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식 때문에 서울에 와서 졸업식을 참석하고 백수의 세계로 진입했습니다. 아직 백수라는 것이 체감이 안 되었어요. 왠지 개학날 학교에 등교해야 할 것 같다는 묘한 의무감이 남아있었어요.
가족들 모두 누나들이 청주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졸업식을 마치자마자 바로 청주로 내려갔어요. 청주에 내려가서 함께 졸업한 공군 위탁장교분께서 직접 공군사관학교를 누나들과 함께 견학시켜주시고, 온 가족이 함께 청남대를 구경하기도 하며 뒹굴뒹굴 거리다가 졸업식 때문에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진주에 사는 친구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어요.
“나 이번에 졸업식 끝나면 진주 갈까 생각중이다.”
저는 사실 계획을 그다지 잘 짜는 편이 아니에요. 계획을 짜기 보다는 무심코 던진 말이 계획이 되고 목적이 되는 편이 많은 편이에요. 이번에도 역시 진주에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친구에게 했던 말이 있기 때문에 진주에 가기로 결심했어요.
“진주는 뭣 하러 가? 거기 촉석루밖에 볼 게 더 있어?”
하지만 한 번 제주에 내려가면 언제 다시 육지로 올라올지는 정말 기약없는 일. 그리고 육지에 올라온다고 해도 진주에 갈 일은 정말 없어요. 진주라는 곳은 친한 친구 한 명이 살고 있는 것 외에는 저와 그 어떤 연관성도 없는 장소. 더욱이 진주는 그 자체만 놓고 보면 볼 것이 많은 동네가 아니고 학교 다니던 4년간 매해 한 번씩은 꼭 진주 친구집에 놀러갔기 때문에 진주에 있는 웬만한 좋은 곳은 이미 다 가 봤어요. 즉 앞으로 진주에 갈 일이 생길 확률은 거의 없다고 자체적으로 판단. 그래서 마지막으로 꼭 진주에 가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더욱이 봄에 진주에 간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진주가 교통의 요지라서 다른 지역으로 가기 좋다는 생각에 반드시 이번에 진주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주에 가서 무엇을 할까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지리산 정상에 가는 ‘중산리 코스’라는 당일치기 코스가 진주에서 바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알아냈어요.
“이번에 진주 가서 지리산이나 갈까? 당일치기 코스도 있는데 충분히 갈 수 있을 거 같은데...”
이 말에 진주에 볼 것이 없는데 뭣 하러 가냐는 부모님의 주장은 진주에 가서 지리산에 가지는 말라는 주장으로 바뀌었어요. 그래서 3월 2일 청주발 제주행 비행기표를 3월 7일 진주발 제주행 비행기표로 바꾸고, 부모님께서는 3워 2일 청주에서 제주로 내려가시는 동안 저는 잠시 서울에 개인적으로 볼 일이 있어서 서울에 올라갔어요.
3월 3일 아침. 버스비를 절약하기 위해서는 서울 고속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야하는데 달랑 하루 세 편 있어요. 13시 버스를 타면 얼추 진주까지 4시간 걸리기 때문에 저녁에 도착하니 너무 늦기 때문에 반드시 08시 고속버스를 타야 했어요. 그러나 아침에 적당히 꾸물꾸물 거리다보니 서울 고속버스터미널 매표소에 08시 10분에 도착하고 말았습니다. 즉 약 10분 차이로 고속버스를 놓쳐버린 것이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비싼 우등버스를 타고 진주로 내려갔습니다. 차라리 30분 늦어버리면 아깝지는 않은데 10분 차이로 버스를 놓쳤고, 매우 시작이 안 좋다고 생각했어요.
버스를 타고 가며 시계를 보니 3월 3일이었습니다.
아하! 오늘은 개강날이구나!
그렇게 고대하던 졸업생의 신분이 되었어요. 전역 후, 학업에 완벽히 뜻을 잃어 학교를 자퇴하고 취직해 돈을 벌겠다고 결심해 일자리를 알아보다가 일단 졸업은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 저의 지상최대 목표는 무사히 8학기 졸업이었어요. 나름 군대 가기 전에 학교를 열심히 다녔는데도 이상하게 이수학점이 빠듯해서 2년간 참 고달프게 학교를 다니며 성적확인시기가 되면 항상 D라도 굽신굽신이니 제발 F만 나오지 말라고 빌던 과거. 4년간 67개 과목을 듣고 졸업한데다 특히 남들이 2개, 3개 듣는 4학년 때 19개 과목을 이수했어요. 그래서 조용히 졸업하고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핸드폰을 꺼냈습니다.
축 개학 키윽키윽
동기 두 명과 후배 한 명에게 저렇게 문자를 보냈어요. 동기에게서 바로 답이 왔어요.
에라 이놈아 학생때가 좋다더라ㅋ 아구 배야
‘사장님 나이스샷!’이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제가 원하던 답이 딱 왔어요. 정말 보낸 보람이 있었어요. 잠시 후. 후배에게서도 답이 왔어요.
형 감사 ㅠㅠ 졸업 축하드려요
이건 마치 연타석 홈런을 친 기분이었어요. 후배의 부러움에 절은 애처로운 목소리가 귀에 울리는 것 같았어요. 후배가 아침에 눈 비비고 가기 싫은 학교를 가기 위해 억지로 집에서 나서는 모습이 창밖 풍경 속 하늘에 선명히 그려졌어요.
이렇게 기분 좋은 답장들 속에서 졸업생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을 때였어요.
개학은 무슨 개학 ㅋㅋ
아...맞다!
이 녀석은 월요일 학교 안 가는 주4파였지!
문자로 약 올리기는 완전 실패했어요. 마지막이 좋으면 다 좋은 것이라는 말을 반대로 뒤집으면 마지막이 안 좋으면 다 안 좋은 것. 이건 마치 국을 다 끓이고 소금 적당량만 넣으면 되는데 소금 대신 설탕을 쳐버린 느낌. 그렇다고 다음날 이 녀석에게만 특별히 한 번 더 ‘축 개학 키윽키윽’이라고 문자를 보내는 것은 너무 찌질해 보이거나 정말 앙심을 품고 제대로 약 올리려는 것으로밖에 안 보여요. 출발부터 아주 안 좋은 징조들이 연속으로 두 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설마 이번 여행에서 별 일 있겠어’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어요.
지금 만나러 가는 친구와 저는 묘한 대결 구도를 가지고 만나는 관계. 친구는 저를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저는 친구를 폐인으로 만들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만나요. 즉 희한한 대결 구도에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대학교 3학년 때에는 친구가 서울에 올라와서 제 고시원 방에서 신세를 지며 거의 폐인이 될 뻔했고, 대학교 4학년 때에는 제가 진주의 친구 집에 가서 꽤 고전을 펼쳤어요. 어쩌면 육지에서 벌이는 최후의 결전. 일단 육지에서의 저의 홈그라운드가 사라지기 때문에 다시 육지로 살러 올라가지 않는 한 더 이상의 결전을 벌어질 수 없어요. 그래서 각오를 단단히 하고 갔어요.
정오를 조금 넘겨 개양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해 친구에게 마중 나오라고 한 후, 저는 느긋하게 친구네 집을 예전 기억을 더듬으며 걸어갔습니다. 초봄의 진주는 비록 경상대학교에서 가까운 개양 근처만 보는 것이었지만 매우 예뻤어요. 제대로 봄이 오면 훨씬 더 예쁠 거 같았어요. 경치가 바뀐 것이라면 개양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변전소 사이에 인조잔디구장이 있는 중학교가 새로 생겨서 마침 제가 도착한 날 개교했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변전소를 조금 더 지나가자 드디어 친구와 만났습니다.
친구와 만나자마자 친구집에 짐을 던져놓고 안에서 조금 쉬다가 바로 밖으로 나왔습니다. 제가 있는 동안 섭취할 일용할 양식을 획득하기 위해서였죠. 친구가 대형마트까지 먼데 어떻게 가고 싶냐고 물어보길래 당연히 걸어가자고 했습니다.
“거기 멀다.”
“괜찮아.”
그래서 걸었어요. 친구 집에서 남강을 건너 꽤 걸어갔어요. 정말 많이 걸었습니다. 가는 길에 친구의 여자친구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지금 마트 걸어간다.”
친구의 여자친구가 뭐라고 말하는 듯.
“나 서울에서 이놈 때문에 엄청나게 걸었다. 이놈도 당해봐야 한다.”
또 친구의 여자친구가 뭐라고 말하는 듯.
“야, 한 번 받아봐.”
“나? 누군데?”
“내 여자친구.”
순간 일시적으로 혼란과 혼돈 상태. ‘친구의 여자친구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는가?’라는 고민 등장. 사실 친구의 여자친구는 저보다 5살 아래. 그러므로 나이만 놓고 보면 제가 반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 그러나 생각하고 자시고 할 시간도 없이 일단 ‘여보세요’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말을 높여서 저는 지금 친구와의 마지막 결전을 벌이기 위해 진주에 내려왔다고 진지하게 설명했어요. 이 말을 과연 이해했을지 스스로 의문. 하여간 그렇게 전화를 받다보니 남강에 도착했고, 남강을 넘어가서 마트에 도착했습니다. 남강을 넘어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한강보다는 폭이 좁지만 남강도 상당히 폭이 넓었어요. 하지만 전에 걸어보았기 때문에 충격과 공포의 거지깽깽이 레벨은 아니었어요. 문제는 남강을 넘어서도 한참 가서야 마트가 나왔다는 것이었어요.
마트에 들어가서 제가 마실 캔맥주와 친구가 마실 병맥주를 샀습니다. 그 외의 것은 정말 거의 안 샀어요. 당장 먹을 반찬이 없다고 해서 간 마트에 맥주만 사고 나왔어요. 맥주와 무화과 말린 것을 사고 나서 저는 폐인의 기운을 담아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그냥 있는 거 가지고 때우자. 어떻게든 되겠지.”
예전 같으면 절대 그렇게 못한다고 할 친구가 좋다고 했습니다. 혹시 이 녀석, 내가 없는 동안 폐인이 된 것인가? 지난번 진주 원정에서 내 앞에서는 폐인 안 된 것처럼 뻐기다가 내가 가자마자 내가 주입한 폐인의 기운에 무릎을 꿇고 폐인이 된 것인가? 그러나 사실은 친구도 자금난. 이미 진주로 가기 전까지 자신은 자금난이라고 제게 알려주었어요. 즉 이것은 저의 승리로 인한 친구의 폐인화가 아니라 단지 자금난으로 인한 친구의 현실적 선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마트에서 나와 집에 돌아가려는데 짐을 들고 왔던 길을 돌아가려고 하니 왠지 끔찍했어요. 친구가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걸어갈래, 택시타고 갈래?”
하필이면 무지 더운 진주의 낮.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더워요. 짐들고 가면 더 더워요. 팔도 아플 거에요. 괜히 친구 폐인 만들어 보겠다고 걸어갔다가 뜻을 못 이룰 수 있어요. 그래서 1보 전진을 위한 2보 후퇴를 결심했어요.
그래서 택시타고 돌아갔어요. 그 어떤 특별함도 없잖아! 무언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황사로 허파도 청소하는 그런 굉장함이 없잖아! 이건 하나도 아름답지도 특별하지도 않아요. 그냥 평범. 허무. -끗-. 이런 수준. 이런 건 여행이라 할 수 없어!
집에 돌아와서 맥주를 마시며 다음날 어디를 갈지 연구를 했어요. 마음 같아서는 지리산 정상에 다녀오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리산을 가는 것은 많이 무리였어요. 정말 무대책에 아무 장비도 없이 닳은 운동화 신고 비 온 직후의 북한산을 올라갔다 생고생을 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지리산은 마음속에서 제외시켰습니다.
“하동 가자.”
청주에서 지리산에 대해 알아보다 하동에 볼 것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쌍계사도 있고 청학동도 있어요. 화개장터도 있어요. 쌍계사와 청학동, 화개장터만 봐도 어마어마하게 많이 보고 오는 거에요. 하동까지 입석으로 기차타고 가면 왕복 5천원 중반이에요. 하동으로 가는 첫 기차를 타고 하동에 갔다가 기차타고 하동에 돌아오면 돈은 저렴하게 쓰고 구경은 다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원래 저의 계획은 화개장이 서는 날에 맞추어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화개장은 1, 6일 장이라서 화개장이 서는 날에 가려면 3월 6일날 가야 하는데 3월 7일이 귀향하는 날이었어요. 즉 6일 날씨가 더럽게 안 좋으면 ‘다음 기회에’라는 것 자체가 없기 때문에 화개장을 구경하는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가기로 했어요.
진주에서의 첫날은 그냥 조용히 지나갔습니다. 진주행 첫차를 놓쳤다는 왠지 껄쩍지근한 사건 외에는 그냥 무난했어요. 적당히 친구 방에서 뒹굴거리다 잠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