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을 되찾은 후, 짐검사를 받고 기차역 안으로 들어갔어요.


"나 씻고 온다."

"너는 꼭 이럴 때 씻냐?"

"그러면 어디에서 씻어? 너 안 씻을 거야?"

"나는 기차에서 씻을 거야."

"믿음이 안 가는데?"

"진짜야!"

"퍽이나 기차에서 씻겠다. 기차 꼴이 그따위인데 어떻게 씻어? 이제 기차 타자마자 바로 안 씻고 골아떨어진다."


친구에게 짐 좀 봐달라고 하고 세면도구를 챙겨서 화장실로 갔어요. 세면대에서 양치하고 세수하고 머리를 감았어요. 정신이 맑아졌어요. 세면도구를 들고 자리로 돌아와서 친구 옆에 앉았어요. 친구는 또 과자를 먹어보라고 했어요. 하나 다 안 먹어보아도 좋고 부스러기라도 맛보라고 했어요. 그러나 싫다고 했어요. 정말로 그 과자는 먹기 싫었거든요. 친구의 과자를 보니 부서져서 가루로 되어버린 부분이 꽤 많았어요. 저거 먹으면 입안이 텁텁하고 갈증나서 물 마시고 싶어질 것이 뻔했어요. 과자가 너무 잘 부스러진다는 것만 독특했어요.


"오늘도 우리 농민공들 바글거리는 곳으로 자리 준 거 아냐?"

"진짜 오늘은 농민공들 사이에 낑겨서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실 저는 누가 우리와 같이 앉아서 가든 별 상관 없었어요. 너무 더럽지만 않으면 그것으로 되었어요. 절세미녀가 와서 앉든 농민공 아저씨가 와서 앉든 그게 그거였어요. 왜냐하면 저는 중국어를 모르니까요. 말을 나눌 수 있어야 같이 앉아서 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의미가 있지요. 친구는 중국어를 할 줄 아니 누가 같이 앉아서 가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요.


"너는 중국어 되니까 예쁜 여자가 너 옆에 앉으면 좋잖아?"

"좋기는 뭐가 좋아?"

"누가 작업 걸어보랬냐? 맛집 같은 거 물어볼 수 있으면 좋잖아."

"음...그렇긴 하지."


친구와 잡담을 하다 또다시 마찬가지로 개찰구 앞에 줄을 섰고, 개찰구 문이 열리자 마구 달려서 기차에 올라탔어요. 이번에는 제가 복도쪽이고 친구가 가운데 자리였어요.


"나 씻고 온다."


아까 제가 친구에게 분명히 너는 오늘 안 씻고 그냥 잔다고 했더니 친구가 그 말을 잊지 않고 자리를 잡자마자 바로 씻으러 기차 화장실로 갔어요. 친구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친구 옆자리에 앉을 승객이 와서 앉았어요. 여대생 같았어요. 단발 머리에 안경을 쓰고 있었어요. 친구들도 같이 탄 것 같았어요. 앞쪽에 그 여자 친구로 보이는 여자가 하나 앉았고, 복도 옆 자리에 두 명이 앉았어요. 자기들끼리 뭐라고 쏼라쏼라 이야기했지만 당연히 저는 한 마디도 못 알아들었어요. 친구 옆자리에 앉은 여자는 앉자마자 스마트폰으로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어요.


친구가 자리로 돌아왔어요.


"오늘은 농민공 아니다!"

"야, 말 걸어봐라."

"지금 드라마 보잖아. 쟤 지금 보는 거 다 끝나면 말 걸어볼께. 맛집이나 괜찮은 구경거리 같은 거 물어보면 되잖아."

"응. 내가 봤을 때는 B는 분명히 우리 믿고 여행 계획 하나도 안 짜올 거다."


제 앞에 앉을 사람도 왔어요. 아저씨였어요. 아저씨 또한 자리에 앉자마자 영화를 보기 시작했어요.


"시안 막 전통적이고 그래? 거기 사진 보면 중국 전통 건물 많이 있고 하던데."

"시안? 거기 그냥 대도시야. 너무 기대하지 마."

"응? 사진 보면 완전 전주 한옥마을 비슷한 거 같던데?"

"거기 그냥 대도시고, 성벽이 도시 감싸고 있어. 그냥 종로 같은 곳이라 생각하면 돼."

"그러면 그거 나름대로 볼만한 거 아니야? 어차피 서울 볼거리 종로에 다 몰려있잖아. 거기 막 중국 전통 거리 같은 거 많이 나오던데."

"아니야. 그냥 대도시고, 병마용이랑 적당히 몇 개 볼 거 있을 뿐이야."


친구의 말은 지금껏 제가 본 시안과 관련된 것들과 매우 달랐어요. 친구는 시안은 그냥 대도시이고 전주 한옥마을 같을 거라고 절대 기대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시안에서 뭐하지?"

"B한테 뭐 하고 싶은 거 있냐고 물어보고, 병마용 다녀오면 될 걸?"

"병마용 입장료 얼마야?"

"150위안."

"진짜 비싸네..."

"너는 그래도 이번이 처음이지. 나는 그거 갔던 거 너네들 때문에 또 들어가야 돼."


시안 일정을 어찌할까 논의를 하다가 앞에 앉은 아저씨가 보고 있는 영화를 보았어요. 영화 속에서 중국 팔로군이 일본 침략자들을 마구 무찌르고 있었어요.


"중국은 드라마나 영화 같은 거 어때?"

"중국꺼? 글쎄...막 재미있는 것은 모르겠다. 팔로군이랑 국공내전 다룬 것이 꽤 많아."


친구 옆에 앉은 중국 아가씨는 드라마에 아주 푹 빠져 있었어요. 멜로물 같았어요.


"이제 이 지긋지긋한 기차도 한 번만 더 타면 되네."

"그때 가다가 힘들면 침대칸으로 바꾸어도 돼."

"뭘 바꿔? 끝까지 이걸로 가야지!"


이 산업 폐기물 같은 열등한 의자에 앉아 중국 대륙 횡단을 완수하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생겼어요. 시안에서 상하이 가는 기차는 공식적으로 15시간 20분 동안 타야 했어요. 둔황에서 란저우 갈 때만큼 긴 이동이었어요. 야간 이동이라 백주대낮에 이동했던 둔황 - 란저우 구간보다는 조금 덜 지루하겠지만 딱 그거 뿐이었어요. 그러나 한 번만 더 고생하면 되고, 3일은 제대로 된 숙소에서 잘 테니 마지막에 버틸 수 있을 거였어요. 게다가 정 힘들면 상하이 가자마자 숙소 들어가서 드러누워서 쉬면 되구요. 딱딱한 의자에 앉아 중국을 횡단하는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요. 나중에 이게 욕심이 생긴다면 그 끔찍한 길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할테니까요. 이왕 참 끔찍한 거 완성되어가는데, 이 기회에 아주 끝장을 내버려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갑자기 친구 옆에 앉은 중국 아가씨가 펑펑 울기 시작했어요. 꺼이꺼이 목놓아 소리내어 울지만 않을 뿐이었지 눈물 콧물을 폭포수처럼 콸콸 쏟아내고 있었어요.


"야, 쟤 갑자기 왜 펑펑 울어?"

"뭔일이지?"


친구 옆에서 조용히 드라마 보던 사람이 갑자기 끄윽끄윽 울어대자 저와 친구 둘 다 당황했어요. 뭔 일인가 보니 드라마에 몰두하다 못해 여주인공으로 빙의해 있었어요. 드라마 장면을 보니 여주인공이 바리깡으로 머리를 박박 밀고 있었어요. 기차에서 옆에 앉은 사람이 드라마 여주인공으로 빙의해 펑펑 울어댈 거라고는 전혀 예상도 못했어요. 저는 친구가 실수로 그 아가씨 발을 콱 밟거나 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단지 드라마 여주인공에 빙의해 일어난 일이었어요.


앞에 앉은 아저씨는 팔로군으로 빙의했어요. 일본군을 향해 총을 빵빵 쏘고 있었어요. 총이 발사될 때마다 총알의 궤적을 볼 수 있었어요. 그나마 다행이라면 둘 다 이어폰은 꽂고 보고 있었다는 것이었어요.


갑자기 웃음이 나왔어요. 친구가 제 옆구리를 쿡 찔었어요.


"야, 왜 웃어?"

"그냥. 상황이 웃기잖아?"

"뭐가 또 웃겨?"

"농민공 아니라고 좋아했더니만 이번에는 완전 판타지에 포위되었어."


낄낄 웃자 친구가 황당해하면서 같이 웃었어요.


중국 아가씨는 코를 팽팽 풀며 여주인공으로 빙의해 슬픈 사랑의 이야기를 계속 써나가고 있었어요. 앞의 아저씨는 일본군의 심장을 향해 총을 빵빵 쏘고 있었어요. 잠시 후, 아저씨가 영화를 정지시키고 담배를 태우러 갔어요. 아가씨와 맞은편에 앉은 친구는 갑자기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내었어요.


휴대용 배터리!


딱 봐도 대용량 휴대용 배터리. 그것도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였어요. 아주 작정하고 배터리를 챙겨왔어요. 그 모습에 둘이 또 웃었어요. 아무 준비 없이 물만 덜렁 사들고 온 우리 자신이 부끄러워졌어요. 이렇게 긴 야간 이동을 하면서 그 어떤 것도 준비해오지 않았거든요. 그러니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재탕, 삼탕, 사골곰탕에 골분까지 내어서 흡입하고 우주 삼라만상에 대해 논하고 이야깃거리가 없어서 심심해하고 있었어요. 이 준비성 앞에 우리는 반성해야 했어요.


잠을 자는데 정말 불편했어요. 적응이 아직도 하나도 되지 않았어요. 잠이 들만하면 머리가 무릎으로 푹 떨어져서 잠에서 깨어났고, 기껏 신경써서 자세를 잡고 잠을 자면 이번에는 양 옆으로 머리가 흔들렸어요. 어떻게 겨우 잠들면 이번에는 허리가 아파서 또 잠에서 깨어났어요. 친구 옆 아가씨는 드라마 속 여주인공로 빙의해서 슬픈 사랑의 이야기를 찍고 있는데 저는 일제강점기 일본 순사에게 체포당해 고문받는 독립투사로 빙의한 기분이었어요.



잠에서 완벽히 깨어났어요. 잠을 잔 것도 아니고 안 잔 것도 아닌 상태라 머리가 찡했어요. 이 고문실에서 어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어요. 기절했다가 깨어난 용사처럼 고개를 흔들고 애써 정신차려서 옆을 바라보았어요. 친구는 괴로움에 몸을 떨고 있었어요. 시계를 보니 아침 7시였어요. 이제 슬슬 정신을 차려야 했어요. 친구를 툭툭 쳤어요. 친구는 눈을 부스스 떴어요.


"진짜 여기서 뛰어내리고 싶다."

"너는 그래도 복도쪽이라 다리라도 뻗고 잤잖아. 나는 괴로워서 죽는 줄 알았어."

"왜?"

"옆에 드라마 보는 애는 다리 쩍 벌리고, 앞에서는 자꾸 정강이 차잖아. 너는 계속 내쪽으로 기대려고 하고. 아주 사방 팔방으로 다 나를 공격해!"


둘 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아주 초췌해졌어요. B만 아니라면 숙소로 들어가서 바로 드러누워 다시 자고 싶었어요. 왜 내가 내 돈 주고 이렇게 고문을 받아야하나 진지하게 고민했어요. 계속 당하면 적응이 되어서 고통의 강도가 덜해져야 하는데, 이건 당하면 당할수록 더 고통스러워졌어요. 그리고 이게 얼마나 괴로운지 갈수록 더 잘 알게 되니까 더욱 기차를 타는 것이 두려워졌어요.


"차라리 농민공이 훨씬 낫다. 농민공들 사이에 가면 신발도 벗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할 텐데, 중국 여자들 사이에 앉아서 한국 망신 안 시키려고 하니까 우리가 죽겠네."


진심으로 깊게 반성했어요. 그동안 농민공들 사이에 낑겨탄 것에 불만을 가진 저 자신이 원망스러웠어요. 농민공들이 아무렇게나 막 하기 때문에 저도 아무렇게나 막 할 수 있었어요. 모두가 신발을 벗고 발냄새를 풍겼기 때문에 저도 신발을 벗고 똑같이 발냄새를 풍길 수 있었어요. 신발과 양말을 벗고 잔다는 것이 피로 회복에서 엄청난 차이를 가져와요. 농민공들이 다리를 쭉 펴고 편한 대로 다리를 쩍쩍 벌리기 때문에 저도 똑같이 그렇게 했어요. 다리를 마음껏 펴고 비틀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피로 회복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요. 오히려 농민공들 사이에 앉아서 가는 것이 더 좋은 것이었어요. 그것도 모르고 친구와 일부러 우리들을 나쁜 객차로 보내는 것 아니냐고 툴툴대었더니 이번에는 한족 여자 대학생들 사이에 앉게 되었어요. 그 결과는 비극이었어요. 한국 망신 안 시키려고 얌전히 있으니 다섯 배 더 고통스러웠어요. 신발과 양말도 못 벗고 다리를 아무렇게나 휘휘 저어가며 자지도 못했어요. 그나마 저는 복도쪽이라 한쪽 다리는 조금 펼칠 수 있었지만, 가운데 낑겨앉은 친구는 정말로 각잡고 앉아서 그 긴 밤을 보내야 했어요.


"자리 바꾸어줘? 여기는 그래도 복도쪽으로 다리 뻗을 수 있는데."

"야, 나 자리 좀 바꿔주라. 진짜 죽겠어."


친구가 제게 제발 자리 좀 바꾸어달라고 사정했어요. 친구와 자리를 바꾸어주었어요. 친구는 다시 잠들었어요. 친구와 자리를 바꾸어서 가운데 자리에 앉자 친구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바로 느껴졌어요. 딱 5분 만에 자리를 바꾸어준 것을 진심으로 후회했어요. 친구를 흔들어서 나도 죽겠으니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야겠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앞에 앉은 여자는 자꾸 정강이를 발로 툭툭 찼고, 옆에 앉은 여자는 묘하게 제 자리까지 넘어와 있었어요. 친구 쪽으로 조금 이동하려 했지만 친구 쪽이 특별히 넓은 것이 아니라 친구를 옆으로 조금 밀어낼 수도 없었어요. 의자에 다소곳히 앉아 있어야 했어요.


"시안 다 왔다!"



아침 8시 4분. 드디어 기차에서 탈출했어요.


서안성 북쪽 방면


엄청난 인파에 휩쓸려 기차역 밖으로 나왔어요.


"지금 숙소에 연락 될 건가?"

"숙소? 왜?"

"숙소에 짐만 맡겨놓고 공항 가게. 얼리 체크인은 안 해주더라도 짐은 보통 맡아주잖아."


친구는 여기에서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한 후 공항으로 바로 갈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아직 B가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매우 많이 남아 있었어요. B는 11시 45분 도착 예정이었고, 지금은 아침 8시 10분이었거든요. 한국에서 직항편 타고 바로 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B가 시안 셴양 국제공항 입국 게이트를 빠져나오려면 짐이 없다고 해도 12시 반은 되어야 할 것이었어요. 여기에서 공항까지 한 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니 굳이 모든 짐을 다 들고 공항으로 바로 갈 필요가 없었어요. 아직 여유가 있으니 숙소에 짐을 던져놓고 잠시 쉬다가 공항으로 가도 시간이 충분했어요.


친구가 예약한 숙소로 전화하는 동안 짐을 내려놓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어요.



Xi'an station


여기도 공안이 지키고 있기는 했지만 신장 위구르 자치구처럼 살벌하게 지키고 있지는 않았어요. 나중에 시안역 돌아왔을 때 기차역 사진을 별 일 없이 또 찍을 수 있어 보였지만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의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일단 기차역 사진을 찍었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가 타고 온 기차가 도착해서 기차역 앞은 매우 혼잡했어요. 그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나니 기차역은 조금 한산해졌어요.


하늘은 파랗고 따사로운 햇볕이 쏟아지고 있었어요. 이 햇볕 맞아가며 드러누워 자고 싶었어요. 친구의 돗자리를 꺼내어 펼치고 드러누워서 한숨 자고 일어나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거에요. 친구는 전화로 중국어로 계속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친구가 전화통화를 하는 동안 오늘 일정을 어떻게 해야 하나 잠깐 생각해 보았어요.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숙소 들어가서 가방 맡겨놓고 서안 공항으로 가서 B와 만나고, B를 데리고 숙소로 돌아와서 체크인한 후 점심 먹고 시내 좀 돌아다니다 저녁 먹고 쉬면 무난한 하루 일정이 될 듯 싶었어요. 시안에 볼 것이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친구가 시안은 전에 와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다고 했기 때문에 친구를 믿기로 했어요. 란저우야 친구가 가본 적도 없는데 준비도 해오지 않아서 참사가 일어난 것이고, 여기는 어쨌든 친구가 전에 한 번 와서 구경을 다 하고 갔던 곳이니까요.


"야, 빨리 가자."

"아침이나 먹고 가자."

"빨리 숙소부터 가게."


친구가 재촉해서 친구를 따라 길을 건넌 후 버스를 탔어요.



버스에서 사진 찍은 것을 확인해보니 너무 밝아서 하늘이 흐린 날처럼 하얗게 다 날아가 있었어요.


'어차피 또 와야할 시안역인데.'


보통이라면 사진을 망쳤다고 조금 시무룩해졌겠지만 시안역은 오늘이 끝이 아니었어요. 최소한 한 번은 더 와야할 곳이었고, 시안역 바로 앞에 성벽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성벽 위를 자전거로 돌면 그때 한 번 또 볼 수 있을 것이었어요.


"여기 그냥 도시네?"

"내가 여기 그냥 큰 도시라고 말했잖아."


버스는 번잡하고 평범한 도시 안을 돌아다녔어요. 가끔 성벽이 보인다는 것 외에는 그렇게 특별할 것이 없었어요.


'이 버스가 관광지는 안 가나보다.'


방송에서 아무리 편집을 했다 해도 그런 곳이 아예 없을 리는 없었어요. 방송이야 그렇다 쳐요. 세트장 차려놓고 찍었을 확률도 있으니까요. 중국 서안을 여행다녀온 사람들이 인터넷에 올려놓은 사진은 세트장 차려놓고 찍은 것은 분명히 아닐 것이었어요. 버스에서 내다본 시안은 성벽과 해자 외에는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대도시였어요. 그래도 친구가 여기 또한 상당히 큰 도시라고 했으니 어딘가에는 또 전통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어요.


버스를 타고 숙소로 가자 숙소 주인이 저와 친구를 환영해 주었어요. 숙소 주인은 친구가 한국인인데 중국어를 유창히 잘 하자 매우 좋아했어요. 예상대로 당연히 가방을 맡길 수 있었어요.


"야, 빨리 공항 가자."

"뭐 벌써 공항을 가? 너 폰도 충전하고 좀 쉬었다 가자."

"그러다 공항 늦어."

"뭔 소리야? 지금 이제야 9시인데 늦기는 또 뭐가 늦어?"

"B 11시 45분 도착이야!"

"국제선이 자기 나오고 싶다고 나오는 데냐? 너 국제선 안 타봤어?"


계속 빨리 공항가야 한다고 보채자 진심으로 짜증났어요. 가뜩이나 피곤하고 배고픈데 친구는 지금 시간 얼마 없다면서 바로 공항으로 가야 한다고 재촉했어요. 친구가 대체 왜 이러나 싶었어요. 얘가 국제선을 한 번도 안 타본 애도 아니고 여러 번 타본 애인데 비행기 도착 예정시간이 11시 45분이니 지금 시간 얼마 안 남았다고 공항으로 달려가야 한다고 보채니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일단 비행기는 도착 예정시간보다 일찍 도착하는 경우가 정말로 거의 없어요. 지금까지 비행기를 엄청나게 타 보았지만 도착 예정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경우는 오직 딱 한 번 있었을 뿐이었어요. 관제탑에서 착륙 허가를 내주어야 비행기가 착륙하는 거니까요. 도착 예정시간보다 지연되는 경우야 흔하게 일어나지만, 그보다 일찍 도착하는 경우는 국내선이든 국제선이든 거의 발생하지 않는 일이에요.


국내선은 수하물이 없다면 공항 크기가 크지 않다는 전제 하에 10분 안에 나올 수도 있어요. 출구 근처 좌석에 앉는다는 운도 따라주어야 하고, 출구가 열리자마자 미친 듯이 달려나온다면 가능해요. 하지만 국제선은 달라요. 자기가 아무리 전력질주해서 빨리 비행기 안에서 빠져나오고 공항 안을 최단시간에 주파한다 해도 입국 심사대가 기다리고 있어요. 입국심사대 앞에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바로 하이패스 달고 통과하듯 여권에 도장만 받고 바로 빠져나오는 운 좋은 상황이 아니라면 입국 심사대에서 또 시간이 한참 걸려요. 우리나라로 귀국할 때를 제외하고 입국 심사대에 대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1등으로 통과한 경우는 이 또한 제 인생에 딱 한 번 있었어요. 그만큼 이것도 운이 많이 따라주어야 해요. 한 명이라도 입국 심사에서 꼬투리 잡혀서 심사 시간 길어지면 뒷사람들 계속 밀리니까요.


11시 45분 도착 예정 비행기를 타고 오는 B가 12시에 입국 게이트를 빠져나올 확률도 엄청나게 희박했어요. 국제선으로 오는 사람을 마중나갈 때, 보통 수하물이 없으면 도착 예정 시각에서 30분, 수하물 있으면 1시간 뒤에 입국 게이트를 빠져나온다고 계산해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국제선은 자기가 나가고 싶다고 나가는 곳이 아니에요.


제가 상하이에 도착할 때도 제 비행기 도착 예정시각에 딱 맞추어서 공항에 나와서 저한테 왜 공항에서 늦게 나오냐고 한소리 하더니 이번에도 또 11시 45분 전에 공항에 도착해 있어야 한다고 난리였어요. 차라리 중국은 차가 막히니까 조금 일찍 출발하는 것이 좋다고 하면 이해라도 하는데, 그게 아니라 비행기가 11시 45분 도착 예정시각이니 11시 45분에 친구가 입국 게이트를 통과할 거라고 박박 우겨대니 짜증도 2배, 배고픔도 2배였어요.


제가 한 소리 하자 친구가 아주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어요.


"야, B 아직 비행기 안 탔지? 우리 숙소 주소나 보내줘. 입국 카드에 숙소 주소 안 적었다가 입국 심사대에서 뭐라고 하면 걔 엄청 당황한다. 그리고 걔 수하물 있는지도 물어보고."


친구는 제가 시킨대로 B에게 숙소 주소를 보내주었고, 수하물이 있는지 물어보았어요. B는 위탁 수하물 없이 기내 수하물 하나만 들고 온다고 했어요.


숙소에서 더 쉬든가 아침을 먹고 출발해도 충분한데 친구가 계속 내심 불안해해서 공항부터 가기로 했어요.


먼저 521번 버스를 타고 시안 호텔로 갔어요.


중국 시안 521번 버스


시안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시안 호텔로 가야 했어요. 시안 호텔에서 출발하는 리무진 버스는 25위안이고, 1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어요.


중국 서안 호텔


아침 10시 버스표를 구입했어요. 가격은 25위안이었고, 구입할 때 여권이 있어야 했어요.


중국 서안 셴양 국제 공항 리무진 버스 티켓


버스표를 구입한 후, 근처 가게로 가서 밀크티를 구입하고 나서 버스를 탔어요. 저와 친구는 넓게 앉기 위해 서로 따로 떨어져 앉았어요. 기차에서도 둘이 찰싹 붙어 앉아 있었는데 버스에서까지 그렇게 앉아서 가고 싶지는 않았어요.


친구 옆자리에 아저씨가 앉았어요.


"푸하하. 봐라, 너 벌 받은 거다."


친구가 시무룩해하며 제 옆으로 자리를 옮기면 안 되냐고 물어보았어요.


"오지마! 나라도 혼자 편하게 갈 거야!"


친구를 약올리고 있는데 제 옆에 저의 1.5배 되는 뚱뚱한 중국인이 앉았어요.


"푸하하하! 나보다 더 안 좋아!"


친구와 저는 졸지에 이산가족이 되어버렸어요. 철조망 같은 중국인 두 명이 저와 친구 사이에 있었고, 버스 복도가 DMZ 처럼 저와 친구 사이를 완벽히 분리하고 있었어요. 친구와 대화하며 놀 수 없었기 때문에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았어요.




아무리 보아도 시안은 그냥 평범한 대도시였어요.


버스에서 잠깐 졸았어요. 저와 친구가 가야 하는 곳은 3터미널이었어요. 버스가 3터미널에 도착하자 버스에서 내렸어요.



"야! 지금 10시 50분이잖아!"


친구가 하도 난리를 치고 불안해해서 친구 원하는 대로 했더니 10시 50분에 공항에 도착해 버렸어요. B 비행기 도착 예정 시간이 11시 45분이니까 도착 예정 시간을 기준으로 한 시간이나 전에 도착해 버린 셈이었어요. 당연히 B가 광속의 스피드로 비행기에서 입국 심사대를 격파하고 공항 밖으로 탈출할 리가 없으니 아주 한참 공항 안에서 죽치고 친구를 기다려야 했어요.



"늦은 것보다는 좋잖아."


친구가 어쨌든 늦은 것보다는 좋은 것 아니냐고 했어요.


중국 시안 셴양 국제공항 제3터미널


공항 안으로 들어갔어요.


중국 셴양 공항


첫 인상은 인천 국제공항과 매우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이었어요. 국제 표준 디자인이 있어서 너나 할 것 없이 다 그것대로 짓는 것인지, 이 공항이 인천 공항 디자인을 참고해서 지은 것인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인천 국제공항 축소판처럼 생겼어요. 그리고 인천공항처럼 공항 안에는 사람이 많았어요. 한국인도, 중국인도 많았어요. 앉아서 쉴 자리가 없었어요. 하필이면 친구 스마트폰 배터리는 이제 간당간당했어요. 당장은 꺼놓고 11시 30분 정도부터 켜놓으면 B와 만날 때까지는 문제가 없겠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어요.


짐작컨데 B가 가이드북을 들고올 확률은 0에 수렴했어요. B는 우리만 믿고 간다고 말했거든요. 친구가 시안을 가본 적이 있다고 해서 B에게 가이드북 하나 들고 오라고 말하지도 않았어요. 장담컨데 B는 저와 친구가 원래 둘이 돌아다니는 시안 일정을 세워놓은 상태에서 자기가 그 일정에 합류해서 같이 돌아다니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어요. 반면에 저와 친구는 시안에 온 목적 자체가 B와 만나서 노는 것이었기 때문에 B에 맞추어서 다니기로 한 상태였구요. 그러므로 이따 돌아다니려면 친구 스마트폰의 지도가 필요했어요.


중국 서안 선양 국제공항


스마트폰 충전할 플러그는 고사하고 출국장에 앉아서 쉴 공간조차 없었어요.


"입국장으로 가자. 거기 가면 그래도 자리 있겠지."


어느 공항이든 출국장이 입국장보다 훨씬 시설이 좋아요. 출국장에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입국장으로 쫓겨나듯 자리를 옮겼어요. 시안 호텔 가는 리무진 버스를 타는 곳을 확인한 후, 컴컴하고 휑한 입국장에서 친구 스마트폰을 충전할 콘센트를 찾아 돌아다녔어요. 다행히 입국 게이트가 있는 벽에 콘센트가 있었어요. 충전기를 끼워보았어요. 충전이 되었어요. 대신 그곳에는 의자가 없었어요.


윗층 출국장은 빛의 세계였고, 저와 친구가 있는 입국장은 암흑의 세계였어요. 윗층은 인천 공항 축소판처럼 생겼고, 매우 밝았어요. 아래층은 버려진 세계였어요. 조명도 침침하고 사람도 없었어요. 벤치도 거의 없었어요. 불만 깜빡깜빡 거리면 버려진 공항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았어요. 입국장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좀비들이 튀어나와도 너무나 당연해 보일 모습이었어요.


"비슷하게 지으려면 아래층도 좀 비슷하게 지을 것이지, 아래층은 완전 방치해놨네."


충전 문제 때문에 다른 자리로 옮길 수도 없었어요. 사이좋게 바닥에 주저앉아 벽에 기대었어요.


"확 드러누울까? 우리 한참 기다려야 하는데."


B가 어서 오기만을 기다리며 사이좋게 바닥에 주저앉아 쉬었어요. 예상대로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쉴 공간도 없었어요. 드러누워서 한숨 자고 싶은데, 그래도 공항이니 드러누워서 자면 직원이 와서 쫓아낼 거 같았어요. 아무리 무질서한 중국이라 하더라도 신경써서 지켜야하는 곳에서는 질서를 매우 강조하더라구요. 일단 기차역, 공항 같은 점은 확실히 통제했어요. 선부터는 잘 모르겠지만요.


제 예상대로 B는 12시 반 조금 안 되어서 입국 게이트에서 빠져나왔어요. B를 데리고 다시 숙소로 돌아갔어요.



체크인을 하고 점심을 먹었어요.



중국 볶음밥


점심을 먹으며 오늘 일정을 어떻게 할 지에 대해 논의했어요. 제 예측이 정확히 맞아떨어졌어요. B는 여행 일정에 대해 그 어떤 준비도 해오지 않았어요. 저와 친구가 원래 시안 여행을 할 것이었고, 그 일정에 자기도 끼어서 같이 놀 거라 생각하고 왔어요. 오늘은 시내를 돌아다닐 것이니 어떻게든 되겠지만, 내일부터 문제였어요. 내일 병마용 다녀온 이후에는 그 어떤 계획도 없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저도 B가 가고 싶은 곳 몇 곳 준비해서 올 거라 생각하고 시안에 대해서는 딱히 알아본 것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제가 가보고 싶은 곳이라고는 회민가와 서원가 뿐이었어요. 여기에 성벽 투어 정도 추가할 수 있을 거구요. 막상 일정을 어떻게 만들어보려 했지만 저도 시안을 몰랐기 때문에 답이 없었어요.


B의 일정이 길다면 그다지 문제될 것까지는 없는데, B의 일정은 3박 4일이었어요. 너무 빡빡한 일정도 안 좋지만, 계획이 없는 것도 안 좋아요. 전자는 체력을 고갈시키고, 후자는 마음을 고갈시켜요. 저와 친구, B가 만나서 우정은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한 대담을 나누고 각자 자아성찰을 할 것이 아니라면 대략적인 계획은 있어야 했어요. 이 일정의 최대 목표는 여행에 대한 권태를 느끼고 무기력해짐으로써 여행에 대한 깨달음을 얻자는 것이 아니라 셋이서 중국땅에서 최대한 재미있는 경험을 하고 추억을 쌓는 것이었거든요.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 오늘은 서안성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로 했고, 다음날은 병마용을 다녀오기로 했으니 벌써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어요.


"여기서 시안성 별로 안 먼데 걸어갈까?"

"그러게. 어차피 남는 것이 시간인데."


친구가 숙소에서 시안 남문까지 그렇게 멀지 않으니 걸어가보지 않겠냐고 제의했어요. 그래서 저와 B 모두 별 생각없이 걸어가자고 했어요.


신고
Posted by 좀좀이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