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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본 카자흐스탄의 라틴 문자 개혁 성패 전망

좀좀이 2013. 6. 11.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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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소련권 튀르크 국가들 중 아직도 자국어를 키릴 문자로 쓰고 있는 나라는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즈스탄이에요. 나머지는 전부 라틴 문자로 문자개혁을 했어요.


최근에야 카자흐스탄이 카자흐어를 라틴 문자로 바꾸기로 발표했다는 뉴스를 접했어요.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6033738


2013년 1월 10일이면 제가 우즈베키스탄에 있을 때네요. 이러니 여태 몰랐지...


일단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말했기 때문에 추진은 될 거라 봐요. 대통령이 한다고 하면 일단 하기는 하는 게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특징이니까요.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말했다면 믿어도 되요. 단, 그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 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죠.


사실 이게 갑작스러운 뜬금포 발표는 아니었던 것이, 이 발표 있기 전부터 몇몇 카자흐스탄 사이트에서는 라틴 문자로 된 카자흐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어요.


http://qz.government.kz/ (라틴 문자로 된 카자흐어로 되어 있는 카자흐스탄 정부 공식사이트)




뉴스에서는 2025년까지 완료할 것이라고 했는데 그때면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86세...엄청나구나...


중요한 것은 이 발표가 어쨌든 뜬금포는 아니라는 것.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는 준비를 해 오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이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매우 부정적인 전망이 우세해요. 그리고 저 역시 우즈베키스탄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보았을 때 썩 긍정적으로 보고 있지는 않아요.


일단 구소련 튀르크 국가들에서 키릴 문자에서 라틴 문자로 문자개혁을 실시한 나라는 세 나라에요.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이죠.


이 세 나라의 공통적 특징 중 하나는 구소련 시절에도 민족주의 정서가 꽤 강했다는 거에요. 국민 상당수가 아제리인, 투르크멘인, 우즈베크인으로 구성되어 있기도 했구요. 독립 직전까지 카자흐인이 50%도 못 넘겼던 카자흐스탄과는 일단 조건 자체가 매우 달라요.


사실 라틴 문자 보급은 영어, 터키어가 얼마나 중요한 언어인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러시아어만 아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자국어를 보급할 것인가와도 매우 큰 연관이 있어요. 더 나아가 심지어는 자국어 화자들에게 새로운 글자를 가르쳐야한다는 문제도 있어요.


우리나라에서야 라틴 문자 모르는 사람이 많지는 않아요. 그 이유는 당연히 영어 때문이죠. 영어를 배워야하다보니 라틴 문자를 자연스럽게 많이 접하게 되어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이죠.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라틴 문자를 왜 알아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려면 결국 영어, 터키어의 중요성과 답이 이어져 있어요.


그리고 소련의 민족 정책 덕분에 러시아인들이 곳곳에 퍼져 있어요. 이들에게 자국어를 보급하는 문제가 중앙아시아 각국의 해묵고 중요한 문제에요. 문제는 글자가 다르면 언어 습득 초기 과정에서 꽤 큰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에요. 멀리 갈 필요 없이 아랍 문자만 보면 지레 겁을 먹는 한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상당히 많죠. 러시아인들이 어려서부터 영어를 많이 배우려 든다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나, 그렇지 않다면 이는 매우 큰 문제로 작용할 것이에요.


게다가 이는 오직 러시아어 화자들에게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 자국어의 문자 체계가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전국민이 대상이 되요. 남녀노소할 것 없이 모든 국민에게 글자를 새로 가르쳐야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런 문제를 '이따위 하찮은 문제'로 바꾸어버릴 수 있는 게 이 지역에는 하나 있는데...


대통령의 의지!


의지! 의지! 의지! 근성! 근성! 근성!


이런 문제라면 다 필요 없어요. 저것들만 있으면 오케이. 이런 정치 체제를 가진 나라에서 안정성은 지도자의 의지와 근성과 아주 큰 연관이 있어요.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방법?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지도자의 의지와 근성이 가장 중요해요. 정말 구제불능 막장 상태에 빠지더라도 끝까지 추진하고 몰아붙이겠다는 강력한 의지와 근성이 있다면 어떻게든 되기는 해요. 목표는 달성했는데 대신 다른 것들이 죄다 엉망진창이 될 수도 있지만요. 정부의 의지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경제 성장 문제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 이것은 어디까지나 국내 한정의 문제이거든요. 그래서 지도자가 확고한 의지와 근성을 가지고 밀어붙인다면 문자 개혁이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어요.


이 의지와 근성의 예를 우리나라에서 찾아보자면, '읍니다'와 '자장면'을 들 수 있어요. '읍니다'를 '습니다'로 바꾼 후에 정부가 일관되고 꾸준히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습니다'를 밀어부쳤기 때문에 '습니다'가 빠르게 정착했죠. 하지만 '자장면'은 '짜장면'이라고 쓴다 해서 아무 문제가 될 게 없었기 때문에 결국 '짜장면'이 표준어가 되었죠.


문자 개혁은 '읍니다'를 '습니다'로 바꾼 것보다 더 큰 문제에요. '읍니다'를 '습니다'로 바꾼 것은 국민들에게 열심히 홍보하고 책을 다시 찍어내는 정도이지만, 문자 개혁을 하면 국민들에게 새로 '읽는 법'부터 가르쳐야 하니까요.


그러면 왜 카자흐스탄은 대통령이 직접 말했고, 미세하게나마 약간씩 준비를 하기는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부정적으로 보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에요.


먼저 카자흐스탄은 독립 후 카자흐인 우대정책을 실시했다가 러시아인들이 우루루 빠져나가는 바람에 엄청난 대혼란을 겪었던 경험이 있어요. 그래서 투르크메니스탄처럼 무모하고 무지막지한 방법을 동원하기는 매우 힘들 거에요. 게다가 이제야 카자흐어 보급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고 하는데 문자 개혁을 실시하면 그나마 이루어졌던 카자흐어 보급이 우루루 무너져버릴 가능성도 있지요. 언어적으로 문제가 생겼다 하면 교통어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러시아어를 이용해 버리는 것이 중앙아시아 언어사회의 특징이니까요.


그리고 바로 옆나라인 우즈베키스탄에서의 라틴 문자 개혁이 거진 10년이 되도록 제대로 정착을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는 점도 매우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어요.


실패한 우즈베키스탄의 문자개혁 - http://zomzom.tistory.com/619


물론 우즈베키스탄의 경우, 정부가 조금 무책임했던 면도 있어요. 게다가 점진적이고 자연스러운 문자 개혁으로 방향을 돌리자 얼마 전부터는 이 문자 개혁으로 새로운 문제가 등장하기 시작했어요. 그것은 바로 우즈벡인들이 같은 우즈벡어를 쓰는데, 젊은 세대는 키릴 문자로 된 우즈벡어를 잘 쓰고 읽지를 못하고, 기성 세대는 라틴 문자로 된 우즈벡어를 잘 쓰고 읽지 못하는 것. 이게 쉽게 이해가 되지 않으신다면 아래 글을 한 번 읽어보세요.


Annyonghaseyo. jeoui beullogeue bangmunhaejusyeoseo gamsahabnida.


바로 눈에 확확 잘 들어오시나요? 이런 상황이 된 거에요. 그래서 심지어는 문자 개혁을 취소할 거라는 소리도 있었어요.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의 사례를 비교해보면 초기에 정부가 얼마나 강력하고 빠르게 밀어부치느냐가 문자 개혁 성공의 관건이에요. 당연히 이 지역에서 엄청난 저항이 있을 거에요. 그다지 중요하지도, 많이 쓰지도 않는 라틴 문자를 갑자기 쓰게 하는 것이니까요. 이 초기 저항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빠르게 극복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이죠.


점진적으로 차근차근 바꾸면 큰 저항 없이 쉽게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이죠. 이 문제는 라틴 문자를 사용하는 무리와 키릴 문자를 사용하는 무리의 힘이 어디가 더 강한가에 따라 가는 문제이거든요.


점진적 개혁을 한다면 초등학교부터 차근차근 바꾸는 방법을 이용해요. 당연히 이 시기에는 라틴 문자를 사용하는 무리의 힘이 키릴 문자를 사용하는 무리의 힘보다 압도적으로 작아요. 이들이 성장해 사회로 진출했을 때 역시 마찬가지에요. 사회로 나온 라틴 문자를 사용하는 무리들에게 압도적인 힘을 가진 키릴 문자를 사용하는 무리들이 따라가고 맞추어가기 보다는 어차피 수적으로도 힘으로도 소수인 라틴 문자를 사용하는 무리들에게 키릴 문자를 쓰게 강요하는 게 더 간단한 문제의 해결책이죠.


결국 정부가 인위적으로 라틴 문자를 사용하는 무리의 수와 힘을 확 늘려서 키릴 문자를 사용하는 무리의 힘을 아주 약하게, 그리고 수적으로도 소수로 전락시키는 수 밖에 없어요.


이래서 결국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의지가 얼마나 강하느냐가 최대 변수로 작용하는 것이에요. 설령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우리나라에서 갑자기 한글 대신 라틴 알파벳을 사용하겠다고 한다는 것과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 이쪽은 하여간 언어적으로 문제가 생기면 러시아어로 가 버리기 때문이에요. 우즈베키스탄에서 라틴 문자가 정착을 못한 큰 이유 중 하나가 라틴 문자를 못 읽으면 같이 표기된 러시아어로 읽으면 된다는 점도 있어요. 이런 독특한 상황 때문에 점진적으로 문자개혁을 하는 게 썩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고 할 수가 없어요. 어느 정도의 홍보 기간은 필요하겠지만요. 사회적으로 영어가 많이 중요해진다면 생각보다 쉽게 성공적으로 문자 개혁을 이루어낼 수도 있을 거에요. 일단 카자흐어 문자 개혁 외에 '라틴 문자를 알아야하는 이유'가 있고 없고의 차이도 나름 영향을 미치니까요.




현행 카자흐스탄의 카자흐어 키릴 문자 (출처 : http://www.omniglot.com/writing/kazakh.htm)



카자흐어 라틴 문자 (출처 : http://www.omniglot.com/writing/kazakh.htm)



카자흐스탄 정부에서 구체적인 문자 개혁 계획을 내놓았는지 참 궁금하네요. 2025년까지 완료하겠다고 한 것이나, 아직까지 정부 기관 일부 사이트에서만 라틴 문자로 된 카자흐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으로 보았을 때에는 구체적이고 확실한 계획안은 나오지 않았을 거 같기도 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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