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가지? 월대나 갔다 올까?'
마땅히 갈 곳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친구와 시시콜콜한 잡담을 하며 계속 어디를 갈 지 고민했어요. 다음날 아침에 제주시민속오일시장을 갈 계획이었어요. 오일장 들리려고 일부러 2박3일 일정으로 내려온 거였거든요. 이날 밤부터 다음날까지 계속 날씨가 안 좋을 거라는 일기예보 때문에 무리해서 도두항 심야시간 풍경까지 전부 촬영해버렸어요. 그 결과 어디 갈 지 떠오르는 곳이 없었어요. 전날 제원사거리 번화가를 촬영 안 했기 때문에 제원사거리 번화가 심야시간 야경 촬영까지는 떠올랐어요. 그렇지만 제원사거리 하나 촬영한 이후에는 길고도 긴 밤시간이 남아 있었어요. 24시간 카페 가서 밤새도록 앉아서 오일장이 열리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어요.
친구는 계속 기침을 했어요.
"너 우한 폐렴 아냐?"
"아니야. 재수없게..."
친구는 며칠 전 서울 올라와서 서울 여기저기 돌아다녔다고 했어요. 그것도 번화가만 골라서 갔어요. 강남도 갔다오고 이태원도 갔다오고 홍대도 갔다왔다고 했어요. 어떻게 된 게 중국 우한 폐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위험지역이라 멀리해야 할 곳을 참 잘도 골라서 다녀왔어요. 친구 몸 상태는 아무리 봐도 엉망이었어요.
"나 12시까지 밖에 못 놀아."
전날까지만 해도 새벽 2시까지 같이 놀 수 있다고 몇 번에 걸쳐 큰 소리 떵떵 쳤던 친구는 갑자기 다음날 12시에 수업 있다고 12시까지만 놀 수 있다고 징징거렸어요. 마음 같아서는 머리를 한 대 콱 쥐어박아주고 싶었어요. 그러나 계속 빌빌거리는 친구를 보니 적당히 카페에서 잡담이나 하며 시간 때우다가 집으로 돌려보내는 게 맞았어요. 진짜 이놈이 우한 폐렴 걸렸으면 빨리 떼어내야죠.
친구는 자기가 마스크 잘 쓰고 다녔기 때문에 절대 우한 폐렴 안 걸렸다고 목청 높여 외치고 있었어요. 하지만 친구 꼴을 보면 영 불안했어요. 2시까지 같이 놀 수 있다고 하고서는 오늘 갑자기 왜 12시까지만 놀 수 있다고 말 바꾸냐고 한 마디 하려는 생각도 안 들었어요. 내 건강은 소중하니까요. 친구가 갑자기 말 바꾸는 태도가 기분 좋을 리는 없었지만 그보다는 이놈이 진짜 우한 폐렴 걸려서 자가격리시켜야 하는데 억지로 끌고 나온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그 못지 않게 많이 들었어요.
친구가 기침을 했어요. 친구는 나름대로 고개를 돌려 기침한다고 했지만 친구의 기침으로 뿜어져 나온 공기가 확산되어 제 얼굴에 닿았어요. 더더욱 심란해졌어요.
나도 이제 돌아가서 자가격리해야 하나. 친구가 우한 폐렴 감염자라면...전날 카페에서 나의 파워포션 맛보라고 한 입 마셔보게 했고, 당장 조금 전에 내 음료 한 번 맛보라고 한 입 마셔보게 했어. 여기에 친구의 기침으로 뿜어져나온 공기까지 얼굴에 닿았어.
심란을 넘어선 혼란 상태까지 도달했어요. 만약 친구가 우한 폐렴 감염자라면 저도 100% 감염될 상황. 이제 바래야 하는 것은 오직 하나. 이놈이 진짜로 우한폐렴 환자가 아니기만을 빌어야 했어요. 왜 전날 파워포션을 마셔보라고 했고, 이날 제 음료를 마셔보라고 했고, 왜 하필 이때까지 이 친구와 카페에서 같이 있는지 모든 결정이 마구 후회되었어요.
11시 반쯤 되자 친구가 어서 카페에서 나가자고 징징대었어요. 카페는 12시까지 영업이었어요.
'이거 집에 가고 싶어서 안달났구만.'
보통 때 같았다면 뭔 2시까지 놀 수 있다고 떵떵거리고 말해놓고서는 벌써 빌빌거리냐고 한 마디 했을 거에요. 그러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어요. 이놈이 진짜 우한 폐렴 환자라면 오히려 제가 우한 폐렴 못 걸려서 안달난 짓을 하는 거였어요. 빨리 집에 집어넣고 자가격리시켜야 했어요. 그래서 친구 말대로 카페에서 후딱 나왔어요.
그래도 친구를 그냥 보내자니 뭔가 조금 아쉬웠어요. 어차피 어디 갈 지 마지막까지 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친구 집까지 같이 걸어가기로 했어요. 만약 친구가 중국 우한 폐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코비드19에 오염된 상태라면 저도 끝장났어요. 체념 상태였어요. 그렇게 내가 조심했는데...진짜 내가 걸리면 바로 이놈 때문이다. 이미 게임 오버였어요. 뭘 어쩌겠어요. 이 녀석을 부른 제 잘못이죠. 중국처럼 이놈 집 찾아가서 문에 못질하고 용접해서 못 나오게 하지는 못할 망정 밖으로 끄집어낸 제 불찰이죠.
친구를 집까지 데려다준 후 삼무공원으로 갔어요. 화장실이 가고 싶었어요. 삼무공원에 있는 화장실로 가서 볼 일을 봤어요.
'월대 가야겠지?'
월대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어요. 심각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삼무공원에서 정말 멀었어요. 이호해수욕장을 넘어서 한참 더 가야 했어요.
"월대 가자."
비가 오락가락하며 내리고 있었어요. 외롭지 않았어요. 우한 폐렴 근심과 함께 걷고 있었으니까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죽게 힘들지?"
이호해수욕장까지도 못 왔는데 벌써 힘들었어요. 어디 앉아서 쉬고 싶은 마음 뿐이었어요. 전날 쌓인 피로가 다 풀려 있을 리 없었어요. 목욕탕에서 냉탕 들어가 다리를 냉찜질해서 억지로 약간 회복시켜놓은 효과가 끝났어요. 남아 있던 피로에 추가로 피로가 더 쌓이고 있었어요.
한참 걸었어요. 내가 이걸 지금 대체 왜 걷지 싶었어요. 무슨 벽화마을이 나왔어요. '오도롱'이라고 적힌 표지석이 있었어요.
'이건 이따가 돌아올 때 들려야겠다.'
사진을 찍은 후 한참 걸었어요. 또 열심히 걸었어요. 간신히 도착한 곳이 이호해수욕장 진입로 입구였어요.
왜 내가 이 길을 걷고 있나 싶은 생각까지 다 사라졌어요. 빗줄기는 일단 멈추었어요. 삼무공원에서 출발할 때는 빗줄기가 강해서 우산을 써야 했어요. 그러나 어느새 비가 그쳤고 습한 냄새만 코를 자극하고 있었어요. 흙냄새와 바다냄새가 섞였어요. 너무 익숙한 냄새였어요. 어렸을 적 참 많이 맡았던 냄새였어요. 어렸을 적에는 이게 당연한 냄새라 여겼지만, 서울로 상경한 후 한참 지나서야 그게 제주도에서만 맡을 수 있는 냄새라는 걸 깨달았어요.
"다 왔다!"
2020년 2월 12일 새벽 1시 46분. 드디어 외도 월대에 도착했어요.
월대는 아직 사람들에게 잘 안 알려진 곳이에요. 여기는 아직까지 진짜 소수만 아는 곳이에요.
외도 월대는 낮에 오면 경치가 정말 예뻐요. 바다와 유량이 풍부한 하천을 동시에 볼 수 있어요. 여기에 한라산까지 한 번에 다 볼 수 있어요. 한라산, 바다, 물 흐르는 하천을 한 번에 다 볼 수 있는 곳이에요. 제주도 여행 마지막에 멍때리면서 머리 식히기 딱 좋은 곳이에요.
외도 월대는 은어가 유명해요. 아주 예전에는 월대에서 은어를 잡아 구워서 파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해요. 지금은 월대에서 은어를 잡아 구워서 판매하는 사람들은 없어요.
월대천 산책로를 쭉 걸어가자 다리가 나왔어요.
다리를 건너갔어요.
월대는 밤에 와도 매우 예쁜 곳이었어요. 아주 오래 전, 낮에 와서 정말 멋진 곳이라고 감탄했던 기억이 떠올라서 왔어요. 밤에 힘들게 걸어서 온 보람이 있었어요.
보리밭이 있었어요.
어렸을 적에 보리밭에서 보리 이삭을 따서 구워먹으며 놀았던 적이 있어요. 보리를 불에 구우면 딱딱하고 죠리퐁 비슷한 맛이 났어요. 맛있어서 먹었다기 보다는 불장난도 하고 간식도 먹는 겸 해서 보리가 익을 때에는 아주 가끔 구워먹었어요.
참고로 제주도 보리밭은 가파도 보리밭이 유명해요.
이번에는 월대천에 있는 돌다리를 건너갈 차례였어요.
아래 영상은 이때 촬영한 제주도 제주시 외도2동 월대 심야시간 야경 풍경 영상이에요.
"여기까지 온 보람 있네."
월대는 밤에도 매우 아름다웠어요. 어두워도 어두운 대로 예뻤어요. 다리 아픈 것 꾹 참고 여기까지 걸어온 보람이 있었어요. 산지천은 한밤중에 가면 상당히 위험하고 별로 좋지 않아요. 여전히 윤락가가 존재하거든요. 그러나 월대는 그런 것 전혀 없는 깨끗한 곳이었어요. 주위 풍경도 진짜 제주도 같은 느낌이 아직까지 살아 있었구요. 월대를 돌아다니며 복잡한 머리 속도 한결 시원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