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여행기/미분류

(단편, 판타지) 백 년의 기억

좀좀이 2013. 2. 5. 03:40
728x90

무너진 건물. 내가 여기 언제 왔더라? 언젠가 한 번 지나갔던 이곳. 그때도 이렇게 건물이 무너져 있었지. 어렴풋 기억난다. 이 마을에 온 날 나를 반겨준 것은 벌레 씹은 듯 했다. 무너진 건물 앞에서 짐을 내려놓고 주저앉았다. 더웠다. 내 전부가 바닥에 흐르는 것 같았다. 부채질을 계속 해도 전혀 시원하지 않았다.


"이 망할 동네...뭐 볼 것 있다구."


실라포츠 교회가 아름답다고 했다. 여관 주인이 실라포츠 교회가 아름답다고 하지 않았다면 여기 오지도 않았겠지. 이틀을 걸어서 왔다. 오직 실라포츠 교회를 보기 위해 여기 온 것은 아니었다. 지지난주에 폭우가 내려서 다리나 성으로 가는 길이 끊겨버렸다고 했다. 다리나 성까지 가려면 이니츠 마을에 가서 산을 돌아가는 길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예정에도 없던 이니츠 마을로 가는 길에 볼만한 것 있으면 보고 가자는 생각에 온 것이 여기였다.


"망할 영감탱이...이게 아름다운 거냐?"


그때 나는 실라포츠 교회 앞에 앉아있었다. 비가 안 오는 게 이상한 하늘이었다. 해는 보이지도 않는데 더워서 견딜 수 없었다. 입을 닫을 수 없었다. 푹푹 찌는 날씨에 울어버릴 것같은 하늘, 그리고 무너져버린 건물. 눈물 나게 아름다워 미치겠네.


그때와 비슷한 더위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오늘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다는 것이다. 너무 맑아서 나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것 같다. 얼굴 위로 땀이 계속 흐른다.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지. 내 눈을 타고 흐르는 것은 눈물이 아니라 빗물이었다. 짜증과 함께 망했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 동네에는 당연히 여관이 없겠지. 이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멀쩡한 건물이 점점 줄어들었다. 내 뒤에 있는 실라포츠 교회에 오니 주변에 사람이 살 것 같은 건물은 하나도 없었다. 뒤져보면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 한 채쯤 있늘 수도 있었겠지만 히룻밤 신세지는 것이 큰 죄를 저지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비도 무섭게 쏟아지고 있었다.


무너져버린 실라포츠 교회 앞에 앉아서 비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바람이 강하게 몰아쳤다. 빗방울이 사정없이 내 얼굴을 때렸다.

"거지같은 날씨!"

욕을 하지 않고 견딜 수가 없었다. 망할 개같은 여관주인은 내게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 이런 동네를 추천한거야! 내가 그 여관에 폐를 끼친 것도 아니구. 망할 자식, 내가 낸 돈으로 빵 사먹고 설사병이나 걸려라. 이 개거지같은 폐허에 여행자 돌아버리게 만드는 무식한 날씨가 아름답다면 인지능력에 큰 문제가 있는 거다. 이 개같은 자식은 병원에 좀 가봐야 해.


욕을 한다고 바뀔 것은 없었다. 욕을 한바가지 하늘에 대고 퍼부어봐야 비바람이 그치고 파괴된 건물들이 저절로 고쳐질 리는 없으니까. 일단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실라포츠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천장도 무너지고 벽도 무너져서 교회 안으로 비바람이 신나게 들어왔다. 창문이 남아있기를 바라는 것은 머리가 없음을 고백하는 일. 여관주인은 실라포츠 교회의 창문이 정말 아름답다고 했다. 그런데 창문이 어디 있지? 창문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벽도 없는데. 왜 무너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며칠 전에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실라포츠 교회의 창문이 예쁘기는 예쁘구나. 지금의 실라포츠 교회는 그 때보다 많이 좋아졌다. 아직도 무너진 상태이기는 하지만 입구는 다 고쳤다. 정성껏 다시 만들어 달아놓은 창틀은 여관주인이 추천할 만 하다. 이제는 이 교회와 이 마을이 왜 다 무너져 폐허가 되었고, 여관주인이 그때 왜 내게 이 교회를 가보라고 추천했는지 안다. 내가 처음 실라포츠 교회를 방문하기 3년전, 이 마을에 큰 지진이 일어났다. 하룻밤 사이에 모든 건물이 무너졌다.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했다. 실라포츠 교회가 그만큼이나마 안 무너진 것이 신의 가호라고 한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 이 나라는 옆나라와 전쟁중이었다. 무수히 많은 남자들이 군에 끌려갔다. 전쟁터에 끌려간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내가 그 여관에 머물기 몇 달 전이었다. 아마 그래서 내게 그 교회를 추천한 것 아닐까 싶다. 아니면 여관 주인이 아무 생각없이 추천했거나.


다 무너진 건물에서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구석에 쭈그려 앉았다. 비가 내리자 기온이 뚝 떨어졌다. 으슬으슬해서 모포를 뒤집어썼다. 비 좀 그만 내려라. 비만 그쳐봐라. 바로 이 저주받을 곳을 떠날 거다. 한밤중이라도 떠날테다.


지금도 당장 떠나고 싶다. 왜 여기까지 기어들어왔는지 후회된다. 그때보다는 분명히 많이 좋아졌다. 사람들이 건물을 다시 짓고 있다. 그러나 그때 그 장면을 그대로 그려보기에 전혀 어려움이 없다. 이런 속도로 건물을 다시 짓는다면 10년 뒤에 와도 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의 그 느낌을 다시 느끼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어디서 오셨소?"

"예?"

왼쪽 뺨에 길게 찢어진 사내가 내 옆에 앉았다. 신기한 것은 그가 슈린어를 안다는 것이었다.

"슈린어 할 줄 아세요?"

"조금 할 줄은 알고 있소. 배웠거든. 전쟁에서."

사내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내게 들이밀었다.

"감사합니다."

"어디서 왔소?"

"남아드라스에서 왔어요."

"거기에서? 뭣 때문에?"

뭐라고 대답할까? 여기까지 오면서 어디에서 왔냐는 질문을 많이 들었다. 그들은 내가 딱 봐도 외지인처럼 생겨서 물어보았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질문을 들을 때마다 나에게 무언가 확인하려고 든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들이 아무리 전쟁에서 이겼다고해서 적을 그렇게 쉽게 용서할 리는 없으니까. 이 나라에 처음 들어올 때나 이번에 들어올 때나 국경 근처에서 사람들이 내게 신신당부했던 것은 절대 우르간 대제국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것 때문에 왔어요."

손가락으로 등 뒤를 가리켰다. 등 뒤에 있는 것은 실라포츠 교회.

"아, 실라포츠 교회! 여기 유명하지."

아직도 실라포츠 교회가 이 사람들에게는 중요한가보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늘을 보며 담배연기를 뿜었다.

"예전엔 굉장했어. 지진 전에."

"지진 전에요?"

"응. 그때는 진짜 최고! 이 지역 최고 보물!"

사내가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복구가 많이 느리네요."

"응?"

사내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내가 단어를 잘못 썼나? 복구라는 표현이 맞을텐데...이 아저씨 혹시 슈린어로 '복구'라는 말을 모르는 건가?

"다시 만드는 게 매우 느리네요."

사내는 짧은 탄성을 질렀다.

"돈 없어. 그리고 일할 사람 많이 없어. 전쟁 때문에. 전쟁 때문에 망했어. 찢어죽일 우르간 대제국 놈들."

사내는 담배를 다 태우자 자리에서 일어나 교회 맞은편 쪽으로 걸어갔다.


자리에서 일어나 교회 안으로 들어가 그때 앉았던 그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나를 깨운 것은 시원한 어둠이었다. 무언가 덮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짐을 풀어 모포를 꺼냈다.

"모포 좀 털까."

안에 아무도 없다. 짐을 다시 묶어놓고 모포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아무리 폐허가 다 되었어도 교회 안에서 터는 것은 좀 그래."

모포를 잡아 털었다. 어둠 속에서 하얀 가루가 날린다. 항상 덮기 전에 모포를 터는데 탈 때마다 먼지가 많이 나온다. 몇 번 터니 대충 다 털린 것 같다. 가까이서 들리는 풀벌레 소리. 여름이 끝나가는 것이 아쉬워 우는 것일까, 아니면 더위에 타 죽지 않아 기뻐서 노래하는 것일까.


따스한 모포. 비바람이 몰아치던 그날 밤, 나는 모포 속에서 잔뜩 웅크려 있었다. 그날 밤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나를 깨웠다. 시커먼 어둠. 나를 여기에 우겨넣은 비바람은 그쳤다. 또르르 또르르 풀벌레 우는 소리. 또옥 또옥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교회 벽 끝에 걸린 구름 옆에 별과 달이 보였다. 교회 바닥에 고인 물 가장자리에 부서지는 달빛. 어둠과 내가 지키던 교회 안에 불빛이 스물스물 기어들어오기 시작했다.

"뭐지?"

쭈그려앉아 불빛이 들어오는 쪽을 주시했다. 별 일 없었으면 좋겠어. 제발 도적들이나 불량배들이 아니어야 할텐데. 발자국 소리만 들린다. 한 명이로군. 발자국 소리가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아가씨였다. 왼손에는 두툼한 책을 들고 있었다. 아가씨가 들고 있는 호롱불의 흔들리는 빛이 길고 곱슬기가 있는 금발 머리카락을 빛나게 했다.

'여기에 사람이 살긴 사나보네'

아가씨는 교회 맨 앞까지 걸어가더니 호롱불을 바닥에 내려놓고 손에 들고 있던 양초에 불을 붙여 제단처럼 생긴 돌 위에 세웠다. 그리고나서 책을 손에 쥔 채로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기도 드리는구나. 아가씨가 기도 드리는 소리가 교회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듯 했다. 무언가 계속 외우던 아가씨는 외우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후."

아가씨가 촛불을 끄는 소리. 그리고나서 들리는 아가씨의 가벼우면서 떨리는 한숨소리. 아가씨는 바닥에 놓인 호롱불을 집어들었다.


시원한 밤이다. 지금 여기를 가득 채운 어둠은 그때 찾아왔던 그 어둠일까. 그날. 아가씨는 기도를 마치고 들어올 때처럼 조용히 밖으로 걸어나갔다. 아가씨가 걸어나간 후 교회 안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어둠과 침묵이 자리잡았다. 또르르 또르르. 벽 너머로 풀벌레 소리가 벽을 넘어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꿈. 조금 전 그 아가씨는 내가 꾼 꿈은 아닐까. 내가 머리 속에서 그리던 천상의 여인.

"눈 마주쳤을 때 인사라도 말할걸!"

뒤돌아선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그 어떤 목소리도 없었다. 잠깐의 침묵과 어색함.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목례를 했다. 그녀는 내가 목례를 하자 미소를 지으며 목례를 하고 교회 밖으로 나갔다. 왜 그때 소리 내어 인사하지 않았을까. 그녀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가 바로 내가 상상하던 천상의 여인임을 알았다. 그러나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후 그나마 든 생각이 이 어색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목례를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소리를 내어 인사했다면 말이라도 한 마디 걸어보았을텐데! 아니야. 어차피 그 여자는 여기 말 밖에 모를거야. 그래도 혹히 모르잖아. 손짓 발짓 해가면서 몇 마디 나누었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봐야 몇 마디나 나누겠어. 이름조차 제대로 못 물어볼텐데. 하지만 혹시 모르잖아!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밀려드는 후회는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밤새 후회하겠지? 이름조차 제대로 못 물어보아도 좋아. 일단 말이라도 걸어보자. 내가 상상하던 천상의 여인에게! 그녀에게 말을 걸기 위해 교회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교회 밖은 어둠 뿐이었다. 그녀의 발자국 소리마저 허공으로 흩어진 후였다.


동이 튼다. 밤새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혹시 그녀가 찾아올까 기다렸다. 그러나 밤새 나와 함께 한 것은 어둠과 적막 뿐이었다.

"비가 안 내려서 안 온 것 아닐까?"

그녀는 오지 않았다. 아쉬움이 마음을 움켜쥔다. 잠시 후 교회에 기도를 드리기 위해 오는 것 아닐까? 그러나 나는 떠나야 한다.


이 교회가 다시 지어지려면 100년은 걸리지 않을까? 아무리 길어도 100년 안에는 다시 짓겠지. 교회가 복구되면 여기를 부수어버린 지진의 기억도 차츰 사라질 거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사람들도 전쟁의 기억을 잊어가겠지. 그때가 되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손자, 손녀에게 지진과 전쟁의 기억을 머언 하늘을 바라보며 천천히 이야기해주실 거다. 아이들은 머리 속으로 지금 이 모습,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몇년 전의 모습을 머리 속으로 그려보기 위해 애를 써 보겠지. 그녀에 대한 나의 기억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내 머리 속에서 계속 살아있을 것이다. 그날 그녀에 대한 추억도 이 교회가 완성될 때까지는 남아있겠지. 해마다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날, 나를 태워버릴 것 같은 더위가 내 머리 속에서 이 기억을 끄집어내지 않을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