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군의 전화로 인해 새벽 한 시에 잠을 깨버리고 말았다. 땡전 한 푼 없어 굶주림을 잊기 위해 일찍 잠이 들었는데, H군의 전화가 나에게 굶주림을 되돌려주고 말았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올랐다. 그러나 한 번 도망간 잠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6월 9일에는 시험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이래저래 쉽게 집중이 되지 않았고, 결국 새벽 6시, H군과 나는 당일치기 기차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H군이 전날, 내게 함께 새병열차를 타고 여행을 갈 생각이 없냐고 물어보았다. 그때 나는 전날 저녁에 영월에 가서 동강까지 걸어간 후,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 아침에 해가 뜨는 것도 보고 동강 및 영월을 구경하다가 점심때쯤 돌아올 계획이었다. 그러나 H군은 피곤하다고 아침에 여행을 가겠다고 했고, 나는 원래 여행을 가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결국 고단함에 찌드는 것에서 조금 쉬고 싶다는 생각에 아침에 전화를 때려 H군과 여행을 함께 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단 5분만에 (세수조차 하지 않았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여행길에 올랐다. 다음날이 시험이었지만, 일단은 그냥 기차를 타고 멀리 떠났다 돌아오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비가 온다던 일기예보는 순전히 거짓말이라고 믿을만큼 하늘은 많이 개어 있었다.
마땅히 갈 곳도 정하지 않은 채, 일단은 전철을 타고 청량리역으로 갔다. 영동선은 내가 다음날 시험을 치러 학교에 가야했기 때문에 탈 수 없었고,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철도는 중앙선밖에 없었다. 중앙선 역 가운데 풍기를 갈지, 단양을 갈지 고민하다가 '풍기 인삼시장'이라는 글을 보고 풍기에 가기로 결정했다.
새벽 6시 50분 차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우리를 제외한 승객 전원이 늙으신 분들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였다. 처음에는 모두 잠을 자느라 정신없었다. 깨어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 뿐이었고, 간식을 파는 수레조차 새벽 열차라서 그런지 돌아다니지 않았다.
나는 다음날 11시에 기말고사가 있었기 때문에 시험과목 교재 1권과 사진촬영기법을 다룬 책 한 권을 들고 갔다. 기차 안에서 창밖을 보다 책을 보다 하며 여행을 즐기다 한 가지 깨닫게 되었다. 필기구를 들고오지 않은 것이었다. 다음날 시험은 사전 및 단어장 지참이 가능한 시험이었기 때문에 처음 계획은 기차에서 단어장을 만들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급히 나오느라 완전 엉망이 되고 말았다.
이제 돌아갈 수도 없고 어찌하리...그냥 시험과목 교재를 몇 번 대충 읽은 후, 창밖을 바라보았다. 간간이 사진을 찍을만한 것이 있었지만, H군이 창가쪽에 앉고, 내가 안쪽에 앉았기 때문에 도통 찍을 수가 없었다. H군의 카메라가 하필이면 D50이다보니 H군이 사진을 찍기 위해 창가에 붙으면 내가 찍을 수 있는 자리는 생기지 않았다. 앞좌석에는 할아버지 한 분이 누워서 주무시고 계셨기 때문에 의자를 돌릴 수 없었다. 그러다 어떻게 한 컷을 찍게 되었다.
얼레? H군을 밀치고 급히 찍은 사진인데, 색감이 아주 마음에 들게 나왔다. 찐득찐득한 느낌을 주는 것이 마치 로모카메라 사진이 주는 색감같다. 어떻게 이런 사진이 나왔지? 기차를 타고 가는 길에 계속 생각해 보았지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유리창의 반사가 이런 색감을 만들어 준 것일까? 만약 이런 느낌이 나오는 필터를 만들면 꽤나 많이 팔릴 것 같다. 방학하면 한 번 연구해서 만들어보아야겠다. 많은 DSLR유저들과 일반인들이 로모카메라를 욕하기는 하지만, 로모카메라의 색감이 참 찐득찐득하고 10년 전 기억이 주는 느낌과 같아서 묘하게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런 묘한 느낌을 주는 필터를 만든다면 왠지 재미있을 것 같다.
기차는 계속 달렸다. 경기도를 지나서 강원도 원주로, 그리고 충청북도로 기차는 들어갔다. 풍기역 도착 1시간 전에 자고 있던 H군을 깨우고 잠깐 눈을 붙였다. 며칠동안 5시간 이상 잠을 청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너무 피곤했다. 나야 잃어버릴 짐이 없었지만, H군은 D50카메라와 렌즈를 껴앉고 잘 수 없었기 때문에 한 명은 깨어있어야 했다. 일단 H군과 임무교대를 하고나서 두 눈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