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첫 걸음 (2007)

첫 걸음 - 02

좀좀이 2011. 11. 30. 12:37
728x90

부제 : 두 가지 암시


01.22


밤을 새려고 노력했지만 새벽 4시가 되자 눈꺼풀이 눈꺼풀인지 바위인지 구분하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새벽 5시가 되자 잠깐 누워있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누우니 편하고 잠이 한 번에 우루루 밀려오더군요. 그래서 김포공항에 가서 공항 셔틀버스를 타고 인천공항 가는 것은 포기했습니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습니다. 한참 신나게 자고 있는데 친구가 깨우더군요.


"야, 너 안 가?"

"응?"


친구가 깨워주어서 겨우 일어났습니다. 시계를 보니 6시 20분이었습니다. 다시 잤다가 눈을 뜨니 7시 45분이었습니다. 씻고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전철을 타고 청량리역에 가서 셔틀버스를 탔습니다. 버스에 타서야 약간 안도가 되더군요. 정말 친구가 깨워주지 않았다면 여행을 못 갈 뻔 했습니다. 못 가지는 않았겠지만, 대신 어마어마한 금전적 손실이 따르고, 부모님께 엄청나게 혼났겠죠.


아직 잠이 덜 깬 상태라서 이것이 꿈인지 아닌지 구분이 잘 가지 않았습니다. 아침의 청량리역은 한산했습니다. 아침 9시라서 그런지 매우 조용하더군요. 무서운 아주머니 할머니들도 없고, 출근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출근하신 후라서 바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인천공항행 셔틀버스에 올라타서 의자에 기대고 앉았습니다. 정말 이것이 꿈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뺨을 꼬집어 보고, 잠에서 깨기 직전에 꾸었던 꿈이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비행기 떠나기 한 시간 전에야 여권을 친구집에 놓고 온 것을 깨닫는 꿈이었기 때문에 여권을 잘 챙겼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았습니다. 다행히 빠트리고 온 것은 없었습니다. 친구집에 들어간 날부터 귀찮아서 가방에서 츄리닝만 빼고 나머지는 아예 풀지 않았기 때문에 아침에 서둘러서 나왔지만 빠트린 것이 없었습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10시 반이었습니다. 일행과 만나기로 한 시각은 원래 11시였는데 12시로 연기되었습니다. 즉 1시간 반 동안 공항에서 혼자 놀아야 했습니다. 수중에 있는 돈은 여행가서 쓸 유로화와 집에 돌아갈 때 써야하는 한화 약간 뿐이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담배 태우고 공항 안을 돌아다니는 것 뿐이었습니다. 가방 바퀴가 낡아서 고무가 다 떨어졌기 때문에 공항 안에서 가방을 끌고 다니자 엄청난 소음이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그 소음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신나게 공항 안을 돌아다니다가 음료수 하나를 사먹고 일행을 만났습니다.


드디어 출국이다!


루프트한자에 올라타서 능숙하게 좌석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어이쿠...또 면벽수행이야.


제주에서 서울 갈 때 앉았던 그런 구조의 좌석에 또 걸렸습니다. 바로 앞에는 벽이 있고, 벽에는 LCD로 된 TV가 달려 있었습니다. 문제는 바로 앞에서 보면 시커멓게 보인다는 점...바로 앞의 TV를 보는 것보다 고개를 돌아갈 수 있는 대로 틀어서 옆의 벽에 달린 TV를 보는 것이 더 잘 보였습니다. 이건 저에게 대체 무엇을 주장하는 것일까요? 이해할 수 없어...정말 이해할 수 없어...이것은 여행의 신이 장난치는 것일 거야. 자리도 완전 최고였습니다. 2-4-2의 구조였는데 저는 정확히 왼쪽에서 5번째 좌석. 양 옆에 사람이 앉아 있고, 눈 앞은 벽이 가로막고 있는 이상한 자리였습니다.


루프트한자의 기내식은 맛이 없다는 것을 친구를 통해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먹어보니 먹을만 했습니다. 문제는 빈 그릇을 빨리 치워주지 않는다는 점...외국인들은 밥을 천천히 먹어서 그 속도에 맞추기 위해 늦게 치워주는 것일까요? 아니면 제가 너무 빨리 먹은 것일까요? 빈 그릇을 늦게 치워주어서 많이 답답했습니다. 루프트한자의 기내식은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그릇을 치우는 것은 인내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앉은 자리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깨닫는 데에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한 시간이 지나서 아직 중국 땅 위를 나는 것이 아닌데도 답답함이 슬슬 느껴지더군요. 다리 쭉 펴고 가는 것? 그런 것 필요 없어요. 창밖만 제대로 볼 수 있다면 10시간도 얌전히 앉아서 갈 수 있어요. 좌석에서 앉았다 일어섰다만 할 수 있다면 충분해요. 다리를 오므려야 해서 불편한 것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지만 시야가 답답한 것은 절대 참을 수 없어요. 그런데 눈 바로 앞이 벽이에요. 왜 하필 하늘은 맑은지 화장실 갔다오면서 얼핏 본 창밖의 경치는 정말 잘 보이고 아름다워요. 화장실을 가려고 해도 양쪽 옆으로 사람이 앉아 있어서 가기가 힘들어요. 옆사람이 자고 있으면 참든지 깨우든지 택일의 상황. 선택권이란 없었습니다.


비행시간이 길어서 영화도 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앞의 화면은 시커멓게 보여서 다른 벽에 걸린 화면을 보아야 했습니다. 목이 아프더군요. '작업의 정석'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만약 비행기 안이 아니었다면 절대 보지 않았을 영화였지만,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보니 반강제적으로 끝까지 보았습니다.


아무리 자도 비행기는 도착할 생각을 하지 않더군요. 그렇게 감옥같은 곳에서 보내기를 몇시간...밝았던 창밖은 어두워지고 어느덧 밤이 되었습니다. 군대 훈련소 입소 일주일째도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았어요. 일행은 모두 수면중. 저는 정신이 말똥말똥. 제가 수면을 취할 때는 일행이 모두 말똥말똥. 완전 엇박자. 자리가 넓어도 양옆에 일행이 앉아있어서 다리를 꼬고 앉을 수도 없어요. 그냥 정자세. 허리가 땡겨요. 그러나 양옆에 앉은 일행은 수면중. 정말 죽을 맛이었습니다. 읽을만한 책을 가져왔다면 책이라도 읽을텐데 읽을만한 책도 안 가져갔습니다. 오로지 앉아있기. 사진을 찍고 싶어도 찍을 것이라고는 벽밖에 없었습니다. 찍을 것도 없어요. 화면에 얼마나 갔는지 나올 때마다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 주시했습니다. 도착지까지 가는데 끝이 보이지 않아요. 정말로 네버엔딩 스토리. 뒷좌석의 사람은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해 아르헨티나로 간다고 하더군요. 두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맺혀요. 프랑크푸르트까지 가는 것도 이렇게 힘들고 답답한데 아르헨티나까지 가라고 하면 좌절모드일 것입니다. 저에게 환승 없이 아르헨티나까지 비행기 타고 가라고 한다면 어쩌면 벽과 삼라만상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벌일지도 몰라요. 내릴 때가 되었을 때쯤 비행기의 벽이 삼라만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깨닫고 무생물과 대화하는 방법에 대한 고찰로 논문을 쓰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렇게 답답함 속에서 온몸을 비틀다가 드디어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공항에 내려서 입국심사를 받는데...


중국인의 습격!


솔직히 이번 여행에서 악역 담당이라면 단연 중국인이에요. 여행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치노', '시느와'에요. 둘 다 '중국인'이라는 뜻입니다. 정말 마음같아서는 '짱께의 습격'이라고 하고 싶지만, 짱께는 민족차별적 요소가 강하기 때문에 사용하지 말아야겠죠. 여행 중 기분나빴던 일들 모두 중국인과 관련있습니다. 외국 나와서 중국인과 얽힐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네요.


입국심사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한 무리의 중국인들이 우루루 몰려오더군요. 그러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새치기를 하더군요. 중국인 한 명이 우리보다 앞서 있었는데 정말 떼거지 중국인들이 우루루 새치기하더군요. 영어도 안 통해요. 완전 막가파에요.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좋게 봐줄 수가 없어요. 줄 서는 건 어디 안드로메다에 보내버린 것 같아요.


새치기까지는 참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중국인의 입국심사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입국심사보다 훨씬 까다로워서 시간이 몇 배 걸린다는 점입니다. 중국 정부도 자국민이 몇 명인지 정확히 몰라요. 중국의 어둠의 자식들은 매우 유명하죠. 중국은 1가정 한 자식 정책을 워낙 강력히 펼치다보니 호적신고가 되지 않은 사람들이 상당히 많지요. 소황제 한 명이 탄생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어둠의 자식들로 전락했는지는 중국 정부도 확실히 몰라요. 자국 정부가 그 모양인데 외국 정부는 오죽하겠습니까. 한국은 EU 가입국들과 비자면제협정을 맺고 있기 때문에 심사할 때 오래 걸리지 않아요. 그냥 여권 한 번 쓱 보고 얼굴 한 번 쓱 보고 도장 꽝 찍으면 끝나죠. 그러나 중국인들은 매우 오래 걸립니다. 결국 제가 서 있던 줄에서 중국인 한 명이 깐깐한 독일 직원에게 걸렸습니다.


입국심사를 받고 짐 검사를 받는데 직원이 저를 잡더군요. 여권을 보자고 하더니 왜 왔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아는 영어라고는 'travel' 뿐...일행이 영어로 간단히 해결해 주었지만 상당히 불쾌했습니다. 저만 잡힌 이유는 제가 머리를 상당히 짧게 자르고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흑인들 얼굴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유럽 사람들도 아시아 사람들 구분 잘 못하더군요. 그래서 그네들 나름대로의 구분법은 머리가 짧은 남자는 중국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인 취급 받으니 상당히 불쾌해졌습니다. 몇 번의 공항 통과와 국경 통과를 통해 내린 결론은 한국인과 일본인은 직원이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간 국가들 모두 한국과 비자면제협정을 맺고 있는 국가였던 점도 크게 작용했겠지만, 한국과 일본에서 유럽이나 튀니지, 모로코로 밀입국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아무래도 큰 것 같습니다. 문제는 중국인. 중국인이라면 밀입국하고도 남습니다. 먼저 유럽으로의 밀입국은 너무나 당연하구요. 모로코와 튀니지의 경우, 이 두 나라는 유럽 밀입국 루트에서 마지막 관문입니다. 그래서 밀입국자들이 많이 몰리고, 그 중에는 중국인들도 포함되어 있지요. 그래서 중국인에 대해서만큼은 직원들이 잘 건드립니다. 


어쨌든 교훈은 외국 여행 나갈 때 남자들은 절대 머리를 짧게 자르지 말 것.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을 구분하지 못하는 외국 애들에게 머리 짧으면 중국인입니다. 걔네들이 중국인으로 판단하면 국경이나 공항 통과때 상당히 고달파집니다.


짐검사를 하는데 샴푸를 빼앗겼습니다. 100ml가 넘는 액체는 반입금지라고 하더군요. 이런 봉변이 있나...루프트한자에서 들고 나온 조그만 캔콜라도 걸렸습니다. 그것은 그 자리에서 원샷해버렸습니다. 그걸 보고서 직원이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더군요.


비행기를 환승하기 위해 대기하는데 재떨이가 보이더군요.


여기 유럽 맞지? 정말 유럽 맞지? 담배에 엄격한 유럽 맞지?


분명히 유럽이 맞았습니다. 프랑크소세지 제조공장이 아니라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이었습니다. 분명 사람들이 어쩌구저쩌구'크', '히'하고 있었습니다. 그 발음만 들어도 이곳이 독일이라는 것을 알겠어요. 그런데 흡연실이 없더군요. 흡연실 대신 재떨이가 곳곳에 있었습니다. 재떨이 근처에 유리벽은 고사하고 환풍기, 환풍구조차 없었습니다. 재떨이 근처에서 나오는 담배 연기는 공항 곳곳으로 퍼지는 거에요. 단순히 담배재와 꽁초 때문에 재떨이 근처에서만 태우라는 것이란 말입니까? 하여간 우리나라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었습니다. 곳곳에 붙어있는 금연 표지판과 떡하니 놓여있는 재떨이의 상존할 수 없는 상존.


공항에서 잠시 쉬면서 창밖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사진에 전부 반사된 카메라의 모습이 찍히더군요. 일행 중 한 명이 100% 카카오 초코렛을 주었습니다.


이건 독약의 맛이야.


뱉을 수는 없어서 삼켰는데 태우자마자 바로 입을 헹구고 담배를 태워야 했습니다. 대합실에서 대기하는 동안 일행의 카카오 초코렛 테스트에 필요한 실험용 쥐가 되어서 아주 골고루 먹어보았습니다. 70%쯤 되어서야 조금 먹겠더군요.


쉬는 시간이 한 시간 정도였기 때문에 담배 태우고 앉아서 잠시 쉬다가 마드리드행 루프트한자 비행기를 탔습니다. 이번도 창가쪽 좌석이 아니었지만, 승객이 너무 없어서 자리를 옮겨 창가쪽 자리에 앉았습니다. 앉은 김에 프랑크푸르트 야경을 한 장 찰칵!


그런데 너무 어두워서 사진이 다 흔들려 버렸습니다. 


사진 찍기를 포기하고 창밖을 보다가 아까 비행기에서의 피로로 인해 골아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기내식을 못 먹었습니다. 일행들은 제가 기내식을 포기하고 잠을 잔 것에 대해 매우 부러워했습니다. 파스타가 나왔는데 너무 짜고 맛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어쨌든 기내식을 놓치고 마드리드 공항에 내려서 짐을 찾으려는데 간판 하나가 보였습니다.


Bienvenue Madrid


분명 '마드리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였습니다. 저 내용을 여러 외국어로 적어 놓았더군요. 그런데 뭔가 이상했습니다. 뭔가 이상한 정도가 아니에요. 정말 이상하고 문제가 많아요. 말도 틀렸지만, 그것보다 폰트가 깨졌어요! 폰트가 깨졌다는 것은 어린아이의 장난으로 머리, 가슴, 배, 더듬이, 다리가 분리된 개미를 보고 '살아있는 생명체 개미'라고 부르는 것과 다를 것 없어요. 이런 국제공항에서 폰트가 깨진 아랍어를 보다니 신기하다 못해 어이없음의 극치였습니다. 일단 사진을 찍고...아랍어의 굴욕인가? 그러나 이 아랍어의 굴욕은 나중에 펼쳐질 일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스페인에서 아랍애들이 문제라는 것은 나중에 잘 알게 되었지만, 이렇게 국제공항, 공적인 자리에서까지 이렇게 굴욕을 당하다니 웃음이 나왔습니다. 물론 화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이놈들, 행정이 참 엉망이네'라고 생각하며 웃었을 뿐이었습니다.


반응형

'여행-첫 걸음 (2007)'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첫 걸음 - 05 튀니지 수스  (0) 2011.12.03
첫 걸음 - 04 튀니지 튀니스  (2) 2011.12.02
첫 걸음 - 03 이탈리아 밀라노  (2) 2011.12.01
첫 걸음 - 01  (0) 2011.11.30
첫 걸음 - 프롤로그  (2) 2011.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