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3장 02화

좀좀이 2017. 11. 27.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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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3장 02화


 나는 추위에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다. 거리에 눈이 쌓여 있는데 얇은 검은 바지와 반팔 셔츠를 걸치고 있다. 길을 걸어간다. 바람이 불고 눈발이 날린다. 회색빛 하늘 아래에 나 홀로 있다.

 그때 감비르가 나타난다. 너는 자신이 남자이자 여자라고 생각하지. 많은 훈련을 거쳐서 이제 육체적으로도 남자이자 여자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어. 너는 나를 바라보며 내가 너와 같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똑같이 저주술을 수련하고 진정한 자유와 평화, 진리의 길을 걷기를 바란다. 그러나 내가 이 마딜 땅 자체를 증오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차마 강요까지는 하지 못한다. 너는 생각한다. 내게 꾸준히 너의 그 모습을 보여주다보면 내가 점점 익숙해지고 조금씩 마음이 변해가겠지. 어느 순간 너와 나는 같은 길을 걷고 있을 거야. 너는 나를 보자 환히 웃으며 인사한다. 너는 너를 바라본 내 표정이 영 밝지 않다고 생각하며 아직은 당연할 수도 있다고 속으로 생각한다. 괜찮아. '너도 언젠가 분명히 저주술을 수련하고 있을 거야.' 너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때 라키사가 다가온다. 너는 나와 감비르를 번갈아보더니 내가 감비르를 못마땅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에 기분이 안 좋아졌다. 너는 감비르가 저러는 것은 단지 감비르의 문제라고 보고 있다. 그건 어디까지나 감비르 개인의 문제이고, 친구가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은 있는 그 자체로 받아들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해. 더욱이 감비르가 저렇게 입는 것, 여자의 고민을 진지하게 이해하려 하는 모습을 보며 네 자신의 문제에 같이 공감하려는 모습으로 보고 있어. 너는 감비르에 대한 내 태도가 매우 못마땅하다. 왜 감비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지? 감비르가 여장을 한다고 해서 우리와 친구라는 것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잖아. 게다가 감비르는 지금 여성이 겪는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이해하려고 한다구. 너는 그런 자세를 왜 좋게 보지 않는 거야? 너는 일부러 감비르에게 친한 척을 하며 내 반응을 살펴본다. 그런 네 모습에 어이없다는 듯 한숨 쉬는 내 모습을 본 너는 속으로 답답해한다. 너는 대체 왜 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 비록 이런 모습이지만 얘 의도가 나쁜 건 전혀 아니잖아! 남자가 여장하는 것이 뭐 어때서!

 멀리서 아다비아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너는 내 주위에 있는 라키사와 감비르를 바라보더니 다시 나를 바라본다. 너는 마음 속에서 중얼거린다. '너는 왜 그렇게 눈이 높니? 나는 항상 내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너를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이렇게 높이 올라왔는데도 너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아. 대체 너는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 여자를 좋아하는 거야?' 너는 나와 라키사, 감비르가 있는 곳으로 오지 못한다. 우리들이 있는 곳으로 오기에는 너 자신이 너무나 더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더러워져버렸기 때문에 다시 우리들 속으로 돌아오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다고 자책한다. 그 길을 가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한다. 너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린다. 너는 나를 바라보며 원망한다. '너는 왜 내게 눈길을 주지 않는 거니? 멀리 떨어져 있지만 제발 고개를 돌려서 나를 바라봐줘!'

 켈라자야가 내게 다가와 말한다. '너 지금 뭐해?' 너는 지금 나를 보며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한다. 너는 나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기한 대상이자 종종 자기를 보며 영 못마땅해해서 기분 나쁘게 만드는 인간이라 생각하지. '오늘은 또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해서 나를 기분나쁘게 하려고 하지?' 속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너는 그 말을 기다린다. '그래도 그게 나를 위한답시고 하는 거잖아.' 종종 내 말에 짜증나기는 하지만 너를 진짜 위해준다는 사실에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기뻐한다. 아직도 너는 시장에서 폭발이 일어났을 때 내가 너를 밀쳐 넘어뜨린 것을 잊지 못한다. 그 일을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한다. 지금 나를 보며 또 그 장면을 생각한다. '그때 기분이 정말 나빴어. 하지만 그게 나를 위해 목숨을 던진 행동이라는 것이었대. 그때 내가 죽을 일은 없었고 정작 죽을 뻔한 것은 너야. 나는 아직도 그게 이해가 안 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를 위해준 사람은 없었어. 넘어뜨려서 나를 다치게 한 건 지금도 못마땅하지만 어쨌든 많이 고마워.' 너는 내가 담배를 입에 물기만을 기다린다. '어서 담배를 입에 물어. 그래야 내가 불을 붙여줄 거 아냐.'

 내 뒤에서 이고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너는 나를 보며 곰곰히 홀로 생각에 빠진다. '설마 저놈도 저주술 한다고 미치지는 않겠지? 안 돼.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돼.' 너는 담배를 태우며 말없이 나를 주시한다.

 너희들 모두 내 앞에 서서 말한다. '너는 대체 누구니?'


 "뭐야?"


 꿈이었다. 머리가 어지럽다. 지금껏 꾸어온 꿈과 너무 다르다. 꿈 속에 감비르, 라키사, 아다비아, 켈라자야, 이고가 순서대로 나왔다. 그들의 모습이 보이는 순간 그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점으로 장면이 바뀌었다. 나는 꿈 속에서 무엇이었던 걸까? 그들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의 생각을 모두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정작 그들을 보며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껍데기만 존재했다. 내가 그들을 보는 순간 그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장면이 그들이 바라보는 내 모습으로 바뀌며 그들의 생각을 그들의 목소리로 듣고 느꼈다. 그렇지만 정작 나는 그 꿈 속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느낀 걸까? 전혀 없다. 나는 단지 하나의 껍데기에 불과했던 걸까?


 이 꿈은 어디엔가 기록해놓고 싶다. 그런데 어떻게 기록을 남겨야하지? 기록을 남기고 싶지만 대체 어떻게 기록을 남겨야할지 모르겠다. 분명히 지금껏 내가 직접 겪거나 본 것, 그리고 책이나 이야기를 통해 들은 것과는 너무 다르다. 나는 존재하는데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들'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 내가 너희들인지 너희들이 나인지조차 뚜렷히 분간이 가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 너희들은 누구인가? 이걸 글로 대체 어떻게 써야 제대로 남길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지?


 이건 주변에서 하도 심란하게 굴어서 꾼 꿈일 거야. 걔네들 모두 꿈 속에서처럼 생각하고 있을 리 없지. 아다비아는 또 서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라키사는 계속 아다비아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아다비아를 본 사람이라고는 나와 켈라자야 뿐이다. 켈라자야는 내 앞에서 아다비아와 만났을 때마다 가볍게 스쳐지나가듯 했다. 그러니 아다비아가 이 도시로 돌아온 후 걔를 제대로 만나본 사람은 나 뿐이다. 감비르는 다행히 서점에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지만 대신 게첸이 자꾸 서점에 온다. 와서 되도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고 책을 빌려가곤 한다. 게첸을 통해 감비르 소식을 듣기 싫어도 듣는다. 어찌 된 것이 증상이 더 안 좋아진 것 같다. 켈라자야는 여전히 한밤중에 이 도시를 배회하고 있다. 그 행동 자체가 참 걱정되기는 하지만 켈라자야에게 그것에 대해 이야기했다가는 켈라자야가 발끈하겠지. 켈라자야야 자기 몸 하나야 잘 지킬 거구. 하지만 요새 들어서 켈라자야가 유독 피곤해하는 것 같다. 단순히 날이 춥고 길에 눈이 쌓여 있어서 육체적으로 피곤해보인다는 것이 아니다. 밤새 넌절머리나는 책을 부여잡고 아침을 맞이한 사람 같달까? 머리가 어지럽고 복잡하고 아파서 힘들어하는 듯한 모습으로 서점으로 오곤 한다. 그리고 예전과 달리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어도 정신 못차리고 깊게 잔다. 라키사는 항상 같지만 라키사조차 조금 지쳐보인다. 모두가 매일 일상처럼 일어나는 살인 사건에 피곤해하고 지쳐하고 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구. 라키사를 챙겨주고 싶은데 지금 누구를 챙겨줄 상황이 아니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니까. 이고는 요새 블랑쉬블르와 루즈카를 만나러 자주 나간다. 그거 말고도 일이 있다고 이른 새벽에 나가서 밤 늦게 들어올 때도 있구. 바하르는 아예 위험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바하르를 보면 확실히 위험에 매우 둔감해졌다는 것이 느껴진다. 이제 주간 근무라고 치롤라에게 계속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거 같던데 잘 될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1월도 절반 넘게 지나간다. 벌써 1월 17일이네. 그래, 차라리 날짜나 빨리 지나가버려라. 시간이 빨리 흘러야 이 지긋지긋한 겨울도 끝나고 봄이 찾아오지. 이고는 여전히 자고 있다. 요즘 들어 이고가 유독 많이 피곤한 것 같다. 책 수거도 다니고 새벽에 나가서 한밤중에 들어오는 날도 있고 하니 그럴 만도 하다. 조용히 물통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새벽 공기가 엄청나게 차다. 허파까지 얼려버린다. 주변을 잘 둘러보며 우물을 향해 걸어간다. 거리에는 경찰과 군인 밖에 없다. 평소에 있는 만큼 있다. 간밤에 이 동네에서 별 일 없었나보다. 경찰 둘이 담배를 태우며 잡담을 나누다 나를 발견하고는 유심히 쳐다본다.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이 길을 하루 이틀 지나다니는 것이 아니라 경찰들도 내 얼굴을 안다. 우물로 물을 길었다. 도저히 세수를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세수는 서점으로 돌아가서 뜨거운 물과 이 물을 섞어서 해야겠다. 물이 꽉 찬 물통 두 개를 들고 다시 걸어왔던 길을 걸어간다. 여기저기 빙판이 생겼다. 길이 너무 미끄럽다. 주변도 계속 둘러봐야지, 바닥도 똑바로 쳐다보며 걸어야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야.


 서점으로 돌아와 세수를 하고 화로에 불을 붙인 후 서점 안을 빗자루로 쓸었다. 이놈의 먼지는 대체 어디에서 기어들어오길래 매일 이렇게 먼지가 수북히 쌓이는 거야? 그때 문이 열렸다. 켈라자야다. 오늘도 정신적으로 엄청나게 피곤해보인다.


 "안녕."

 "괜찮아?"

 "응?"

 "엄청 피곤해보여서."

 "아니야. 괜찮아."


 켈라자야는 화로 옆으로 가서 앉았다. 안으로 들어가 말린 사과 한 조각을 컵에 집어넣고 뜨거운 물을 따랐다. 그 컵을 들고 나와 켈라자야에게 건네주었다. 켈라자야는 나를 힐끗 한 번 쳐다보더니 컵을 받아들었다.


 "뜨거워. 천천히 마셔."

 "내가 바보인줄 알아?"


 켈라자야는 뜨거운 물을 호호 불어가며 조금씩 홀짝인다. 얘는 대체 밤마다 뭘 하는 거야? 오늘 옷은 어제와 똑같은 붉은 포도즙빛 민무늬 블라우스에 검은색 짧은 스커트, 그리고 새까만 외투와 그보다 더 까만 무릎까지 올라오는 부츠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겨울이 된 후 켈라자야의 옷은 거의 항상 색이 비슷하다. 상의는 검은색 아니면 진한 붉은 계열, 나머지는 전부 검은색. 옷은 종종 바뀌는 것 같은데 색깔은 항상 똑같다.


 "너 검은색이랑 빨강색 많이 좋아해?"

 "왜?"

 "그냥...겨울 되니 항상 그 색만 입는 거 같아서."

 "이번에는 옷 색깔이 불만이야?"

 "아니야! 그냥 물어본 거야. 항상 검은색 아니면 붉은색이잖아."


 켈라자야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얘는 하여간 뭐만 물어보면 나한테 불만 있냐고 따져댄다.


 "그냥 편해서 입는 거야."

 "아...하긴, 겨울에 빨래하기 힘드니까."

 "그런 거 아니야."

 "그러면?"

 "너 나를 위해 물어보는 거야?"

 "아니. 그냥 궁금해서..."

 "그러면 되었어."


 켈라자야는 손가락으로 컵 속에 있는 물 먹은 말린 사과를 꺼내 입에 집어넣었다. 아, 얘한테 스푼 주는 거 까먹었구나. 이미 다 마시고 말린 사과까지 건져먹었는데 어쩔 수 없다. 얘야 이런 것으로 삐지지는 않겠지. 식사할 때 자꾸 맨손으로 집어먹으려 하는 애니까. 설마 오히려 자기 스타일에 맞게 주었다고 속으로 좋아하는 거 아니야? 켈라자야는 컵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계속 불을 쬐고 있다. 대체 밤에 뭘 하고 돌아온 걸까? 불을 쬐며 따뜻한 물을 마셔서 몸이 풀렸는지 의자에 앉아서 꾸벅꾸벅 존다. 안에 들어가서 자라고 하면 또 성질내는 거 아니야? 그래도 뭐 불편하게 여기에서 졸고 있어? 항상 들어가서 잘만 잤으면서.


 "켈라자야, 졸리면 안에 들어가서 자."

 "아니에요! 제가 안 그랬어요!"


 내가 한 거라고는 안에서 들어가서 자라고 말한 것 밖에 없다. 그런데 켈라자야는 갑자기 화들짝 놀라서 몸을 번쩍 세우더니 그대로 뒤로 자빠졌다. 뒤로 자빠지자마자 놀라서 정신도 없을 텐데 바로 옆으로 굴러서 엎드리더니 바닥을 기어서 내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가지런히 무릎을 꿇고 나를 향해 두 손을 싹싹 빌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예, 제가 잘못했어요. 진짜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때리지만 말아주세요. 정말 잘못했어요!"

 "야, 갑자기 왜 그래?"


 두 손으로 머리를 가리고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 벌벌 떨며 흐느낀다. 얘는 갑자기 또 왜 이래?


 "아악! 진짜 제가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럴께요! 때리지만 말아요. 앞으로 절대 안 그럴께요!"

 "야, 정신차려!"


 바닥에 쭈그려 앉아 켈라자야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켈라자야는 계속 눈물을 줄줄 흘리며 두 손을 싹싹 빈다. 제발 때리지만 말라고 애원한다. 대체 뭘 또 때리지 말라는 거야? 켈라자야 상체를 잡고 흔들었다.


 "야, 야! 뭐 하는 거야?"


 켈라자야 상체를 마구 흔들자 켈라자야는 그제서야 울음을 그치고 나를 쳐다보았다. 두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다물며 몸을 부르르 떤다. 순간 내 고개가 오른쪽으로 휙 돌아갔다. 왼뺨이 얼얼하다. 순간 화가 머리 끝까지 쫙 치솟아올랐다.


 "아, 진짜!"


 켈라자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방문을 있는 힘껏 열고는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아주 난폭하게 쾅 닫아버렸다. 아, 진짜 아침부터 열받네. 자기 혼자 졸다가 번쩍 깨서 엉엉 울다가 나한테 따귀 때리고 성질내고 있어. 진짜 오늘은 시작부터 재수 더럽게 없는 날이다. 진짜 켈라자야 저건 미쳤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온 힘을 다해서 따귀를 날리는 거야? 진짜 남자였으면 바로 면상에 주먹을 꽂아넣어버렸을 거다. 그래도 내가 참아야지. 저런 정신나간 애랑 싸워서 뭐하냐. 남자, 여자를 떠나서 제정신이어야 따지든 싸우든 하지.


 화로에서 불을 쬐고 있는데 서점 문이 열렸다. 진짜 오늘 일진 더럽게 안 좋구나. 아침부터 켈라자야 때문에 열받아 죽겠는데 이번에는 감비르다. 저 자식은 오늘도 이상하게 진한 화장을 하고 여자 옷을 걸치고 왔다. 저놈은 무조건 서점에 출입 금지다. 이고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서점 밖으로 끌고 나가야 한다. 이고가 감비르 저러는 거 무지무지 싫어하니까. 이고한테 감비르를 왜 서점 안으로 들였냐고 이따 한 소리 듣지 않으려면 지금 미리 끌고 나가야 한다.


 "야, 나가자."

 "왜? 나는 여기 안에 들어가면 안 되니?"

 "나가자. 나가서 이야기하자구."

 "싫은데? 나 여기에서 몸 좀 녹이고 싶어."

 "좀 쫓아나오라고!"


 감비르를 억지로 잡아끌고 서점 밖으로 나왔다. 아예 들어갈 엄두도 못 내게 문도 잠가버렸다. 감비르를 굳이 안 봐도 불만투성이겠지. 상관없다. 네놈이 불만인 것보다 너를 보고 이고가 나에게 한 소리 하는 것이 더 싫으니까. 다행히 서점 앞 찻집이 문을 열고 장사 준비를 하고 있다. 찻집으로 끌고 들어갔다.


 "왜 왔어?"

 "너 내가 보고 싶지 않았니? 정말 실망이야!"

 "아침부터 속 뒤집어지게 하지 말구. 왜 왔냐?"


 감비르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침부터 진짜 미치겠네. 이런 짓은 라키사나 아다비아, 켈라자야가 해야 예쁜 거지. 네가 아무리 네 자신이 자웅동체라 우겨도 넌 남자고, 그런 행동은 정말 보기 싫다.


 "나 지금 너한테 또 상처받았어! 이 감정 어떻게 할 거니?"

 "헛소리하려면 돌아가! 아침부터 사람 피곤하게시리."


 감비르의 감정 따위에 신경써야 할 필요는 전혀 없다. 내가 오라고 한 것도 아니고, 제발 오지 말라고 빌고 있는데 자기가 먼저 찾아왔으니까. 감정 상해서 화났다면 그냥 돌아가든가. 네가 지금 돌아가면 나야 좋다. 가뜩이나 새벽부터 이유없이 케라자야한테 따귀 맞아서 기분도 아주 최악인데. 그러나 감비르는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어보인다. 한숨을 푹 내쉬더니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본다. 제발 그 면상 좀 어떻게 치워주면 안 될까? 일부러 찻집 안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 요즘 꿈 꾸니?"

 "아니."

 "어떤 꿈도 안 꿔?"

 "어. 고작 그 이야기하러 찾아온 거냐?"


 오늘 아주 이상한 꿈을 꾸고 잠에서 깨어났다. 그 꿈은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분명히 존재하는데 존재하지 않는 꿈. 그 꿈 속에서 존재하는 나는 단지 껍데기였던 걸까? 나는 '너희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꿈을 꾸었다고 이놈에게 말해줄 생각은 아예 없다. 설령 동네방네 희안한 꿈을 꾸었다고 떠들고 다니더라도 이 미친놈에게만은 이야기해주지 않을 거다. 보나마나 그게 무슨 저주술이니 진정한 진리니 자유와 평등이니 헛소리 지껄이면서 같이 저주술 수련하자고 할 거니까.


 "나 일곱 가지 꿈에 더 많이 다가간 거 같아. 어쩌면 좋지?"

 "뭔 소리야?"


 감비르는 부끄러운 듯 두 손을 뺨에 대고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그냥 아무 짓도 안 하고 예전의 너처럼 행동해주면 안 될까? 아침부터 이놈이랑 싸우기 싫다. 그냥 입 다물고 있어야지. 또 편견이네 차별이네 하는 소리 들으면 지금은 진짜 꼭지가 돌아버릴 거 같아. 진짜 꿈을 거지 같은 것을 꾸니 시작부터 일진 더럽게 사납네. 켈라자야는 왜 아침부터 발작하고 난리고, 이놈은 또 왜 아침부터 찾아와서 헛소리를 지껄이는지 모르겠다. 다 좋다. 그걸 왜 내가 당해야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나 어제 멋진 꿈을 꾸었지 뭐야."

 "뭔 꿈? 네가 진짜 막 가슴이 빵빵하게 자라나고 아랫도리 뚝 떨어져?"

 "어머! 그런 거 아니야! 그 꿈은 있지, 너무나 황홀했단다!"

 "응, 퍽이나."


 감비르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화가 나서 상기된 것이 아니라 뭔가 황홀한 것을 보아 저절로 얼굴이 붉어진 듯한 표정이다. 대체 뭐 얼마나 휘황찬란한 꿈을 꾸었길래 저러는 거야? 그보다 그런 꿈은 혼자 간직하라구. 나한테 굳이 안 들려줘도 돼. 나는 그런 꿈 이야기 듣고 싶은 생각 일절 없으니까. 너의 헛소리보다 아까 켈라자야가 왜 갑자기 그런 이상한 행동을 하고 나한테 따귀를 날렸는지가 밤하늘의 어둠만큼 궁금하다고.


 "꿈 속에서 나는 이 길을 걷고 있었어.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며 꽃을 흔들어주는 거 있지! 남자들은 나처럼 예쁘게 꾸미고, 여자들은 우리가 '남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처럼 옷을 입고 있었어. 그들이 모두 활짝 웃으며 손에 손을 잡고 있었어. 너무 멋지지? 황홀하지 않니?"

 "어."


 건성으로 대답했다. 뭐가 대단하다는 거야? 그런 꿈이야 얼마든지 꿀 수 있는 꿈 아니야? 몸서리칠 정도로 외롭던 차에 꿈 속에서 사람들이 자기를 옹호해주는 꿈을 꾸어서 기쁘다는 건가? 그렇게 받아들여야 하나. 감비르가 꿈 속에서 어떤 장면을 보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것이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나한테 찾아와 자랑할 꿈은 분명 아닐 거다.


 "모두가 하나가 되었어. 이것은 바로 진정한 저주술의 모습 아닐까?"

 "그러니까 그 말 하려고 나한테 온 거야?"

 "응!"

 "나 저주술 싫다니까! 이젠 진짜 싫어! 그렇게 좋은 거면 너나 실컷 하라구!"


 이놈 때문에 더 짜증난다. 결국은 나보고 자기와 같이 저주술 수련하자는 거잖아. 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해? 나 저주술 수련 죽어도 안 한다구. 나는 이 망할 마딜 땅에서 탈출하는 것이 목표란 말이야! 어차피 나는 정신적으로 아드라스인이 아니고 육체적으로 마딜인이 아니니까 아예 뭐든 속하지 않는 엉뚱한 곳에 가서 살 거다. 그게 내 목표이자 꿈이다. 저주술을 수련하는 순간 이 나라 못 떠나! 그리고 그 이전에 저주술과 이 미친놈의 역겨운 꼬라지와 돌아버린 정신세계의 상관관계를 도저히 모르겠다. 이러다 아주 키란이 스스로 거세했다고 우길 기세다.


 "왜 그렇게 수줍어해? 너 스스로 이미 저주술을 사용했잖니."

 "뭔 개 풀 뜯어먹는 소리야? 내가 언제 저주술을 썼다는 거야?"

 "그 시험! 어머, 벌써 잊은 거니? 너는 너의 의지로 결과를 바꾸었잖아. 그것이 바로 저주술! 차별과 편견을 뛰어넘은 멋진 진정한 저주술!"

 "이 병신아, 그게 뭔 저주술이야? 아다비아랑 라키사가 도와주고 내가 열심히 해서 통과한 거지!"

 "그 모든 것이 저주술! 나는 있지, 너랑 같이 이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바꾸고 싶어. 무한한 자유, 끝없는 평등...너무 황홀하지 않니?"

 "야, 가라. 나 들어가서 잠이나 더 자아겠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놈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다. 너무 피곤하다. 오늘은 이고한테 몸 너무 안 좋아서 일 쉰다고 하고 하루 종일 방에 처박혀 있어야 할 날인가? 아침부터 일진이 사납다.


 "타슈갈, 너 있잖아..."


 뒤돌아서서 찻집에서 나가려는데 감비르가 불렀다. 고개를 뒤로 돌렸다. 감비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뭇거리고 있었다.


 "뭐? 말할 거면 빨리 말해."

 "너, 이런 내 모습이 싫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찻집에서 나왔다. 그러면 그걸 좋아하라고? 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고 가슴에 헝겊 뭉치 집어넣는 것 다 역겹지만, 정말 싫은 건 그게 아니다. 그렇게 하고 다니는 감비르와 같이 다니면 나까지 미친놈 취급받겠지. 그래도 그건 괜찮아. 그거까지는 참아줄만하다. 라키사 말대로 그거야 개인 문제니까. 꼴보기는 싫지만 자기가 그렇게 입고 싶다는데 뭐라고 해.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다. 저놈의 이해할 수 없는 정신세계가 끔찍하게 싫고 토나오는 거다. 남자면 남자고 여자면 여자지 무슨 남자이면서 여자라는 거야? 그리고 무슨 진정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건지 아예 이해를 못 하겠다. 이건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 그냥 미친 헛소리다. 앞뒤 하나도 맞지 않고 대자연의 섭리조차 자기 멋대로 부정하고 그걸 나한테 자꾸 강요하려고 한다. 진짜 이렇게 대하면 좀 알아서 떨어져나갈 줄도 알아야지, 왜 자꾸 나한테 찾아와서 같이 저주술 수련하자고 해대는지 모르겠다.


 '오라는 아다비아는 안 오고 별 개 잡것 감비르 저놈만 오네.'


 서점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이고가 말없이 물통을 들고 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잠시 후, 세수를 하고 나온 이고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오늘 이따 오후에 책 수거 좀 다녀와."

 "책 수거?"

 "응. 나 오늘 어디 갔다와야 해서."

 "알았어. 나 혼자 돌아다니면 돼?"

 "어. 혼자 다녀도 될 거야. 세 곳이니까."

 "응. 잘 다녀와."


 이고는 방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는 바로 서점에서 나갔다. 이고가 나간지 얼마 되지 않아 라키사가 서점에 왔다. 라키사는 내 표정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질문을 던졌다.


 "감비르 왔다 갔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너 표정이 매우 안 좋아서."

 "어. 왔다 갔어. 아주 아침 일찍."


 라키사는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와 앉았다. 네가 무슨 이야기할 지 뻔히 알아. 그렇기 때문에 더 싫어. 너는 제대로 모르잖아! 라키사가 내 손을 잡았다. 손이 정말 차갑다.


 "타슈갈..."

 "왜?"


 라키사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고민이 되는지 계속 자기가 쥐고 있는 내 손만 바라보았다. 라키사 눈에 감비르는 대체 어떻게 비추어지는 걸까?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라키사가 감비르의 저 미친 생각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나? 희안하게 라키사는 그랬던 적이 없는 것 같다. 그것도 운이라면 운인 건가. 아니면 감비르가 라키사에게만은 일부러 정상인 척 하는 것일까?


 라키사가 내 손을 더 힘껏 움켜쥐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너는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고 있을까.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고? 감비르를 너무 미워하지 말라고?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 감비르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라고? 나도 진심으로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 켈라자야 때문에 안 될 건가? 켈라자야가 어떤 과거를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끔찍한 과거였던 것 같기는 하니까.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라키사가 감비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지금 감비르는 받아주고 말고 할 것이 아니다. 생각이 다른 것은 대자연의 섭리 안에서의 이야기다. 감비르는 대자연의 섭리를 벗어났다. 그건 받아줄 수 없는 거다. 미친 거니까. 아무리 라키사가 나한테 부탁하고 사정한다 해도 될 것이 아니다. 감비르가 라키사 앞에서 얼마나 정상인 흉내를 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내가 그렇게 싫다고 했으면 그만할 때도 되었잖아. 왜 자꾸 나한테 같이 저주술 수련하자고 하는 건데? 그거야말로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말에 전적으로 위배되는 거다. 내가 싫다는데, 왜 내가 싫다는 의견은 철저히 무시하고 꺾으려 드는 거야?


 "기분 풀어."

 "응?"

 "기분 풀어."

 "어."


 라키사는 다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답답하다. 왠지 나만 지독하게 나쁜 놈이 된 기분이다. 그렇지만 감비르가 얼마나 미쳤는지, 왜 도저히 받아줄 수 없는지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도 못하겠다. 그건 이미 인간의 상식, 아니지, 인간의 도리를 벗어난 것이니까. 감비르가 에드자로 돌아온 이후 감비르와의 기억은 다 엉망진창이다. 보통 상식적인 흐름들에 의존해 기억에서 비어 있는 부분들을 복구해나간다. 이건 그게 되지 않는다. 감비르야 자기 생각이 옳고 매우 논리적이라고 생각하겠지. 그건 어디까지나 미친놈이 자기를 미쳤다고 하지 않는 것이고. 일반인 눈에서는 미쳐도 단단히 미친 거다.


 "걔는 걔 나름대로 너를 위해주는 거잖아."

 "나를 파괴하려 드는 거야."

 "네가 너무 나쁘게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지금 너만 그러는 거야' 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 말이 혀뿌리까지 기어올라왔지만 다시 가슴 속으로 밀어넣었다. 이고에게 물어보라고, 켈라자야에게 물어보라고, 바하르에게 물어보라고 하고 싶지만 그런다고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냥 내가 입을 다물어버리는 것이 낫지. 라키사가 감비르를 감싸고 도는 행동만큼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라키사가 착해서 그런 것이겠지만...왜 내 이야기는 제대로 안 들어주는 거야? 이것은 이유 없이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구. 최소한 사람이라면 절대 받아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거부하는 거다. 저주술이야 이 땅에서는 취향이라 치자. 그렇지만 그 저주술을 수련하는 길이랍시고 감비르가 떠들어대는 것은 최소한 인간이라면...그것은 넘을 수 없는 선이자 넘어서도 안 되는 선이다. 인간을 포기하란 소리다.


 점심을 먹을 때까지 라키사와 말을 하지 않았다. 라키사는 조용히 서점 일을 하고 책을 볼 뿐이었다. 나도 마찬가지로 서점 일을 하고 책만 봤다. 답답하다. 이 미친 감비르 썩을 새끼 때문에 라키사와도 이렇게 어색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라키사와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관계가 좋아지려고 할 때마다 감비르 문제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문제로 이렇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버린다. 이 문제만 극복하면 세상이 미쳐돌아가도 조금씩 라키사와 더 많이 친해질 수 있을 거 같은데 이 문제가 그야말로 하늘 끝에 닿아 있는 벽이다. 이건 내 주장을 굽히고 양보하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감비르에게 잘 대해주라고? 걔는 지금 나를 자기쪽으로 강제로 끌어들이려고 하고 있는데? 그것이 진정한 옳은 길이라 혼자 강하게 믿으며 말이다. 점심을 먹는 동안에도 라키사와 말을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이제 책 수거나 다녀와야겠다.


 "나 책 수거 다녀올께."

 "응. 조심해."

 "알았어."


 대출 카드가 들어 있는 나무통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지게를 짊어메었다. 그래도 낮이라 그런지 공기가 새벽보다는 따스하다. 오늘은 에드자 대학교쪽에 세 곳이다. 주변을 잘 둘러보며 걸었다. 어디에서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거리에 서 있는 경찰들이 자기들끼리 잡담하며 놀고 있다. 그러나 저들 역시 긴장하고 있는지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히히덕거리고 있다. 작년보다 나아진 거라면 이제 하도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니까 그것이 이제는 전보다 조금은 더 당연하게 느껴진다는 거다. 물론 또 내 앞에서 그런 사고가 발생한다면 무서울 거다. 그렇지만 내 앞에서만 별 일 없다면 이것이 다른 일상과 다를 것이 있나 싶은 마음도 조금 든다. 어디서든 무서운 일이 터질 수 있다는 공포가 온몸을 꽉 묶고 있지만, 어디서든 사람들의 일상은 지속되고 있으니까. 냉정히 생각해보면 지금 나를 실제 괴롭히는 것은 그 공포가 아니라 이 추위잖아.


 '쟤 치롤라 아냐?'


 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푸른색 긴 외투를 걸친 여자는 분명히 치롤라였다. 쟤가 지금 왜 길을 돌아다니지? 켈라자야한테 진짜 죽을 뻔 한 이후로는 얌전해진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이렇게 돌아다니도록 루즈카가 놔두나? 치롤라도 자기 몸 하나 정도 지킬 저주술이야 쓸 수 있기야 하겠지만, 쟤도 지금 정신 상태가 제정신은 아닐텐데.


 "치롤라!"

 "안녕."


 치롤라에게 인사하자 치롤라가 차분한 목소리로 내 인사를 받아주었다. 아직도 마음 속에 앙금이 남아 있으려나?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자고 마구 외쳐대던 것을 외면했으니까. 하지만 지금도 그 시위에 참가하지 않은 건 작년에 내가 한 일 중 두 번째로 가장 잘 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 시위가 만악의 근원이었으니까. 그래도 바하르 말에 의하면 바하르랑 잘 지내고 있다고 하니 말이 안 통할 정도로 정신 상태가 안 좋은 거 같지는 않은데.


 "네가 이 시각에 여기 왠 일이야?"

 "나 이쪽으로 방 잡았어."

 "루즈카 집에서 나왔어?"

 "응. 이제 나 혼자 살려구."


 바하르랑 잘 지내고 루즈카가 자기 집에서 나가서 살게 허락해주었다니 상태가 많이 좋아졌나보다.


 "이제 몸은 괜찮아?"

 "응. 몸은 예전에 다 나았어."

 "아...다행이다."

 "지금도 마음은 아프지만...과거에만 갖혀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래, 잘 생각했어. 어쨌든 그 시위는 끝났잖아. 벌써 몇 개월 전 일이다.


 "바하르는 만나봤어?"

 "나 조금 전에도 만났어."

 "그래?"

 "바하르는 뭐 좋아해?"

 "바하르? 글쎄...낮에 근무서려면 추우니까 장갑이나 목도리 같은 거 필요하지 않을까?"

 "아, 그렇겠다. 나 갈께!"


 치롤라가 손을 흔들고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둘이 꽤 잘 되어가나본데? 바하르 진짜 부럽네. 지금까지 고생한 것을 인생에서 이런 식으로 보상받는 건가? 나는 바하르보다 덜 고생해서 인생의 보상을 아직도 못 받는 걸까. 설마 조만간 둘이 서점으로 찾아와서 이제 우리 사귄다고 자랑하는 거 아니야? 바하르가 능력이 좋은 건지 치롤라가 능력이 좋은 건지 모르겠다. 둘 다 뛰어난 건 사실이니까.


 "아다비아는 또 어디 숨어 있는 거야? 서점이나 놀러올 것이지."


 아다비아는 괜찮겠지? 그냥 피곤해서 그랬던 것일 거야. 바하르 말이 자꾸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별 거 아닐 거다. 설령 실력이 안 되어서 도중에 쫓겨난 것이라 해도 일반인이 거기에서 그만큼 버텼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잖아. 그 교육에 참여할 수 있는 수준까지 그렇게 빠르게 올라간 사람 자체가 거의 없을 거다. 아다비아는 분명히 잘 극복해내고 다시 밝아질 거야. 그리고 또 자기 잘난 척을 마구 하겠지. 웃으면서 받아주면 될 거다. 설마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것이 당연하다는 소리를 한층 더 무섭고 치밀하게 발전시켜온 거 아니야? 그러면 감비르랑 둘이 붙여놔야지. 둘이 싸우면 엄청 웃기겠다.


 책 수거를 마치고 서점으로 돌아왔다. 켈라자야와 라키사가 화로 옆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지게를 내려놓고 책과 대출 카드를 갖고 계산대로 갔다. 아무 말 하지 않고 대출 카드와 돈을 정리한 후, 책을 책장에 다시 꽂았다. 설마 오늘 이따 또 게첸 오는 거 아니야? 게첸이 오는 것 말고는 이제 별 일은 없을 거 같은데. 책을 사갈 사람은 왠지 오늘도 없을 것 같고, 빌려가는 사람이나 한둘 오지 않을까 싶다. 그 한둘 사이에 게첸이 끼어 있다면 또 짜증나는 일이 생기는 것이구. 아침에 감비르가 멋진 꿈을 꾸었다고 나한테 찾아왔으니 이따가는 게첸이 서점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둘이 만나서 헛소리 대잔치하는 거 아닐까?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게첸의 헛소리도 감비르의 헛소리에 만만치 않다. 오히려 더 심하다. 감비르의 헛소리는 그냥 미친놈 헛소리라 귀를 막아버리면 된다. 그러나 게첸은 미친 것 같지는 않은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자꾸 한다. 그래서 신경을 더 긁는다.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건 아니라고 따지고 싸우고 싶어지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게첸의 이야기에 말려들어버린달까? 모르겠다. 나가서 담배나 태워야겠다.


 벽에 기대서서 입에 담배를 물었다. 켈라자야가 따라나와 담배 끝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연기가 피어오른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담배만 바라보며 불을 붙여주곤 했는데 모처럼 손가락으로 담배 끝을 건드려주었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뿌옇다. 오늘밤 또 눈이 내리려나? 모든 기분과 감정을 있는 힘껏 짓이겨버리는 겨울의 회색 하늘. 바닥을 바라보았다. 재와 흙이 뒤섞여 지저분한 색깔의 조화가 된 하얀 눈. 켈라자야는 내 옆에 서서 계속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다. 쟤한테 할 말 없다. 아침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화난다. 얘한테 그걸 따질 수도 없다. 분명히 제정신에서 그런 건 아니었을테니까. 그렇지만 화가 나는 건 화가 나는 거다. 켈라자야는 묵묵히 계속 바닥만 바라본다. 딱히 할 말이 없다. 내가 가슴이 좁은 건가 싶기도 하다. 제정신으로 그런 것 아닌 것 뻔히 아는데. 그래도 정신차리고는 있는 힘껏 따귀 날리는 건 너무하잖아! 내가 맞을 짓을 대체 뭘 했는데? 오히려 잘못한 건 켈라자야 아닌가?


 "담배 태우면 기분 좋아져?"

 "아니."

 "그러면 왜 태워?"

 "안 태우면 기분 나빠지니까."


 켈라자야가 뜬금없이 담배를 태우면 기분이 좋아지냐고 물어봤다. 담배를 태워서 기분이 좋아지는 건 모르겠다. 단지 담배를 계속 안 태우고 있으면 기분이 나빠져서 태울 뿐이다. 화났을 때 태우면 기분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잘 모르겠다. 그냥 태우니까 태우는 거다. 켈라자야는 또 아무 말이 없다. 그저 바닥만 계속 내려다볼 뿐이다. 자기도 새벽에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하고 있을 거다.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를 안 하네. 되었다. 알아서 하든 말든. 내가 잘못한 걸까? 결국은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할 거다. 켈라자야가 원래 아픈 걸 아는데 그걸 조심하지 않은 내 잘못이지. 같이 서점에서 지내는데 둘 다 앙금 갖고 분위기 썩어나게 만들 수는 없잖아. 감비르에 대한 라키사와의 의견 대립은 정말 어쩔 수 없다. 그건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켈라자야 문제라면 그냥 넘어가면 될 일이다. 기분이 무지 나쁘기는 하지만 원래 그런 애니까.


 "들어가자. 너 아프면 어쩌려고 그래."


 켈라자야는 외투도 안 걸치고 밖으로 따라나왔다. 가만히 놔두면 또 멍하니 여기서 서 있겠지. 얼마나 감기에 잘 안 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무지 춥다는 거다. 그렇게 얇은 옷으로 오래 서 있으면 인간인 이상 감기에 걸릴 수 밖에 없다.


 "이거..."


 켈라자야가 주먹을 쥔 오른손을 나를 향해 뻗었다. 손을 내밀었다. 켈라자야는 내 손 위에 주먹을 올려놓더니 천천히 손가락을 펼쳤다. 구슬처럼 동그란 것이 손바닥 위로 떨어진다. 켈라자야가 손을 치우자 내 손 위에 올려놓은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있었다. 투명한 구슬 모양의 사탕이다.


 "고마워."


 사탕을 입에 집어넣었다. 아무 향이 없다. 단맛도 별로 없다. 썩 좋은 사탕은 아니다. 그래도 제 딴에는 새벽의 일이 미안하니 준 거겠지? 사과했다고 받아들이자.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켈라자야도 따라들어왔다. 화로에 셋이 모여앉았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조용히 불만 바라볼 뿐이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간다. 라키사는 근무 시간이 끝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켈라자야와 저녁을 먹었고, 서점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이고가 서점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오늘 늦을 거라는 말은 없었다. 아무리 늦어도 서점 문이 닫기 전에는 돌아오곤 했다. 서점 문 닫을 시간 넘어서 돌아올 거라면 나한테 꼭 먼저 문 닫고 자라고 했다. 뭔가 이상하다. 이렇게 아무 말 없이 서점 문 닫을 시간 지나서까지 안 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게다가 오늘은 저녁에 책 수거하러 다녀와야한다. 한 건 있다. 여기에서 가까운 곳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나 책 수거 다녀올께."

 "응?"

 "이고 늦잖아. 나라도 다녀와야지."

 "같이 가."

 "그러든가."


 라키사가 같이 가자고 했다면 말렸을 거다. 물론 라키사는 아까 집으로 돌아갔지만 말이다. 그러나 같이 가자고 한 건 켈라자야다. 켈라자야에게 서점에 혼자 있으라고 해봐야 켈라자야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게다가 원래대로라면 켈라자야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을 시각이다. 게다가 저주술도 잘 쓰니 어찌 보면 나 혼자 돌아다니는 것보다 훨씬 안전할 수도 있다. 한 곳에서 책 하나 받아오는 것이니 지게를 짊어지고 나갈 필요도 없다. 서점 불을 끄고 나와서 문을 잠갔다. 밤이 되니 공기가 매우 차갑다. 가로등 불빛이 파르르 떨린다. 간간이 거리에 서 있는 경찰들이 보인다. 저들도 지금은 매우 긴장될 거다. 언제 사고가 발생해도 너무나 정상스러운 어둠이니까. 켈라자야와 아무 말 없이 길을 걸었다. 책을 받은 후 다시 서점으로 돌아왔다. 켈라자야가 저주술로 불을 붙여주었다. 서점 문을 잠근 후, 정리할 것을 다 정리하고 화로 옆에 앉았다.


 "오늘은 거리 안 돌아다녀?"

 "오빠 오면 나가려구."


 오늘 이고 정말 많이 늦네. 시계를 보았다. 밤 11시. 설마 이고가 살해당한 건 아니겠지? 지금 나가서 찾아봐야하나? 아니야.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져야 해. 지금 이고가 오지 않는다고 밖으로 나가서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설령 켈라자야가 같이 따라다닌다 해도 밖은 많이 위험하다. 지금까지 몇 번 겪어봤잖아. 조심한다고 조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갑자기 뭔가 터지고 하는 건데. 그런 위험을 켈라자야가 감지해낼 수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랬다면 시장에서 겪은 두 번의 사건에서 켈라자야가 그렇게 무방비상태로 있지는 않았겠지. 만약 오늘 밤새도록 안 돌아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동이 튼 후에 이고를 찾아서 돌아다녀봐야겠지. 어쨌든 지금 이고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나가는 것은 위험하다. 루즈카, 블랑쉬블르 집에 찾아가서 이고가 아직까지 서점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이야기해봐야 달라질 것도 없구.


 "나 뭐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


 켈라자야한테 밤에 대체 뭘 하는지 물어봐야겠다. 이런 건 단 둘이 있을 때 물어보는 게 좋겠지. 켈라자야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대답해주면 기분 풀 거야?"


 아까 아침의 일을 계속 마음에 두고 있었나보다. 나 역시 당연히 아직까지도 아침 일 때문에 기분이 썩 좋지 않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켈라자야와 거리를 두고 멀리할 생각까지는 없다. 얘가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태라는 건 이미 충분히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까 자기 딴에는 사과한답시고 사탕 하나 주었잖아. 별로 맛없는 사탕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제 딴에 사과랍시고 사탕 준 거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응."

 "그러면 물어봐."

 "너 밤마다 뭐해?"

 "나?"

 "응."

 "돌아다녀."

 "밤새도록?"

 "응. 밤새도록."

 "돌아다니면서 뭐해?"

 "그냥 돌아다녀."

 "안 무서워?"

 "안 무서워."


 정말로 밤새도록 이 도시를 그저 돌아다니기만 하는 걸까? 왠지 그건 아닐 거 같다. 그러나 나한테 저렇게 대답한 것은 자세히 말해주기는 싫다는 의미일 거다.


 자정이 넘었는데도 이고는 서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화로의 불도 꺼졌다.


 "켈라자야, 들어가자."

 "나?"

 "일단 들어가서 눈 붙이자. 동 텄는데도 이고가 안 오면 그때 같이 나가서 찾아보게."


 켈라자야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서점 문이 잘 잠긴 것을 확인한 후 방으로 들어갔다. 켈라자야는 화로에 불을 붙여놓고 내 자리에 기어들어가 있다. 내 자리에서 비키라고 할까? 악의는 없을 거다. 맨날 낮에 내 자리에서 자니까 항상 하던 대로 내 자리로 기어들어간 거겠지. 오늘은 내가 이고 자리에 드러누워서 자야 하나? 켈라자야가 상반신을 일으켜 앉으며 말했다.


 "비켜줘?"

 "아냐. 괜찮아. 이고 자리에 누우면 돼."


 자리에 드러누웠다. 진짜 이고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니겠지? 대체 무슨 일이길래 여태도록 안 와? 이제 날짜가 바뀌었다. 켈라자야는 벌써 잠이 들었다. 쟤는 참 속 편하게 잘 자는구나. 아니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일단 자고 보자는 건가? 나도 지금 빨리 조금이라도 자야한다. 그래야 동이 텄을 때 이고가 그때까지 서점에 안 돌아왔다면 이고를 찾으러 밖에 나갈테니까. 서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기만을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들리는 것은 켈라자야의 숨소리, 그리고 화로에서 장작이 타는 소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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