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3장 01화

좀좀이 2017. 11. 26.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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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3장 01화


 "이 아침에 누구야?"


 누군가 아침부터 창문을 두드려댄다. 이고는 아예 이 소리를 못 듣는지 그냥 잔다. 오늘 서점 쉬는 날인데 누가 이렇게 새해 첫날부터 문을 두드려대는 거야? 이불에서 기어나왔다. 찬 공기가 온 몸을 덮친다. 새해 아침만이라도 내 체온으로 따스하게 데워진 이불 속에서 느긋하게 보내려 했는데 아침부터 누군가 방해한다. 새해 아침은 가족들과 보내야 하는 거 아니야? 어떤 파탄난 가족이길래 아침부터 서점 창문을 두드려대는 거야?


 "누구세요!"


 창문을 활짝 열었다. 검은색 긴 머리. 첫눈처럼 창백한 얼굴. 그리고 살며시 번지는 미소. 양손으로 두 눈을 비볐다.


 "아다비아!"


 아다비아가 아무 소리 없이 밝은 표정을 지었다.


 "잠깐만 기다려!"


 방문을 열고 서점 문으로 달려가 문을 활짝 열고 나갔다. 아다비아가 서점 입구로 돌아왔다. 두꺼운 새하얀 외투를 걸치고 발목을 덮는 새하얀 부츠를 신고 있었다. 아다비아는 두 손을 외투 주머니에 집어넣고 서점 입구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하얀 눈 위에서 정말 새하얀 아다비아가 빛난다. 나를 향해 한 걸음씩 걸어오는 모습이 눈길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져 오는 것 같다. 조용하게 거리에 울려퍼지는 사박거리는 눈 밟는 소리. 아다비아가 서점 입구에 서 있는 내 앞에 서서 수줍게 미소지었다.


 "오랜만이야."

 "응! 들어와!"

 "들어가도 돼?"

 "당연하지!"


 아다비아가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서점 문을 닫고 아다비아에게 화로 옆에 앉으라고 했다. 아다비아는 화로 옆 의자로 가서 조용히 앉았다. 마치 처음 서점에 온 사람처럼 의자에 앉아 주변을 둘러본다. 어떤 방향을 향해서든, 어떤 것을 보든 처음 보는 신기한 것을 보는 것처럼 두 눈을 살짝 크게 뜨고 천천히 바라본다. 바뀐 것은 없지만 아다비아가 여기 안 온 지 그래도 몇 개월 되었으니까. 바뀐 것이 있나 천천히 찾아보는 거겠지.


 "춥지? 불 피워줄께."

 "아니야, 괜찮아."

 "날 많이 춥잖아."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서 화로에 불을 붙였다. 불이 잘 붙지 않는다.


 "조금만 기다려. 금방 불 피워줄께."


 아다비아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화로에 불이 안 붙지? 불이 크게 붙지 않고 금방 꺼져버린다. 성냥을 세 개 써서야 겨우 화로에 불을 붙일 수 있었다. 화로에 불을 붙이고 나서야 지금 내 꼴이 엉망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손으로 머리를 만져보았다. 머리가 눌려서 머리에 날카롭게 하얀 선이 그어진 것이 느껴진다. 눈도 잘 안 보인다. 눈에 눈꼽이 끼고 눈도 뻑뻑하다. 그 이전에 잠이 덜 깨어서 정신이 없다. 몽롱하다. 지금 아다비아가 내 앞에 있는 이 장면이 꿈은 아니겠지? 눈을 힘껏 껌뻑이고 두 손으로 눈을 비볐다. 분명히 아다비아가 화로 앞에 앉아 있다. 아다비아는 이런 내 모습을 보더니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나 잠깐 씻고 올께!"

 "응."

 "미안해! 세수만 금방 하고 올께."

 "아니야, 괜찮아."


 방으로 들어가 수건을 들고 물항아리에서 물을 떠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찬물을 얼굴에 끼얹고, 물로 눈을 닦아내었다. 머리에 찬물을 붓자 머리가 깨지게 아프다. 밖에서 아다비아가 기다리고 있다. 빨리 씻고 나가야 한다. 씻는다고 시간 질질 끄는 동안 아다비아가 가버릴 수도 있으니까. 찬물을 머리에 끼얹을 때마다 두개골을 톱으로 썰어버리는 것 같지만 참고 계속 끼얹었다. 손가락이 마디마디 뚝뚝 떨어지는 것 같지만 참았다. 빨리 씻고 나가야지. 밖에 아다비아가 있다.


 한 손으로 수건으로 머리를 거칠게 문지르며 물통을 들고 나왔다. 아다비아는 외투를 벗고 있다. 외투 안에도 무릎 아래로 조금 내려오는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구나. 거기에서 많이 힘들었지만 결국 성공했나보다. 저렇게 순백의 옷으로 온몸을 덮고 있다니 말이다. 얼굴이 하얗다 못해 창백해보이는 것이 영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밖에 나올 일이 없어서 하얗게 된 것이겠지. 침침한 실내에서 새하얀 아다비아는 그 자체만으로도 빛난다.


 "외투 왜 벗었어? 서점 춥잖아."

 "아니. 여기는 따스해."


 이제 정신이 조금 든다. 새해 첫날 아침의 시작이 아다비아와의 재회라니! 뮈젤에서 엄청나게 성공했나봐! 그래도 고생 많이 하기는 했나보다. 그러니 저렇게 창백한 얼굴이겠지. 어쨌든 좋다. 아다비아가 지금 내 앞에 있으니까. 그동안 네가 보낸 편지 보면서 얼마나 걱정했다구! 그나저나 뮈젤은 얼마나 춥길래 이 서점 안이 따뜻하다는 거야? 나한테는 이 서점 안도 엄청 추운데. 바깥보다야 화로 옆이 따스하기야 하겠지만 저렇게 외투를 벗고 있을 정도는 절대 아니다. 물에 살얼음이 낄락말락할 정도로 추운 정도인데. 그나저나 다시 봐도 정말 순백의 공주 같은 모습이다. 바깥의 눈보다 더 눈부시게 새하얀 원피스와 부츠. 그리고 그 옆에 놓인 외투까지. 얘가 원래 이렇게 흰색을 좋아했었나? 전에 학교 같이 다닐 때에는 저렇게 흰 옷을 열광하며 입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저렇게 새하얀 복장은 이래저래 돈이 많이 들고 그 당시에는 돈이 없어서 화려한 색을 즐겨 입었나보지.


 "너 흰색이랑 정말 잘 어울린다!"

 "그렇게 되고 싶어."


 얘는 대체 얼마나 더 많이 성공하고 싶은 거야? 원래 계속 끊임없이 성공하려고 노력하던 애였으니까. 그래, 새하얀 색은 그야말로 성공의 상징. 새하얀 색을 닮고 싶다는 말은 참 아다비아같은 말이다. 저러니 내가 좋아할 엄두도 못 내는 것이기도 하구. 지금도 아다비아의 위치와 내 위치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큰데 아다비아가 거기에서 더 올라가봐. 나중에는 까마득하게 높아서 내 눈에 보이지도 않을걸? 지금도 얘는 나보다 너무나 훨씬 더 잘났기 때문에 얘와 사귈 수 있는 확률은 아예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아다비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점 안을 천천히 돌아다니며 책장을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수십 년 전 기억을 떠올리려는 사람 같다. 손끝으로 책을 가볍게 하나씩 건드려본다. 예전에 나한테 공부 가르쳐주러 왔을 때 봤던 책들일텐데 왜 저러지? 아다비아는 책을 하나씩 손끝으로 가볍게 건드려보며 앞으로 걸어가다 저주술 책이 꽂혀 있는 책장 앞에 멈추어섰다. 저 책들 아직도 있냐고 그러겠지? 저주술 엄청 싫어했으니까. 나도 여전히 저주술 책이 무지 싫다. 아까 화로에 불이 잘 붙지 않았을 때 저 저주술 책들 중 하나를 뽑아 불을 붙여버리고 싶었다. 저 책들은 그런 용도로나 써야 할 거야. 아니, 종이책은 은근히 불에 잘 안 타니까 그렇게 사용하지도 못할 건가? 아다비아는 책 한 권을 뽑아들더니 한 장씩 천천히 넘기기 시작했다.


 "이 문장 예쁘다."

 "어떤 문장?"


 아다비아가 보고 있는 책은 저주술 책이다. 얘가 갑자기 왜 저주술 책을 보며 아름다운 문장이 있다고 하는 거야? 너 원래 저주술 자체를 엄청나게 싫어했잖아. 저주술 책은 쓰레기 보듯 하던 너잖아. 그런데 그런 반응은 대체 뭐야? 뭐 진짜 와닿는 문장이라도 하나 찾은 건가? 어떤 문장이길래 예쁘다고 하는 거야? 얼마나 훌륭하고 아름다운 문장이길래 저주술이라면 끔찍하게 싫다고 하던 네 마음에 든 거지?


 "하늘로 비상하는 날개 잃은 새."

 "하늘로 비상하는 날개 잃은 새?"

 "응. 참 예뻐."

 "그래."


 속으로 피식 웃었다. 뭔가 정말 엄청난 문장일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아다비아가 이야기해준 문장은 아름답다고 할 건덕지가 하나도 없는 평범한 문장이었다. 물론 말이 안 되는 문장이기는 하지. 날개 없는 새가 무슨 수로 하늘로 비상을 해. 애초에 저주술 책에 적힌 문장들 자체가 엉터리이기는 하고 저건 그나마 조금 정상적인 문장 같아서 저게 마음에 든다고 했을 수도 있겠다. 갑자기 이른 아침에 서점에 찾아와서 마치 여기를 처음 온 사람처럼, 그리고 지금 몇십년만에 온 것처럼 행동하며 저주술 책 책장을 진지하게 넘기는 아다비아의 행동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너 거기서 교육 잘 마쳤어?"

 "응."

 "다행이다!"


 아다비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고개조차 끄덕거리지 않았다. 거기서 참 많이 힘들었나보다. 기억하기도 싫을 정도로 괴로웠던 걸까? 하긴, 거기 교육받으러 간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은 아니었겠지. 그들과의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고 아다비아가 얼마나 발악했을까? 안 봐도 뻔하다. 아다비아 성격에 지지 않으려고 아주 목숨 걸고 덤벼들었을 거다. 다시는 그런 짓 하고 싶지 않겠지.


 "무슨 안 좋은 일 있었어?"

 "아니."


 이번에도 짤막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정말 힘들었나보다. 그만 물어봐야겠다. 그곳 이야기는 아예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다.


 "너는 애인 없어?"

 "응. 없어. 왜?"

 "너는 눈 많이 높은 거 같아."

 "뭔 소리야?"


 아다비아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저 미소의 의미는 뭘까? 상당히 애매하다. 아까까지 내게 보여준 미소와는 뭔가 다르다. 저 표정이 진짜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전혀 분간이 가지 않는다. 분명히 입은 미소를 지으며 웃고 있는데 눈이 뭔가 이상하다. 웃고 있는 눈으로 보아야할지 울고 있는 눈으로 보아야할지 분간이 안 가는 눈. 뜬금없이 애인 없냐고 물어보더니 대답을 듣고는 매우 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설마 내가 애인 있다고 대답하기를 바랬다는 거야? 그리고 내가 눈이 높기는 뭐가 높아? 주변에 나와 어울릴 만한 애가 있어야 좋아하든 말든 하지. 다 너무 잘나거나 나보다 더 잘나고 미쳤는데.


 "나 이만 가볼께."

 "나중에 또 놀러와!"

 "올 수 있으면."

 "아...너 바쁘지? 언제든 와. 나 여기 항상 있으니까!"


 아다비아가 화로 옆으로 돌아와 외투를 걸쳤다. 그때 서점 문이 열렸다. 저 미친년은 왜 또 이 아침부터 서점에 온 거야?


 "타슈갈, 새해 축하해."

 "너도. 그런데 왠일이야? 오늘 서점 문 닫아서 안 온다고 했잖아."

 "새해 축하 인사하러."


 켈라자야는 새까만 원피스 위에 새까만 외투를 걸치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시꺼먼 부츠를 신고 있다. 아다비아와 켈라자야를 번갈아 보았다. 순백의 아다비아와 순흑의 켈라자야. 완벽히 대비된다. 켈라자야가 나와 아다비아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켈라자야의 부츠 굽이 바닥을 쾅쾅 내리찍으며 또각또각 소리를 서점 안에 진동시킨다. 켈라자야는 아다비아 앞에 멈추어 서더니 아다비아를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한 번 쓱 훑어보았다.


 "타슈갈의 여자친구?"

 "아니요. 저는 그저 친구일 뿐이에요."


 켈라자야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진짜야?"

 "응. 진짜야."


 내 말에 아다비아가 고개를 조금 숙였다. 입가에 미소가 사라진 것 같다. 설마 켈라자야와 내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생각하나? 그렇고 그런 사이조차 아니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너랑은 아무 상관 없잖아. 너는 나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우리는 단지 친구일 뿐이니까.


 "왜 흰색으로 입었어요?"

 "깨끗하고 싶어서요."


 켈라자야는 왜 아다비아를 보자마자 저래? 설마 새해 첫날부터 시비걸고 싸우고 싶어서 그러나? 켈라자야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아다비아도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분 너 아는 사람이야?"

 "응. 친구야. 우리랑 동갑이구."

 "안녕하세요. 저는 아다비아에요."

 "내 이름은 켈라자야. 18살. 치르치나 출신."

 "아, 그렇군요. 저는 에드자 출신이에요."


 아다비아는 켈라자야의 시선을 피해 다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켈라자야는 그런 아다비아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켈라자야가 딱히 시비를 걸기 위해 저러는 것 같지는 않다. 뭔가 이상한 것을 느껴서 저러는 것일 거다. 사실 지금 나도 아다비아가 매우 이상하다. 원래 이러던 애가 아니다. 켈라자야에게 보이는 태도 뿐만이 아니다. 창문을 열고 아다비아를 발견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가 알던 아다비아와 이 아다비아가 같은 아다비아인지 혼란스럽다. 분명히 같은 아다비아다. 그렇지만 지난해 아다비아가 내게 보낸 첫 번째 편지를 읽던 순간까지가 단지 나의 꿈이었다는 것처럼 지금 내 앞의 아다비아는 내 기억 속 아다비아와 너무 다르다.


 아다비아가 서점에서 나갔다. 켈라자야는 화로 옆으로 가서 앉았다.


 "야, 오늘 서점 쉬는 날인데 뭣하러 왔어?"

 "말했잖아. 새해 인사하러 왔다구."

 "그거 때문에?"

 "응. 나 이만 갈께."

 "벌써? 이고한테는 새해 인사 안 해?"

 "너한테 하러 온 거야."


 켈라자야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점에서 나갔다.


 "아침이라도 먹고 가!"

 "괜찮아. 오늘 너 쉬는 날이잖아."

 "밖에 춥잖아. 오늘은 또 어디 있으려구."


 오늘 식당 문 여는 곳도 없을텐데 하루 종일 굶게? 또 어디를 정신없이 돌아다니려고 지금 나간다는 거야? 아마 밤에 또 열심히 여기저기 이 도시 안을 싸돌아다녔을텐데 잠도 안 자고 또 돌아다니려고? 켈라자야의 팔을 잡았다.


 "너 밤새도록 거리 배회했을 거 아냐. 이왕 온 거 눈이라도 붙이고 가. 오늘 식당 문 열은 곳 없어."


 켈라자야의 표정이 굳었다. 아주 딱딱히 굳은 표정에 금이 가듯 입을 천천히 열며 말했다.


 "지금 명령하는 거야?"

 "아니야! 뭘 명령해? 싫으면 가든가!"

 "나를 위한 거야?"

 "그래! 오늘 식당 문도 안 열어. 오늘 하루 종일 굶으면서 돌아다닐래?"

 "알았어."


 켈라자야의 표정이 풀어졌다. 켈라자야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고가 계속 자고 있으니 아마 내 자리로 기어들어가서 자겠지. 그래, 새해 첫날에는 집에서 보내야한다. 자기 짐도 여기에 다 가져다놓고는 어디를 간다는 거야? 진짜 내일 아침까지 계속 이 도시를 정처없이 돌아다닐 생각이었던 거야?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못 먹고 어제부터 계속 돌아다니다가는 내일 너 얼어죽을걸. 그래도 새해 첫 날에 아다비아를 만났고, 켈라자야도 서점으로 찾아왔다. 이 정도면 올해 첫 출발 치고는 괜찮은 건가? 아다비아가 뭔가 이상하기는 하지만 이래저래 힘들고 피곤해서 그런 걸거다. 또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가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겠지.



 1월 2일. 아침 일찍 라키사가 서점으로 왔다. 역시 모범생이다. 켈라자야는 1월 1일에 서점 문 닫는다고 했는데도 바득바득 찾아왔는데 라키사는 서점 문 닫는다고 하니 오지 않았다.


 "어제 아다비아 왔다 갔어."

 "정말? 아다비아 돌아왔어? 걔 어때?"

 "뭐...조금 이상하긴 한데 별 거 아닐 거야."

 "이상하다니?"


 라키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보았다.


 "많이 피곤했나봐."

 "그래?"

 "그래도 아다비아라면 곧 다시 밝은 모습 찾지 않을까? 그냥 피곤한가 보더라구. 기운이 많이 없어 보였어."

 "여기 막 돌아왔다면 조금 그렇겠다."


 라키사는 가방에서 쿠키를 꺼냈다.


 "이거 먹어."

 "고마워!"


 쿠키를 한 입 먹었다. 고소하다. 견과류가 씹힌다. 새해 선물이라고 일부러 견과류 들어간 쿠키로 들고 왔나보다. 라키사에게 줄 선물을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했다. 준비하러 나갈 수나 있어야지. 계속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죽어나가는데. 아마 어젯밤에도 어디에선가 사람들이 죽었을 거다. 새해가 되던 밤에 살해당한 사람도 있겠지. 단지 길거리 모든 상점이 문을 닫고 거리에 사람이 없어서 그런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것 뿐일 거다. 이 망할 도시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누군가 살해당하니까. 이제는 무슨 사건이 터졌다고 해도 놀랍지 않다. 일상이 되어버린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밖에 마음껏 돌아다니기에는 조금 무섭지만. 그래도 이 쿠키로 조금이나마 기뻐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안녕!"


 서점 문을 열고 켈라자야가 들어왔다. 오늘은 새까만 외투 속에 시뻘건 블라우스와 짧은 스커트를 입고 있다. 쟤는 짐을 여기에 가져다놓고 옷은 또 어디에서 갈아입는 거지? 다른 곳에 또 살림을 차려놓은 건가? 집이 없어서 서점에서 잠을 청하는 것은 아닌 건가? 하여간 저건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피부에서 마음 속까지 다 수수께끼 투성이다. 켈라자야는 서점에 들어오자마자 입을 손으로 가리고 하품을 했다. 밤새 돌아다녔구만. 이 위험한 도시에서 밤에 대체 뭘 하면서 돌아다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실력 있는 저주술사라니 자기 몸 하나는 잘 지킬 거다. 나나 라키사, 이고 같은 일반인들에게는 죽도록 위험한 밤이지만 말이다.


 "타슈갈, 나 아다비아 봤어."

 "아다비아? 어디에서?"

 "새하얀 옷 입고 멀찍이서 서점 바라보고 있던데?"

 "진짜?"


 서점 밖으로 뛰어나갔다. 라키사도 같이 뛰어나왔다. 어디에 아다비아가 있다는 거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다비아라면 이 거리에서 금방 찾을 수 있다. 켈라자야 말이 맞다면 눈에 안 띌 수가 없다. 그렇게 새하얀 옷을 입고 있는 여자라면 이 칙칙한 거리에서 한 번에 찾지 못할 수가 없지. 아무리 거리를 둘러보았지만 아다비아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거리로 나가 조금 걸어다니며 아다비아를 찾아보았다. 새하얀 옷을 입은 여자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 켈라자야가 잘못 본 거 아냐? 켈라자야는 아다비아를 어제 처음 봤으니 다른 여자 보고 착각했을 수도 있다. 아다비아가 서점에 왔으면 안으로 들어왔지, 왜 멀리서 보고 있겠어? 서점 안으로 들어왔다.


 "너 혹시 잘못 본 거 아니야?"

 "절대 아니야. 나 못 믿어?"

 "아니. 그건 아닌데..."

 "어제 본 걔 맞아."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바로 옆을 지나왔으니까."

 "어느 쪽으로?"

 "방금 네가 걸어갔던 쪽으로."


 그쪽에 분명히 없었는데? 켈라자야 말을 믿어야 하나? 아다비아가 무엇 때문에 서점을 멀찍이서 바라보다 발걸음을 되돌려? 여기에 와도 몇 번을 왔는데. 거의 매일 내 공부 도와준다고 이 서점에 왔다. 이고와 딱히 갈등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이고와도 잘 지냈고, 나와도 잘 지냈다. 라키사와는 매우 친했고. 그런데 왜 서점 안으로 안 들어와? 켈라자야가 무서워서 못 들어왔나? 켈라자야를 바라보았다.


 "너 아다비아와 많이 친해?"

 "응. 많이 친해."

 "그렇구나."


 켈라자야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라키사는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지 나와 켈라자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제 아다비아랑 켈라자야랑 어떤 일 있었어?"

 "아니. 둘이 어제 처음 보고 인사한 거 뿐이야."

 "맞아. 그 새하얀 옷 입은 애. 인사 말고 아무 일 없었어."


 라키사는 나와 켈라자야의 말을 듣더니 조용히 중얼거렸다.


 "어디 가던 길이었나보지. 나도 어제 서점 올 걸."

 "뭐, 또 오겠지."


 라키사는 화로 옆으로 가서 앉았다. 켈라자야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라키사 옆에 앉았다. 라키사는 아무 말 없이 화로의 불만 바라보고 있다. 아다비아를 못 봐서 아쉬운가 보다. 아다비아가 에드자로 돌아온 건 사실이니 피로 좀 풀리면 다시 서점으로 놀러오겠지. 그때 보면 될 거다. 아니면 아다비아가 라키사를 만나러 갈 수도 있구. 비록 학교가 무기한 휴교 상태라 '에드자 대학교'라는 확실히 만날 수 있는 장소는 없어졌지만 이쪽 어딘가에 있다보면 만나게 될 거다.



 아다비아가 서점에 온 지 벌써 6일이 지나갔다. 새해 첫 날에 온 이후 계속 서점에 오지 않는다. 거리를 돌아다닐 때도 아다비아를 본 적이 없다. 켈라자야도 그날 이후 아다비아를 보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다비아는 대체 이 도시 어디에 있는 거야? 많이 바쁜가? 아니면 에드자로 돌아오는 길이 하도 험해서 계속 방구석에서 골골대고 있는 거 아니야? 얘는 편지로 사람 걱정시키더니 나타나서도 사람을 걱정시킨다.


 이고는 일이 있다고 이른 새벽에 서점을 나갔다. 이고가 나갈 채비를 할 때 잠에서 깨어난 후 계속 잠이 오지 않는다. 아다비아 생각이 계속 난다. 그날 아예 언제 어디에서 보자고 약속을 잡아야 했던 걸까? 나야 그렇다 쳐도, 라키사랑 친하면서 라키사를 만나러라도 서점에 한 번 더 올 법 한데 오지 않는다. 라키사도 그것 때문에 은근히 조금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다. 그렇다고 이 도시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아다비아를 찾아 온 거리를 돌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구.


 "일어나야지."


 계속 잠이 오지 않는다.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야겠다. 우물 가서 물 좀 길어와야겠다. 아직 방 안이 깜깜하다. 어둠 속에서 벽을 더듬어 창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검푸른 어둠이 거리에 가득하다. 눈이 계속 내리고 있다. 또 눈이 내리기 시작했네. 켈라자야는 이 눈을 맞으면서 지금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겠지? 켈라자야가 아다비아를 잡아왔으면 좋겠다. 그럴 일이 일어날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설령 둘이 정면으로 마주친다 해도 과연 인사나 나눌까?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물통을 들고 서점 문을 열었다.


 "아다비아! 너 뭐해?"


 서점 문을 열자마자 깜짝 놀랐다. 아다비아가 서점 문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그 새하얀 눈이 아다비아의 어깨와 머리 위에 쌓여가고 있다. 아다비아는 웅크린 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아다비아 옆에 쭈그려 앉아 아다비아 머리 위에 쌓인 눈을 털어주었다. 그제서야 아다비아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어죽으려고 환장했나? 아다비아를 일으켜 세웠다.


 "너 여기서 뭐해?"


 아다비아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주었다. 아다비아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 그저 나를 쳐다볼 뿐이다.


 "어서 안으로 들어와!"


 아다비아 팔을 붙잡았다. 옷이 엄청나게 차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이 오히려 따스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차갑다. 새벽이고 나발이고 왔으면 문을 두드려야 할 거 아니야? 전에 창문 잘 두드렸으면서 오늘은 왜 이렇게 서점 앞에서 불쌍하게 웅크리고 있는 거야? 내가 새해 첫날 들어오지 말라고 한 게 아니라 언제든지 오라고 했는데! 아다비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로 들어가도 돼?"

 "그걸 왜 물어봐? 내가 언제든 오라고 했잖아!"


 아다비아를 잡아끌고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화로 옆으로 데려간 후 화로에 불을 붙였다. 얘 완전 꽁꽁 얼어붙은 것 같다. 불을 세게 지펴야겠다.


 "야, 눈 털어. 왔으면 문을 두드리고 부를 것이지, 왜 거기 웅크리고 앉아 있어?"

 "그냥."

 "뭐가 그냥이야? 완전 얼음이구만. 여기서 불 쬐고 있어!"

 "응."


 방 안으로 들어갔다. 솥 안의 물이 뜨거울 건가? 다행히 아주 뜨겁지는 않지만 따뜻하기는 하다. 뜨거운 물을 한 컵 떴다. 말린 과일이 있던가? 자루를 뒤져보았다. 말린 앵두가 조금 있다. 말린 앵두 몇 알을 집어서 컵 안에 넣고 스푼으로 휘휘 저었다. 물이 아주 뜨겁지 않아서 말린 앵두가 잘 불어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다 마실 즈음에는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불기는 하겠지. 다시 방 밖으로 나가 아다비아에게 컵을 건네주었다.


 "마셔. 미안하지만 지금 아주 뜨거운 물은 없어."

 "고마워."


 아다비아가 컵을 받아들고는 컵 안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추울텐데 여기로 와! 왜 그렇게 화로에서 멀찍이 있어?"

 "정말 그래도 돼?"

 "뭐가 그래도 돼? 어서 화로 옆으로 와서 몸 좀 녹여. 너 그러다 진짜 크게 아파!"


 아다비아가 반 발 정도 살짝 앞으로 왔다.


 "너 답지 않게 왜 그래?"

 "미안해."

 "바짝 와! 너 진짜 감기 걸린다니까?"


 의자를 화로 바짝 옆에 갖다 놓고 아다비아를 거기에 앉혔다. 아다비아는 고개를 숙이고 계속 컵 속의 앵두만 바라본다. 나도 아다비아 옆에 앉았다. 아다비아는 나와 거리를 두려고 몸을 내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슬금슬금 나와 멀어지려고 계속 조금씩 옆으로 움직인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다. 정말 얘가 왜 원래 얘 모습과 다르게 행동하는지 모르겠다. 설마 내가 켈라자야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생각하나? 그때 딱 켈라자야가 서점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

 "응. 안녕."


 켈라자야는 내게 인사를 하고는 아다비아를 쳐다보았다. 아다비아는 켈라자야를 한 번 바라보더니 말없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목례를 했다. 켈라자야도 그 모습에 조금 당황했는지 더듬거리며 '안녕'이라고 말하며 고개를 살짝 숙여 답례했다. 켈라자야는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와 앉아 불을 쬐기 시작했다. 켈라자야는 화로 속 불만 바라보고 아다비아는 컵 속 앵두만 바라본다. 그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화로 옆에 세 명이나 있는데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하다. 숨소리조차 거슬릴 정도로 침묵만 맴돈다. 간간이 아다비아가 물을 홀짝이며 마시는 소리만 들린다. 아다비아가 물을 그렇게 여섯 번 홀짝였을 때였다. 너무 조용해서 아다비아가 물을 몇 번 홀짝이나 세고 있었다. 그때 켈라자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안에 들어가서 잘께."

 "응. 잘 자."


 켈라자야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쟤도 서점에서 일해?"

 "아니. 그건 아니고 낮에 와서 자고 가. 밤에는 밖에 나가구."

 "켈라자야는 밤에 뭐해?"

 "몰라."

 "안 물어봤어?"

 "응. 안 말해줄 거 같아서."

 "그렇구나."


 아다비아는 다시 컵 속을 바라보았다.


 "부럽다."

 "너도 지금 피곤하면 안에 들어가서 조금 자다 가."

 "아니야."

 "잠깐 자다 일어나면 라키사도 볼 수 있을 거야. 조금 후면 라키사도 올 텐데 보고 가면 좋잖아."

 "아니야, 내가 어떻게..."


 아다비아는 스푼으로 앵두를 건져내어 입에 넣었다. 그렇게 컵 안의 앵두를 하나씩 건져먹기 시작했다. 얘는 씨도 안 뱉고 그걸 다 삼키네. 오물거리며 씹고 씨를 발라내지도 않고 그냥 삼킨다. 억지로 씨까지 삼키는 것이 너무 뻔히 보인다. 그러나 차마 씨를 뱉으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일부러 저러는 것이 분명하니까. 바보도 아니고, 나이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씨 발라내야 한다는 것도, 앵두알 하나를 그대로 삼키기 쉽지 않다는 것도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 저러는 건 자기가 그러고 싶어서 억지로 삼키고 있다는 거다.


 "라키사도 너 많이 보고 싶어해. 라키사도 보고 가."

 "라키사는 나중에 따로 만날 생각이야."


 아다비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이만 갈께. 앵두 맛있다. 고마워."

 "아다비아, 다음에는 문 앞에 웅크리고 있지 말고 문 두드려! 내가 못 들으면 발로 걷어차든가!"


 아다비아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점심을 먹어야할 시간이 되자 라키사가 서점으로 왔다. 켈라자야는 곤히 자고 있다. 켈라자야 식사는 이따 켈라자야가 일어나면 따로 차려주든가 해야겠다. 굳이 내가 안 차려줘도 알아서 잘 찾아먹으니 신경쓸 필요도 없지만 켈라자야가 일어나면 그래도 식사하겠냐고 물어는 봐야지. 식사라고 해봐야 별 거 없다. 말린 고기, 말린 과일, 그리고 물에 갠 볶은 곡물 가루가 전부다. 그래도 이런 거라도 먹을 수 있는 것이 어디야. 이런 것 자체를 먹는 이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에 감사해야지. 살아있으니까 이런 것이라도 먹는 것이니까.


 "아까 아다비아 왔었어."

 "정말?"

 "응."

 "나는 아직까지 아다비아 한 번도 못 보았어."

 "나중에 너랑 따로 만날 생각이라던데?"

 "대체 언제?"


 라키사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다비아가 어떤 모습이라고 상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오늘 새벽 그 모습이라면 차라리 안 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아무리 봐도 아다비아에게 뭔가 큰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어떤 큰 충격을 받았길래 저러는 걸까? 솔직히 아까 대체 거기에서 무슨 일을 겪었길래 그렇게 이상한 행동을 하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나와 거리를 두려고 하는 거야 괜찮다. 그럴 수도 있지. 그렇지만 한때 그렇게 자주 들락날락거리던 서점에 들어오는 것을 뭘 망설이는 거야? 그리고 라키사와 만나는 것을 일부러 피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왠지 물어봐서는 안 될 것 같아서 말만 안할 뿐이다. 뮈젤에서 대체 어떤 일을 겪었길래 지금 저러는 걸까?



 아다비아가 새벽에 서점에 찾아온지 이틀이 지났다. 이제 1월 9일. 오늘도 아다비아는 서점에 찾아오지 않았다. 이제 서점 문 닫을 시간이다.


 "야, 뭐하냐?"

 "어? 이 시각에 왠 일이야?"


 바하르다. 올해부터 바하르는 주간 근무라고 했다. 주간 근무니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근무시간이다. 일 끝나고 바로 서점으로 왔구나.


 "그냥. 심심해서. 너 일 끝났지?"

 "응. 이제 끝났어."

 "그러면 돌아다니면서 놀자."

 "지금? 이 깜깜한 때에?"

 "그러면 지금 말고 언제?"


 아무리 지금 경찰 옷을 입고 있다고 해도 그렇지, 이 밤중에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놀자구? 이 위험한 도시에서 깜깜한 거리를 돌아다니는 건 정말로 위험하잖아. 어디에서 쿠룬나스가 튀어나오고, 어디에서 폭발과 살해가 벌어질지 모르는데. 백주대낮 사방이 훤히 잘 보일 때 돌아다니는 것도 위험한데 이 시꺼멓고 어두운 밤에 뭘 돌아다니며 놀자는 거야?


 "지금 사람들 마구 죽어나가는데 무슨 밤에 돌아다녀?"

 "야, 죽을 놈은 어차피 죽어."

 "그래도 그렇지."

 "나야 동원령 때문에 경찰 역할 하고 있으니 걱정마. 최소한 경찰들이 우리한테 뭐라고 할 일은 없어."


 영 못마땅하지만 일단 따라나서기로 했다. 별 일이야 없겠지. 바하르를 따라나섰다.


 "야, 치롤라는 뭐 좋아하냐?"

 "글쎄? 나도 걔랑은 그렇게 많이 안 친해."

 "그래도 사탕 같은 거 좋아하겠지?"

 "왜? 선물로 주게?"

 "응. 이제 주간 근무니까. 순찰 다니다 잠깐 만나곤 하거든."


 바하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제 치롤라한테 대놓고 작업걸려고 하나 보네.


 "치롤라가 너 옷 보고 뭐라고 안 해?"

 "이거? 경찰복?"

 "응."

 "별 말 안 하던데? 걔도 내가 억지로 이거 하고 있다는 거 알아."


 바하르는 시위 진압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괜찮다는 건가? 둘이 잘 되면 좋겠다. 그러면 치롤라도 정신 좀 차리지 않을까? 일곱 가지 꿈 같은 헛소리에 빠져 살지 않고 바하르와 알콩달콩 연애하는 것이 훨씬 나을 거다. 물론 작년 봄과 여름처럼 연애를 즐기기 좋은 환경은 아니지만 둘 다 저주술사니 이 상황이 덜 위험하겠지. 둘이서 연애를 하려고 하면 자기들끼리 무슨 방법을 찾아내겠지. 둘 다 저주술사니 일곱 가지 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도 될 거구.


 "감비르는? 감비르 만나봤어?"

 "그 새끼 이야기는 하지도 마."

 "왜? 너한테 뭐라고 했는데?"

 "내가 지금 이거 하고 싶어서 하냐?"

 "아니."

 "그런데 다짜고짜 나보고 경찰이라고 쓰레기래. 미친 새끼, 누구는 이거 하고 싶어서 하나. 별 쓰레기 같은 새끼들 때문에 동원령 내려져서 억지로 하는 건데."

 "감비르가 너한테 그래?"

 "어! 그 미친 또라이 새끼, 자기나 똑바로 할 것이지. 꼴이 그게 뭐냐? 되도 않는 여장질이나 하고 다니면서."


 올해가 시작된 후 지금까지 감비르가 서점에 나타나지 않아서 참 좋다. 그놈은 그냥 정신병이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그런데 그놈을 더 미치도록 부추기는 새끼가 옆에 있다는 것이 더 문제다. 만약 그 새끼가 없었다면 그나마 좀 덜 하지 않았을까?


 "너 게첸 알아?"

 "게첸? 누군데?"

 "중앙학문연구소에서 일한다던데?"

 "내가 중앙학문연구소에 있는 사람을 뭔 수로 다 아냐? 그런데 왜?"

 "그 새끼가 옆에서 자꾸 옆에서 꼬드기는 거 같던데?"

 "뭐라는데?"


 바하르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게첸은 며칠 전 왔었다. 와서 책을 빌려갔지. 책만 안 빌려갔어도 쫓아냈을 거다. 그런데 책을 빌려가는 바람에 쫓아내지 못했다. 빌려간 책은 저주술 책이 아니었다. 셀베티아어로 된 아주 평범한 소설이었다.


 "자꾸 진정한 자유로 가는 길 어쩌구 씨부려."

 "아, 그런 새끼들 좀 있긴 해."

 "그런 새끼들?"

 "응. 그런 병신들 좀 있어. 자기들은 안 하면서 남이 하면 박수치는 놈들."

 "뭔 말이야?"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하나?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찬양한달까? 있어, 그런 놈들."

 "대체 무슨 말이야?"

 "자기는 전혀 할 생각이 없는데, 남이 하는 거 보면서 막 부추기고 찬양하는 새끼들. 그게 맞는 소리인지 뻘소리인지 생각도 안 해. 그런 놈들이 좀 있기는 해. 어디서 이상한 것만 주워듣고 와서 아는 척 주둥이 놀리고."

 "맞아! 게첸 그 새끼가 그래!"

 "보나마나 그 새끼 자기보고 여장하라고 하면 난리칠 거다."

 "그런 놈들 너네 학교에 많냐?"

 "응, 조금 있어. 나는 차마 못하겠는데 남이 하는 거 지원해주겠다고 들어온 놈들. 병신들, 그럴 거면 자기가 할 것이지."

 "그러니까! 툭하면 나한테 와서 자유로 가는 길이니 뭐니 한다니까?"

 "그냥 병신 새끼야. 상종할 가치도 없는 것들."


 바하르는 게첸 같은 놈들을 여러 번 봤나보다. 바하르가 게첸을 만나면 반응이 어떨까? 진짜 서점에 와서 자유로 가는 길 어쩌구 하면 입을 찢어버리고 싶다. 진지하게 감비르가 그렇게 멋져보이면 너도 똑같이 하라고 쏘아붙이고 싶다. 물론 그러면 자기는 자신의 상황 때문에 못하기 때문에 감비르를 응원한다는 헛소리를 하겠지. 감비르가 지금 막 나가는 이유 중 하나는 아마 게첸이 옆에서 박수를 쳐주기 때문일 거다. 그러니 자기가 남자이자 여자란 헛소리를 하지.


 "게첸이 감비르한테 계속 잘한다 잘한다 해서 감비르가 더 막 나가는 거 아닌가 싶어."

 "그럴 수도 있구. 감비르도 속으로 외로우니까 게첸한테 엥기는 것일 거야."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게 나을까?"

 "그냥 놔둬. 외롭다고 받아주면 자기가 왜 외로운지 깨닫겠냐? 막 나가도 상관없다고 착각하지."


 씁쓸하지만 바하르 말이 맞다. 외롭다고 감비르가 저러는 것을 억지로 받아주는 것이 과연 옳을까? 아니, 그렇지 않을 거다. 자기가 왜 외로운지 외로움 속에서 깨닫고 정신차려야지. 솔직히 받아주는 것 자체도 끔찍하게 싫구. 단순히 여장한 것이 문제가 아니다. 진정한 자유와 평등이라느니 남자이자 여자라느니 하는 망발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건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니까. 아주 짐승하고도 똑같아지겠다고 네 발로 기어다니며 입으로 흙을 파먹겠어! 그리고 왜 자꾸 나한테 그러는데? 나는 저주술 수련 자체에 관심이 아예 없다구. 솔직히 친구란 인간과 인간의 관계고, 인간이라면 어쨌든 남자든 여자든 둘 중 하나다. 남자이자 여자? 미친놈, 개소리 씨부리고 있네. 서점에 안 오는 건 아마 켈라자야가 무서워서 그런 거겠지? 진짜 그날 켈라자야한테 더 도발했다면 켈라자야가 죽여버렸을 수도 있다. 물론 그놈은 전혀 눈치 못 채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감비르는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고 친구이니 어떻게든 정신차리게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게첸은 정말로 싫다. 게첸은 자기 주둥이로 대리만족이라고 하려나?


 "아, 맞다! 아다비아 에드자 돌아왔어."

 "아다비아? 진짜?"

 "응. 서점에 두 번 왔었어."

 "벌써? 지금 돌아올 때가 아마 아닐건데?"


 아다비아가 에드자에 돌아왔다는 말에 바하르가 깜짝 놀랐다. 나도 깜짝 놀랐다. 지금 돌아올 때가 아니라니 무슨 말이야?


 "자에드와 예라도 돌아온 거 같던데?"

 "걔네가 왜 벌써 돌아와?"

 "아직 돌아올 때 아니야?"

 "아니야! 그 교육이 아마 1년간 진행되는 과정일걸? 나는 그렇게 알고 있어. 네가 잘못 본 거 아니야?"

 "아냐. 전에 시장에서 자에드랑 예라 봤어. 아다비아는 서점에 두 번이나 찾아왔구."

 "그럴 리가 없는데..."


 바하르가 인상을 쓰며 길에 멈추어섰다. 혼자 '뭐지?'라고 중얼거리더니 품에서 담배를 꺼내서 입에 물었다. 나도 같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바하르 말대로라면 셋 다 지금 에드자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거잖아? 바하르 말대로 교육이 1년 과정이라고 했을 때, 아다비아 혼자 돌아왔다고 하면 이해할 수 있다. 아다비아는 일반인이니까 그 과정에서 낙오했을 수도 있어. 그래서 그렇게 정신적으로 피폐해져서 돌아왔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자에드와 예라는 아니다. 둘은 활짝 웃으며 그날 시장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구.


 "나도 그건 조금 알아봐야겠다. 그게 분명히 1년 과정일 건데..."

 "아다비아한테는 못 물어보겠어. 잘 보이지도 않지만 뭔가 좀 충격받은 거 같아서..."

 "괜찮아. 내 주변에 물어보면 뭔가 알아낼 수 있을 거야."


 차가운 바람이 옷깃 속으로 스며들어왔다. 하늘에는 별이 초롱초롱 떠 있다. 다시 서점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그 어느 곳에서도 비명소리도, 피비린내도 느껴지지 않는다. 다행히 오늘 밤 바하르와 같이 걷는 이 길은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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