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나의 정말 정신나간 이야기 (2006)

나의 정말 정신나간 여행기 - 05 경상북도 풍기

좀좀이 2011. 11. 15.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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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에 드디어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풍기에 딱 하나 있는 농협으로 달려갔다.  정말 내가 아는 모든 신이라는 신의 이름은 다 부르며 은행에 뛰어가서 잔액을 확인해 보았다.  과연 끝나지 않는 고난의 행군은 계속될 것인가?


그 결과는 바로 '오늘만은 고난 끝, 행복 시작'이었다!  드디어 매달 들어오기로 되어 있으나, 학교 파업으로 인해 들어오지 않던 봉급이 들어온 것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전날, 학교 직원 앞에서 한 푸닥거리를 한 효과가 바로 나타난 것이었다.


H군에게 빌린 돈을 단번에 청산하고, 집에서 빌렸던 돈 역시 모두 갚자 내 수중에는 돈이 또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도 이것이 어디냐...돈 500원을 아끼기 위해 고시원에서 제공되는 김치를 볶아서 매일 밥을 비벼먹다가, 그것도 질려서 나중에는 그냥 맨밥에 물을 부어서 한 사발 들이키고 식사 잘 했다고 이 쑤시는 날도 많았다.  하루는 맨밥에 물을 부어서 한 사발 들이키는데 눈물이 찔끔 나오려고 했다.  차라리 내가 소득이 없는 것이라면 덜 서러운데, 내 정당한 노동의 댓가가 엉뚱한 사람들의 힘겨루기로 인해 안 나오고, 그로 인해 이번학기부터 내가 생활비를 벌어서 살겠다고 외치자마자 집에 손을 내밀어야할 위기에 처했다는 생각이 들자 너무 서러웠다.  H군은 툭하면 내게 빌붙으려고 했고, 심심하면 옆에 와서 D50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힘들어 죽겠다고 찡얼거리고 있었다.  솔직히 지금 내가 학생이기 때문에 집에 손을 내미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집에 '이제 일자리를 구했으니 생활비는 제가 벌어서 쓸게요'라고 전화를 통해 말했을 때, 부모님께서 좋아하셨지만 그것을 누르면서 힘들면 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 때문에 차마 전화를 할 수 없었다. 


가뜩이나 현재 학업과 나의 꿈과 이상이 맞지 않아 힘든데, 경제적으로, 그리고 주변의 친구라는 놈까지 이래저래 힘들게 해서 여행을 떠난 것이었다.  바로 다음날이 시험이었지만, 떠나지 않으면 질식할 것 같았기 때문에 훌쩍 떠나버렸다.  그러나 한동안 그런 인간 이하의 생활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이제 앞으로 최소한 하루에 5천원은 쓸 수 있다!  최소한 인간답게 하루 한 끼는 라면을 먹을 수도 있고, 기분좋게 담배를 태울 수도 있다!  이번달은 빚을 제하고, 구입하기로 예정된 것들을 구입하면 돈이 얼마 남지 않겠지만, 지난달처럼 인간 이하의 생활은 하지 않아도 된다!  즉...살았다!


이제 내가 광란의 구매만 하지 않으면 고난의 행군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너무 기뻤다.  순간 단백질을 섭취하라는 몸의 욕구가 머리로 전해졌다.  탄수화물이야 집에서 밥으로, 섬유질과 지방은 볶은 김치로 섭취를 했지만, 단백질만은 섭취할 방법이 없었다.  풍기하면 인삼과 마늘, 그리고 인삼과 마늘을 둘 다 섭취할 수 있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삼계탕이었다.  동네 주민들께 어디에 가는 것이 가장 좋고, 여기에서만 맛 볼 수 있는 음식이 뭐냐고 여쭈어보자 한결같이 '인삼갈비탕'이 여기에서만 맛 볼 수 있는 음식이고, 인삼이 유명하기 때문에 삼계탕도 좋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인삼갈비탕이 맛있는 집은 차로 가야하기 때문에 삼계탕이 맛있는 집으로 가라고 하셨다.


삼계탕집에 가서 느긋하게 음식을 기다리는데, 역시나 시골인심이었다.  우리가 서울에서 왔다고 하자 우리에게 인삼주 4잔을 주셨다.  맛이 좋았다.  인삼주는 참이슬, 두꺼비와는 또 다른 술이었다.  삼계탕 역시 맛있었다.  가슴살이 푸석거리지 않았고, 인삼도 맛있었다.  그리고 생마늘이 압권이었다.  확실히 생마늘이 맛이 좋았다.  씹는 순간, 매운 맛이 혀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 느낌과 마늘 냄새가 역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기분좋게 배를 채우고 나와서 담배를 한 대 태웠다.  이런 재떨이를 얼마만에 본 것인지 모르겠다.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이렇게 여행을 끝내기는 아쉬웠다.  결정적으로 내게 여유자금이 생겼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더 놀 수 있었다.  하늘을 보았다.  약간 애매한 날씨였다.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갈까?  영주와 단양, 둘 중 한 군데를 선택해야 했다.  여기에서도 경제적 논리가 적용되었다.  영주는 풍기보다 뒤에 있는 역이고, 단양은 앞에 있는 역이다.  즉, 기차삯에서 단양으로 가는 것이 영주로 가는 것보다 이득이었다.


우리는 일단 걸어가기로 했다.  방향을 확실히 몰랐기 때문에 버스기사 아저씨께 길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버스기사 아저씨께서는 우리보고 미쳤다고 하셨다.  우리는 남아도는 것이 시간이라서 단양까지 걸어갈 생각이라고 말씀드리고는, 계속 걸었다.  표지판이 나왔다.


-단양 40km


40km...푸하하 고작 40km야!  단양이 멀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40km밖에 안 되잖아!  충분히 걸어갈 수 있어!  10시간만 걸어가면 되는 거리잖아!


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40km...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솔직히 무리였다.  단양에 가 보고 싶었지만, 그 욕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다음날 시험이었다.  다음날 시험은 사전을 지참하고 지문을 번역하는 시험이었기 때문에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시험이었다.  이것은 무턱대고 '가는거야!'라고 소리칠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바로 부석사에서 풍기까지 왔을 때 사용했던 '차 잡아서 신세지기'였다.


그러나 이제 그 운도 끝난 것 같았다.  차들은 부석사~풍기 도로를 달리던 속도의 거의 1.5배 되는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세워줄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겨우 두 대를 잡기는 했지만, 모두 단양이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안 된다고 하셨다.  날씨는 참 좋았다.  모내기가 막 끝난 논에는 풍경이 비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단 계산을 해 보았다.  한 2km 걸었으니 앞으로 약 38km를 더 걸어야한다.  그런데 고향에 있을 때 함덕에서 제주시까지 걸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기억으로는 거리 이정표에 나온 거리라는 것은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즉, 여기에서 단양까지 40km라는 것은 시 경계지점까지 40km가 남았다는 것이고, 단양역이 있는 곳 까지는 50km가 될지, 60km가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다음날 시험을 보러 갈 수 없었다.  그리고 날씨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거리에는 가로등이 많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해가 떨어진 이후, 한 시간에 3km를 걷기도 힘들고, 사고 위험도 매우 높았다.


 

그래서 H군에게 돌아가자고 제안했다.  H군은 아직 차를 잡아 신세를 지는 것에 미련을 못 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차를 직접 잡는 입장이었던 나는 (내가 차를 잡고, H군이 말해서 얻어타기로 역할분담이 되어 있었다.) 차를 잡는다는 것이 완벽히 불가능하고, 더욱이 단양에서 단양역까지 가는 것을 계산하면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 우기듯이 돌아가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비는 얄궂게도 우리가 뒤돌아서서 돌아가면 멎고, 다시 뒤돌아서서 앞으로 가려고 하면 다시 내리곤 했다.


결국 한참을 단양 쪽으로 걸어갔다가 풍기로 돌아왔다.  우리는 일단 풍기역에서 기차시간을 본 후에 어찌할 지를 결정하기로 했다.


풍기역에 가서 기차시간을 보았다.  밤 8시 즈음에 청량리로 가는 막차가 있었다.  H군은 가장 개발이 안 된 동네가 어디이냐고 역무원 아저씨께 물어보았고, 역무원 아저씨께서는 단양역에 가 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역무원 아저씨께서는 단양역 앞에 가면 아무 것도 없고, 시내로 들어가는 승객을 맞이하기 위한 택시만이 줄을 서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로써 우리의 목적지는 정해졌다.  단양에 가는 것이었다.  단양에서 걸으며 6시간을 보낸 후, 단양역에서 첫차를 타고 청량리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기차를 타기 전, 역 앞에서 밤참을 대신할 강냉이와 800원짜리 대형 음료수를 구입한 후, 역에 들어갔다.  이제 머리 속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돈에 대한 부담도 어느 정도 사라졌고, 여유도 생겼다.  '풍기가 조금만 더 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또는 '내일이 시험만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내 말대로 어제 영월에 갔다면 얼마나 재미있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풍기에서 너무 좋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일단 인심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차를 무려 두 번이나 얻어탔고, 교과서에 그렇게 나오고 주입식 교육으로 그렇게 세뇌당한 부석사 무량수전도 직접 눈으로 보았다.  시골의 여유와 시골장터의 구수한 맛도 보았고, 그 유명한 풍기 인삼과 유독 많이 보이던 마늘도 먹어보았다.


기차를 기다리며 잠깐동안, 정말 잠깐동안 나의 미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진로문제로 인해 상당히 골치가 아팠다.  비록 내가 글을 쓰고, 토론하고, 사진 찍는 것을 매우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리고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내 적성에 어학은 정말 맞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 전공은 나와 내 고향을 거의 영원히 떼어놓을, 그리고 나를 거의 영원히 도시에 묶어버릴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사람냄새가 제대로 나는 시골이 좋았다.  그리고 서울의 화려하고 복잡한 것보다는 시골의 소박하고 단순한 것이 좋았다.


그러나 돈이 사람을 얼마나 힘들게 만들 수 있는지 이번 일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금전적으로 힘든 H군조차 나를 보고 무언가 힘든 것에 쩔어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내가 앞으로 선택해야할 길은 무엇일까?  길은 많다.  하나의 목표가 있으면, 갈 수 있는 길은 여러 갈래로 뻗어있다.  나는 그 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다양한 방법과 다양한 길 가운데 나는 하나의 방법과 길을 선택해야하는 것이다.  부석사까지 걸어갈 수도 있고, 차를 타고 갈 수도 있다.  정해진 길로 갈 수도 있고, 시간만 된다면 뱅글뱅글 돌아서 갈 수도 있다.  단양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상황에 가장 적합한 길을 찾아 가는 것일 뿐이다.  가는 길은 여러갈래이지만, 현재 상황에 가장 적합한 길 하나를 찾아가는 것이다.


역 안이 갑자기 환해졌다.  그리고 방송이 흘러나왔다.  기차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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