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 52분 단양 출발 청량리 도착 무궁화 열차의 특징은 바로 이 기차가 중앙선을 타고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영동선을 타고 내려온 기차가 중앙선으로 갈아타고 온다는 점이다. 그러나 단양에서 타면 큰 차이는 없다. 단양에서 청량리까지는 중앙선을 타고 올라가기 때문이다.
좌석에 앉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H군이 잤는지 자지 않았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의자에 앉아서 창밖을 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밖은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맑은 날 밤에도 창밖은 열차 안의 불빛으로 인해 거의 보이는 것이 없는데, 비까지 내리니 보이는 것은 창밖에 맺힌 빗방울 뿐이었다.
정신없이 잠을 잤다. 도중에 딱 한 번 깨어났다. 내가 깨어났을 때, 기차는 무슨 강 비슷한 것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강을 지나가네'라고 생각한 후, 다시 잠을 청했다.
H군이 나를 계속 깨웠다. 이제 조금 후면 청량리역 도착이라고 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릴 정신도 없었다. 그냥 피곤했다. 더 자고 싶었지만, 이제 내려야했다. 기차가 청량리역에 들어갔다. 기차에 탈 때는 설레임과 함께 탔는데, 내릴 때는 피곤함에 절어서 내렸다. 역시나 무리한 일정은 여행 마지막에 사람을 힘들게 했다.
풍기역에서, 단양역에서 기차표에 기념도장을 받을 때마다 내가 했던 생각은 바로 '청량리역에서는 어떤 기념도장을 찍어줄까'였다. 어디에선가 주워 들은 것이 있어서 이번 여행을 다니는 동안, 역무원에게 표를 기념으로 가지고 싶다고 말한 후, 표 위에 기념도장을 받았다. (공짜이고, 매표소에 가서 "기념도장 찍어주세요"라고 말하면 찍어주기도 하고, 도장에 잉크를 뭍혀서 건네주기도 한다) 풍기는 인삼, 단양은 단양팔경이 유명한데 청량리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유명한 것이 전혀 없었다. 남대문 시장은 서울역 코앞이고, 동대문 시장 역시 청량리역에서 꽤 멀었다. 제기시장이 그려진 도장을 찍어줄까? 아무리 생각해도 청량리만의 특별한 것은 없었다. 청량리역 주변에 있는 호객 아주머니들을 철도청에서 만든 기념도장에 집어넣었을리는 만무할 것이고...아예 도장이 없는 것은 아닐까?
비몽사몽에 두통만 느껴지고 그 어떤 계산도 서지 않았지만, 청량리역에서 기념도장을 받아야겠다는 생각만은 머리 속에 확실히 살아있었다. 청량리역에 내리는 순간, 시험에 대한 걱정은 온데간데 없고 그저 기념도장을 받아야한다는 생각만 머리 속에 남아있었다.
역무원 아저씨께 기념으로 표를 가져가겠다고 말씀드린 후, 기차표를 들고 매표소에 갔다. H군은 귀찮으니 그냥 가자고 했지만, 이왕 시작한 여행, 할 것은 다 해 보고 마무리를 짓자는 생각에 H군을 끌고 매표소로 갔다.
"저기요..."
"예?"
"청량리역 기념도장 찍을 수 있을까요?"
"저쪽 창구로 가 보세요."
직원의 말대로 가장 좌측에 위치한 창구로 갔다. 거기에서 똑같이 청량리역 기념도장을 찍을 수 있냐고 물어보자 기념도장에 잉크를 듬뿍 뭍혀서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대체 어떤 그림일까? 무엇이 그려져 있을까? 청량리를 대표하는 것으로 과연 무엇이 뽑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보이지 않았다. 이 기대는 도장을 찍는 순간, 허무함과 허탈감으로 바뀌었다. H군의 표에 도장을 찍어준 후, 그림을 보았다. 비몽사몽에 두통에 안구건조증까지 겹쳐서 앞에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지만, 표에 찍힌 그림만은 확실히 내 눈에 들어왔다. 그 그림은 바로 '기차'였다.
'기차'였다.
'기차'였다.
'기차'였다.
'청량리역의 상징은 기차'였다.
'청량리역의 상징은 기차'였다.
이런 허무함이 있나...청량리역 기념도장을 가지고 '이것은 지하철 1호선 청량리역 기념도장이야' 또는 '이것은 지하철 용산선 청량리역 기념도장이야'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까? (용산선 청량리역이 철도 청량리역이고, 지하철 청량리역이나 용산선 청량리역이나 모두 한국 철도공사 관리이기는 하다) 덩그러니 기차 하나만 달랑 그려진 이 도장을 바라보니 허탈한 미소만 나올 뿐이었다. 그래도 청량리역에 기념도장이 있다는 것이 어디냐...솔직히 청량리역에서는 기념도장을 못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내 예상을 뒤엎고 기념도장이 있었다. 단지 기념도장이 너무나 기념스럽지 못해서 정신이 멍해질 뿐이었다. 내가 피로에 절고 절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소금에 절고 절어 빳빳함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파가 되어 청량리역에 도착해 기차에서 내렸을 때의 그 기분을 아주 예술적으로 표현한 것 같았다.
전철을 타기 위해 역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맑고 햇빛은 대지를 향해 쉴새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새벽 날씨 치고도 참 좋은 날씨였다. 어젯밤에 단양이 이렇게 맑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다 지나간 일이었다. 사람들은 출근하기 위해 부지런히 걷고 있었고, 거리의 노점상은 급한 사람들의 허기를 돈으로 바꾸기 위해 음식을 내놓고 있었다. 어제 저녁 이후 먹은 것이라고는 강냉이 반 봉지밖에 없었지만, 너무 피곤해서 머리가 아플 지경에 다다르자 식욕저하의 단계를 뛰어넘어 식욕거부의 단계에 도달했다.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출근하러 나오는데, 나는 그 시각에 귀가했다. 아침 6시 반. 대충 세수하고 발을 씻고 방에 들어와서 이번 여행을 통해 구입한 기차표를 사진으로 한 장 찍었다. 컴퓨터는 아예 켜지 않았다. 컴퓨터를 켜면 잠을 안 자고 컴퓨터를 하다가 시험시간에 잠들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계획은 아침에 돌아와서 벼락보다 빠른 속도로 열심히 공부를 해서 시험을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피로로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고, 머리 속에는 오로지 잠을 자야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시험은 오전 11시 시작이었기 때문에 앞으로 4시간을 버텨야한다는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차라리 잠이나 자자.'
그것이 오히려 현명할 것 같았다. 잠깐 잠을 자고, 맑은 정신으로 시험을 보는 것이었다. 단어장이야 없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사전 지참이면 사전만 열심히 찾아도 문제는 다 풀 수 있었다. 이 나를 타락으로 항상 몰고가는 자신감...힘들 때면 언제나 내 곁에서 알 수 없는 행복과 용기를 불어넣으며 돈이 없을 때는 지름신의 모습으로, 시험공부를 급히 해야할 때는 출처불분명의 잡히지도 않는 알딸딸한 형상의 지식으로 나타나는 이 자신감이 다시 강림한 것이었다.
디카를 책생 위에 올려놓았다. 일단 건조를 시킬 생각이었다. 망원/광각 컨버터 및 초 가난 안구에 쓰나미 자작 광각렌즈는 아예 정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잠을 청해도 아무리 많이 자야 3시간이었다. 그래도 나의 이성은 아직 살아있었다. 9시에 일어나서 딱 1시간만 공부를 하자! 밤도 많이 새곤 했는데, 이 정도로는 끄덕 없다. 2시간만 자면 된다. 단양역에서도 자고, 기차 안에서도 잤다. 수면은 이제 충분하다. 다시 자기최면모드에 돌입했다. 어정쩡하게 긴장을 풀면 피로가 가중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단양역과 기차안에서 잔 것은 오후 1시까지만 놓고 보았을 때 엄연한 실수였다. 단양역에서 잤다면 기차안에서 잠을 완벽히 깨야만 했다. 그러나 문제는 기차안에서도 잤다. 그러나 너무 졸렸다. 시험이고 나발이고 간에 일단은 잠부터 자는 것이 순서였다. 그래서 찾은 적당한 타협점이 바로 아침 9시에 일어나 한 시간 동안 공부를 하고 시험을 보러 가는 것이었다.
얼마나 잤을까? 아침 햇살 치고는 상당히 뜨겁다고 생각했다. 시계를 보았다. 11시 25분이다! 앗싸가오리~시험 늦었다. 늦은 정도가 아니라 이 정도면 시험을 못 본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행히 머리가 떡지지는 않았지만, 여기에서 학교까지 가면 대충 10분, 그러면 11시 35분, 그런데 갑자기 배는 왜이리 아프지? 화장실부터 갔다왔다. 순간 머리 속에서 오만 생각이 다 떠올랐다.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시험지에 이름만이라도 쓰게 해달라고 빌어볼까? 아니면 남자답게 시험을 깔끔히 접어버릴까? 그러나 아직 세상에는 따스한 빛이 있었다.
화장실에서, 그리고 방에 돌아와서 잔머리를 열심히 굴리고 있었는데,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이 있었다. 지난번 시간, 교수님께서는 시험진도까지 진도를 나가지 못하셨고, 시험출제를 이미 끝내버리셨기 때문에 시험날 진도를 다 나가고, 바로 시험을 치르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그 교수님 스타일이라면 시험진도까지 나가는데 대략 한 시간은 걸릴 것이고, 아무리 빨라도 30분은 걸릴 것이다.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지금 출발하면 아무리 운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해도 시험시간으로부터 10분 정도 늦는 것이었다!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다. 잠잘 때 입었던 반바지와 오래된 반팔 티셔츠 위에 남방을 대충 입고 가방에는 책 하나 집어넣고 양말은 여행갈 때 신었던 것을 그대로 신은 뒤에 반바지이기 때문에 발목까지 접은 후 학교로 뛰어갔다.
강의실에 도착했을 때, 시험지는 모두 나누어져 있었고, 교수님께서는 시험지를 보시며 해석을 해 주시고 계셨다. 시험의 1,2번이 바로 오늘 진도를 나갈 부분이었기 때문에 1,2번은 점수반영이 안 될 것이니 대충 칸만 채우라고 하시고 직접 해석해주시고 계셨다. 교수님께서는 나를 보시자마자 '자네가 왜 시험에 안 오는지 궁금했네'라고 말씀하셨다. 문제는 바로 내 시험지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교수님께서 보고 계신 시험지가 바로 마지막 남은 한 장, 바로 내 시험지였다.
교수님께서 열심히 2번 문제 해석을 해주시고 계셨지만, 잠이 밀려왔다. 바로 앞에서, 정말 10cm만 더 나가면 교수님과 내 머리가 부딪힐 거리에 있었지만, 잠이 밀려와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교수님께서는 2번문제까지 해석을 다 해 주신 후, 내게 시험지를 주시며 시험 문제를 풀라고 하셨다. 1,2번 문제 해석해주시는 동안 졸았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보다 졸지에 두 문제를 더 풀게 되었다. 지문 10개 정도를 번역하는 시험에서 2개가 더 추가되니 거의 12개였다. 즉, 엄청나게 많은 문제였다. 아무리 내가 이것과 관련된 일을 1년간 했다고 하더라도, 손으로 쓰는데 걸리는 시간도 있었고, 사전을 찾는데 걸리는 시간도 있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썼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거의 초인모드 알타비스타 번역기 모드였다. 평소에 내 손이 그렇게 빨리 움직이고, 내 머리가 그렇게 빨리 돌아갔다면 전과목 A+의 영예를 매 학기마다 맞이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이보다 번역을 더 빨리 한 적은 없었다. 틀을 잡아놓고 고유명사와 숫자만 바꾸어서 할당량을 채울 때를 제외하면, 내 생애에서 가장 빠른 번역속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험에서 나는 진정 알타비스타 번역기였다. 속도는 클릭하는 순간 번역이 다 되는데, 잘못된 번역도 많고, 앞뒤가 애매한 번역도 많고, 하여간 속도만 빠르고 이래저래 문제가 많은 알타비스타 번역기 모드였다.
시험을 다 풀고 교수님께 인사를 드리자 교수님께서는 내게 "자네, 너무 야위었어. 힘든 일이 있더라도 항상 웃으면서 지내게."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런데 문제는 내 복장이었다. 그 강의실에서 오로지 나만 구겨진 반바지에 여행으로 인해 꾀죄죄해진 남방을 입고 있었다.
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다른 교수님과 마주치게 되었다. 교수님께 인사를 드리자 교수님께서는 내 복장을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 교수님께 오후 5시 반까지 연구실에 나가겠다고 말씀드린 후,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내가 한 일은 바로 삼각대를 사러 간 것이었다. 전날, 삼각대가 없어서 상당히 불편했기 때문에 삼각대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남대문을 향해 집을 나선 것은 오후 1시 40분이었고, 수업은 오후 3시 시작이었다. 그 수업은 오늘 종강예정이었다.
'오후 4시에 강의실 들어가자.'
집에서 자고 있던 H군을 전화로 깨워서 남대문에 가서 삼각대를 사고, 조금 돌아다니다가 바로 집으로 돌아와서 집에 삼각대를 놓고, 잠시 쉬다가 학교에 갔다. 강의실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4시 20분이었다. 강의실에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망했다...'
동기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수업이 일찍 끝난 것이냐고 물어보자 동기가 말했다.
"오늘 휴강했어. 너 안 오길래 나는 네가 5,6교시 수업 휴강되었다는 소식 듣고 일부러 안 온 줄 알았지. 전화 좀 켜놓고 다녀. 연락이 안 되니까 알려줄 수가 없잖아."
그런 것이었다...평소 툭하면 전화를 끄고 자유를 만끽하다보니 주변 사람들이 내게 연락을 취하기 매우 불편했던 것이었다.
이렇게 나의 길고 긴 이틀간의 여행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