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해야 했던 숙제 (2012)

해야 했던 숙제 - 05 우즈베키스탄 코칸드 구시가지

좀좀이 2012. 10. 19.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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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가지 eski shahar 를 간다는 것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에요. 이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번화한 거리를 걷는 것도 좋아요. 하지만 달동네를 걸을 때의 그 짜릿한 느낌은 없어요. 구시가지나 달동네나 무엇을 발견할 지 모르니까요.


타슈켄트에도 구시가지가 있어요. 초르수 바자르 너머에 있는 구시가지는 아직도 정부에서 손을 못대고 있는 곳. 대외적으로는 이곳이 보존 가치가 있어서 재개발을 하지 않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이유가 있어요. 한 집에 여러 명이 거주 등록을 해 놓아서 문제이기 때문이죠. 이런 이유를 떠나 개인적으로 타슈켄트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 바로 이 구시가지. 소련 시대에 지어진 아파트를 걷는 것과 달리 구시가지를 걸으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 들거든요.


구시가지는 옛날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 그래서 그 길을 걸을 때마다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과거로 가는 느낌이 들어요. 진짜 우즈베키스탄의 냄새를 맡는 기분도 들구요. 구시가지를 돌아다닐 때 조심해야할 것이라면 아무래도 도로 상태가 좋지 않아 차를 조심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혹시나 모를 치안 문제를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우즈베키스탄은 치안이 매우 안정된 국가이기는 하나 외국인 입장에서는 이런 곳을 다닐 때 약간 조심하기는 해야 해요. 물론 술 취해 큰 길을 돌아다니는 것이 맨정신으로 구시가지 골목을 돌아다니는 것보다 더 위험하기는 하지만요. 중요한 것은 외국인인 이상 경찰에게서 멀어질 수록 스스로 조심해야 하는 것은 대체적으로 맞는 소리라는 것.


긴장은 하지 않았어요. 그저 주의만 할 뿐. 아무리 사람들이 착하고 좋다고 해도 자동차까지 착한 것은 아니니까요. 우즈베키스탄에서 구시가지를 돌아다닐 때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은 바로 자동차. 이런 곳에서는 길이 좁고 도로 상태가 안 좋아서 자동차가 지그재그로 운전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어요.


구시가지에 들어가자마자 사람들이 저를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어요. '한국', '중국', '일본'을 외치며 쫓아오는 아이들도 있었고, 수줍게 흘깃 바라보며 '어느 나라 사람일까?'라고 자기들끼리 수근대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타슈켄트 구시가지 돌아다닐 때에는 '왔구나' 하는 무덤덤한 분위기였어요. 그러나 여기는 신기한 구경거리가 온 듯 한 반응이었어요. 게다가 카메라까지 꺼내니 아이들은 자기들을 찍어달라고 조르기도 했어요. 사진을 찍어서 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찍어서 보여주기만 하는데도 신나서 좋아하는 아이들. 동양인이 온 것 자체가 재미있는 거리인데 카메라까지 들고 있으니 완벽한 동네 구경거리가 되었어요.


구시가지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모스크 하나를 발견했어요.




"벌써 하나 찾은 건가?"


모스크 앞으로 갔어요. 제가 찾던 모스크가 맞았어요. 이 모스크는 진바르도르 모스크 Zinbardor Masjidi.



시간을 절묘하게 맞추어 왔어요. 마침 사람들이 우루루 모스크에서 나가고 있었어요. 제가 모스크에 도착했을 때 막 예배가 끝난 듯 했어요. 모스크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는 웬만해서는 안 들어가요. 기도를 방해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까요. 모스크 안에서 예배 시간이 되어서 기도드리고 있는데 들어가서 왔다 갔다 하며 사진을 찍는 것은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 저 역시 피하는 일이에요. 그런데 제가 모스크 정문에 갔을 때 마침 사람들이 기도를 드리고 모스크에서 나오고 있었어요. 사람들이 모스크에서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모스크 안으로 들어갔어요.



안에 예배가 끝난 후 계속 기도를 드리는 분이 계셔서 안으로 들어갈까 망설이고 있는데 한 할아버지께서 제게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먼저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얹고 가볍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드렸어요. 할아버지께서 인사를 받아주셨어요.


"어디 사람이니?"

"한국이요."

"우즈벡어 어디에서 배웠니? 이 도시에 일하러 왔니?"

"아니요. 저 학생이에요. 타슈켄트에서 우즈벡어 공부하고 있어요."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할아버지께 들어가도 되냐고 여쭈어 보았어요. 할아버지께서는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시더니 저를 데리고 모스크 안으로 들어가셨어요.


"사진 찍어도 되나요?"

"물론."



내부는 깔끔했어요.



이쪽이 미흐랍이에요. 미흐랍은 모스크에서 심장과 같은 곳. 전에도 말했듯이 미흐랍 방향으로 기도를 드려야지, 미흐랍 방향이 아닌 쪽으로 기도를 드리면 그건 무슬림들에게 있어서 엉터리 기도에요. 마드라사든 모스크든 그 중심은 미흐랍.



이것은 꽤 인상적이었어요. 우즈벡어를 아랍 문자로 적어놓은 것이었어요.


بوګون نماز وقتلری

bugun namoz vaqtlari


우리말로 해석하면 '금일 예배 시각'. 현대에 와서 아랍 문자로 우즈벡어를 적어놓은 것은 여기에서 처음 보았어요. 지금도 우즈벡어가 아랍 문자를 차용해서 쓰고 있었다면 우즈벡어 공부하기는 더 어려워졌을 것이고, 위구르인들과 우즈벡인들은 서로 적어놓은 것을 쉽게 잘 읽었을 거에요. 그나마 지금 우즈벡어 아랍 차용 문자는 안 쓰기에 망정이지, 이것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면 정말 우즈벡어 공부하는 입장에서 울고 싶었을 거구요. 지금도 우즈벡어는 문자 개혁이 완벽히 끝나지 않고 과도기적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 라틴 문자와 키릴 문자를 둘 다 아주 비중 높게 사용하고 있어요. 현재까지의 사용 범위는 라틴 문자 30에 키릴 문자 70 정도. 사람들의 사용 실태는 라틴 문자 10 미만에 키릴 문자 90 초과. 이런 아주 혼란스러운 상황에 아랍 문자까지 끼어들었다면 공부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정말 짜증이 제대로 났겠죠. 저 역시 우즈벡어 라틴 문자를 읽고 타이핑할 때는 라틴 문자를 사용하지만 손으로 쓰는 것은 키릴 문자를 사용하거든요. 라틴 문자로 된 우즈벡어 책을 읽으며 모르는 단어 찾아서 적어놓을 때에는 키릴 문자로 적어놓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지극히 흔한 현상에 동조하고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아랍 문자까지 또 자기만의 영역에서 지금까지 계속 사용되었다면 학습자 입장에서는 아무리 숙달되었다 하더라도 세 문자 중 어느 문자를 주 문자로 삼을지로 머리 아프게 되었겠죠.


모스크에서 나와 다음 갈 곳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어요.



여기는 건물 상태가 타슈켄트 구시가지보다 괜찮아 보였어요. 이렇게 문 위에 있는 방을 우즈벡어로 boloxona 라고 해요. 여기는 원래 아이들 방으로 쓰는 곳이라고 해요. 우즈벡어로 bola 는 '아이'라는 의미이고, xona 는 '방'이라는 의미에요. 이 두 단어가 합쳐져 나온 말이 boloxona. 이 볼로호나는 구시가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더욱이 이렇게 좋은 상태로 남아 있는 경우는 더 적어요.


"여기 에스키 샤하르는 상태 괜찮은데?"


타슈켄트에 있는 하스트 이맘 모스크로 가는 길을 찾아 구시가지를 헤맬 때 본 구시가지의 상태는 여기보다 훨씬 안 좋았어요. 그래도 초르수 바자르와 하스트 이맘 모스크 사이에 있는 구시가지는 상태가 양호한 편이었지만, 그 외 지역 구시가지 건물과 도로 상태는 정말로 열악했어요. 그에 비해 이곳은 도로 상태도 그렇게 나쁘지 않고 건물 상태도 매우 괜찮은 편이라 걸어다니며 주변을 감상할 만 했어요.



"심요고츠다!"


우즈벡어로 simyog'och 는 '전봇대'에요. 이것은 진짜 나무로 만든 전봇대. 사실상 고어가 된 말이라 현재는 이 단어를 쓰면 사람들이 이해는 하지만 이 단어를 이용해 말하지는 않아요. 우즈벡어에서 '전봇대'는 러시아어에서 차용한 stolb 에요. 그런데 눈 앞에 있는 전봇대는 정말로 나무로 만든 전봇대. 정말로 simyog'och였어요. 이것은 타슈켄트에서도 본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이 구시가지에서 보니 정말로 과거로 돌아간 듯 했어요.



이렇게 골목길을 지나 다음 갈 곳인 소히브조다 하즈라트 마드라사 Sohibzoda Xazrat Madrasasi 에 도착했어요. 이 마드라사는 1850~1860년에 지어졌어요.



심상치 않은 입구. 입구 한 쪽에 벽돌이 수북히 쌓여 있었어요.


들어가자마자 제 예상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어요. 이 마드라사는 수리중. 안에서 보수 공사중이신 분들이 쉬고 계셨어요.


"안녕하세요."

"어서 와요."

"조금 둘러보아도 되나요?"

"둘러봐요."


여기는 보수중이라 들어가도 되는 곳과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 아직 정확히 나누어져 있지 않았어요. 그저 너무 위험하게 생긴 곳은 못 들어가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들어가도 되는 곳. 입구에서 왼쪽 방향으로 걸어보기 시작했어요. 입구 왼쪽에는 조그만 입구가 하나 더 있었어요. 그 입구 안에는 계단이 하나 있었어요. 이 계단을 통해 올라가면 위로 올라갈 수 있어 보였어요. 계단은 위쪽까지 막혀 있지는 않았어요.


"여기 들어가도 되요?"

"되요."


그래서 위로 올라갔어요.




마드라사 위에는 그다지 크게 눈에 띄는 것이 없었어요. 그저 마드라사 내부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는 장점 외에는 굳이 꼭 올라가야할 이유가 없었어요.



내부는 이렇게 공사중. 이제라도 보수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정말 다행. 이 보수 공사가 끝나면 여기도 나름 볼 만한 곳이 되지 않을까? 물론 그 보수 공사가 다 끝나려면 엄청난 시간이 걸리겠지만요.



규모만 놓고 보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마드라사였어요. 어쩌면 제가 서 있는 이곳은 그나마 보수 공사가 어느 정도 끝난 자리일지도 몰라요.


내려와서 계속 안을 둘러보았어요. 여기 저기 돌아다니다 좀 더 깊숙한 쪽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아서 더 안쪽 깊숙히 들어갔어요.



사진 오른쪽 끝에 있는 입구를 통해 들어온 안쪽. 여기는 정말로 아직까지 그냥 버려진 구역.



방 하나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입구가 낮아서 허리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어요.



버려진 유적 안에 들어오니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어요. 버려진 유적 안에 들어와서 신기하다는 느낌에서부터 이렇게 방치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한 생각까지요. 이렇게 방치가 된 이유야 사실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소련 시대부터 방치되어 왔을 테니까요. 구 소련 지역을 돌아다니며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고의적으로 방치된 유적들이 많았어요. 특히 민족주의 및 종교와 관련된 건물들이라면 더욱 고의적으로 방치되었다는 것이 보였어요.


마드라사를 둘러보고 나가려는데 아저씨가 저를 불렀어요.


"저거 사진 찍고 가!"

"저거요?"

"저거 오래된 거야!"



이것은 오래된 마차라고 했어요. 이것도 역시나 방치중.


이제 남은 것은 호지벡 마드라사 Xojibek Madrasasi. 슬슬 파르고나행 버스를 타러 가야 할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발걸음을 재촉해야 했어요. 코칸드에서 파르고나로 가는 버스는 론니플래닛에는 오후 6시 반 막차라고 나와 있었어요. 우즈베키스탄에서 대중교통수단이 대충 시간을 지키기는 하지만 혹시 모르므로 6시까지는 버스 정거장에 가야 했어요. 코칸드에는 숙소가 거의 없었거든요. 파르고나라고 숙소가 많이 있다고 책에 나와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그러나 코칸드보다는 많이 있는 것 같았어요. 파르고나 자체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다기 보다는 숙소 때문에 파르고나에 가는 것이었어요.


호지벡 마드라사를 찾아 구시가지를 돌아다니는데 애들이 우루루 몰려왔어요.


"중국인! 중국인!"

"나 한국인이야!"


한국인이라고 하자 애들이 러시아어로 막 떠들어대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나는 러시아어 몰라. 너희가 뭐라고 하는지 한 마디도 모르겠어. 자기들끼리는 우즈벡어로 이야기하면서 제게는 러시아어로 이야기하는 원치 않는 외국인 배려. 그냥 말 못 알아듣는 척하고 길을 갈까 하다가 얘네들에게 길이나 물어보기로 했어요.


"호지벡 마드라사 어디냐?"

"우리들 따라와요!"


졸지에 애들 한 무리를 이끌고 동네를 돌아다니게 되었어요. 애들은 사진 찍어달라고 하고, 이것 저것 물어보았어요. 그리고 자기들끼리 또 시끄럽게 엄청 떠들어대었어요. 이건 완전 동네 민폐. 애들이 재미있는 놀잇거리 하나 생겼다고 빽빽 소리치며 우루루 몰려다녔기 때문에 조용한 동네는 엄청나게 시끄러워져 버렸어요. 몇몇 동네 주민분들께서 아이들에게 조용하라고 꾸짖으셨어요.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런 게 먹힌다면 아이들 무리가 아니죠. 잠깐 동안 조용해졌다가 시끄러워지는 아이들. 게다가 사진이라도 하나 찍으려고 하면 옆에서 계속 자기들도 찍어달라고 난리였어요.


그래도 아이들 덕분에 길을 전혀 헤매지 않고 바로 호지벡 마드라사까지 빨리 갔어요.


"너희들 저리 가!"


호지벡 마드라사 앞 평상에 앉아 쉬고 계시던 아저씨께서 아이들을 다 쫓아내고 저를 부르셨어요.


"저요?"

"옆에 와서 앉아."


아저씨가 앉아 있는 평상에 걸터 앉았어요. 아저씨께서는 차 한 잔을 건네주셨어요.


"어디에서 왔어?"

"한국이요."

"일하러?"

"아니요. 학생이에요."


우즈벡어로 이야기하자 아저씨께서는 매우 신기해 하셨어요.


"우즈벡어는 어디에서 배웠어?"

"타슈켄트에서요. 타슈켄트에서 우즈벡어 배우고 있어요. 지금 학교에 허락 얻어서 여행다니고 있어요."


아저씨와 잠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호지벡 마드라사가 어디 있냐고 여쭈어 보았어요.


"호지벡 마드라사? 저기야. 저쪽 끝에 있는 것이 입구야. 저 마드라사는 코칸드에서 가장 오래된 마드라사야. 그래서 다른 곳들은 지도에 안 나와도 저곳은 지도에 나와."


아저씨가 가리킨 곳에서 어떤 아저씨 한 분이 저를 바라보고 계셨어요. 아저씨께서는 그 아저씨께 손을 흔드시더니 저기로 가면 된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제게 영어로 설명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면 자기 아는 분 중 한 명이 영어를 잘 아므로 그분께 연락해서 도와주게 하겠다고 하셨어요. 그러나 괜찮다고 했어요. 우즈벡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데다 그분을 기다릴 시간이 없었거든요.



이쪽은 입구처럼 생겼지만 입구가 아니에요. 여기로는 들어갈 수가 없어요. 아저씨가 알려준 쪽으로 가는데 아까 그 애들이 또 우루루 몰려왔어요. 제가 문 앞에 서자 아저씨께서는 제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애들은 다 쫓아내었어요. 애들은 안까지 쫓아들어가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아저씨가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하시며 쫓아내셔서 못 들어왔어요. 주변은 다시 조용해졌어요.


아저씨께서는 친근하게 다가오셔서 제게 관광객이냐고 물어보셨어요. 그래서 지금 학생이고, 타슈켄트에서 우즈벡어를 공부하고 있다고 대답했어요. 아저씨는 열쇠를 가져와야하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셨어요.



아저씨께서 열쇠를 가지러 가신 동안 내부를 둘러보았어요.


"여기 마드라사 맞아?"


아무리 둘러보아도 마드라사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어요. 여기는 정말 평범한 일반 가정집. 여기와 마드라사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건가? 그래서 이 집을 통해서만 마드라사에 들어갈 수 있는 건가?


아저씨께서 열쇠를 가져오시더니 따라오라고 하셨어요. 아저씨께서는 집 구석 가장 허름한 곳에 가셨어요.



"여기는 뭐지?"


집 구석 버려진 창고처럼 생긴 곳. 아저씨께서는 열쇠로 자물쇠를 따고 문을 열더니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어요.


...


...


...



"이거 뭐지?"


할 말을 잃게 하는 풍경. 지도에 다른 마드라사는 안 나오더라도 이 마드라사는 코칸드에서 가장 오래된 마드라사이기 때문에 지도에 나온다고 했어요. 그렇다면 매우 중요한 마드라사. 이 마드라사는 론니 플래닛 코칸드 지도에도 당당히 표시되어 있는 마드라사였어요. 그런데 내부에 들어가니 할 말이 없었어요.


이건 뭐 할 말이 없네...


밖에서 본 호지벡 마드라사는 이렇게 생겼어요.



외부에서 보았을 때 내부에 무언가 크게 볼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이것이었어요.





아저씨 말씀에 의하면 이 마드라사가 코칸드에서 매우 중요한 마드라사이기는 했어요. 문제는 보수가 하나도 안 되고 방치중이라는 것. 돈이 나와야 보수를 할 텐데 정부에서 맨날 보수 비용을 주겠다고만 하고 돈을 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방치중이래요. 더욱 큰 문제는 이런 지경이면 부끄러움이기 때문에 알려지지나 않아야 할 텐데 이 마드라사가 알려지기는 또 잘 알려졌다는 것. 론니플래닛 믿고 코칸드 오는 관광객이라면 여기도 오기 마련이에요. 실제로 관광객들이 종종 여기를 찾아오는데, 그때마다 안 보여줄 수는 없어서 보여주기는 하지만 정말 그때마다 너무 창피하다고 하셨어요.


"이것은 정말 수치야!"


아저씨께서는 안을 보여주시며 이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정말 여기를 일부러 찾아온 제가 미안할 정도로 내부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방치된 수준.



안에서 이것을 발견했어요. 이 집은 단순히 오래된 마드라사 정도의 의미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위인의 집이기도 했어요. 읽어보면 우즈벡 소비에트 문학의 위대한 문인이었던 함자 하킴조다 니요지 (1889~1929) 가 살았던 곳. 이 석판도 그냥 굴러다니듯 한 낡은 기둥에 기대어져 있었어요. 이 정도 의미를 가진 곳이라면 빨리 보수를 해야 할텐데 정말로 보는 사람이 부끄러울 정도로 방치중.


할 말을 잃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어요. 아저씨께서는 차 한 잔 하고 가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이제 시간이 정말 없었어요. 그래서 지금 파르고나행 버스를 타러 가야 한다고 말씀드리자 아저씨께서는 집 안에 있는 석류 나무에서 석류 한 개를 따서 주셨어요.



버스정거장에 도착하니 거의 6시가 다 되었어요.


"널널하게 버스 타고 가겠구나."


파르고나행 버스에 타려는데 차장이 빨리 타라고 했어요. 코칸드에서 파르고나행 막차는 오후 6시였어요. 6시에 미리 가서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정확히 시간을 맞추어서 간 것이었어요.


파르고나행 버스 요금은 4천숨. 버스에 올라타 자리에 앉았어요.


'오늘은 그래도 여행이 생각보다 쉽게 잘 풀리는구나.'


아침에 늦잠을 자서 여행을 늦게 시작했어요. 그래도 어떻게 코칸드를 문제 없이 잘 둘러보았어요. 여기는 말만 통한다면 딱 한나절 동안 보기 좋은 곳. 볼 것도 나름 조금 있고, 걸어서 돌아다닐만한 도시였어요.


차가 출발했어요. 기분 좋게 좁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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