들어갈 수 있을 확률이 크게 높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거든요.



평범해보이는 건물을 지나 앞으로 가는데 '19~20세기 부하라 민족 및 자수 공예 박물관'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건물이 나왔어요. 역시나 문이 잠겨 있었어요. 내부는 짐작컨데 민속 박물관 정도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이곳을 지나가자 드디어 연못이 나왔어요.



한쪽에서는 기념품으로 팔고 있는 장신구를 아직까지 치워놓지 않고 있었고 그 옆에는 탁자들이 있었어요. 탁자들을 지나가자 드디어 제가 찾던 그 장면이 나왔어요.




부하라 와서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이 장면!


정말 내 손에 사과가 없는 게 아쉬울 뿐이구나!


이곳이 바로 여자들 구역이었어요. 여자들이 이 연못 주변에서, 그리고 연못에 들어가 놀고 있으면 왕이 사과를 던졌어요. 그 사과를 받은 여자가 바로 그날 밤 왕을 차지하는 여자가 되는 것이었어요. 비록 지금은 그때 그 모습을 그대로 느끼기에는 어려웠어요. 만약 지금도 그러고 있었다면 당연히 저는 여기 들어가지 못했겠죠. 제가 들어왔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여기에 옛날 하렘의 분위기는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어요. 단지 이곳이 바로 왕과 왕의 여자들이 놀고 즐기던, 그리고 왕이 자신과 밤을 보낼 여자를 선택하기 위해 사과를 던지던 그 이야기를 가지고 옛날 모습을 그려볼 뿐이었어요.


마침 애들이 한쪽 구석에서 물수제비뜨기를 하고 있어서 저도 돌멩이를 하나 주워 연못으로 가볍게 던졌어요. 사과는 없으니 돌멩이였어요. 저는 왕도 아니고, 여기도 더 이상 하렘이 아니니 그냥 연못을 향해 가볍게 던진다는 것으로 만족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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