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첫 걸음 (2007)

첫 걸음 - 03 이탈리아 밀라노

좀좀이 2011. 12. 1.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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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빗물로 물 빠진 도시


01.23


마드리드 공항에 도착했을 때의 시각은 자정이었습니다. 밀라노로 가는 첫번째 비행기를 타야했기 때문에 새벽 4시쯤에는 줄을 서야 했습니다. 즉 공항에서의 노숙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상황. 노숙은 정말 싫어요. 정말 많이 피곤해요. 그러나 방법이 없었습니다. 호텔에 들어간다고 해도 이동시간 2시간 잡으면 남은 시간은 2시간. 샤워하고 조금 쉬려고 하면 벌써 출발할 시간. 이러면 더 피곤해. 그냥 노숙하는 것보다 돈도 더 들고 피로도 더 많이 쌓이기 때문에 노숙 확정.


노숙할 자리를 찾는데 공항에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마지막 비행기여서 공항에 남아있는 사람은 우리 일행처럼 노숙하는 외국인 뿐이었어요. 나를 반기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악취에 가까운 향수 냄새+유럽인 특유의 체취. 얼마나 지독한지 피로로 인해 말라버린 두 눈은 이 악취가 가져오는 따가움으로 인해 제대로 뜰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냄새로 숨이 턱턱 막히고 눈은 따갑고 머리는 무겁고 이래저래 피곤한 상황에서 운좋게 한 한국인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할머니의 남편인 한국인 할아버지를 만나 공항의 24시간 운영하는 카페에서 노숙을 하게 되었습니다. 할 일 없이 앉아있는 스페인 남자들이 가벼운 시비를 걸려고 했지만, 한국인 할아버지께서 능숙한 스페인어와 노련미로 그들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리고 잠시 할아버지와 흡연시간. 할아버지께서 한국 담배의 맛이 그립다고 하셔서 면세점에서 산 디스 두 갑을 드렸습니다. 할아버지의 여러 이야기를 듣다가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귀가하는 전철 막차시간에 맞추어서 돌아가시자 공항에서 심심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사먹으려고 해도 가격이 너무 비싸...침이 한 방울 목구멍을 타고 넘어갈 때마다 저의 두 손은 열 번씩 덜덜 떨렸습니다. 콜라 한 캔이 1유로에요. 한국에서 1~2천원이면 충분히 먹을 것들이 여기에서는 보통 몇 유로...무서워요. 가격이 무서워요. 가격 단위가 달라지면 물가도 크게 달라지는군요. 여기는 그래도 우리나라보다 잘 사는 나라. 상식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아무리 세뇌를 시키려고 해도 물가는 너무 살인적이에요. 유럽에서 그나마 물가가 저렴하다는 스페인의 물가도 막상 몸으로 부딪히니 완전 살인적. 다른 일행이 커피 한 잔을 사 주셔서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마셨습니다. 한국이었다면 공항에서 버티는 4시간동안 이성을 잃고 이것저것 계속 사먹었겠지만, 여기는 스페인. 1대 1000으로 계산해도 이성을 잃을 수 없는 살인적인 물가.


어떻게 공항에서 4시간을 버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매치기가 많은 나라인데다 공항에서 밤새 담배태우고 술마시는 사람들은 모두 소매치기라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일행이 돌아가며 잠시 눈을 붙였습니다. 저도 잠시 눈을 붙이기는 했지만 잠이 쉽게 오지 않더군요. 술 취하면 시비 거는 것은 우리나 그네들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혼자 바람쐬러 잠시 나갔다 오고 싶어도 그네들이 혼자 다니려고 하면 시비 걸 준비를 해서 도무지 혼자 다닐 수가 없더군요. 스페인의 첫인상은 정말 위험하고 악취투성이 나라로 남게 되었습니다.


새벽 4시가 되자 알이탈리아항공 앞에 줄을 서서 표를 받고 수하물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새벽 6시, 드디어 비행기 출발. 창가쪽에 앉았는데 계속 잠을 잔 것 같습니다. 딱 한 번 깨어났습니다. 기내식이 나왔다고 옆에 앉은 일행분이 저를 깨우더군요. 기내식은 샌드위치와 케익, 떠먹는 요구르트가 나왔습니다. 샌드위치와 케익은 맛있었지만, 제가 제정신을 차리고 먹은 것이 아니라서 지금 다시 먹으면 어떨지 궁금합니다. 어쨌든 반쯤 졸면서 먹은 샌드위치와 케익. 제정신을 차리고 먹은 것이라고는 떠먹는 요구르트와 커피 뿐이었습니다. 떠먹는 요구르트는 정말 맛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것보다 점성이 강하더군요. 단맛과 새콤한 맛이 적당했습니다. 요구르트를 먹고 창밖을 보니...


구름바다다.


땅이 안 보여요. 오로지 구름의 연속. 멀리 동이 트는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 땅을 보고 싶은데 땅은 하나도 보이지 않아요. 끝없는 구름의 바다. 사진 전혀 찍고 싶지 않아요. 이런 장면은 너무 흔하게 보는 장면이에요. 서울에서 제주 갈 때 실컷 찍을 수 있어요. 그래도 나름대로 기념이라고 사진 한 장 찍는데 스튜어디스가 무엇을 마시겠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처음 불어를 사용했습니다.


'Un cafe'


알아듣더군요. 제 불어를 알아들은 것인지, 아니면 이탈리아어도 커피는 카페라서 알아들은 것인지는 미지수입니다. 어쨌든 다시 잠들었다가 깨어나니 밀라노. 창밖을 보니 어이쿠...비가 오고 있었습니다. 나를 향해 엄습해오는 알 수 없는 불안감. 조금 오는 비가 아니었어요. 정말로 장대비. 주룩주룩. 꽤 많이 오더군요. 밀라노 공항에서 회비 100유로를 걷고 비가 오는데 시내 구경을 나갈지에 대해 잠시 상의. 저는 모든 것을 일행분들께 위임하고 혼자 공항 구경.


밀라노 공항에서 나와 시내로 들어가는 전철을 타러 가다보니 무슨 전시물이 있더군요. 우리나라에서는 절대 허용될 것 같지 않은 '돌체 앤 가바나' 광고 아래에는 이탈리아의 '피아제'라는 회사와 관련된 각종 훈장 따위를 전시한 전시물이 있습니다. 구두를 제외하면 나체인 여자, 권총을 든 남자는 벌써 사람 하나 죽였고, 한 남자는 납치되었는지 안대를 하고 있고, 우측에서는 살인이 벌어지기 직전의 상황...이탈리아가 맞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잠깐!


전시물 뒤에서는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고, 그걸 양동이로 받아내고 있어. 여기 선진국 이탈리아 맞지? 이탈리아 중에서도 특히 잘산다는 북부지역에 위치한 대도시 밀라노, 그리고 그 밀라노에 위치한 국제공항 말펜사 공항 맞지? 프랑크푸르트 공항의 재떨이, 마드리드 공항의 아랍어 다음으로 유럽이 내게 준 두 번째 충격. 공항 천장에서 물이 새고 있어요. 우리나라였으면 졸속행정이니 부실공사니 한심한 공항관리니 별별 소리가 다 나올 상황들이 그 잘난 독일과 스페인, 이탈리아의 국제공항에서 너무나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완전 쇼크. 대형 쇼크. 유럽이라고 무조건 꿈의 세계만 그릴 것은 아니군요.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역시 말만 듣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천지차이였습니다.


말펜사 공항에서 밀라노 시내로 나가는 전철을 타는 역으로 갔는데...


재떨이가 버젓이 있더군요. 다시 한 번 두 눈을 의심.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전혀 볼 수 없는 것이 여기에서는 아직도 당당히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제 기억이 확실히 맞다면 우리나라에서는 2003년부터 야외 역에서도 담배를 태울 수 없게 했습니다. 이전까지는 영등포나 신길역에서 느긋하게 담배 한 대 태우고 환승해서 귀가하고 등교했지만, 이때부터는 그런 여유가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당당히 재떨이가 자리잡고 있고,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너무나 당연하게 담배를 태우고 있었습니다. 유럽은 아직 금연열풍과 무관한 지역인가? 아니면 우리나라가 가족계획처럼 한 번 시작하면 아주 씨를 말려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건가? 하여간 별 시시한 것들 하나하나가 주는 새로운 충격의 연속이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밀라노 시내로 들어가는 길.


아무리 보아도 힘이 없어. 무언가 스산해. 늑대떼가 갑자기 기차를 습격해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아. 여기에서 대성통곡해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아. 늑대떼가 갑자기 기차를 습격하고 사람들이 대성통곡해야 정상일 것 같은 이상한 분위기.


2층 기차 안에서 본 바깥 풍경은 정말 스산한 풍경이었습니다. 늑대떼가 갑자기 기차를 습격해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아요. 사람들이 대성통곡해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아요. 비가 와서 하늘은 회색인데, 풍경에서 찾을 수 있는 모든 색이 전부 물빠진 색감이었습니다. 나무가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것은 겨울이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건물의 페인트칠조차 물빠진 색감인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오래 되어서 빛이 바랜 것이 아니에요. 색칠할 때부터 물빠진 색감을 사용한 거에요.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어보였습니다. 하늘이 푸른 빛이라면 그나마 조금 예쁘게 보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하늘에서 비까지 떨어지니 화석이 되어버린 도시를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풍경을 보고 너무 슬퍼서 아름답다고 표현한다면 수긍할 수 있으나, 밝아서 아름답다고 표현한다면 결사반대 피켓이라도 만들어서 들 거에요. 정말 밝은 느낌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해가 져서 한밤중이 된다면 아름답게 보였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밀라노의 풍경...이건 낙제점이에요. 낙제로도 성이 차지 않아요. D-를 주고, 영원히 재수강 및 삭제 금지를 때려서 성적표에 영원히 남도록 해도 마음에 들지 않아요. 하여간 피곤한데 풍경도 우중충하고 비까지 내려서 기분은 완전 축 처졌습니다.


밀라노 시내로 들어와서 전철을 타고 밀라노 성당으로 갔습니다.


드디어 고딕양식을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정말 하늘을 찌를 것 같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습니다. 망할 비만 좀 그쳐주면 좋으련만...소매치기 때문에 가방을 앞으로 매고 우산을 들고 사진을 찍으려니 매우 번거롭고 힘들었습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자 그 높이에 입이 쩍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궁륭'이라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이 정도면 나름대로 만족할만한 수준이었습니다. 밀라노. 밀라노 성당만은 A+이었습니다. 성당을 보고 나왔는데도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상상했던 남유럽이 아니야! 밝은 남유럽? 어디를 봐서 밝은 남유럽이야? 어둡기만 잔뜩 어둡고 음산하고 비까지 내리고...이런 분위기에서 일주일만 살면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았습니다. 밝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런 날은 정말 싫어요. 따스하게 햇살이 내리쬐는 날이 좋아요. 밀라노에 가면 따스한 햇볕 아래에서 밀라노 성당 앞에서 광장까지 달려보겠다고 계획을 세웠는데 계획은 완전 틀어졌습니다. 달릴 수는 있어요. 대신 비를 쫄딱 맞고 바지에는 물이 잔뜩 튀겠죠. 물이 튀는 것까지는 좋아요. 문제는 빨래의 압박...그래도 잠시 비가 그쳤을 때 뛰었습니다. 정말로 뛰었습니다. 비록 회색 구름 아래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달렸습니다. 물웅덩이를 피해 달리느라 조금 힘들었습니다.


점심은 피자를 먹었습니다. 이탈리아에 왔으니 이태리 피자를 맛보아야 한다는 논리로 인해 피자와 포도주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 맛은...


내 이태리 피자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다시 안 먹는다!


진짜 맛 없었습니다. 일단 너무 느끼했습니다. 빵이 얇은 것까지는 좋아요. 그런데 치즈의 두께가 빵의 두 배. 완전 느끼함의 천국이었습니다. 그것까지는 그래도 참을만 했습니다. 문제는 짜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느끼하고 너무 짜니 이건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느끼한 것보다는 짠 것이 나았기 때문에 소금을 쳐서 먹었습니다. 하여간 정말 맛이 없었습니다. 안초비 피자도 먹어봤습니다. 아주 비린 고등어맛이더군요. 하여간 피자도 밀라노 풍경처럼 낙제점. 밀라노, 다시 가고 싶지 않아요.


점심을 먹고 밀라노 성당 근처에 있는 쇼핑의 거리로 갔습니다. 다른 이름이 있겠지만, 저에게는 오직 '쇼핑의 거리'일 뿐이었습니다. 일행분들이 쇼핑을 하는 동안 저는 혼자서 거리를 배회했습니다. 화려하고 잘 꾸며놓았는데, 동양인-특히 일본인이 많이 보였습니다. 일단 백인이 가장 많고, 일본인이 다음으로 많고, 일본인의 1/3에 달하는 수가 한국인이었습니다. 중국인은 거의 보이지 않더군요. 하여간 쇼핑의 거리. 저는 눈으로만 흘깃흘깃 보다가 금새 흥미를 잃고 다시 광장으로 진출했습니다. 광장에서 혼자 일행이 다시 모이기로 한 시각까지 놀고 있는데, 한 동남아시아 사람이 저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습니다. 사진 두 장 찍어주고 서로 웃으며 헤어져서 일행분들과 만나 어떤 성 하나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보러 갔습니다.


이 둘에 대한 느낌은...솔직히 그 어떤 감흥도 없었습니다. 성은 말 그대로 성이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일정 인원만 입장시켰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교과서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못했습니다. 모나리자를 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최후의 만찬을 보니 허탈함에 한숨만 피식 나올 뿐이었습니다. 어쨌든 보았습니다. 프레스코화. 계란을 이용해 그린다는 프레스코화. 실제로 보았습니다. 이걸로 위안을 삼았습니다. 이 그림 하나 보려고 두 시간 힘들게 대기했습니다. 결론은 왕허무. 허무 그자체. 허무의 본질을 깨달았습니다. 저의 미적감각이 뒤떨어진 것인지, 교양이 없는 몰상식한 존재여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최후의 만찬은 정말 허무 그자체였습니다.


다시 말펜사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에 저녁거리로 빵을 샀습니다. 빵 위에 올려진 치즈를 보자마자 대장과 위가 뒤집혀서 목구멍 바로 아래에 대장이 붙어버릴 기분. 그러나 얼굴은 애써 미소. 내 속도에 맞추어서 걷는 것이 아니다보니 다리도 아파요. 생각해보니 하루종일 서 있었습니다. 혼자하는 구경과 일행과의 행동을 둘 다 하려고 하니 정신없이 뛰고 걸었어요. 즉 남들이 100미터 걷는 동안 저는 혼자 구경하고 다시 일행을 따라잡기 위해 200미터 걸은 셈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깨달았습니다. 혼자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뿌리는 스프레이 파스 가져가세요. 참 요긴하게 쓰일 것입니다.


말펜사 공항에서 빵을 먹는데 무지 짜더군요. 밀라노에서 먹은 빵은 전부 엄청나게 짰습니다. 저도 짠 맛을 매우 좋아하고 잘 먹는 편인데 이건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짠 맛이더군요. 입에서 소금맛이 느껴질 지경이었습니다. 그래도 힘든 일정을 생각하며 꾸역꾸역 먹었습니다.


튀니지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일행분들 가운데 한 분이 '이제 마쓰리병을 보게 될 거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쓰리병? 이건 신종 질병인가?


알고보니 그것은 아랍인들 특징 중 하나인 '줄 잘 안서기'를 비꼬는 말이었습니다. 이집트인이 아랍어로는 '미스리윤', 그네들 방언으로는 '마스리'입니다. 이집트인들은 줄을 정말 잘 안서고, 패닉상태에 쉽게 빠져서 건물에 불이 나면 줄서서 전원이 충분히 빠져나올 시간에 문에 끼어 죽고 밟혀 죽고 난리가 난답니다.


그러나 마쓰리병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밀라노발 튀니지행 비행기에는 튀니지, 리비아등 북아프리카 국가 국적의 사람들이 많이 탔는데 줄은 잘 서더군요. 단, 앞사람이 조금이라도 우물쭈물 거리면 뒷사람이 바로 치고 나간다는 점...제가 짐을 드느라 잠시 우물쭈물 거리는 틈에 세 명이나 저를 앞질러 갔습니다. 무언가 이상한 분위기. 비록 이집트에 치우치기는 했지만, 제가 듣기로는 아랍인들과 질서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나 질서를 잘 지키는 아랍인들...이것은 앞으로 벌어질 여행의 작은 암시였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또 잤습니다. 이제 비행기 의자가 너무 편하더군요. 앉기만 하면 으례 잠이었습니다. 쿨쿨 신나게 자다가 이번에도 거의 자정이 다 되어서 튀니지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묘한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깔끔하기는 한데 무언가 삐걱거리는 것이 있는 듯한 분위기...튀니지와 우리나라는 30일 사증면제협정이 체결되어 있기 때문에 공항 통과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공항을 나와 숙소로 들어갔습니다. 여기에서부터 문제 발생...


아랍어가 안 통해.


영어도 안 통해.


일행분들이 호텔 카운터 직원과 숙박을 위해 흥정을 하는데 호텔 카운터 직원이 아랍어도 잘 알아듣지 못하고, 영어는 아예 모르더군요. 호텔 카운터 직원은 어떻게든 불어로 이야기하려는 눈치였습니다. 수를 말할 때 불어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더군요. 우리가 영어로 원, 투, 쓰리 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우리가 우리말로 일, 이, 삼...하는 정도로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불어로 수가 튀어나왔습니다. 그것 때문에 약간의 언어소통문제 발생. 저는 뒤에서 구경만 했습니다. 방 배정을 받고 들어가자마자 양말과 속옷을 버려버렸습니다. 양말에서 인간으로써 감히 참을 수 없는 악취가 나더군요. 양말과 속옷을 비닐봉지에 넣고 단단히 묶은 후, '속옷은 그냥 빨아서 입을까?'라고 잠시 생각했지만 5초만에 포기. 양말의 악취가 뭍은 속옷은 100만번 빨아도 그 냄새가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속옷과 양말은 넉넉하게 가져왔기 때문에 한 개 정도는 버려도 상관없었습니다. 양말은 버려도 되는 것을 신고 왔지만, 속옷은 약간 아까웠습니다. 여기에서 얻은 교훈 하나.


여행 첫날은 반드시 버릴 양말과 속옷을 입자.


장거리 이동으로 인해 피곤한데 무슨 빨래란 말입니까. 고국에서 빨래비누를 사들고 가기엔 짐이 너무 많아요. 그리고 설령 빨래비누가 있다고 해도 첫날만큼은 그냥 얼른 씻고 잠을 자는 것이 상책이에요. 그 다음날도 강행군이 미소를 날리고 있으니까요. 어쨌든 교훈 두 개를 획득했습니다. 여행 일정이 짧다면 버릴 양말과 속옷을 바리바리 싸서 여행을 가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아요. 한 번만 입고 버리는 상쾌한 기분을 느껴보는 것도 괜찮으니까요.


어쨌든 수명 다한 양말과 수명이 약간 남은 속옷을 버리고 샤워를 한 후, 바로 골아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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