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나의 정말 정신나간 이야기 (2006)

나의 정말 정신나간 이야기 - 04 경상북도 풍기

좀좀이 2011. 11. 15.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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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에서 부석사까지 오는데 기억이 나는 것이라고는 내가 버스비를 2천원 넘게 냈다는 사실 뿐이었다. 버스에서 바로 골아떨어졌기 때문에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풍기로 가는 길 중간에 소수서원이 있었다는 것은 기억이 났다.


 

버스가 소수서원에 도착했을 때, 잠시 잠에서 깨어났다. 그때 내가 본 것은 소수서원이 아니라 소수서원 매표소였다. (주머니에 돈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돈 내고 들어가는지 돈을 내지 않고 들어가는지만 보였다. 돈을 내고 들어간다고 하면 그 다음부터는 눈에 마땅히 보이는 것이 없었다. 시간에 쫓기다보니 밤에 몰래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버스비가 비쌌기 때문에 걸어내려가기로 했다. 20km가 조금 넘는 거리였기 때문에 무서울 것이 없었다. 인간이 한 시간에 도보로 걸을 수 있는 평균거리는 4km내외였고, 다음날 시험이었던 나는 원래 당일 막차를 타고 상경할 계획에서 다음날 첫차를 타고 상경할 계획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20km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확실히 부석사가 외진 곳에 있다보니 가옥들이 참 마음에 들었다. 내가 미래에 살고 싶은 집은 으리으리한 궁전이 아니라 조그만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집이다. 방을 작게 세 칸, 서재 한 칸, 부엌, 화장실, 창고로 이루어진 작은 집을 만들어서 사는 것이 꿈이기 때문에 이런 집을 보는 것이 매우 즐거웠다.


이 집의 정체는 무엇일까? 나름대로 2층집이다. 그런데 사람이 안 사는 폐가같았다.


오리들이 하천에서 놀고 있었다. 서울에서 보던 작은 오리들이 아닌 정말 비대한 오리들이었다. 우리가 다가가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슬슬 걷는 것이 질리기 시작했다. 질렸다기 보다는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만약 정말 느긋하게 여행을 하는 것이었다면 적당히 쉬면서 걷기도 하고, 주위 풍경도 감상하고, 사람들과 대화도 하면서 길을 걷겠지만, 지금은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백수가 된 H군이야 남는 것이 시간이어서 마음에 들면 오늘 여기에서 하룻밤 머물고 갈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나는 무조건 다음날 첫차를 타고 서울에 상경해야만 했다. 시험을 못 보아서 F를 맞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다음날 올라갈 거라면 차라리 풍기에 빨리 돌아가서 다른 지역으로 간 후, 거기에서 야경을 보며 이 흔하지 않은 기회를 살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날씨도 점차 개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오늘 밤 좋은 야경을 구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차를 잡아서 신세를 지기로 했다. 의외로 차 한 대가 쉽게 잡혔다. 우리가 풍기까지 데려다줄 수 있냐고 물어보자, 운전하시는 아저씨와 옆에 타신 아주머니께서는 풍기까지는 가지 않으므로 무리이지만, 대신 풍기 가는 길과 가시는 길이 갈라지는 지점까지 태워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아주 쉽게 4km를 단축했다.


차에서 내린 후, 애매한 표지판과 함께 갈림길이 나와서 주변에 앉아계신 할아버지들께 길을 여쭈어보았다. 그러나 할아버지들께서는 앞다투어 손짓발짓 해가시며 우리에게 길을 자세히 알려주셨다. 할아버지들의 자세한 설명으로 방향을 제대로 잡게 되었다. 시간만 있었다면 그 할아버지들과 보다 긴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밥도 한 끼 얻어먹을 수... 그러나 시간에 쫓기다보니 할아버지들께 인사를 드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걸을 맛이 전혀 나지 않았다. 아직도 남은 거리는 16km였다. 눈 앞이 막막해지는 것 같았다. 내 머리 속은 시험에 대한 걱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여행의 즐거움과 시험에 대한 걱정이 서로 아웅다웅 싸우고 있었다. 풍경은 확실히 아름다웠다. 그러나 사진을 찍을만한 풍경은 없었다.  사진기를 가지고 촬영을 하려고 하는 순간, 풍경은 아름다움을 숨겨버렸다.



게다가 광량부족으로 인해 셔터스피드가 도통 나오지 않았다. 아직도 내가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여행 중 내가 건질 수 있는 사진이 3장만 되어도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와서 확인해보니 상당히 많은 사진들이 생존했다는 것이었다. 우산의 위대함이다...내가 만약 나중에 집을 짓는다면 이렇게 두 채를 지을 지도 모른다. 큰 집에는 방과 서재, 부엌, 화장실, 작은 집에는 창고와 방...마당은 없을지 몰라도 텃밭은 만들 것이다.


길이 구불구불했다. 경사도 어느 정도 있었다. 차는 꽤 빠른 속도로 달렸다. 이런 길은 피로를 가중시켰다. 걸을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풍기 인삼시장은 정말 별볼일 없다고 생각했지만, 확실히 인삼이 많이 나는 곳이라서 그런지 인삼밭이 많이 있었다. 풍기는 인삼이지 인삼시장은 아니었다.


초 가난 안구에 쓰나미 자작 광각렌즈로 한 컷 찍어보았다. 조리개를 조이고 싶었지만, 셔터스피드 확보를 위해 조일 수 없었다.  이나마라도 나온 것이 감지덕지였다.


이렇게 사진을 찍으며 걸어가다가 또 다시 차를 잡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은 하늘이 돕고 있는 것일까? 또 차를 잡았다. 내가 잡은 차만 벌써 5대였다. 그 중 3대는 방향이 달라서, 또는 운전자 분께서 사정이 있어서 타지 못했지만, 확실히 인심이 좋은 곳이었다. 이번에 우리를 태워주신 운전자는 어떤 여자분이셨다. 마음 같아서는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며 내려가고 싶었지만,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왠지 대화를 하는 것을 썩 즐거워하는 것 같지 않으신 것 같았다. 몇 마디 짧은 대화가 오고 간 후, 침묵이 이어졌다. 어쨌든 그 여자 운전자 덕분에 풍기까지 엄청나게 빨리 돌아왔다.


확실히 시골인심이 좋았다. 서울에서 이렇게 여행하려고 하면 십중팔구 미쳤다고 할 것이다. 서울에서는 택시도 제때 안 세워주는데, 과연 행인이 차 좀 태워달라고 해서 태워줄까? 심히 의문이다. 우리를 태워주신 운전자 두 분, 그리고 우리에게 길을 열심히 알려주셨던 할아버지들...모두 이 여행에서 가장 기분좋았던 장면으로 남을 것이다. 바로 그분들을 만난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다른 출사들과 달리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매우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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