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벌써 12시잖아!"


족자카르타 왕궁인 크라톤을 다 보고 나니 12시였어요. 원래 계획대로 딱딱 맞아들어갔다면 이 시각에 저는 이쪽에서 볼 것을 다 보고 점심을 먹으러 가야 했어요. 점심을 먹고 숙소로 돌아가서 샤워 하고 파쿠알라만 크라톤을 보고 2시쯤 프람바난 사원으로 출발하는 게 이상적인 계획이었어요. 계획을 수정하든가 이제부터 뛰어다니며 보든가 선택을 해야 했어요.


적도 근처에서 마주하는 정오의 햇볕은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어요. 저를 굴복시킬 수는 없었지만 저를 충분히 피곤하게 만들고 있었어요. 선글라스도 모자도 걸리적거리기만 하는 존재들이라 짐 속에 쑤셔넣고 들고 나오지 않았어요. 그 덕분에 머리카락은 달구어지는 것 같았어요. 게다가 습하다보니 조금만 걸어도 땀은 비오듯 쏟아졌어요. 땀이 비오듯 쏟아지니 목이 마르고 입 안은 찝찔했어요.


'오늘 파쿠알라만 크라톤 보는 건 포기해야 하나?'


이제 이 동네에서 볼 것은 타만 사리와 카우만 모스크가 남아 있었어요. 이 둘의 방향은 반대였어요. 왕궁을 기준으로 따만 사리는 말리오보로 거리 반대쪽으로 걸어들어가야했고, 카우만 모스크는 말라오보로 거리 방향으로 걸어 올라가야 했어요. 둘이 그렇게 가까워보이지도 않았어요. 빨리 보고 파쿠알라만 크라톤까지 보는 방법이 있긴 있었어요. 그것은 베짝을 타고 돌아다니는 것. 베짝을 타고 돌아다닌다면 이동 시간이 얼마 되지 않으니 금방 다 볼 수도 있었어요.


나는 걷는다.


베짝을 타기 싫었어요. 그래도 여행 왔으면 걸어다니는 게 어울리는 이동 방법이 아니겠어? 정말 먼 거리라면 베짝을 타야겠지만 이건 못 걸어갈 거리도 아니잖아? 게다가 이렇게 탈 것을 타고 돌아다니면 길과 주변 풍경을 제대로 보고 사진을 찍을 수 없었어요. 사실 이 이유가 더 컸어요. 이 길을 또 걸을 일은 이번이 아니라면 이 여행 중에는 없었어요. 언젠가 요그야카르타를 다시 방문하게 될 때라면 몰라도, 이곳은 무조건 오늘 보는 것으로 끝낼 생각이었기 때문에 덥든 힘들든 사진도 찍어가며 걸어다니고 싶었어요.


이제 부지런히 걷는 일만 남았어요. 카우만 모스크는 포기해도 괜찮았어요. 점심 따위는 그냥 제껴도 상관 없었어요. 그렇지만 프람바난 사원만큼은 절대 포기하거나 양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만약 늦는다면 프람바난 사원을 허파가 터지도록 전력질주하며 구경하는 수가 있더라도 오늘 꼭 가야 했어요. 오늘 프람바난 사원을 못 간다면 그 대가는 끔찍했어요. 내일 하루 종일 땀에 절은 단계를 넘어선 땀에 찌들은 옷을 입고 있어야하는 것은 물론이고, 야간 이동도 있으니 이 꿉꿉한 옷을 입고 모레 점심때까지 버텨야 했어요. 기차 자체는 자카르타에 새벽에 도착할 예정이었지만, 숙소에서 얼리 체크인을 해주지 않으면 기차에서 입고 있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어야 하니까요.


"따만 사리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나요?"

"여기에서 왼쪽으로 가면 돼."


왼쪽? 이건 절대 아닌데?


크라톤 입구로 나와서 인도네시아인에게 타만 사리 가는 길을 물어보자 입구를 본 상태로 왼쪽으로 가라고 알려주었어요. 그러나 그 방향은 절대 아니었어요. 왼쪽으로는 나가는 길도 없었을 뿐더러, 방향이 타만 사리가 있는 곳과 정반대 방향이었거든요. 맞는 길이라면 분명히 오른쪽으로 가야 했어요. 아무리 타만 사리가 어디 있는지 몰라도 지도를 보면 방향이 어느 쪽인지 감은 잡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직원에게 다가가 물어보았어요.


"따만 사리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안으로 들어가서 오른쪽에 용무늬가 있는 문으로 나가서 5분 정도 돌아가면 나와요."


다시 안으로 들어가라구? 타만 사리와 크라톤은 연결되어 있었던 건가? 그보다 용무늬가 있는 문은 대체 어디 있다는 거지? 그런 건 보지 못했는데?


직원이 안으로 다시 들어가서 오른쪽에 있는 용무늬 있는 문으로 나가라고 알려주었기 때문에 일단 다시 왕궁 안으로 들어갔어요. 왕궁 안으로 들어가기는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직원 말이 맞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일단 '오른쪽'이라는 말과 '직원'이라는 지위 때문에 말 대로 가보기는 하지만 계속 이거 엉뚱한 길 알려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어요.


궁전 안으로 들어가서 오른쪽을 유심히 살펴보았어요. 멀리 용무늬가 있는 문이 보이기는 했어요.


"따만 사리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한 인도네시아인이 직원과 이야기하는 것이 보여서 그들에게 다가가 물어보았어요.


"제가 지금 점심 먹으러 집에 가는 길인데 방향이 그쪽이에요. 제가 도와줄께요."

"고맙습니다."


인도네시아인은 제게 따라오라고 하더니 용무늬가 있는 문으로 나갔어요. 문을 나서자 전통 가옥들이 쭉 있는 작은 길이 나왔어요.



"여기는 옛날에 군인들과 기술자들이 살던 곳이에요."


크라톤에서 타만 사리로 가는 길에 형성되어 있는 마을은 과거 왕궁을 지키던 군인들 및 수공인들이 살던 곳이라고 알려주었어요. 그렇다면 여기가 서울의 서촌쯤 되는 곳이구나. 서촌은 종종 놀러가는 곳이라 족자카르타 와서 서촌 같은 마을을 걷는 것이 신기하면서 익숙하게 다가왔어요. 왠지 같은 주제 다른 모습을 보는 기분이었어요. 주변을 천천히 살피며 길을 걸어갔어요.


"이 길을 따라 쭉 가면 큰 나무가 나오는데, 거기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타만 사리가 나와요."

"고맙습니다."

"전통 공예 보러 갈래요?"

"전통 공예요?"


인도네시아인은 제게 따라오라고 했어요.



indonesian doll


이거 아까 소노부도요 박물관에서 보았던 거잖아!


직접 만들고, 그 자리에서 판매하는 곳이었어요. 무엇을 마시겠냐고 물어보자 물이나 한 잔 달라고 하고 직원 이야기를 들어보았어요. 직원은 인도네시아의 문화가 매우 독특하다고 알려주었어요. 인도네시아에는 힌두교, 이슬람이 있는데, 인도네시아의 힌두교는 인도의 힌두교와 다르고, 인도네시아의 이슬람도 아랍의 이슬람과 다르다고 했어요. 인도네시아의 힌두교가 인도의 힌두교와 어떻게 다른지 영어로 자세히 설명해주는데 힌두교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서 뭐라고 하는지 거의 이해하지 못했어요. 인도네시아에 힌두교 문화가 많이 남아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힌두교 관련 공부는 전혀 하지 않고 왔어요. 게다가 힌두교는 신이 하도 많아서 뭐가 뭔지 몇 번 대충 보는 것으로는 감도 잡을 수 없었어요. 왜 똑같은 신이 여러 모습으로 나오고 그것마다 또 다른 신이 되는지 아예 이해불능이었어요. 이건 이해도 안 되고 외우는 것도 안 되는 그냥 복잡하고 어려운 세계. 인도네시아의 이슬람이 아랍의 이슬람과 다르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서 설명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아랍의 이슬람과의 큰 차이 중 하나가 인도네시아 이슬람에서는 율법의 해석이 보다 자의적이라는 점이에요. 마음대로 엉터리로 해석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보다 주관적으로 해석,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 상황이 죽을 상황까지는 아니지만 내가 죽을 상황이라고 느꼈다면 그 상황은 죽을 상황이라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자세한 설명을 듣고 대충 안을 둘러본 후 밖으로 나왔어요.


"루왁 커피 마시러 갈래요?"

"아니요, 괜찮아요."

"거기는 공짜에요. 구입 안 해도 되요."


조금 더 걸어가자 루왁 커피를 만들어 파는 집이 있었어요. 안에서는 서양인들이 루왁 커피를 시음하고 있었어요. 루왁 커피는 사향 고양이에게 커피콩을 먹이고, 사향 고양이가 배설한 커피콩으로 만든 커피라고 해요.


사향고양이


집 한켠에는 사향고양이가 갇혀 있었어요. 사향 고양이라고 하는데 고양이처럼 생기지 않아서 신기하게 쳐다보았어요.


"커피 시음해보실래요?"

"아니요, 괜찮아요."


인도네시아 루왁 커피


이것이 바로 사향 고양이의 배설물. 의외로 배설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생겼어요.



이 집에서 정말 인상깊었던 것은 이 조각이었어요. 이 조각이 작은 것으로 있었다면 그건 진짜 구입했을 거에요. 하지만 그런 건 없었어요.


길안내를 도와준 인도네시아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이제 시간이 별로 없어서 먼저 가보겠다고 말하고 헤어졌어요. 물건을 강매하는 분위기는 전혀 없었고, 특별히 물건을 구입한 것도 없었어요. 아까 본 것이기는 했지만 전통 꼭두각시 인형 제작하는 것도 보았고, 사향 고양이와 루왁 커피 원료인 사향 고양이 배설물도 보았어요.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런 호객행위라면 나쁠 것은 없었어요. 비록 구입하면 좋겠다는 눈치를 보내기는 했지만 구입하기 싫으면 구입 안하면 그만이었어요. 그리고 공짜로 설명 듣고 구경도 했어요. 오히려 되도 않는 가이드 시늉하다가 나중에 돈 요구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게 수만 배 더 좋았어요. 제가 찾는 기념품이 없었기 때문에 구입을 아무 것도 안 한 것이지, 만약 있었다면 구입을 했을 거에요. 일단 직접 만드는 것을 확인하고 구입하는 것이니까요. 여행 다니며 기념품 살 때 가장 열뻗치는 일이라면 기껏 구입해서 나중에 확인해보니 'made in china' 가 먼지처럼 작은 글씨로 적혀 있는 경우거든요. 진짜 이거 당하면 아무리 거의 공짜 가격에 구입했다고 해도 제대로 열받아요.


알려준대로 걸어가니 큰 나무가 나왔어요.



나무에서 방향을 꺾어 골목으로 들어갔어요.



아...더워...


도저히 더위를 견딜 수 없어서 가게로 들어가 음료수를 하나 구입했어요. 가게 앞 탁자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며 주변을 살펴보았어요.



"일단 맞게는 왔구나."


앞에 있는 것은 소코 퉁갈 모스크 masjid soko tunggal 였어요.


"이왕 왔으니 들어가보자."



평범한 가옥을 모스크로 쓰는 듯한 외관이었어요.






모스크 옆은 공동묘지였어요.



모스크에서 조금 더 걸어가자 드디어 타만 사리 Taman Sari 가 나왔어요.



타만 사리는 18세기에 지어졌어요. 타만 Taman 은 자바어로 '정원, 공원' 이라는 뜻이고, 사리 Sari 는 자바어로 '아름다운, 꽃들'이라는 뜻이 있다고 해요.


입장료 12500루피아를 내고 안으로 들어갔어요.



문을 통과하자 드디어 타만 사리에서 가장 유명한 연못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이거 멋진데!"


족자카르타 타만 사리


Taman sari


일단 연못 감상은 잠시 뒤로 하고 타만 사리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어요.




연못 외에는 그렇게 크게 볼 게 없었어요. 다시 연못으로 가서 천천히 타만 사리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시작했어요. 타만 사리 연못에서 여자들이 놀고 있으면 술탄이 여자를 지목해서 밤을 보냈다고 해요.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의 시토라이 모히 코사와 비슷한 이야기가 담긴 곳이었어요. 시토라이 모히 코사는 초대형 수영장이 하나였던 데에 비해 여기는 작은 수영장이 두 개.





역시 돈이 중요하구나.


타만 사리를 보자 알함브라가 떠올랐어요. 알함브라에 가서 연못을 보았을 때 이런 느낌이었어요. 차이점이라면 알함브라는 관리가 잘 되어서 매우 깔끔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는 것 정도였어요. 타만 사리도 깨끗하게 정비하고 페인트칠 새로 하고, 바닥 청소 한 후에 물 가득 채우고 분수 가동시키면 알함브라 못지 않게 아름다운 장소가 될 거에요. 주변 정비까지 한다면 더더욱 아름다워질 거구요. 그렇게 한다면 '스페인에는 알함브라, 우즈베키스탄에는 시토라이 모히 코사, 인도네시아에는 따만 사리' 라고 해도 모두가 납득할 거에요. 하지만 이렇게 쫙 정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돈. 역시 인문환경에서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은 돈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보고 느끼게 되었어요.


따만 사리는 건물 위로도 올라갈 수 있었어요.




저거 뭐지?


건물 위로 올라가서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어요. 따만 사리 주변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 어느 집 앞에 작은 플라스틱 욕조가 있었고, 그 옆에 시멘트로 만든 무언가가 보였어요.



우물이었어요. 이 동네는 아직 우물물을 사용하고 있었어요. 여기서 지하수를 퍼서 마시면 삼다수를 마시는 건가? 보통 외국에서 생수를 사서 마시는 이유는 석회질 문제와 위생 문제 때문. 여기는 화산 지형이니 물 자체만 놓고 본다면 제주도 지하수와 비슷하지 않을까? 위생만 보장된다면 한 번 마셔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런 추측과 달리 실제 인도네시아의 물은 석회질이 많이 들어 있어서 그냥 마시면 몸에 안 좋다고 하지요.



yogyakarta



타만 사리를 보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어요. 따만 사리 자체를 둘러보는 데에 걸린 시간은 10분 남짓일 정도로 규모가 크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곳이 제대로 보수가 된다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곰곰히 생각하며 보다보니 의외로 시간이 조금 걸렸어요. 아예 방치되어 있는 유적은 아니었지만 무언가 아쉬운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어요. 이쪽이 잘 정비된다면 아마 사람들이 줄을 서서 여기로 들어오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느긋하게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닐 수도 없었을 것이구요. 알함브라를 구경할 때에는 아침 일찍 가서 연못 사진을 찍기 위해 연못으로 달려갔었어요. 여기는 알함브라보다도 규모가 작으니 만약 잘 보수되고 주변 정비도 잘 이루어진다면 사람들로 바글바글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어요.


반응형

Posted by 좀좀이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